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생매장 (11)
루비아가 나를 갸웃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가짜. 라고요?”
“일단 끝까지 확인해 보고.”
문체는 몹시 흡사하다.
그의 책 여덟 권을 정독한 내가 봐도 속을 정도니까.
하지만.
지혜가 오르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앉은 자리에서 다른 책을 읽어 봤지만 마찬가지다.
아무런 메시지도 뜨지 않았다.
지혜가 올라간 탓인지, 책을 읽는 속도가 더 빨라졌기 때문에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그렇게 한자리에서 책 네 권을
더 읽었다.
- 털썩.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그것도 가짜인가요?”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책을 읽던 루비아가 물었다.
“아마.”
물론 ‘캐빈 애슈턴’이 쓴 책이라고 해서 전부 지혜가 올라야 한다는 법은 없다.
지금까지 봐 왔던 책들이 오히려예외적인 경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이론적인 이야기일뿐이다.
책을 읽어 보니 기묘한 위화감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마치 친숙한 누군가를, 흉내 내는 타자를 보는 듯한 위화감.
“제가 도움이 못 되어 버렸네요.
죄송해요. 뭐라도 하고 싶었는데.”
루비아가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낙담한 표정으로 말한다.
“뭐. 가짜라는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니에요. 전에 진짜 책을 읽을 때랑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어요.
분명히 알아보시는 거겠죠.
슬퍼하며 축 쳐져 있는 루비아를 그럴 거 없다면서 위로했다.
가서 확 뒤엎을까 싶은 생각마저떠오른다.
숙소 주변에 붙은 다섯이나 되는 미행을 붙이고, 빌려준 책도 전부 다 가짜라니.
나는 고민에 잠겼다.
놈들은 ‘캐빈 애슈턴’의 이름으로, 이보트 가문의 욕이 쓰인 책들을 우리에게 빌려줬다.
이게 가짜 책이라면.
진짜 책에는 이보트 가문에 대해 뭐라고 적혀 있을까.
후작은 분명 캐빈 애슈턴에 대해 단서를 갖고 있을 거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이름에 표정이 일그러졌을 리가 없다.
하지만 어떻게 접근할지가 문제.
중요 작전을 코앞에 둔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시기다.
다짜고짜 잠입해서 아는 걸 전부 말하라며 고문하기도 곤란하다.
캐빈 애슈턴.
캐빈 애슈턴.
나만큼 그 이름에 집착하는 다른 한 녀석을 안다.
아이작이다.
놈에게 상담하고 싶은데, 대체 딱필요한 지금 어디를 간 걸까?
대신 루비아와 이런저런 추측을 이어 나가 보려 할 때였다.
- 똑똑.
복도로 똑바로 걸어온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라티에 영애께 전할 편지가 있습니다.”
“편지라고?”
문을 열자 낯선 인간이 밀랍으로 봉한 편지 봉투를 건넸다.
“어디서 온 거지?”
“시셀 리드바렌 영애께서 보내신서신입니다. 좋은 밤 되시길.”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편지예요?”
“응. 잠시만.”
- 투툭.
편지를 뜯었다.
탈탈 털며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독 따위는 들어 있지 않았다.
막 쓴 편지였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가 이리저리 풍겨 댔다.
“읽어라.”
속지를 루비아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두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편지를 한 줄 한 줄 읽었다.
“음. 먼저 일찍 떠나게 되어서 아쉬웠습니다. 수도 상황에 대해서 궁금하신 건 없으신지요? 그라티에 영애와 좀 더 내밀한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오늘 밤이라도 좋습니다.
언제든 내방 환영합니다. 시셀.
리드바렌 드림. 저한테 왜 이런 걸 보냈을까요?”
루비아가 편지 안에 든 초대장을 손으로 흔들었다.
살짝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인기 많은데. 티 파티에서 뭔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줬나 보지?”
나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별 눈치가 없어도, 최소한 그녀가 거기서 만만치 않게 보였다는 것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멍하던 루비아의 얼굴이 살며시발갛게 물들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이상하네요.
이분은 이보트 영애와 무척이나 적대적인 것처럼 보였는데. 혹시한 명이라도 더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걸까요?”
“어쩔 건가.”
“글쎄요. 고민이네요. 결정하시는 대로 할게요.”
“내가?”
“네! 책임 떠넘기기예요.”
그녀가 쿡쿡 웃었다.
잠시 생각에 빠졌다.
말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현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봤다.
루비아의 입장이라는 것도 있다.
이보트 영애의 티 파티에 참석해놓고 그 최측근처럼 굴었었는데, 갑자기 적대자 리드바렌 측 초청에 응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어쩔까.
