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생매장 (14)
‘레나는.
의식이 돌아왔다.
하지만 조각조각 갈린 풍경을 보니, 내가 정말 정신을 차린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기괴했다.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손은 전혀 엉뚱한 방향을 향했다.
오른쪽 같기도 했고,왼쪽 같기도
했으며, 손이 거꾸로 팔 안쪽으로 말려드는 것 같기도 했다.
모든 방향이 낯설었다.
뒤틀어진 공간은 관습적인 방향 감각을 강렬히 거부하고 있었다.
‘앞’과 ‘뒤’라는 개념이 서로를 오해 했다.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개념은 완전히 부서진 틈새들 사이에 엉망 으로 끼어 있었다.
몸이 산산이 조각나서,서로 다른 곳에 있으며 방향을 느낀다면 이런 감각이지 않을까.
‘레나.
내 무게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레나를 떠올렸다. 그녀가 죽는 모습으로 온 사방이 가득 메워졌다.
반으로 갈라져 아무렇게나 튀어 나왔던 붉은 내장들이 생생하다.
살짝 벌어졌던 입이 떠오른다.
마지막 한 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살해당했다.
잿빛 기사의 칼에 몸이 갈라지던 레나를 떠올리자 ‘앞’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는 한 발을 내디뎠다.
직각에 가깝게.
기괴한 각도로 허공을 디딘 듯한 감각이었다.
‘뒤’도 ‘좌우’도 없는 전진.
한 번 디딘 자리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철저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성공한 계획이라고 생각 했는데,기스-제-라이를 살해했던 잿빛 기사가 허공을 뚫고 나타나 모두를 죽여 버렸다.
도저히 누군지 알 수 없는 기사.
그는 대체 어디서,그리고 어째서 튀어나온 것일까.
정체와 목적 어느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강자들을,순식간에 살해하는 강함도 마찬가지다.
있을 수 없다.
아니,‘있어서는 안 될’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놈은 이번에도 나를 공격하지 못했다.
공격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스킬 레벨만 올랐을 뿐.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놈을 볼 때마다 이 견고한 세계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느낌이다.
일단. 레나의 시체를 수습하고
싶었다.
나는 계속 ‘앞’으로 향했다.
한참을 헤매다 보니 앞에 은은한 초록빛이 비쳐 오는 게 느껴졌다.
멍하니 그쪽을 향해 걸었다.
빛을 뿜으며 허공에 떠 있는 건 나냐우가 죽인 마법사의 시체였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우우우우옹!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포스 실드 Lv.l을 흡수합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강한 보호막을 생성합니다. 직접적인 물리 충격과 에너지 파장,마법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유용한 스킬입니다.
스킬 레벨이 올라감에 따라 방어 범위와 강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나냐우에게 목이 떨어진,마법사 알로히스가 산사태를 막으려 할 때 보여 주었던 권능이다.
무려 산 하나 분량의 흙이 통로로 쏟아지는 바람에 빛을 바랬지만.
물리 공격뿐만 아니라,마법까지
막을 수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는 엄청난 스킬이다.
포스 실드를 두른 채라면,갑옷 훼손에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싸울 수 있을 거다.
[포스 실드 Lv.2룰.]
[.Lv.3을 흡수합니다!]
실드를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조작 가능한 범위는 지혜 수치와 스킬 레벨에 비례합니다.
[•七.4를 흡수합니다!]
포스 실드에 중량을 실을 수 있게
됩니다. 무게 범위는 지혜 수치에 비례합니다.
“실드.”
일렁거리는 반투명한 방패가 몸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몸 전체를 보호해 주는 타워 쉴드 정도의 크기였다.
마법사 알로히스가 만든 것처럼 전방위를 보호해 주려면 레벨이 좀 더 높아야 할 듯하다.
알로히스를 내려다봤지만,화염 마법의 대가라는 녀석에게 의외로 더 뽑아낼
건 없었다.
정수 흡수 스킬의 효율은 급격히 낮아지고 있었다.
