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아무 대가 없이 ⑷
〈졸았냐?〉
아이작이 갑작스럽게 물었다.
〈졸았잖아. 죽을까 봐.〉
부정할 생각은 없다.
여기서 끝날까 봐 두려워진 사실이다.
푸르손의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느꼈던 강렬한 압박감.
뭐가 뭔지 파악할 사이조차 없이 슬라임에게 두개골이 녹아서 죽은 일이 떠오른다.
이 세계의 루비아는 북쪽의 탑에 실험체로 갇혀 있다.
그녀를 구하지 못한 채 여기에서 무너지는 건 곤란하다.
아이작이 주위를 돌며 사방에서 킥킥거렸다.
〈고작 저런 것들을 마주치고 부담 느끼면서 엠버에 관심을 가지냐?〉
아이작은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거기서 노는 건,이딴 작은 제단 멧는 거랑 비교도 안 된다고.〉
가겠다고 이야기한 적도 없는데. 하지만 관심을 가진 건 사실이다.
정수를 빼앗을 수 있는 강자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을 테니.
아이작은 내 심리의 결을 빠르게 읽어 버리는 것 같다.
나는 파악하기 쉬운 타입일지도 모른다.
레나도,루비아도 내 생각을 금방 파악했으니까.
- 휘익!
한 번 두꺼운 철판을 쑤셨던 칼은 멀리 던져 버린다.
주인 잃은 장검 한 자루를 새로 주웠다.
검은 기운이 검신에서 일렁이며 뿜어져 나왔다.
깊고 서늘한 어둠이 푸른 하늘을 천천히 물들이는 것 같았다.
푸르손의 추종자들은 인간의 피로 질퍽한 땅을 천천히 걸어왔다.
기껏 경직된 시체들이 발에 밟혀 자세를 바꾼다.
스물 정도의 녀석들이 포위망을 형성했다.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지 않으려면 빠르게 도망가야 하나?
이미 그러기도 늦어 보였지만.
- 퍼득!
울긋불긋한 날개를 가진 하피는 그냥 기동성만 뛰어난 건 아닌 것 같았다.
구부정한 자세로 나뭇가지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하피의 팔뚝과 허벅지는 인간이 아니라 곰의 그것 처럼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다.
“감히. 제단을.
같은 말을 외치는 목소리도 점차 갈라졌다.
세로로 수축된 동공을 깜빡이며 상반신도 인간의 형태를 버린 뱀이 가까이 다가왔다. 뱀이 붉은 혀를 빠르게 날름거렸다.
오던 길에 잡아먹기라도 했는지, 입은 다물고 혀만 날름거렸는데도 인간의 피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전쟁이라 그런가? 어지간히 잘 먹고 다니는 거 같네.〉
아이작은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대비를 해 놓았는지도 모른다. 사막의 거북이,와들루스 때처럼 결정적일 때 알아서 해결할 계획이 있을지도 모르지.
조금은 안심이 됐다.
그래도 도망은 가게 해 주겠지.
나무 위에 앉은 하피는 날카로운 발톱을 위협적으로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선택해라.”
“뭘. 선택하라는 거지?”
“제단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든지, 아니면 으스러져 죽어라.”
〈설마 제단을 그리는 능력도 없는 놈들인가?〉
자신을 제국 3본부장이라고 말한 사슴 아에자르가 떠오른다.
어쩌면 녀석 정도만 이런 제단을 그릴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뿔은 안 잘리고 잘 있으려나.
“.아에자르는 잘 있나? 브로디. 발도프는?”
브로디 발도프.
늑대인간의 이름이다.
회색빛 털 위로 짙게 피어오르던 새카만 아지랑이,손톱과 이빨에 서린 누구보다 강렬한 검은 기운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그 두 녀석이 가장 강해 보였다.
지금 나타난 무리에는 섞여 있지 않다.
슬라임도. 보이지 않고.
그나마 다행인가.
하피가 흠칫했다.
“네가 그들을 어떻게 아는 거지?”
지켜보던 뱀이 쩌억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하나가 칼 한 자루에 필적하는 커다란 독니가 드러났다.
저 녀석도, 전에는 보는 것만으로 몸이 굳는 느낌을 받았는데.
“현혹되지 마! 일단 놈의 뼈부터 다 으스러뜨려 놓고 생각하자!”
