229화 생매장 (9)
평화로운 티 파티.
그런 걸 생각했는데.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소심하고 순진해 보이던 아이가 일부러 좌석 하나를 이상한 곳에 배치했다.
상석을 차지하고 느긋하게 있던 소녀하나를 차서 쫓아내고, 루비아를 앉혔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지만.
월 어떻게 끼어들어야 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루비아를 위협하는 녀석이 있다면 공포 스킬이라도 써 볼까 싶었지만, 이런 경우는 누구에게 써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 파르르.
귀족 영애들의 눈썹이 긴장으로 떨린다.
-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생생하게 들린다.
억지로 양쪽 입꼬리를 올린 시셀리드바텐의 얼굴에서 경련이 인다.
당장이라도 엉엉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이건 위험하지 않나.
어린 귀족들 사이의 싸움에 너무휘말려 드는 것 같은데.
시셀 리드바텐은 저렇게 지독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자리에 남아 있다.
이보트 후작 영애에게 어마어마한 앙심을 품을 건 당연하다.
그리고 그 앙심의 상당 부분은.
이보트 영애 곁의 루비아에게도 돌아가겠지.
머리가 지끈 울리는 시점.
루비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약속하세요.”
귓속말이 다.
금발 곱슬 아이가 흠칫하며 작게 내뱉었다.
“.네?”
탐지 스킬을 최대로 발휘한 탓에, 루비아의 귓속말이 바로 내 곁에서 크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 상황은 제가 기꺼이 장단을 맞춰 드릴 테니, 이보트 가문의 장서를 개방해 주세요.”
이보트 가문의 장서?
루비아는 책을 좋아하니까.
상태창에 보이는 직업에도 엄연히 사서가 보이고 있다.
소녀와 어울리는 대가로 재미있는 책이라도 찾아보려는 걸까.
“그. 그게.
금발 곱슬 아이는 홀린 것 같은 눈으로,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께요.”
왜 루비아가 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티 파티는 처음 와 봤다면서.
- 탁.
가명으로 안내된 루비아가 자리에 앉았다.
금발 곱슬 소녀는 루비아의 귓속말에 잠깐 표정이 흐트러졌지만, 곧 다시 수줍게 웃으며 페이스를 회복했다.
티 파티에서 자리 배치의 엄청난중요성과 민감함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다.
루비아를 이용해서 이보트 후작영애는 지독한 공격을 한 것이다.
일단 알 수 있는 수준에서 생각해보자면.
알려지지 않은 시골 영애를 평소밟고 싶었던 녀석의 자리에 턱하니 배치해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전략이랄까.
시셀 리드바텐이 목청을 슬며시가다듬었다.
도저히 여기서 순순히 물러나지는 못하겠다는 듯, 한 마디를 날린다.
“이보트 후작 영애께서 실수하실까 봐걱정되는군요.”
실수.
이 정도 단어 사용이면, 눈앞에다결투장을 던진 셈이다.
여자들의 이목이 단번에 쏠렸다.
“어머, 실수요?”
“세심한 자리 배치야말로 귀족의 꼼꼼함을 반영하는 것이지요. 명성높은 이보트 후작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알려질까 두렵네요.”
아직 어린아이라서일까.
침착하지 못하다.
좋은 선택은 아니다.
주최자에 이어, 옆의 루비아까지 푹 찌른 셈.
이보트 세나 에렌가에데가 수줍게 웃으며 답변했다.
“어머.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다들 먼 거리를 와 주셔서 너무감사해요.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어서 앉아 주셔요.”
탐지 스킬을 키고 있는 탓일까.
모두의 미묘한 표정과 움직임이 대부분 다 읽혔다.
이보트 후작 영애는 ‘먼 거리’를 강조함으로서 멀리서 온 ‘지방의’
귀족이 상석에 앉아야 할 이유를 만들었다.
여기서, 레나가 일부러 먼 곳에서 이름을 따온 그라티아 가문보다 더멀리 사는 귀족은 없을 테니까.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눈짓을 보니.