- 퍽.
반투명한 쉴드를 방패처럼 움직여 툭,치자 마법사의 시체가 저 멀리 날아갔다.
이런 식의 운용이라는 거군.
실드에 무게를 싣는다는 의미가 와닿았다.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 부응!
반투명한 실드를 생성하고 이리저리 허무하게 휘둘러도,공간은 여전히 기괴하게 뒤틀려 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공간을 한참 걸었다.
또 다른 초록색 빛이 보인다. 시체다.
스티글리츠.
얼굴에 십자 모양 흉터가 새겨진 무투가.
그의 잘린 팔과 목은 몸통에서 두어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나는 멍하니 손을 들었다.
‘앞’으로밖에 나아갈 수 없는 공간이다.
여기 두고 가면 다시 만날 기회 따위는 없다.
- 우우우우응.
초록색 빛이 몸에 홀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드리안 무투武閱 Lv.l(희귀)을
흡수했습니다!]
패시브 스킬입니다.
무기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음 효과가 부여됩니다.
공격력이 35% 상승합니다.
치명타 확률이 35% 상승합니다. 공격 속도가 30% 상승합니다.
패시브 격투기를 얻었다.
희귀 스킬이라는 메시지가 추가로 떠오른다.
고작 1레벨임에도 엄청난 증폭 효과다.
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페널티가 크긴 하지만,레벨을 높이다 보면 저기서 퍼센트가 점점 커지겠지.
충분히 성장시켜 볼 만한 스킬.
생각을 멍하니 홀려보내며 흡수를 계속했다.
[누적 타격 Lv.l을 홉수했습니다!]
무기를 사용할 경우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너는 이미 죽어 있다.’
상대의 신체에 차근차근 타격을 쌓아 넣습니다. 상대는 막고 있는 것처럼 착각할지 몰라도,마지막 순간에
손끝으로 톡 건드려도 몸이 부서져 내릴 상태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역시 맨손 스킬.
마지막 순간에 너는 이미 죽어 있다고 말하고 싶은 녀석이 좋아할 법한 스킬이다.
[기합 Lv.l을 흡수했습니다!]
큰 소리를 내어 주변의 기운을 몸에 강하게 끌어모읍니다.
레벨에 따라 방어력과 공격력이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기합 Lv.2를.]
[•七.3를 흡수했습니다!]
이제 소리는 생략해도 좋습니다.
다행히 이건 무기를 사용할 때도 적용되는 스킬이다.
나쁠 건 전혀 없고,당연하게도 전투력에 커다란 도움이 될 거다.
[힘 1을 홉수했습니다!]
[힘 1을.]
[•••흡수했습니다!]
‘이걸로 끝인가.’
스티글리츠의 몸에서는 더 이상 초록색 빛이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힘 스탯은 98에 도달했다.
이 정도의 흡수량이면 후작에게도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다.
상대가 이 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힘을 가진 젓빛 기사만 아니라면.
이 무투가는 그 누구를 상대로도 뒤지지 않고 당당히 겨뤘으리라. 나는 한참을 앞으로 걸어갔다.
아직 원근감도,방향감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지만.
슬슬 ‘앞’으로 걸어가는 건 상당히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는 속도를 냈다.
‘질주.’
- 팟!
부서진 공간을 발이 빠르게 디뎌 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상처 하나 없는 나냐우의〈낫〉이 허공에 떠 있었다.
깨지거나 긁히지도 않았다.
아무런 반항을 하지 못한 탓이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잿빛 기사에 의해 아작아작 씹어 먹힌 나냐우의 잔해를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동맥이 흐르는 곳은 대부분 물어뜯겨 있었고,강제로 뼈가 씹히고 ‘피’를 죄다 빨린 그녀는 난폭하게 도축된 고기의 모습이었다.
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나냐우는 초록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반이 넘게 뜯겨서 너덜너덜해진 목에서 빛이 홀러 들어왔다.
루-름을 모두 빨린 그녀지만 뿜는 빛은 그 누구보다 많았다.