나는 남은 열다섯 권의 책을 쑥훑어봤다.
“읽을 책도 남았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전부 다 가짜였던 거죠?”
“그래.”
루비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죄송해요.”
그녀의 목소리에 미안함이 짙게 배어 나온다.
“아니, 네가 그런 반응 보일 건전혀 없는데.”
루비아의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자 한층 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보트 이 새끼가.
어떻게 한 권이 진짜가 없나.
그 딸은 루비아를 보자마자 바로 이용해 먹을 생각부터 떠올리고.
적극적으로 장단을 맞춰 줬는데, 아비가 고맙다면서 빌려준 책은 한 권도 빠짐없이 전부 다 가짜다.
망할 놈들.
“나쁜 녀석들이네요. 정말 여기로 한번 가 볼까요?”
내 분위기를 읽은 걸까.
루비아가 초대장을 흔든다.
“그러지. 목적은?”
“이보트 후작에 대해 한번 물어보려고요.”
좋은 생각이다.
애슈턴도 애슈턴이지만, 이보트후작이 궁금해진다.
애슈턴의 이름을 말했을 때 놈이 보인 민감한 반응을 생각한다면, 녀석이 이 책을 가짜인 줄 모르고 우리에게 줬을 가능성은 적다.
미행하는 녀석들이 보라는 듯이 대놓고 리드바렌 백작가를 향했다.
혹시 저쪽에서 무력을 쓴다 해도, 루비아 정도는 데리고 가볍게 빠져나올 수 있다.
저택 크기는 비슷했다.
그러나 이보트 후작가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백백하게 깔린 무장경비병들이 눈에 띄었다.
담장 부근에 설치된 각종 트랩이, 탐지 영역 안에 빼곡히 느껴졌다.
“도둑 들 일이 많나 보군.”
“가장 부유한 가문 중에 하나라고해요. 종교재판관을 맡은 것도.
물욕에 가장 덜 휩쓸리려면, 이미가진 돈이 많아야 한다는 이유라고 들었어요.”
얼핏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웃기는 논리였다.
정문 앞쪽에는 뇌물이라도 대려하는지, 몇몇 마차들이 길게 줄을 늘이고 서 있었다.
“너는 정문으로 가라.”
“해골님은요?”
“안쪽을 좀 살피지.”
적지敵地라면 적지다.
언제든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인지 확인해서 나쁠 건 없었다.
- 훌쩍!
담을 넘었다.
빼곡히 깔린 트랩 위치가 한눈에 훤히 읽힌다. 탐지 스킬을 최대로 발휘한다. 걸리적거릴 만한 녀석은 눈에 띄지 않는다.
‘질주.’
- 팟!
아예 빠르게 여기저기 다녀도 될 정도다.
농락하듯이 바로 뒤에서 다녀도 눈치채는 인간 하나 없었다.
‘전부 허수아비인가.’
초대장을 보여 주고, 당당히 저택안으로 들어오는 루비아를 보면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강자들이 모이는 제국 수도.
게다가 여긴, 얼핏 봐도 ‘실세’인귀족의 저택이다.
기사단을 데려왔나 싶을 정도로, 저택 앞뒤를 빼곡히 지키는 병력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내 존재를 눈치라도 챈 녀석은 단한 명도 없다.
역시 ‘유령’들의 존재는 이상하다.
에라스트는 더욱 그렇다.
그곳에 머물러 있던 ‘내사과장’의 존재는 터무니없다.
단순히 내가 약하고, 이 세상이 강자로 가득한 것만은 아니다.
뭔가.
뭔가 왜곡되어 있다.
살해당하기 전 내사과장과 섞은 대화를 떠올렸다.
<.너희 같은 강자들이 왜 이런시골에 와 있는 거냐.>
<상부 지침이라고. 황실 비역에서 내려오는 지침.>
<국장 후보자들은 에라스트에서 필히 1년씩 근무해라. 수상한 게 등장하면 깔끔히 정리해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 ‘유령 내사과’가 출동한다면, 이런 백작가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깔끔히 정리된다.
힘의 분배가.
뒤틀려 있다.
리드바렌 백작의 저택은 무언가를 흉내 낸 복제품처럼 보인다.
제대로 된 힘은 은밀한 극소수에 집중되어 있고, 이 귀족들은 마치 깃털 장식처럼 보인다.
차라리 경비병 하나 두지 않았던 이보트 후작이 일으킨 기운이 훨씬
‘진짜’ 같았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루비아는 정문에서 두 집사에게 안내 받았다.
