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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37화 (237/458)

238화 아무 대가 없이 (2)

〈여기다.〉

아이작은 나를 데리고 달빛지대 곳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제가 만든 제단처럼 민첩하게 표식들을 바로 바로 찾아냈다.

그가 가리킨 장소는 단 한 번도 허탕을 친 적이 없었다.

나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던 숨은 표식들이 아이작이 말한 곳만 가면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떻게 이걸 다 읽어 내는 거지?”

〈내가 좀 그렇다. 다음은.〉

- 첨벙!

땅을 파헤치다가,다음은 차가운 강물 아래로 들어갔다.

산길을 타고 내려오는 강바닥에도 문양이 새겨진 암석이 보였다.

아이작이 말한 부분을 긁어내고 다시 다른 문양을 새겼다.

바닥에 뭐가 새겨져 있건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강물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몇 번을 반복하고 밖으로 나가자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됐다.〉

“벌써 끝인가?”

물론 빨리 끝난다고 해서 불만이 있는 건 전혀 아니다.

다만 이 거대한 지역을,고작 이 정도의 표식을 새겨서 말파스의 제단으로 만든다는 사실이 좀처럼

와닿지 않았을 뿐이다.

〈왜,일 좀 편하게 하면 안 돼?〉

아이작이 툭툭 부리를 털었다.

〈이 세상이라는 건 최대한 편하게 살아야 되는 거라고. 아까 다 설명 했잖아. 이름만 바꾸면 돼. 푸르손 추종자들이 몇 개월 걸려서 힘들게 새겨 놨는데,최대한으로 써먹어 줘야 예의지.〉

“그런가.”

〈일단 가만히 숨어 있어.〉

그나저나.

이 제단을 만들어 준,T&T 내부 푸르손 추종자들은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궁금했다.

아이작의 말대로라면 T&T는 이미 2년 전에 망한 상황이다.

푸르손의 추종자들은 분명 전쟁을 찬성했던 것 같으니,나냐우 파와 별도로 황실의 토벌 대상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살아 있으니 이 정도로 큰 제단도 새길 수 있었겠지.

레나와 처음 만난 생애에서,나를 압도하던 놈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다시 만난다면 어떨까.

녀석들 가운데 하나인 슬라임은 이미 한 번 이겨 본 상태.

지금은 그때보다도 강해졌으니, 예전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레나를 데리고 넉넉히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레나는 이미 죽은 상태다.

얕은 여름의 강은 침묵 없이 계속 졸졸 흘렀다.

푸르손 일당이 갑자기 나타나서 제단을 망쳐 놓은 책임을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비아에 대한 압도적인 걱정이 워낙 나를 짓누르는 탓인지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타나면 싸워 죽이면 그만이다. 오히려 내가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 한번 실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제단을 망친 책임을 물으러 오는 푸르손의 추종자들은 없었다.

다른 곳에 제단을 만드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나는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어이. 제단에 대해서 왜 이렇게 관심이 없냐? 마왕에 대해서 딱히 궁금한 거 없어? 뭔 의욕이 이렇게 없어?〉

가만히 있자 아이작이 나를 자꾸 쿡쿡 찔러 왔다.

“.루비아를 구하는 일에 관계된

일인가?”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연관된 거 아니겠냐? 내 가르침만 들을 수 있다면 몸도 마음도 바칠 놈들이 고금을 통틀어 수두룩한데. 나한테 반응을 좀 해 보란 말이야.〉

“가르쳐 주면 고맙겠군.”

〈이거 완전.〉

아이작은 투덜대면서도 이런저런 지식을 나에게 쏟아붓는 것처럼

전수했다.

〈회전이란 말이지.〉

지휘관으로서 알아야 할 병종에 대한 것까지 가르쳤다.

“어차피 군대 따위를 운용할 일은 없을 텐데. 게다가 마법사나 검주 같은 존재들에 의해 한 번에 뒤집하는 게 회전 아닌가? 전술 따위를 뭐 하러.”

- 깡!

아이작이 부리로 강하게 정강이를

쪼았다.

〈멍청한 소리. 단신으로 전세에 영향을 끼칠 만한 인간은 백만 명 가운데 한 명 정도밖에 없다.〉

〈아쥬라에 처박힌 마법사들까지 합해서 그런 숫자야. 전쟁의 9할은 그런 녀석들 없이 벌어지고 있어.〉

“•••그런가.”

일단 잠자코 강의를 듣기로 했다.

사흘이 지났을 때였다.

- 쿠르릉. 쿵. 쿵. 철컥.

촉촉한 여름 들판을 짓밟는 기계 소리가 들려왔다.

안개는 자욱했지만 기계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몇 기가 어느 방향 으로 움직이는지 모두 다 느낄 수 있었다.

— 쿵. ^

열 기 정도의 직립 보행 기계는 주변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홀로 안개가 끼어 있지 않은 지역 이었다.