왠지 녀석 쪽이 더 긴장하고 있는 기분이다.
- 우지끈!
거대한 뱀이 아름드리나무들을 수수깡처럼 부러뜨리며 덮쳐 왔다.
활짝 벌린 끈적한 입에서 선홍색 피와 녹색 독액이 아래위로 주욱 늘어진다.
_ 스스스숙!
뱀이 주위를 빙빙 돌았다.
공격하기 위해 목을 슬쩍 움츠릴 때마다 그 움직임을 잡아서 칼을 겨눴다.
- 파밧!
나무 부스러기와 시체 파편들이 어지럽게 튀었지만 시야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뱀의 움직임이 그리 빠르지 않게 느껴졌다.
점점 오르던 회전 속도는,슬슬 한계에 도달했는지 어느 순간인가 정체되어 있었다.
- 쉬쉿!
혀를 날름거리며 나무 뒤를 계속 돌았지만,내가 계속해서 자세를 바꾸면서 견제하자 공격 타이밍을 전혀 못 잡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시시! 뭐 하는 거야?”
“닥쳐라.
- 퍼드득!
관전하던 하피의 등에서 커다란 날개가 다시 펼쳐졌다.
“에잇! 다들 덤벼!”
하피가 내 쪽을 향해 빠르고 낮게 날아오며 손톱을 휘둘렀다.
공격 경로를 예상해 거꾸로 칼을 강하게 휘둘렀다.
[참격 Lv.3 발동!]
[기합 Lv.3.]
[방어력과 공격력이.]
[사신의 낫 마스터리(희귀) Lv.l이 자동으로 적용됩니다. 영혼을 가진 존재들에게 추가 데미지를.]
전장에서 인간 천 명을 베며 스킬 중첩은 이미 자연스러워진 상태다.
- 툭.
“어어.?”
하피는 깔끔히 잘린 제 오른팔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끊어진 단면이 꿈틀거리며 세차게 피를 뿜어냈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회전하며 하피의 오른쪽 날개를 잘랐다.
커다란 날개가 아무 거리낌 없이 한 번에 잘렸다.
다시 한 발을 디뎌 녀석의 허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 서걱.
상황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그녀가 뒤로 급히 몸을 솟구쳤지만,이미
허리는 칼에 반 이상 잘려 있었다.
“키,키이이잇!”
하피는 고통과 충격에 싸인 표정으로 튀어나온 내장을 붙잡았다.
하지만 흘러나온 붉은 장기들은 엉망으로 엉키고 녹아내려 있었다. 베는 순간 집중해 발동한 흡수와 산성 스킬의 효과.
“고,공.!”
- 서걱!
다시 두 발을 디뎌 녀석의 심장에 칼을 꽂았다.
빼지 않은 채 그대로 박아 두고, 근처에 있는 다른 장검을 잡았다.
삼천 명이 죽은 전장.
칼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피는 눈을 뜬 채 서서 죽었다. 잠시 동안 기괴한 고요가 흘렀다.
아이작은 우습다는 듯이 킬킬대며 말을 걸었다.
〈이제 감이 좀 잡히냐?〉
〈대체 왜 재들한테 졸았던 건데? 네 마음대로 하면 돼!〉
= 저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너무 쉽게 물리치는 게 이상하다. 아이작의 결계일지도 모른다.
약화 결계라거나.
〈응? 뭔 소리야 대체? 아무것도 안 했는데?〉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라거나. .아이작이 그럴 놈은 아닌데.
어쨌건,이게 정말 저들이 지금 발휘할 수 있는 전력이라면.
먼저 쳐도 충분하다.
‘질주.’
- 팟!
하피와 싸우며 질주 스킬을 아예 쓰지도 않았다는 게 새삼 우습게 느껴졌다.
주변을 포위한 푸르손 추종자들의 눈가 근육이 썰룩거렸다.
‘나를. 놓쳤군.’
가볍게 칼을 휘둘러 한 명의 목을 한 번에 베어 냈다.
옆에 있던 세 명이 한 번에 창을 내질러 공격했지만 몸을 회전시켜 두 명의 팔을 잘랐다.
검은 피부의 오크는 빠르게 몸을 뒤로 랬지만 어깨에 칼이 반 이상 들어갔다.
“크아아앗!”
