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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36화 (236/458)

237화 아무 대가 없이 ⑴

〈그럼. 아주 좋은 방법이 있지. 어쩌면 루비아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쥬라의 탑에서 빼내 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방법이 대체 뭐지?”

나는 녀석을 바라보고 절박하게 물었다.

아이작이 흐뭇하다는 듯 엉뚱한 소리를 했다.

〈탑에 갇힌 사령술사를 어떻게든 구하려는 해골병사라. 이거 정말 감동적인데.〉

“대답해 줘.”

〈순서를 좀 바꿔서 말해야겠군. 난입해라.〉

“난입. 이라고?”

- 스옥.

아이작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땅바닥에 줄 몇 가닥을 숙숙 그었다.

〈군대의 이동을 계속 관측했다. 열흘 뒤 달빛지대 교차로에서 큰 회전이 벌어질 거다. 엠버를 치는 제국군의 뒤를 치기 위해,연합의 철인 군단이 나타나지.〉

“철인. 군단이라고?”

〈그렇다. 초반 격돌이 시작되고, 얽혀서 난투가 벌어질 때 슬며시

끼어들어라. 격전지 주변에 작은 숲이 있다. 안개가 낄 때쯤 싸움이 벌어 지니 숨어 있다 나오면 된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모조리 다 죽이는 거다. 이대로 부딪친다면 백중지세. 서로 자기들이 조금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밀어 붙이다가 서로 전멸에 가까운 꼴을 당하게 될 거야. 이왕 전멸하는 거, 네 영양분이 되게 만들어라.〉

- 숙. 스윽.

- 콰직.

아이작은 바닥에 놓은 나뭇가지 몇 개를 옮기고,서로 겹치고,다시 발로 짓밟아 짓이겼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게. 양쪽의 군대인가?”

〈응.〉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넌 내가 한 것처럼,서로 부딪칠 때 양쪽의 전력을 다 깎아 내면 된다.〉

“네가 두 군대를 통솔할 수 있는 것처럼 거침없군. 지나친 자신감에 차 있는 거 아닌.

- 달그락.

나는 말을 멈춰야 했다. 아이작의 귀엽다는 둣이 태도가 역력히 느껴 졌다.

그 시선에는 나를 몹시 무안하게

만드는 수많은 체험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뒤늦게 상기했다.

눈앞의 우스꽝스런 이 까마귀가, 혼란기 제국의 절반을 지배했다는 사실을.

대체 자신의 교단과 함께 얼마나 많은 전장을 넘어왔을까.

나와 같이 단순한 소모품이 아닌, 전체를 조율하는 시선으로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르고 이겨 왔을까.

녀석이 군대를 돌렸던 건 전투에 패해서가 아니다.

여신들에게 저주받았기 때문.

실제 전투 실적으로 본다면, 오직 무패無敗를 이어 갔던 괴물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전술적인 관점에서라면, 내가 이러쿵저러쿵 말을 늘어놓을 상대는 아니겠지.

아이작은 피식 웃으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부 바쳐라.〉

“바치라고?”

〈네가 죽이는 인간들의 피를 모두

말파스에게 바쳐라.〉

아이작이 친절히 설명을 이었다.

레나와 함께했던 첫 번째 생.

푸르손의 추종자인 늙은 사슴이 했던 말이 겹쳐 떠올랐다.

‘인간은 전쟁을 일으킬 걸세. 우린 거기서 흐르는 피를,위대한 왕께 바치면 된다네.’

〈제사를 받은 말파스는 네게 힘을 빌려줄 거다. 이왕 악마라고 불릴 거라면 단순한 학살로는 아깝지. 인간의 생명은 자원이야. 충분히

활용할 필요가 있어.〉

사슴 아에자르의 말이 이번에도 겹쳐 떠올랐다.

‘함께하세. 자네도 힘을 가지게나. 세상을 뒤엎지는 못해도,강림을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힘 아닌가?’

그때는 거절했다.

패배할 광대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왕들이 패배하는 것도 어차피 십수 년 후의 일.

루비아를 구출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못 할 것도 없다.

“그럼. 마왕은 그 대가로 내게 뭘 요구하는 거지?”

