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생매장 (13)
나는 그 순간, 루-륨 탈취 계획의 중심이 이름 모를 폭파 담당자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비명 소리도 마법도 마스크 위로 새어 나오는 가쁜 호흡도 전부 다어마어마한 토사에 묻혀 버렸다.
쏟아져 내리는 작은 산 분량의 흙을 아예 공백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의 소유자라면 몰라도, 마법사니 뭐니해도 이런 걸 막을 방법은 도저히 없어 보였다.
처음 몇 초간 막아 내던 반투명한 쉴드도 산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좁아져 버렸다. 마법사도 자기 자신 정도만 간신히 보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스크를 쓴 채 묻힌 호위병들은 한층 더 힘겨워하며 허우적거렸다.
가득 메워진 토사 속에서, 아직제정신을 유지하는 녀석들이 뭔가 꿈틀거려 보려는 순간이었다.
- 꽈광!
다시 한 번 굉음이 터지며 바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냥 안 나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파를 정확히 계산했는지, 2차붕괴는 내가 숨어 있는 환풍구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천장과 단단히 연결된 도르래를 잡고 매달렸다.
- 콰르르르르!
그동안 물길을 통제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폭발하며 몰아치는 강한 지하수에 호위 행렬은 그대로 쓸려흘려 가 버렸다.
십여 분이 지난 뒤.
바깥에는 괄괄 흐르는 물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제야 슬슬 밖으로 나와서 사건이 일어난 앞쪽을 돌아봤다.
비밀 통로의 천장도.
지하수가 흐르는 아래도 깔끔하게 통째로 날아가 있었다.
내가 한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저 아래서 콸콸 지하수가 흐르는 바닥을 바라봤지만, 워낙 단시간에 정신없이 휩쓸린 탓에 그 자리에서 버티는 녀석은 없는 것 같았다.
할 일도 없다.
이거 좀 민망한데.
일이 잘 풀려 다행이긴 하지만.
이대로 10%를 받아도 될까.
감탄이 나올 정도로 딱딱 잘 맞아떨어져 실행되는 계획이다.
이 정도 참여에 10%라면 솔직히 측정할 수도 없을 만큼 이득이다.
레나가 나를 억지로 끼워 주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이대로 가만히 있기보다는.
적어도 전투조가 대기하고 있는 곳에가 조금이나마 도와라도 줘야 할 것방해는 안 되겠지.
장소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일단 가 보자.
- 팟!
나는 다시 환풍구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무너져 내린 산이 눈에 들어왔다.
저 꼭대기에서 폭파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정교하게 폭파를 계획한 녀석은 대체 누굴까.
이런 수준의 녀석까지 섭외하고, 루-륨 운반 정보를 변동 사항들도 실시간으로 알아첼 만큼의 중요한 황실 내부자를 끌어들이다니.
레나의 기획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외곽이라 그런 건지, 아직 근처에 누군가 몰려들지는 않은 상황이다.
레나가 가르쳐 준 장소로 향했다.
지하수에 휩쓸린 녀석들이 나오게 될 장소다.
그곳에서는 살육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 쾅!
나냐우가 발사하는 총탄이 마지막남은 마법사의 쉴드에 강한 충격을 가했다.
“끄윽.”
얼굴에 십자 모양의 칼자국이 난 남자가 주먹을 쥐었다.
두 번째로 보는 얼굴이었다.
지난 생에 T&T 지부장에 올라선레나를 다들 가져가려고 다툴 때, 나냐우 파의 다른 고위 간부들에게 결투로 해결하자고 했던 녀석이다.
”어두운 밤의 은빛 주먹!”
녀석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마법사를 향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물에 휩쓸려 온 마법사가 쏘아 낸직경 1미터가 넘는 화염구가 푸른기운을 띤 남자의 주먹에 닿자 큰 폭발을 일으켰다.
멀리서도 열기가 느껴지는 강한 화염이 남자의 얼굴을 그대로 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자세를 낮추고 그대로 앞으로 전진했다.
마법사의 힘에 주위의 수풀들이 한순간에 전소되었지만, 정통으로 화염구를 맞은 남자는 오히려 머리칼이 좀 그을린 걸 빼면 멀쩡했다.
마스크를 쓴 유령의 시체를 밟고 몸을 튕긴 남자가 쉴드에 곧바로 주먹을 찔러 넣었다.
- 쾅!
더 이상 버틸 힘도 없는지 쉴드가 풀린 순간, 나냐우가 가볍게 낫을 휘둘러 마지막 남은 마법사의 목을 잘랐다.
“명성치고는 초라한 최후로군.”
마법사 알로히스의 피는 자신이 까맣게 태운 땅 위에 흩뿌려졌다.
“어, 웬일로 여기까지 왔어? 당신덕분에 일은 잘 풀렸는데.”
루-륨 금고 위에 걸터앉은 레나가 날 보고 손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덕분이라니.
“혹시 내가 도와줄 건 없나 해서 왔지만. 없었던 것 같군.”
“성실하네. 하지만 이쪽 멤버가 좀화려해서.”