나는 마치 의무처럼 그녀의 빛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지혜를 1 홉수했습니다.]
[민첩을 1 흡수했습니다.]
[민첩을.]
스랫 평균이 계속 올라간다.
[마도공학(희귀) Lv.l 을 홉수했 습니다!]
공학의 극은 마도와 닮아 있지요. 마도의 끝도 그러합니다. 그 둘의 결합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공학과 마도는 절대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 둘은 서로의 가장 좋은 보조자입니다.
- 서로의 힘을 증폭시키게 설계된 도구의 사용이 가능합니다.
마도공학.
〈사람의 흉내 내는 인형〉을 읽었을
때가 떠오른다.
지식만 있고 실제로 쓸 수는 없는 Lv.O 이지만, 그때도 마도공학을 홉수했었는데.
지금처럼.
머릿속에 완전히 새겨지는 느낌은 아니었다.
품에서 ‘저격기’를 빼 들었다.
그라스미어의 전당에서 꺼내 왔고, 아이작의 말대로 몇 부분을 눌러 줄였던 물건.
〈타이탄 전용 저격기지.〉
〈연합 의회 의원들이 파일럿으로
타고 다니는 거 말이야. 번외급 철인鐵人이라고 보면 된다.〉
아이작이 루-륨으로 작동한다고 말한 무기.
그 사용법이 기억처럼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홀러 들어왔다.
겉보기에는 그저 흔하고 차가운 쇠막대를 들어 앞을 겨눴다.
- 철컥,철컥!
동그란 부분을 누르고,가운데를 확 잡아당기자 잡기 좋은 손잡이와 트리거 역할의 스위치가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물론 이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 루-름이 없으니까.
마도공학의 지식이 홀러 들어오며 실험할 것도 없이 그걸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잡기 좋게 튀어나온 손잡이에는 일부러 휘갈겨 쓴 필기체로 다음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권리 양도〉
무기의 이름인 것 같다.
마도 공학 스킬을 얻었지만,무슨
센스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까지 알 수는 없다.
나는 흡수를 계속했다.
[고대어 Lv.l을 흡수했습니다.]
[고대어 Lv.3을.]
[룬어 Lv.l을 흡수했습니다.]
[Lv.3.]
[골동주의 Lv.l(희귀)을 홉수했 습니다!]
유물과 유적에 대한 탐사 능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진품과 가품을 별다른 지식 없이 직관적으로 구별합니다. 유물이나 유적을 발견할 때마다 큰 폭으로 경험치가 올라갑니다.
흥미로운 스킬이다.
경험치가 올라서 나쁠 건 당연히 없다.
유물이나 유적 가운데 쓸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
흉측하게 뜯겨진 나냐우의 시체에 어떤 주관도 갖지 않은 채 흡수를 계속했다.
죽은 나냐우는 내게 감상 따위는 갖지 않는다.
나도 그래야 한다.
[사신의 낫 마스터리(희귀) Lv.l을 홉수했습니다!]
낫은 무기로 쓰기에는 극단적으로 비효율적이고 어려운 무기입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아니죠.
낫 사용과 관련된 모든 페널티가
사라집니다.
‘영혼’을 가진 존재들에게 약간의 추가 데미지를 가합니다.
나냐우가 계속해서 뿜어내던 빛은 이제 사라졌다.
고개를 위로 돌려,그녀의 낫을 바라봤다.
- 파직!
낫을 쥐는 순간 강한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사용자 정의 무기입니다.]
[사용 권한을 강제로 취득하시겠 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공학 레벨이 너무 낮습니다.] [소유권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건 안 된다.
방금 취득한 스킬,〈골동주의〉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낫을 놓아둔 채 다시 ‘앞’으로 움직였다.
더 이상 빛은 없었다.
부서지고 왜곡된 공간밖에 보이지 않는다.
시간도 내게 등 돌려 앉은 것처럼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나는 가라앉고 떠오르면서 오직 알 수 있는 ‘앞’을 향해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