〈응? 인간들의 피를 준다고 이미 말했잖아. 뭘 더 받아?〉

“그걸로 끝인가? 또 다른 제약이 있을 것 같은데.”

〈후후.〉

아이작이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어째서 악마 숭배를 금지한다고 생각하느냐?〉

“바쳐야 하는 게 지나치게 많기 때문인가?”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달콤하기 때문이지.〉

〈악마라는 건 그냥 후발 주자에게

붙는 이름일 뿐이다. 더 너그럽고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니,애초에 해 먹던 것들의 질시를 받는 거지.〉

〈게다가 난 말파스의 제사장이야. 이 세계에서 나만큼 그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놈은 없어. 손해 보는 계약은 절대 맺지 않아.〉

아이작의 상태창은 확인했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리고. 좀 더 확실한 경우를 상상해 볼까? 탑에 갇힌 루비아를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바로 ‘날개’를 가진 말파스다.〉

‘제사는 준비되어 있어. 공양받은 왕께서 강림하시면 인간은 끝일세.’

사슴 아에자르.

그의 기억을 떠올릴 때,아이작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내 말파스가 다른 마왕들보다도 먼저 이 세계에 강림하게 되면.〉

녀석은 그 상상만으로도 무척이나 뿌듯한 것 같았다.

〈문제는 전부 간단히 해결이지. 탑 꼭대기에 갇힌 루비아도 쉽게 태우고 올 수 있어. 그녀는 너를 가장 확실하게 도와줄 수 있다. 일단 강림만 된다면.〉

“.그게 그렇게 빠르게 되나?”

나는 미래를 안다.

마왕 강림까지는 앞으로 8년이다.

〈너랑 내가 빠르게 만들면 된다.〉

〈기대되지 않나? 어떤 마왕이든 한번 강림하고 나면,모든 종족이 거기 줄을 서기 바쁠 거다. 하지만 너는 선지자가 되는 거야! 그녀의 발톱 아래 고개 숙여 조아리는 게 아니라,그녀를 강림시킨 자로서 등에 타고 윤기 나는 검은 깃털을 쥘 영광을 누리게 된다. 나와 함께

말이지.〉

물론 그런 영광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의 말대로 마왕급이 직접 도와준다면,그게 루비아를 구하는 확실한 길임은 분명하다.

〈너라면 내가 그녀에게 자랑스레 소개해 줄 수 있지.〉

“원래. 너도 ‘강림’을 준비하고 있었나?”

〈물론이지. 이 전장도,그녀에게 주는 제사로 설계하려고 했는데. 말파스와 계약을 맺은 네가 직접 제물들을 죽이면,그녀는 널 정말 사랑하게 될 거야. 아낌없이 힘을 퍼다 줄 거라고.〉

“으음.”

〈동정하는 거야? 어차피 마왕이 강림하면 다 죽을 인간들이야. 네 손에 죽어서 나쁠 건 전혀 없다고. 마왕 강림 전에 죽여 주는 게 훨씬 자비로운 일인데. 왜,싫어?〉

동정은 하지 않는다.

그냥 ‘언젠가 질 것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약간은 기분이 묘할 뿐이다.

생각해 보면.

이미 내 몸에는 말파스의 인장이 있다.

그저 압도적이고 멀게만 느껴지던 마왕魔王들.

그중 하나와 가까워지는 경험도 굳이 나쁠 건 없으리라.

어차피 다른 선택지는 없다.

길게 고민하고,방법을 찾을 여유

따위는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루비아의 정신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을지 모른다.

“좋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계약하도록 하지.”

〈현명한 결정이야!〉

아이작은 무척 기뻐했다.

날개를 펼쳤다.

그러자,바람이 일어났다.

- 휘이이잉.!

바닥에서 솟아난 어둠과 바람이 나를 감쌌다.

물리력은 없었지만,여기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장막 건너에서 아이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바람을 타고 움직인다고 상상 해라. 실이 풀려나가는 것처럼.〉

흐린 경계가 느껴졌다.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장막 건너의 세계가 더 생생하게 와닿았다.

- 파지직.!

번개가 쳤다.

비바람이 거세게 울었다.

〈좋아. 계속 하늘을 나는 감각을 떠올려라. 혼자 나아•갈 지평선을. 까마귀가 보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잿빛 하늘의 한끝을 검은 깃털로 덮고 있는 까마귀가 보였다.