“어머. 와 주셨군요! 정말 현명한 선택을 하셨어요.”
리드바렌 영애가 루비아를 반갑게 맞이했다.
현명한 선택이라.
무슨 이야기를 할 건지 벌써부터 짐작이 된다.
속이 과하게 들여다보이는 타입의 인간 소녀다.
응접실에 들어선 시셀 리드바텐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
“이보트 가문은 망했어요.”
“망했. 다구요?”
루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진한 척이 여기서도 제법이다.
“네. 찻잔 그릇이나 정원 꾸미기 같은 거에나 신경 쓰고 있어서야 귀족이라고 할 수 있나요?”
우스꽝스러운 헛기침 몇 번을 한 소녀가 말을 이었다.
“개국공신 가문이라고 해도 별수없지요. 어린애들은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지만. 글쎄요.
정문에 줄 선 마차들 보셨죠?”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라티에 영애는 수도가 처음이시잖아요. 그러니까 당신께는 제가 기회를 드리고 싶었어요. 제대로 편을 선택할 기회를 말이죠.”
시셀이 씩 웃었다.
“무조건 줄을 잘 서야죠. 그래야 인생이 잘 풀려요.”
시셀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순간루비아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마도 ‘줄을 잘못 선’ 에라스트가신들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 재수 없는 꼬맹이로군.
<확실히 그렇네요.>
남의 험담에 대해, 루비아치고는 드물게 빠른 동의다.
<아는 게 있나 한번 떠보기만 해야 겠어요.>
그녀의 질문에, 시셀은 신이 나서 이것저것 털어놓았다.
루비아가 여기가지 온 이상.
분명히 자기편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보트 가문은 이미 황제 폐하의 눈 밖에 났어요. 전쟁 준비에 전혀협조하지 않고 있거든요.”
“전쟁, 이요?”
“어휴. 정말 아무것도 모르셨구나.
가르쳐 줄 테니까 잘 들으세요.
하지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없었다.
그동안 아이작이나 레나에게 계속정보를 얻은 까닭일까.
시셀이 대단한 듯 뱉어 내는 말은 시시한 가십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 별거 없군.
<크게 기대는 안 했었지만, 정말 아는 게 없네요.>
이 정도라면 그냥 레나에게 따로 묻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
루비아도 실망한 듯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어요. 그러면 전 이만.
“아니요. 지금 확실히 말을 하고 가셔 야죠.”
소녀가 루비아를 막아섰다.
이건 또 새로운데.
루비아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냥 정보만 듣고 가려고 하신건가요? 그건 정보상점에 가서 돈내고 사세요.”
“어느 쪽이 유리한지는 명백한데 왜 그냥 재 보는 것처럼 굴죠?”
= 치워 줄까?
<아니에요. 얘긴 들어 볼게요.>
루비아가 말을 이었다.
“제가 이쪽을 선택한다고 해 보죠.
그럼 저에게는 좋은 게 뭐죠?”
“목숨을 부지하는 것과, 전쟁 후최고의 자리에 오를 우리 가문과 친분이 있다는 것. 충분한 대가 아닐까요?”
= 뭔 소리냐.
<살려는 준다는 얘기네요.>
“그 대가로 제가 해야 하는 일은뭐죠?”
“어렵지 않은 일이에요. 이보트가문에 좋지 않은 증언 하나를 해 주면되요.”
어처구니없는 녀석이다.
리드바렌 백작이란 인간의 수완이 얼마나 좋을지는 몰라도, 그 딸은 엉망이었다.
“제가 거짓말은 잘 못해서요.”
하고 싶지 않은 거짓말만이겠지.
그라티에 영애는 그렇게 능숙히 흉내내면서.
어쨌거나, 분명한 거절의 뜻이다.
“뭐라고요? 지금 리드바렌가를 우습게 보고 계시는 건가요?”
화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뭔가 소꿉놀이 같은 기분이 든다.
공간 전체에서 느껴지는 위화감.
= 얼른 나가자.
이런 ‘가짜’들의 장난에 어울려 줄생각은 없다.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빨리레나의 작전대로 루-룸을 탈취해야 할 것 같다.
“다음에 뵙죠.”
“무슨.
- 딸랑!
“부르셨습니까?”
덩치 좋은 시녀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잡아.”
이런 일에 익숙한 둣, 시녀들은 표정도 변하지 않고 움직였다.
도와주려고 한 순간.
- 과득!
시녀들이 내미는 손을 루비아가 잡아서 옆으로 꺾었다.
“아아악!”
시녀 두 명이 순식간에 양옆으로 나뒹굴었다.
지금 뭘 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