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생매장 (16)
두 번의 가을.
그 사이에 벌써 2년이나 지났다는 말이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거짓말 같지는 않다.
나는 아이작을 바라봤다.
듬성듬성 빠진 털.
금이 가 버린 부리.
아이작의 몸이 무척이나 고단했던
세월을 증거한다.
2년이 아니라 20년의 흔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헤어지기 전에 잔뜩 걸치고 있던 치렁치렁한 장신구는 전부 다 어디 팔아먹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2년 후라면 린트부름의 이야기를 하며 일깨워야 할 기스-제-라이도 이미 죽은 상태다.
제국의 침략 전쟁도 이미 시작해 버렸을 거고.
그라스미어 영주인 첸들러 녀석은 애벌레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루비아는. 어떻게 됐지?”
이를 악물었다.
내가 곁에 있어 주지 못한 사이에 2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기분 탓일지 몰라도,이 세계는 루비아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다.
직접 만들었다며 건넨,다른 것과 함께 삭아 없어져 버린 손수건이 떠오른다.
〈알고 싶은가?〉
당연하다.
반드시 알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운명을 듣고 어떤 충격에 휩싸일지 몰랐다.
하지만 이건 좋고 싫음의 문제는 아니다.
얼마나 힘겹던지 반드시 들어야 하는,저버릴 수 없는 의무였다.
의무가 사슬처럼 나를 얽어댔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은 침묵했다.
아무 말 없는 짧은 시간이 두렵게 느껴졌다.
저 멀리 산새 울음이 불길한 괘종 소리처럼 들릴 때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수도에 있는 T&T 거점들이 전부 다 털렸다.〉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고,트로핀 나냐우도 이미 살해당했다.
다 털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대부분이 살해당했고.〉
- 우드득.
뼈밖에 남지 않은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이번에도,실패-
〈•••루비아는 북쪽으로 끌려갔다.〉
“끌려갔다고? 그럼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건가?”
〈그래. 보아우드에 갇힌 장난감을 금방 죽여 버릴 거라면 처음부터
데려가질 않았을 테니까.〉
“보아. 우드라고?”
〈창백한 탑. 겨울요새라고 불리는 보아우드 연구소다.〉
연구소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어둡고 차가웠다.
진실을 듣기가 두려웠다.
〈루비아는 그곳에 실험체로 갇혀 있다. 일단 마법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테니 적어도 10년은 살아
있을 거다. ‘살아’는.〉
아이작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걸 네가 아는 루비아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뼈마디가 뻣뻣해진다.
어둡고 차가운 긴장감이 뼈와 뼈 사이로 축축하게 들어찬다.
루비아가. 실험체라고?
수없이 떠오르는 싫은 상상들을 억지로 지우고 죽인다.
부정. 부정. 부정.
계속 생각을 억지로 지워 댄 탓에 머리가 멍해져 버린다.
아이작의 진술이 이어졌다.
〈너희들이 벌인 ‘그 일’ 덕분에. 광범위한 숙청이 있었다. 이보트 후작을 비롯한 관련자들은 물론, 조금이라도 전쟁에 덜 적극적이던 녀석들은 다 쓸렸지.〉
“이보트. 후작.?”
전혀 엉뚱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몰랐나? 그 녀석이 황실 내부의 정보를 빼내어 T&T에 전달했던 것 같던데.〉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 녀석이 내부자였다니.
첫 만남 때, 캐빈 애슈턴이라는 이름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애슈턴과는 어떤 관계일까.
가짜 책을 줬다고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같은 편이었다니.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루비아는 왜. 끌려간 거냐.”
〈이보트 가문이 반역죄로 완전히 멸문滅門할 때,루비아도 묶였다. 다른 녀석들은 싹 살해당했는데, 루비아는 묘한 몇몇 증언들 때문에 악마숭배자의 혐의가 있다며.〉
“악마숭배라고?”
〈이보트 후작 영애의 티 파티에서 악마를 섬긴다는 발언을 했다던데. 자신을 지켜 주는 악마가 있다고.