“같은 편인가?”
마법사와 싸우던 남자가 내 쪽을 돌아봤다.
나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아니라서 더 흥미롭군. 한번 싸워 보고 싶은데 괜찮나?”
- 콰드득.
남자가 주먹을 쥐었다.
“그만둬, 스티글리츠. 당신처럼 힘만 넘쳐 나는 바보는 아니거든.”
“당신이 더 강할 거다.”
나는 빨리 루-륨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에, 남자를 보면서 손을 휘휘내저었다.
게다가 저런 강렬한 화염을 쉽게 주먹으로 터트릴 정도라면 실제로 싸워서 이길 자신도 전혀 없다.
“흠.”
스티글리츠라고 불린 자는 주먹에 맺힌 기운을 풀고 양손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나는 금고를 바라봤다.
인간 다섯 정도는 넉넉히 들어갈만한 크기의 원형이었다.
아예 뭔가 들어갈 틈새조차 없는 매끈한 금고지만 아무도 걱정하는 낌새는 없다.
내용물은 이미 확인되었고, 개봉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 같은 표정들이다.
- 터벅.
금고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게. 루-륨인가?
가짜는 아니다.
안에 담긴 막대한 힘이 느껴졌다.
500리터의 루-름.
굳이 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몸의 피를 루-륨으로 대체한
나냐우는,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50리터를 흡수한다면.
기대감에 젖어 있을 때였다.
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이송부터 하자고. 거기 힘넘치는 아저씨가 잠깐 들어 줄래?”
“맡겨라.”
스티글리츠라고 불린 남자는 마치 칭찬을 들었다는 듯이 금고를 향해걸어갔다.
이 근방에서, 열기구를 통해 멀리운반하는 거였던가.
금고 위에 앉아 있는 레나가 폴짝아래로 뛰어내리며 물었다.
“그런데 당신, 이보트 후작과는 대체 무슨 관계야?”
나는 깜짝 놀라서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반가운 질문이다.
이보트 후작에 대해서 내 쪽에서 레나에게 물으려고 했는데, 먼저 말을 꺼내 준 것이다.
한데 무슨 관계라니.
갑자기 왜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했다.
루비아와 있었던 일까지, 자세히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 우우우응!
“뭐지?”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나냐우였다.
그녀가 마법사의 목을 딴 거대한 낫을 고쳐 쥐었다.
허공이 뒤틀리며 쥐어짜졌다.
천처럼 찢겨진 공간 사이로 검은 빛이 새어 나왔다.
분명 겪은 적 있는 현상이다.
잔혹한 기시감이 사방을 조였다.
한곳을 향해, 빈 공간이 힘없이 일그러지며 까닿게 뭉쳐졌다.
그때와 똑같다.
아니, 그전보다 더 빠르다.
“도망가!”
제대로 된 생각을 이어 나가기도 전에 소리쳤다.
- 쨍그랑!
허공이 박살 났다.
새까만 균열에서 두 번째 보는 ‘그것’이 걸어 나왔다.
나는 나냐우를 바라보며 기괴한 위화감을 느꼈다.
처음에 그 누구보다 빨리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던 그녀는, ‘그것’이 허공에서 나타나자마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조.?”
- 콰직!
나냐우의 등 뒤로 걸어간 ‘잿빛 기사’는 손가락 하나 꼼짝 못 하는 그녀의 목을 뽑았다.
그리고 가볍게 몸을 들어, 은빛 혈액을 자신의 입안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 촤아아악.
잿빛 기사의 벌린 입안으로 은빛혈액이 뿜어졌다.
목이 분리되고도 루-륨의 힘으로 죽지 않은 둣, 아니면 사후 경련을 일으키는 듯이 꿈틀거리며 트로핀 나냐우가 은빛 피를 뿜어 댔다.
그녀의 모습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한참 저 너머에 있었다.
- 와그작!
잿빛 기사는 나냐우의 몸에 묻은 루-륨 한 점까지 다 먹겠다는 듯 그녀의 다리를 찢은 뒤 아작아작알뜰하게 씹어 삼켰다.
어느새 잿빛 기사의 투구는 늑대머리처럼 긴 형태로 변해 있었다.
‘먹이’다.
씹고 뜯고 마시는 소리가 주위를 가득 채웠다.
“.레나!”
멍하니 굳은 그녀를 흔들었다.
“저런. 저런 건. 정보. 저런 것에 대한 정보는. 없는데.”
식사가 끝났다.
강제 최면에라도 걸린 둣, 사실과 꿈의 접면에서 멍하던 ‘전투조’들은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되찾는 것 같았다.
“.모두 도망쳐요.”
레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그 말을 듣지 못할 정도의 인간은 없지만, 남은 셋이 고개를 저었다.
“저 괴물이. 시조를.”
“이대로 갈 수는 없지.”
금고 근처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두 남자가 칼을 고쳐 쥐었다.
“후읍.”
도복을 입은 스티글리츠의 몸으로 주변의 공기가 흘러들어 갔다.
“방해하지 마라.”