아래쪽에는 백에서 이백 정도로 이뤄진 부대들이 강과 작은 숲을 따라 길게 주둔했다.

도합 이천 정도.

나는 언덕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것들이. 철인인가?”

〈그렇다. 이 전장에서 가장 강한 녀석들이지. 네 개입이 없다면.

근소한 차이로 저 연합군이 이기는 이유가 될 거다.〉

기계들을 관찰하기 위해 조금 더 언덕에 가까이 갔다.

도합 열 기.

대략 3미터에서 4미터 정도 되는 높이의 인간형 기계들이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몸을 풀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철인’들은,골렘이나 기계인형이라기보다 일종의 거대한 갑옷처럼 느껴졌다.

조종하는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손가락이나 다리,팔의 움직임이

인간의 그것과 무척 닮아 있었다.

안에 있는 조종사의 존재가 몹시 생생하게 느껴졌다.

- 위이이잉.

열 기의 기계 인간들은 그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빠르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적어도 삼십 센티는 되어 보이는 두꺼운 철갑을 생각할 때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의 효율이었다.

꼭 이족 보행을 할 필요도 없이, 발아래에 달린 바퀴로 미끄러지는

이동까지 가능한 듯했다.

〈쯧쯧. 발전이라는 게 없다니.〉

가볍게 몸을 푸는 기계들을 보고 아이작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 발전이라고?

〈마도학도 공학도 다 퇴화했다. 저딴 허접한 툴에다,동력 엔진도 완전히 쓰레기 같은 걸 쓰다니.〉

= 위용은 제법 대단한데.

〈그보다 안에 있는 것들이 사실 더 문제다. 기껏 탑승했으면서도 조종을 저렇게밖에 못 하나.>

꽤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듯한데 아이작은 혹평을 이어 갔다.

나는 칼을 쥐고 눈앞의 녀석들을 상대하는 상상을 했다.

일단 철갑 자체가 무척 두꺼웠다.

기사의 풀 플레이트 아머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평균적으로 삼십 센티.

적어도 백배에서 이백 배 정도는 두꺼워 보인다.

누르기만 해도 무게에 짓이겨져서 그대로 죽어 버릴 거 같은데.

쉽게 베어 낼 자신은 없다.

전장에서 저것들이 싸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군마를 타고 풀 플레이트를 입은 기사들이 나 같은 해골병사들에게 재앙이었다면,이건 그 기사들에게 재앙일 거 같은데.

“대령! 안개 때문에 아래가 전혀 안 보이질 않나!”

다른 녀석들보다 1미터 정도 큰 가운데 있던 철인이 소리쳤다.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웅웅대며 울려 퍼졌다.

〈저게 음성진동판이다.〉

아이작이 부리를 들어서 ‘철인’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엄청 구린 걸 쓰는군.〉

옆에 있던 철인이 대답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개 덕분에 적 기사단의 위력도 훨씬 줄어들 것으로 생각됩니다. 최고의 기술력으로 만든 철인이 열 기나 있으니 난전으로 돌입하면 승기는 압도적으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대령! 미리 날씨 파악을 했어야 한다고 문책하는 거요! 본 의원도 그런 기초적인 지식은 모두 알고 있다고.”

〈잘들 논다. 일단 내버려 두고. 모이고 서로 싸울 때 쓸어 주자고.〉

연합군 지휘부를 그대로 놓아두고 아래로 내려왔다.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먼저 아래쪽의 연합군을 치우고, 제국군 정예들로 놈들을 포위하는 그림을 그릴 거다.〉

〈그냥 날 따라다니면 되겠지만. 일단 알려는 주는 거다.〉

안개를 따라 계속 이동했다.

은신을 최대로 사용하면 대낮에도 들키지 않는다.

안개에 적당히 몸을 숨긴 채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창과 방패,허리에 찬 장검으로 무장한 병사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관찰했다.

자세한 숫자가 잡혔다.

〈이게 언제적 160명이냐. 편제는 도무지 바1 생각을 안 하는군.〉

아이작이 옆에서 투덜거렸다.

말 그대로 한 부대는 160명 정도.

안개를 뚫고 하나하나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기초적인 훈련은 받았는지 열은 제대로 맞추고 있고 보급품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긴장했냐?〉

= 글쎄.

〈저놈들 중에,네 칼을 한 합이라도 받을 수 있는 녀석은 한둘이 고작일 거다.〉

그런 긴장은 아니다.

묘하게 내 기억과 어긋나는 점이 느껴졌다.

10년에 걸친 전쟁은 결국 제국의 완승으로 끝난다.

그러나 여기는,제국과 연합의 원 국경에서도 오히려 제국 쪽으로 꽤 들어온 지점이다.

애벌레.

유령.

황실의 저력과,음침하고 치밀한 전쟁 준비를 여러 각도에서 접한 나는 언뜻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밀집해서 서 있는 병사들을 다시 한 번 보며 지나갔다.