네 이야기 아닌가?〉
“루비아는 그런. 그따위 발언은 하지 않았어.”
〈자극적인 이야기는 뭐든지 항상 부풀려지니까. 게다가 증언을 한 시셀이라는 아이가 종교재판관의 딸인 게 컸다.〉
루비아가 파티에서 했던 발언들이 떠올랐다.
인간이 아니라도 좋다고 했던 말. 그냥 안 보이면 초조하고,뭔가
자기와 이어져 있는 것 같다고 한 이야기들.
나에 대해서 한 말 때문에 그녀가 실험체가 됐다고 생각하자 정신이 무너질 것 같았다.
“고작 그딴 거 때문에.
〈그에 더해 몇몇 이적異績에 대한 증언들까지 추가되며 마법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끌었지.〉
루비아가 행한 이적들.
그런 거라고 해 봐야 전부 다 내가 슬쩍 했던 일이거나,나에 관련된
일들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특이한 걸 발견하면 실험부터 하고 싶어 하는 게 바로 마법사들이다.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심문 마법으로 증명됐고.〉
죽음은 적어도 출구다.
하지만 실험체라니.
이건 지나치다.
“루비아를. 왜 구하지 않았지? 이런 결계를 뚫고 날 구할 정도면, 루비아를. 구했어야지!”
터무니없는 억지.
말도 안 되는 비난이다.
아이작이 그녀를 구해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헛소리 말라며 차갑게 비웃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의외로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착잡한 느낌으로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고민했다.〉
“고민. 했다고?”
〈너를 구할지 그 아이를 구할지 고민했다. 둘 중 하나라도 구하러 움직이면,저들은 내 존재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할 거다.〉
〈운신이 더 힘들어지겠지. 게다가 사용할 수 있는 힘에 한계가 있다. 이 결계를 뚫느라 내가 흡수했던 루-륨을 전부 다 써 버린 상태다. 내가 그 아이를 구했더라면,너는 여기서 자기 자신조차 잊을 정도로
오랫동안 갇혀 있었을 거다.〉
아이작의 선택은 잘못되었다.
루비아를 구했어야 한다.
나는 그 안에서 어떻게 되든 상관 없었다.
안에서 자살했어도 좋다.
나는 다시 시작했을 거고.
이 세계선의 루비아는 아이작에게 구출된 채로 살아갔겠지.
하지만 그걸 몰랐다고 아이작을 원망할 수는 없다.
내가 회귀한다는 사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내가 아이작을 불신해서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구해야. 한다.”
루비아를 구한다.
죽더라도,그녀가 실험체로 잡힌 현실을 바꿔 놓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내게 손수건을 건넸던 루비아’를 이 세계선에 이대로 놓고 도망갈 생각은 결코 없다.
아이작은 착잡한 듯 말했다.
〈포기해라.〉
“그럴 수 없어. 네가 돕지 않아도 나 혼자 어떻게든 할 거다.”
〈후.〉
녀석이 양쪽으로 고개를 저었다.
〈못 한다. 모든 ‘탑’ 근처에는 높은 수준의 왜곡이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다. 지금까지 어떤 마법사들을 보아 왔는지는 모르겠지만,그런 자들이 아쥬라에는 수백이나 상주하고 있다. 그리고 탑의 주인들은 네가 상상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을 거다.〉
아이작의 말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나는 내가 경험해 본 잣대 하나를 들이댔다.
“검주들과 비교하면 어떻지?”
〈마치 그들과 싸워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절대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텐데.〉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어쨌건,지키는 싸움이냐 빼앗는 싸움이냐에 따라 다르다. 빼앗는 싸움일 때,탑주들은 훨씬 어려운 상대지. 검주들의 준비와 탑주들의 준비는 차원이 완전히 다르거든.〉
〈검주들의 준비는 스스로에 관한 것이지만,탑주들의 준비는 공간과 인과에 관한 것이다. 아무렇게나 길을 걷다 싸운다면 분명히 검주의 손을 들어 줘야겠지. 하나 지키는
싸옴이라면 열이면 열. 백에 아흔 여덟은 탑주들이 이긴다.〉
가장 많이 마주쳤던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를 상상했다.