시셀 리드바텐이라는 여자는 아마이 저택에서 제일 가까이에 사는 모양이다.
“하지만.!”
리드바렌 영애는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다들 표정이 좋지 않다.
구질구질하다.
그런 표정을 짓는 모두의 얼굴이 보인다.
이제 여기서 그녀의 편은 없었다.
다들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몇 번의 대화가 오고 간 뒤, 같이 있던 소녀들은 이보트 후작 영애와 곁에 선 신인에게 완전히 줄을 선상태였다.
“와아. 그라티아 가문의 영지에선 보석이 잔뜩 난다고 하더라고요.”
“블랙베리 님이 드레스를 골라주셨다는 소문이 있으니, 역시 정말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계신 게 분명해요!”
“너무 부러워요!”
진행을 쭉 보니 느껴진다.
이보트 후작 영애에게 처음부터 호의적인 쪽도, 처음으로 티 파티를 연다고 하니 어떤 아이인지 염탐해보려는 쪽도 있는 듯했다.
하지만 참석한 소녀들은 이제 다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적인 발육은 좀 부족해 보이는 이 곱슬머리 금발 소녀가.
절대 만만하지는 않구나.
“정말 꿈같은 맛이네요.”
“크림이 정말 진하네요-".! 장미 향이나요. 마치 꿈꾸고 있는 것 같은걸요.”
“초콜릿이 달지 않으면서도 이리맛있다니.
루비아에게도 관심이 집중되었다.
소녀들이 앞다뤄 루비아 앞에서 정말로요? 하며 눈을 반짝이거나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간간이 손뼉을 치며 호들갑스럽게 맞장구치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라티아 영애께서는, 혹시 어떤 사람이 취향이세요? 호호호! 너무쑥스러운 걸 물었나?”
이건 나도 좀 궁금한데.
“저는.
짧은 침묵 뒤.
루비아가 눈동자가 언뜻 파르르빛났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람, 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묘한 대답이었다.
주위의 여자들도 갸웃했다.
“와앗! 사람이 아니라면. 천사님같은 게 취향이신 걸까요?”
루비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눈빛이 흐릿하게 젖어 갔다.
“이거 분명 누군가 상대가 있네.
그렇지요?”
“너무 캐물어도 실례겠지만 저도 궁금해지는걸요.”
“어떤 분인지만 듣고 싶어요.”
루비아가 입을 열었다.
“그냥, 안 보이면 어쩐지 초조하고, 뭔가 저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드는 분이에요. 절 지켜 주시고.
“역시! 수호천사 같은 건가요?”
“글쎄요. 그런 이미지와는 조금거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수도도 그분덕분에 온 거예요.”
루비아의 얼굴에 살며시 흥조가 떠올랐다.
덕분에 수도를 온 거라면.
설마 내 이야기인가?
막 민망해지려고 할 때였다.
- 쨍그랑.
끝자리에 있던 시셀 리드바렌이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애써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던 모두의 시선이 어쩔 수 없이 집중됐다.
깨진 찻잔이 시셀의 왼쪽 손등을 엷게 베어 냈다.
베인 피부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피가 흐르는 손등을 가만히 보던 시셀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사람이 아니고, 천사도 아니면 악마라도 만나고 계신 건가.”
“어머.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하지만 더 이상의 소요는 없었다.
시셀 리드바렌은 뒤돌아 그대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인사조차 없이.
루비아를 슬쩍 살폈지만 별다른 표정의 변화는 없다.
악마라.
루비아가 만약 내 이야기를 했던
거라면,
찻잔을 깨고 나간 저 여자아이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항상 부질없이 부서지긴 했지만, 마왕군의 선봉에 서긴 했으니까.
지금도 마왕들이 강림한다면 인간편에 서진 않겠지.
분위기는 곧 수습되었고, 아무 일없었다는 듯 찻잔이 치워졌다.
“그건 태워 주세요.”