피로가 서려 있는 얼굴이 많았고,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공포가 눈에 꽉 들어찬 인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창을 앞으로 내지르고,발굽에 짓밟히고,그래도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좌우 앞뒤로 백백한 밀집 대형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대열은 이룬 이상 개성 같은 건 모조리 사라진다. 어떻게든 돌아갈 수밖에 없는 톱니바퀴가 된다.

나는 안개들 너머 낯선 얼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발길을 돌렸다.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달빛지대 북쪽을 향해 걸어갔다.

투두두두 빠르게 들려오던 말발굽 소리는 안개 지역에 접어들자 점차 느려졌다.

기병대의 숫자는 약 삼백 정도로 보였다.

그 뒤를 따르는 보병의 숫자는 약 일천 정도.

연합군 보병의 절반이다.

점점 느려지는군.

〈꼭.〉

다가오는 기병들의 기색을 느끼는 내게 아이작이 말을 걸었다.

〈안개가 끼었다고 반드시 기병이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지휘관이 나 같은 자일 때는 더욱 그렇지.〉

또 자랑인가 싶었지만,당장 딱히 할 일도 없어 적당히 들어주었다.

너 같은.?

〈지형을 전부 외우고,적 보병의 움직임을 완벽히 예측하는 지휘관 말이다. 상대가 대비치 못한 측면 공격,후면 돌격을 무한정 퍼부을 수 있거든.〉

나는 아이작을 무시했다.

다가오는 기병대의 모습에 좀 더 집중했다.

안개에 섞여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만드는 건 서로 다른 표정을 가진

하나하나의 인간과 말들이었다.

나는 내가 죽일 인간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말고삐를 느슨히 쥔 남자는 갈증 나는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말 머리를 나란히 하는 남자는 목욕이나 하고 싶다고 말을 받았다.

투구가 슬쩍 비뜰어진 남자는 푸, 하고 한숨만 쉬었다.

가까워지자 땀이 말라붙은 피부가 보였다.

어쨌거나 적을 죽이고 싶다거나,

영광을 누리고 싶다거나 하는 말을 하는 인간은 의외로 드물었다.

그 뒤에 따라오는 보병들은 더욱 그러했다.

가장 뚜렷하고 보편적으로 읽히는 것은 피로감이었다.

행군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그들의 발에 채여 부서지는 흙덩이를 닮아 있었다.

은신 스킬을 최대한 발휘한 채로 곁에서 그들을 관찰했다.

하나하나의 사고와 감정이 나에게 던져지고 있었다.

나는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삶의 기록을 나에게 통합한다.

이 인간들은 모두 나에게 하나의 사냥감.

허공에 뜬 푸른 창에서 나타나는, 거대한 ‘경험치’ 제공 무리다.

- 다그닥. 다그닥.

안갯속에 몸을 숨긴 채로 제국군 기병대의 옆을 따라갔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고,아무도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40기씩 일곱으로 나눈다. 적진을 정찰한 뒤.

지휘관이 명령을 내렸다.

〈좀 지루해지겠군. 그래도 노출을 최소화시켜야 하니. 적어도 절반 정도는 죽은 다음에 뛰어들어라. 안전이 최고다. 한 시간은 지나고 나서.〉

아이작의 말이 왠지 크게 와닿지 않았다.

제국군에 섞여 걷는 전장이 왠지 익숙하다.

한 시간이라.

그 정도를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우측에 가까이 있는 궁병 부대가 느껴진다.

70미터.

60—.

50.

‘질풍.’

‘더블 캐스팅 ‘질풍.,

- 휘이이이이잉!

“뭐,뭐야?”

“웬 강풍이 갑자기.!”

“안개가 걷혔습니다!”

우측에 자리 잡은 연합군 궁수 부대와 제국군 기병대 사이의 안개가 반 이상 사라졌다.

적의 모습이 뚜렷하고 분명하게 보이는 상황.

- 피비비비빗!

무수한 화살들이 기병대 우측을 향해 날아온다.

갑자기 드러난 적을 향해 반쯤은 패닉에 빠져 쏘아 댄 화살.

유효 타격은 많지 않았다.

〈너 이 자식이.!>

아이작이 내가 한 짓을 보고 당황 한다.

“도,돌격! 천우의 기회다!”

상황 파악이 느리지는 않다.

기병 지휘관은 반색을 하고 돌격 명령을 내렸다.

- 투두두두두두!

막 쪼개려던 기병이 한 덩어리가 되어 막 두 번째 사격을 준비하는 궁수 부대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제국군에게 그렇게 친절한 짓을 한 것만은 아니다.

궁병대의 좌측. 그리고 우측.

“궁병대를 보호하라!”

안갯속에 멍하니 앞만 보고 있던 창병 네 부대가 밀집 대형 방향을 옆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 투두두두!

나는 최후방 제국군 기병 하나를 살해한 뒤 말에 올라탔다.

〈야 이 새끼야.!>

= 따라올 거면 따라와라.

여기는 제단.

나는 첫 번째 제사를 조금 일찍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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