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생매장 (10)
캐빈 애슈턴.
그 말을 들은 이보트 후작이 매우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색으로 따진다면 느슨하고 흐트러진 노란색이었던 후작은 날카로운 칼날이 가진 차가운 회색을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절로 경계심이 일어났다. 지금껏 캐빈 애슈턴이라는 단어에 유의미한 반응을 보이는 자는 단 하나였다.
수도를 구경한다고 훌쩍 떠나 버린 아이 작.
그리고 이제는 이보트 후작까지 둘이다.
아이작의 사례로 미루어 본다면, 이보트 후작이 평범한 녀석이 아닌것은 분명하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를 살폈다.
몸에 지닌 날붙이는 없다.
호신용 칼조차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 건가.
그렇다고 칼이 필요 없는 경지는 아닌 것 같은데.
레안드로 후작이나, 이제 이름을 알게 된 ‘소녀 공작’ 타르티에 같은 검주들에게 느껴지는 기운은 없다.
숨긴 지팡이도 없었다.
기스-제-라이가 살해했던 마법사두 명을 떠올렸다.
그들과도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마법사라고 보기도 힘들다.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나 정말 많은 걸 겪었구나.
검주劍主들과는 직접 칼을 맞대고 싸우다 몇 번이고 살해당했다.
마법사들이 전력으로 싸우다 죽는 장면을 거듭해서 봤다.
그들의 분위기를 읽어 낼 정도로 경험을 쌓은 것이다.
어쨌건, 캐빈 애슈턴이 언급될 때 이보트 후작이 순간적으로 일으킨기세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칼 앞에서 쓰러지더라도.
베어도 벤 것 같지 않은 느낌을 받을 듯했다.
그건 상대가 내재한 무형의 어떤 자부심이나 기품 같은 거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날카롭게 일어난 기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곧 사그라졌다.
“허허.
후작은 멋쩍은 듯이 웃었다.
나도 칼자루를 잡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뭔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곧바로 제압하려고 했지만, 그는 앉은 의자에서 처음부터 아예일어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아버지? 무슨 일 있어요?”
“하핫. 무슨 일? 아무것도 아니다.
그라티아 영애, 티 파티는 즐길만하셨나?”
“이보트 영애께서 작은 부분까지 세심히 배려해 주신 덕분에, 무척즐길 수 있었습니다.”
루비아도 티를 내지 않고 정중히 대답했다.
= 너도 방금 느꼈지?
<???네. 캐빈 애슈턴과 대체 무슨관계일까요?>
후작은 친근한 표정을 지으면서 루비아에게 말했다.
“그. 책은 물론 찾아서 빌려드릴테지만, 내 한 가지 부탁이 있네.
곧 저녁 식사가 준비될 텐데, 함께 드시고 가지 않겠나?”
위험할지도 모른다.
루비아의 정체를 시험하려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 어쩔 거지?
<으음. 여기서 저녁을 거절하면 절 수상하게 볼 것 같은데요. 일단맡겨 주세요.>
그녀를 믿고 따라가기로 했다.
일단 내가 옆에 붙어 있는 상황.
신변에 위협이 발생하면 나타나서 해결해 줄 수도 있다.
설마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독살 같은 짓을 하지는 않겠지.
‘캐빈 애슈턴’에 대해 무언가 말을 내뱉는 대신, 이보트 후작은 루비아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좁네만. 가족들끼리 식사하는 곳일세. 부디 즐겨 주게.”
중후하고 거대한 저택이라 식당도 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번에 기껏해야 열 명 정도가 식사하면 고작일 것 같았다.
하지만 식당에 메이드 한 명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셋이 식사하기는 충분히 넓었다.
“영애의 식사량은 모르지만.”
후작은 어뮤즈먼트로 나온 카나페하나를 집으며 농담을 건넸다.
“부족함은 없게 준비했으니 느긋하게 즐겨 주시오.”
허언은 아니었다.
주방에서 식사가 만들어질 때마다 접시를 들고 온 메이드가 식사를 하나씩 소개했는데, 슬쩍 듣기에도 값비싼 요리들이었다.
“푸아그라 테린입니다.”
긴 사탕 껍데기처럼 만든 종이가 툭 풀어졌다.
식사하는 표정을 보니 독이 든 것 같지는 않다.
수프도 평범하지 않았다.
“섞어 드시면 됩니다.”