= 말파스인가.

〈그녀가 너를 바라볼 거다. 너도 그녀를 계속해서 바라봐라. 계속. ‘의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까마귀 근처에 백금 귀걸이를 한 남자가 나타났다.

휘어진 링부터 사용된 보석까지, 열 손가락에 전부 다른 반지를 낀 남자가 내 손목을 잡고 까마귀를

향해 날았다.

= 아이. 작?

〈그래. 나다.〉

저런 모습이었나.

조금 집중이 흐트러지자 녀석의 몸 절반이 연기처럼 흐려졌다.

〈시각화를 잘 유지하라고.〉

하지만 크게 타박받지는 않았다.

어차피 아이작이 만들어 낸 환상. 나는 적당히 보조만 맞출 뿐이다.

관념적으로 느껴지는 미친 폭풍과 구부러진 기압을 뚫으며 까마귀와 나란히 날았다.

〈년 그냥 뜻만 전해라. 네 살해를 말파스에게 바치겠다고. 회로까지 이미 다 새겨져 있는 데다. 내가 중재하니 그거면 충분하다.〉

= 바친. 다.

한순간 바람이 벚었다.

아이작이 만들어 낸 검은 장막이 걷혔다.

녀석은 조금 지친 기색으로 옆에 있는 상태였다.

“.어이. 괜찮은 거냐.”

상처투성이 까마귀 인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친 기색과는 달리 녀석은 실실 웃는 어조였다.

〈후후. 이제 됐다. 자잘한 일이 남았는데 그건 내가 하면 되고. 축하한다.〉

“뭘 축하한다는 거지?”

〈말파스가 널 특별히 좋게 봐준 모양이다. 무척 호의적으로 계약이 체결된 것 같다.〉

“그게 무슨.

〈쉽게 말하면 인간 하나를 죽여도 둘을 죽인 것처럼 대가를 내린다는 말이지. 천천히 직접 느껴 보도록 해라.〉

마왕과의 계약.

아이작이 중간에서 알아서 했다고

말하기에 일단 납득했지만,당장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는 지쳐 있는 아이작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몸 여러 군데 뚫린 상처가 새삼 시선에 들어왔다.

“고맙다.”

〈당연. 응?〉

“결계에서 날 구해 주지 않았나.”

〈득큭. 아까는 루비아를 구하지 않았다고 징징거리더니. 나도 내 이득을

최대화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뿐이다.〉

“그래도.”

〈시끄러! 일단 달빛 지대로 가자. 제단을 만들어야 한다.〉

녀석이 말을 돌렸다.

아이작의 말을 따라,회전이 벌어 진다는 달빛 지대 교차로를 향해

사흘을 꼬박 걸었다.

그들이 이곳을 싸음터로 정한 건 아니라고 했지만,군대의 규모와 경로를 볼 때 틀림없다고 했다.

〈이곳밖에 없다.〉

아이작이 부리를 들어서 사방을 길게 한 번 가리켰다.

나도 따라 주위를 둘러봤다.

“지금은 조용한데 그래.”

짙은 안개 사이로 내리는 빗방울 소리,바스락거리는 늦여름 벌레들 울음소리만 무겁게 사방을 메웠다.

우는 벌레들 하나하나에겐 오늘이 생의 첫날이고 마지막 날일지도 몰랐다.

몇 개월 뒤면 마른 풀잎 사이로 다른 벌레들이 사각거리며 하루를 울다가 죽을 것이다.

난입과 학살의 현장으로는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여기도 내가 와 본 적이 있지. 그때보다 나무는 좀 줄었구나. 좋아. 군대가 오기 전 저 언덕에 숨어 있으면 된다. 끼어들기 가장 좋은 위치다.〉

“제단을 그려야 하지 않나?”

나는 산속을 지나다 마주친 제국 레인저의 창을 획획 휘둘렀다.

그러자 녀석은 실쭉 웃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말했다.

〈웬 녀석들이 온갖 사방에 이미 다 새겨 놨다. 암석에 지하에 숲에 아주 난리를 쳐 놨네.〉

〈제사 바치는 상대를,푸르손에서 말파스로 바꾸기만 하면 끝이다. 쉬엄쉬엄해도 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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