숨을 크게 들이쉰 스티글리츠는 질문이나 기합 한 마디 없이 곧장 잿빛 기사를 향해 주먹을 질렀다.
지나치게 딩당한 그 태도에 순간적으로 이길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생각마저 들었다.
- 파앙!
멈춰 있던 공기가 터지면서 휘청거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온몸을 훑었다.
기술 이름조차 외치지 않았지만, 방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기운이 주먹에 뭉쳐 있었다.
저런 힘을 아래에서 사용했다면, 비밀 통로가 통째로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될 정도의 강력한 공격이었다.
잿빛 기사는 그 공격을 슬쩍 지나치며 한 손으로 대검을 휘둘렀다.
- 촤아아악!
대검이 스티글리츠의 팔을 그대로 자르고 지나갔다.
압축된 화염 폭발에 그을리지조차 않던 남자의 팔이 잘리면서 붉은 피가 허공에 뿜어졌다.
팔의 절단면과 몸통의 절단면에서 동시에 피가 뿜어져, 한순간 팔이 길게 늘어진 듯한 착시가 일었다.
잘린 팔에 모였던 짙푸른 기운이 두 번 깜빡이다 곧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하하하하하.!”
하지만 스티글리츠는 겁먹지 않고 미친 듯이 웃으며 하나 남은 팔로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 콰직!
잿빛 기사는 강하게 휘둘러 오는 스티글리츠의 주먹을 건틀렛으로 잡았다.
- 깡!
스티글리츠는 머리로 잿빛 기사의 투구를 박았다. 이마가 찢어져서 피가 났다. 아무런 효과는 없었다.
기사는 그런 스티글리츠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배에 그대로 칼을 박아넣었다.
그리고 바닥으로 툭 털어 낸 뒤에 목을 잘랐다.
조금 전 나에게 결투를 신청했던 인간은 이제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
레나가 남은 인간들에게 또다시 외치려 할 때였다.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은 없다.
‘질주.’
레나의 입을 막은 채 그녀를 안고 뒤로 달렸다.
그녀라도 구하는 게 급선무다.
다른 두 남자가 잿빛 기사를 향해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바닥에 널린 시체로 볼 때 그들이 해치운 유령이 한둘이 아니지만,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하지 못하고 몸이 절단되는 게 뒤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i7T0 公 tp ㅆ公 fC (ba 니 a) T T)? v.]
가깝다.
따돌릴 수 있는 속도가 아니다.
“도망쳐라. 시간을 끌 테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읍!”
레나의 입을 막았다.
“나한테는 공격이 안 먹힌다.”
이번에도 그럴지는 어떨지는 확신할수 없지만.
대답은 필요 없다.
레나를 멀리 던진 뒤, 사정거리 안에 상대가 들어왔다고 느껴지는 순간 뒤로 대검을 휘둘렀다.
- 까앙!
하지만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 났다.
스티글리츠의 팔을 자른 마검과, 내가 휘두른 그라스미어의 대검이 동시에 서로를 지나쳤다.
[참격 Lv.2을 습득했습니다!]
[참격 Lv.3을 습득했습니다!]
또 벌어진 현상.
잿빛 기사가 나를 바라봤다.
녀석의 전신 회로가 잠시 점멸을 반복했다.
속도도, 힘도 비교되지 않지만.
어째서인지 놈의 공격은 나에게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공격을 받은 녀석은, 강한 불쾌감을 표하고 있다.
투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향이 있다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검기 Lv.3 최대줄력.]
[흡착吸着 Lv.5 발동!]
[산성 Lv.5.]
[냉기 폭풍 Lv.l을 발동합니다!]
[너울거리는 불꽃.]
녀석의 공격은 내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
내 공격은. 투과되면서도 분명히 데미지를 입힌다.
최대의 공격을 할 생각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최대한의 힘을 밀집해 대검을 휘둘렀다.
- 팟!
놈은 발을 디디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공중에 체류한 순간 등에 무수한 칼날로 만들어진 날개들이 돋아났다.
아래서 뭘 해 볼 수도 없을 정도의 속도로 잿빛 기사는 레나를 향해 몸을 쏘아 냈다.
- 서걱!
검은 섬광이 뻗었고, 레나의 몸이 반으로 터져 나갔다.
심장이 있는 왼쪽이 먼저 바닥에 떨어지며 철퍽 소리를 냈다.
절단면으로 붉은 내장이 아무렇게 튀어나온 오른쪽이 십 미터 앞에 떨어졌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작게 벌린 그녀의 입이 보였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세상이 흔들렸다.
레나가 내게 했던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나는 뭔가에 홀린 둣, 반사적으로 그녀의 상태창을 열었다.
아무것도 뜨지 않는다.
이름도, 호감도도, 시나리오 완료캐릭터라는 설명도 뜨지 않는다.
당연한 즉사였다.
[ai/in ? p 7? v k crcoar rj.!]
- 쌔앵!
비행 중인 잿빛 기사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어 내게 던진 순간.
공간이 어둡고 축축한 부정형으로 뒤틀렸다.
상하좌우는 물론, 미래와 과거도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속에서 서서히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