메이드가 트러플을 눈앞에서 갈아계란으로 살짝 코팅된 스프 위에 백백하게 떨어트렸다.
하나씩 나오는 전채와 식사에는 정성이 매우 들어가 있었다.
= 어때?
<후우.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네요. 긴장하고 있으면서 티를 안 내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잘 먹는 것 같은데.
=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음. 그건 아니에요.>
후작은 식사 내내 캐빈 애슈턴에 대해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요리는 입에 맞으신가? 내 슬쩍듣기로. 어머님께서 요리에 무척조예가 깊다고 하던데.”
“아하하핫.
루비아는 갑자기 조금 과장되게 웃었다.
조금은 버릇없어 보일 정도였다.
후작은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능청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지?”
“용서하십시오, 각하. 저희 모친의 요리 솜씨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서 그렇습니다.”
“특별하게 뛰어나다고 들었다만.
제대로 수업을 받았다고.
“각하, 제 부친의 수첩 첫 장에 쓰여있는 말이 있습니다.<주의: 앤이 요리하는 상황을 절대 만들지 마라.
내가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허허. 그럼 내가 들은 소문이 좀왜곡되었던 모양이야.”
= 지금 너를 떠본 건가?
<맞아요. 앤이라는 분은 참혹한 요리 솜씨와, 어마어마한 요리에의 욕구로 가득한 백작 부인이에요.>
루비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의 비슷한 함정 질문이 이어의식하고 듣거나, 중간중간 루비아가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함정인 줄도 모르고 넘겼을 화제들이었다.
공부하겠다더니, 정말 그라티아가문 본인도 이렇게 자세히 자신에 대해 알기 어려울 것 같았다.
저런 것까지 아나 싶을 정도로.
= 고생하는군.
<아니에요. 아까 티 파티에서는 공부한 걸 전혀 쓸 수가 없어서, 조금 허무했는걸요. 지금 제대로 쓰고 있네요.>
루비아는 한 번도 당황하지 않고 후작과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나가고 있었다.
왜 이보트 후작은 캐빈 애슈턴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을까?
그리고 그걸 다시 숨기려 할까.
아이작이 곁에 있었다면 정답을 알려 줬을지 모른다.
최소한 녀석에게 물어보기라도
하고 싶은데.
아이작은.
대체 어디를 간 건지, 며칠 동안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고 있다.
떠날 때 기약도 없이 수도 관광을 하겠다고 했을 뿐.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어디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릴 아예 버리고 간 거라면.
개운한 기분이 들어야 할 텐데,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나는 괜히 목을 한 바퀴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작은 어디에도 없었다.
흑돼지 어깨 등심을 구워 낸 메인요리에 이어, 디저트로 사과 칵테일과 딸기 파르페가 나왔다.
“.식사 무척 즐거웠네. 다음에 또초대할 수 있으면 좋겠군.”
“정말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꼭그럴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아, 맞다. 아버지, 책은요?”
“물론 생각하고 있어. 전집으로 스무 권짜리를 먼저 내어드리지.
마차를 준비해서 따로 배달해 줄 거야.”
스무 권!
아이작의 행방에 대해 고민하던 생각마저 멀리 날아갈 정도였다.
애슈턴의 저작 스무 권이라니!
그런 게 이보트 가문에 있었다는 말인가?
“와.
루비아도 놀랐는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엄청난행운을 만난 느낌이다.
무척 수완 좋아 보이던, 진네이 유베조차 한 권밖에 구하지 못한 책이다.
지금까지 읽은 것도 여덟 권밖에 되지 않는다.
별별 재주를 다 부리던 보육원의 슬라임에게도 세 권밖에 없었다.
그런데 스무 권을 전집으로 내어주는 스케일이라니. 이것이 개국 공신 가문의 저력이라는 것일까?
루비아는 후작에게 거듭해서 감사인사를 건넸다.
= 스무 권이라니.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말인가.
<정말 잘됐네요!>
캐빈 애슈턴의 책 스무 권을 읽을 생각으로 두근거렸다.
적어도 지혜가 20은 오를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스킬을 얻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시간의 틈바구니에 갇힌 천재 대마법사’를 읽었을 때.
캐빈 애슈턴의 히든 피스를 접했다면서 지혜가 무려 10이나 상승한 데다가, 통찰 (E마이너) 이라는 특전까지 얻었던 적이 있다.
스무 권이다.
그러면 그중에 한 권 정도는.
- 다그닥.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 바깥으로 마차가 저택을 출발했다.