세나는 곱슬거리는 금발을 손으로 살짝 꼬며 다소곳이 말했다.
파티가 성황리에 끝난 뒤.
대부분의 소녀들은 돌아갔다.
“그라티아 영애께서는 잠시 이쪽으로?”
나는 은신을 풀지 않은 채, 저택안에 들어가는 루비아를 쫓았다.
슬슬 말해 줘도 좋을까?
그녀를 계속 몰래 지켜보는 게, 썩좋은 기분은 아니니까.
= 루비아.
<으앗! 어? 어디 계세요? 어디??.
이거 생각보다 훨씬 당황하는데.
= 모른 척해라.
“크흠! 흠!”
“그라티아 영애.T
“아니에요. 앞으로 가요.”
<어, 언제부터 계셨던 거죠?>
= 방금. 걱정되어서 왔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당황하겠지.
아까 들은 대화가. 내 이야기일가능성도 있고.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 티 파티는 즐거웠나? 당황스런 일은 없었고?
짐짓 떠보듯이 물어보았다.
<작은 사건들이 있기는 했는데.
예상했던 범위였어요. 그래도 전부 재밌었어요! 제가 참가할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예상했던 범위라.
루비아가 조금 더 무서워진다.
= 혹시 도와줄 건 없나.
<아니요! 여긴. 그냥 제게 맡겨주세요.>
루비아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호화로운 응접실.
사슴뿔로 장식되어 있는 테이블에 둘을 안내한 뒤, 세나가 루비아를 보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시겠지만, 영애를.
이용했어요.”
그녀가 안절부절못하고, 굉장히 미안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깐다.
세나와 대조적으로 루비아는 무척평온해 보이는 모습이다.
내가 근처에 있다는 걸 알고 더평정을 찾은 것 같다.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절 미워하시기 전에 먼저 제 사정부터 들어주세요.”
소녀가 말을 이었다.
“저희는 개국공신 가문이에요. 명망 높은 마법사나 검주는 그리 배출하지 못했지만, 이리저리 줄을 잘타며 지금껏 살아남았죠.”
개국공신이라.
확실히 후작이라는 작위를 카드로 따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개국공신.
뭔가 익숙한 단어다.
어디서 들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곧 떠오르는 게 있었다.
슬라임이 해 준 이야기였다.
<캐빈 애슈턴. 개국공신인 대공가문의 직계 장자이자, 아쥬라의 최고위 실력자였죠.>
캐빈 애슈턴과도 조금쯤 관련이 있으리라는 건.
무리한 추측일까.
루비아에게 그자의 책도 찾아봐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싶었다.
이보트 영애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런 만큼, 이랄까. 저희 가문은 최근의 전쟁 추진에 계속해서 반대해 왔어요.”
“좋은 일이네요.”
루비아의 표정이 누그러진다.
그녀의 아버지도 전쟁을 반대하다살해당한 처지다.
남 일 같지는 않겠지.
“어른들은 희생될 수많은 목숨을 걱정하는 척하지만. 실은, 수도에서 손꼽히는 명문으로 잘살고 있으니까, 전쟁 따위 불안한 짓을 해 봐야 득이 없다는 거죠.”
가문이 전쟁을 반대한다는 말을 듣고 루비아의 표정이 확 누그러진 탓일까.
덕분인지 세나의 말이 길어진다.
“리드바렌 가문은 대표적 주전파예요.
시셀의 부친은 유명한 종교재판관이죠、”
종교재판관이라.
그런 녀석들이 있었던 것 같기도하다.
어차피 나는 모든 인간에게 있어이단이므로, 종교재판관이나 보통인간이나 다를 것은 없었다.
“엠버와 연합에 제국의 종교를 퍼트린다고 난리도 아니지요.”
결국, 주화파 주전파 대표 가문의 갈등이 작은 정원 안에서 벌어진 셈인가.
“제가 내몰지 않았으면 시셀이 분명히 무슨 짓인가 했을 거예요!