아이작의 말이 아득하게 들린다.
“그렇게까지 심한 차이가 난다는 거냐.”
〈중립을 띠는 공간을 상상해라. 지금 네가 있는 이 숲 같은 곳이 어느 정도 그렇겠지.〉
“그래서?”
〈여기에서 한쪽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는 중력과,우연과,마찰력을 떠올려 봐라. 아니,떠올릴 수 있는 건 죄다 상상해라. 단순한 트랩의 차원이 아니라. 아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자들이 왜.”
〈뭐? 말해 봐라.〉
“왜 북쪽에만 머물러 있는 거지?”
순찰 중인 가짜 황제를 호위하다 기스-제-라이에게 죽은 마법사들.
루-름 수송에 동참하다 나냐우와 스티글리츠에게 죽은 마법사들.
아이작의 말이 사실이라면,이런 녀석들은 탑주와는 비교할 수 없이 떨어지는 수준이다.
〈그물을 잘 치는 거미는 거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법이다. 치면 칠수록 거기에 얽매이게 되겠지. 그물을 촘촘하고 섬세하게 칠 수 있을수록 더욱더 그렇다.〉
“수도에 파견되거나 밖으로 돌아 다니지 않고,아쥬라에 머무르는 녀석들이 ‘진짜’라는 거냐?”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설명했으니. ‘창백한 탑’을 공격하겠다는 어리광은 이제 슬슬 그만 부리도록 해라.〉
“.그럴 수는 없다.”
〈뭐야? 이런 기초적인 말귀도 못 알아먹은 거냐? 너 같은 녀석이 열, 스물이 넘게 있어도 안 된다. 아니.
서른 넘게 있어도 아쥬라의 탑들을 공략할 수는 없어.〉
“그 이상 강해지면 되겠지.”
〈•••어떻게?〉
아이작이 황당하다는 듯 날 보고 물었다.
부리를 올려 날 보고 묻는 어조가 미묘하다.
그 아래에 옅게 깔린,희미하게 들뜬 기색이 느껴진다.
2년.
아쥬라의 탑에 갇힌 루비아.
이건 녀석의 함정인지도 모른다.
나를 자극해서 어떤 비밀을 알아 내려는.
하지만 함정이라면 걸려 준다. 놈에게 이용당하지 않는 것보다, 루비아를 어떻게든 구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나는. 창천의 구멍을 본다.”
<.〉
제발 더 말하라는 둣 녀석이 나를
간절히 노려봤다.
이제 와서 뻘 건 없었다.
“누군가를 죽이면 그 자체만으로 성장한다. 강한 녀석을 죽일수록, 더 많이 죽일수록 보상처럼 바로 분배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게 허공에 뜨지.”
아이작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다.
“다른 노력은 필요 없다. 살해가 성장이다. 강한 자들의 시체에서는 힘 자체를 홉수할 수 있다. 모두 허공에 표시된다. 그게 네가 말한 창천의 구멍이라는 거겠지.”
여전히 아이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부리조차 부딪치지 못한다.
이미 깨닫고 있었다.
나와,이 세계의 다른 녀석들은 분명히 다르다.
아이작이나,유령들이나,마법사나 다른 기사들 누구와도 다르다.
그들은 결코 나와 같은 방식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상태창을 보지 못하고,이런 식의 조건을 적용받지 않는다.
이건 압도적인 특혜다.
활용 방법은 서서히 감이 잡히고
있다.
- 따악.
생각을 정리한 걸까.
아이작은 몹시 느릿하게 부리를 부딪쳤다. 그리고,날개를 앞쪽으로 접고 내게 말을 걸었다.
〈그 여자애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겠냐?〉
답은 간단하다.
“물론이지.”
아이작이 씩 웃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