루비아의 마차 뒤로 전집을 실은 마차 한 대가 따라갔다.
그리고 서로 다른 방향에서 다섯명이 슬쩍 저택을 빠져나오는 게 느껴졌다.
미행.
후작이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다.
꺾이는 골목을 따라서 걸어오는 녀석도 있었고, 지붕 위를 움직여날아오는 녀석도 있었다.
팔짱을 끼고 대로를 걸어오다가, 흩어져 다시 분장을 바꾸고 마차 뒤를 밟았다.
물론 내 탐지 능력을 속일 정도는 아니었다.
유령들과 몇 번이고 부딪쳐 봤던 내 입장에서는, 그냥 따라오니까신경 쓰이는 정도에 불과했다.
일단 루비아에게 말하지는 않고 그들을 파악하며 걸었다.
‘탐지.’
[심안心眼(C플러스) 적용 중.]
다섯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루비아의 마차를 따라온다.
특별한 살의 따위는 없어 보였다.
이보트 후작가에서 나온 것들.
당장 붙잡아 죽이거나 고문하기도 애매하다.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모르는 척루비아에게는 전혀 티 내지 않았다.
녀석들은 각자 숙소 주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안에 들어오려고 한다면 어디를 하나 부러뜨려 줬을 텐데.
나는 짐꾼들이 들고 온 스무 권의 두꺼운 책을 바라봤다.
빈 책장에 차곡차곡 정리된 책들.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이런책들은 접하지도 못했겠지.”
“도움이 되어 기뻐요! 저도 같이 읽어도 될까요?”
당연한 이야기다.
고개를 끄덕인 뒤 책을 펼쳤다.
<제국사 편력 - 캐빈 애슈턴>
제국 초창기부터의 역사를 그대로 기록한 책이었다.
물론 그저 단순한 기록의 배열은 아니었고, 야사野史 하나하나마다 작가의 생각을 달아 각각의 행동을 평해 놓은 책이었다.
- 스륵.
제국 초기부터 존재했던 가문들의 역사에 대해 세세하게 기록한 책이었다.
애슈턴 가문과 이보트 가문.
눈에 띄는 점은.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이보트가家는 건국 초기부터 애슈턴가에 대해 항상적대심과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저자인 캐빈 애슈턴은 자기 가문얼굴에 금칠을 하며, 그와 동시에 이보트 가문을 지독할 정도로 깎아내리고 있었다.
“저속하고. 게으르면서. 한심한 것들이라니. 평가가 너무한데요?
그런 말까지 들을 가문은 아닌 것 같았는걸요.”
“으음.”
“게다가 이런 책을 직접 보존하고 있다니 신기하네요. 그냥 수집욕때문일까요?”
루비아가 짚은 포인트가 묘하게 느껴졌다.
<최고 공신 가문인 애슈턴가家는 거의 대가 끊길 지경에 이르렸다.
이 비극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전모가 밝혀진 바는 없다. 하지만 그 뒤에 이보트 가문이 있으리라는사실. 적어도 이보트 가문이 몹시기뻐하리라는 건 명백하다.>
“아니, 이걸 왜 남 핑계를 대지.”
이런 서술 때문이라면.
이보트 후작의 반응도 이상한 건 아니다.
일단 나도 캐빈 애슈턴에게 묘한 도움을 받는 처지니, 그의 적이면 나도 이보트의 적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읽어 갔다.
- 스르록.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바티엔느가문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대부분 성정이 과격하며,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지위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였다.
<.검투사나 하다가 비명에 가면 딱 좋을 혈통이다.>
이보트와 바티엔느.
그 두 가문 외에 별다른 악담은 없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많다.
특히나 책을 쓴 ‘필체’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유려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묘한 위화감이 척추로 스멀스멀 천천히 기어올랐다.
뭔가 달랐다.
한 줄 한 줄을 읽을 때마다 알 수 없이 럽텁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읽은 뒤책을 덮었을 때였다.
- 탁.
조용한 숙소에 작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해골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혜가 오르지도 않았고, 특전이 생겼다는 메시지도 없었다.
한 권만 읽어서는 아닐 텐데.
지금까지 읽은 것도 절반 이상이 시리즈물.
<캐빈 애슈턴의 업적 - 17>같은 것들을 단권으로 읽었을 때도 분명바로 지혜가 올랐으니까.
결론은 간단했다.
나는 루비아를 보며 말했다.
“이거. 가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