제 첫 번째 티 파티를 망쳐 놨을게 확실하다고요!”
애는 애다.
귀족은 귀족이다.
정세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거다.
밖에서는 수많은 인간들이 지금도 굶어 죽어 가고 있는데, 작은 세계안에서 보호되고 길러진 귀족들은 이런 걸 걱정하고 있다.
루비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전 영애께서 약속만 지켜 주시면 됩니다.”
“그럼 절 미워하시진 않을 거죠?”
금발의 소녀는 울상이 되었다.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 관계는 미워하니 어쩌니 할 사이는 아니지요.”
루비아의 말을 들은 금발 소녀는 울상을 한 번에 거둬들였다.
역시 이것까지도 연기였던 건가.
“그런데. 처음부터 제가 이렇게 접근한 걸 알고 계셨던 거예요?”
“그냥저냥 짐작만 했지요.”
루비아의 이런 모습이 새로웠다.
무덤에서는 정말 어설픈 사령술사로만 보였는데.
통찰력이나 정치력이라고 말할
것마저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나와 함께 다니며 성장했는 지도 모른다.
사막을 횡단하고, 거대한 괴수들이나 인간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본 경험을 한 ‘영애’들은 별로 없을 테니까.
“아.
자신의 가면을 한 번에 꿰뚫어 본루비아를, 이보트 영애는 흠칫한 눈으로 바라보며 감탄했다.
“이쪽이에요. 도서관으로 안내해드릴게요.”
두 여자의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특별히 찾으시는 책이 있나요?”
내가 애슈턴의 이름을 꺼내 볼까고민하기도 전에.
“캐빈 애슈턴이라는 작가의 책을 찾고 있어요.”
이건 놀랐다.
=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이보트 가문은 개국공신이에요.
그리고 무武보다는 문文에 훨씬 더치중한 가문이죠. 저택 서재에 어마어마한 장서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 이야기는 언제 다.
= 그렇다고 캐빈 애슈턴이라니.
<그 사람 책을 찾고 계시잖아요?
몰래 딱 가져다드리려고 했는데.
깜짝 선물은 아쉽게 실패네요.>
설마, 그녀는 처음부터 이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건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서재에 도착했을 때였다.
“어? 문이 열려 있네요.”
안쪽에 앉아 있는 인간 한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별다른 위협은 될 것 같지 않은 초로의 남자였다.
“들어왔느냐.”
낮고 따듯한 목소리였다.
“어, 아버지? 혼자 계세요?”
“시간이 늦었으니까. 다들 퇴근시켰다. 옆에 계신 분은?”
“헤햇. 이번에 친해진 그라티아백작가의 영애예요.”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루비아는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들고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허헛. 딸 친구인데 그런 예를 취할필요까지는 없다네.”
열은 금발 남자가 실없이 웃었다.
세나 이보트는 살짝 들뜬 듯이, 두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마침 잘됐어요! 어떤 사서보다저희 아버지가 최고예요.”
“세나, 괜한 금칠은 관두려무나.
가진 재주가 없으니 방에 들어앉아책이나 읽는 게지.”
“에이! 판본에 따른 미세한 차이점까지 알고 계신 분이면서.
“그야 자랑할 만한 것도 아니지.”
“아무튼, 여기 그라티아 영애께서 찾으시는 책이 있대요. 아버지가 도와주실래요?”
“오? 그래? 하긴, 딱 보아도 무척독서가 깊을 것 같은 영애분인걸.
우리 세나는 삽화가 들어간 책만 좋아해서 말이야. 이거 반갑구려.”
마른 남자의 웃음이 한층 더 깊어제국 수도에서 어떻게 후작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정도로 유약해 보이는 남자였다.
경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작가의 책이지?”
“캐빈 애슈턴이라는 작가의 책을 찾고 있습니다.”
“맞아, 그런 이름이었어!”
“.아버지?”
서재에 앉아 있던 남자의 얼굴이 차갑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