커다란 철제 방패를 앞장세우고 돌진하는 놈을 그대로 발로 찼다. 무투 스킬의 영향인지 녀석이 뒤로 이십 미터 넘게 날아가 나무에 부딪혔다.
이렇게 쉽다니.
그 순간 나무 위에서 거대한 뱀
머리가 떨어져 내렸다.
잠시 멈춘 순간을 노린 빠른 공격 이었지만 탐지 스킬에 전부 잡히고 있었다.
옆으로 슬쩍 몸을 빼며 창을 하나 집어 바닥에 거꾸로 꽂았다.
아래로 꽂힌 뱀의 머리가 창날에 쓸려 길게 비늘이 뜯겼다.
그대로 옆으로 몸을 돌려 강하게 칼을 내리쳤다.
통나무만 한 몸통에 손가락 한 마디 길이로 칼날이 비늘을 패며 초록색 피가 허공에 튀어 떨어졌다.
- 스스숙!
뱀은 비명도 지르지 않고,다시 공격해 오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빠르게 달아났다.
“도망.?”
죽어 가는 동료들을 놓아두고 저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황스러웠다.
〈재 어디 가냐?〉
빠르게 도망가던 뱀이 나무에서 떨어졌다.
고작 2미터 정도의 높이인데 수십 미터 높이에서 떨어진 것 같은 큰 충격음이 울렸다.
아시시라고 불린 뱀은 터무니없는 무게에 짓눌린 둣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꿈틀거렸다.
저번에 사도의 부스러기를 잠깐 붙잡았던 속박 주술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보다 상대가 약한지, 아니면 아이작이 강해졌는지 뱀의 반응은 훨씬 더 극적이었다.
묶인 게 아니라 바닥에 머리를 콱 박고 꼼짝을 하지 못했다.
나는 기절시킨 푸르손의 추종자, 검은 오크 둘을 끌고 간 뒤 뱀에게 물었다.
“T&T가 망하고. 너희는 어떻게 살아남았지? 뭘 하는 중이냐?”
“끗. 끄흐흑.
뱀이 눈을 깜빡였다.
세로로 수축되어 있던 눈동자가 스르르 풀렸다. 앞부분이 서서히 아무것도 입지 않은 인간 여자의 상반신으로 변했다.
목덜미에서 가슴 위쪽까지 방금
생겨난 긴 상처가 있었다.
뱀은 피 묻은 녹색 머리카락으로 가슴을 묘하게 부각시키며 말했다.
“그럼. 저를 살려 주실 건가요?”
“그럴지도.”
“2년 전 사건 때문에,원래 저희 제단이 부서졌어요. 그때 기반이 많이 약화됐죠.”
“2년 전 사건이라면.
“루-룸 탈취 시도요. 황실이 정말 이것저것 지독하게 잡았거든요.”
의외로 협조적이다.
= 아이작,힘 좀 풀지.
〈킥킥. 정말이냐?〉
= 정말.
푸르손의 추종자들.
그들의 행방에 대해 듣고 싶었다.
〈네가 원하면,난 당연히 그렇게 해 줘야지.〉
속박이 조금 풀린 듯 뱀이 여자의 몸을 한 상반신을 좀 더 세웠다.
“아앗. 정말 감사드려요.”
“아에자르는?”
“그래서. 아에자르가 힘을 써서 여기에 제단을 만들었던 거예요. 지금도 혼자 전장에 제단을 만들러 다니고 있고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쩌면 슬라임에 관한 이야기도 자연스레 들을 수 있겠지.
“브로디 발도프는. 자기 문제를 해결하러 다니고 있어요. 개인적인 신변에 관련된 건데.
“그게 뭐지?”
여자에게 한 발 더 다가간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까닿게 물들며, 다시 세로로 빠르게 수축했다.
- 카악!
여자의 입이 터무니없는 각도로 턱 끝까지 찢어졌다.
- 퀘!
뱀은 입에서 초록색 독을 뱉었다. 이때를 위해서 모아 왔는지 무척 진한 초록색이었다.
느리다.
뒤로 몸을 빼서 피한 뒤 자연스레 칼을 내리쳐 목을 잘라 버렸다.
잘린 머리가 저 혼자서 꿈틀대며 바닥에 피를 뿌리다 멈췄다.
- 치이익.
머리 부분의 피는 독성이 있는지 바닥을 녹이는 소리를 냈다.
뒤에서 독을 맞은 두 명의 오크는 바로 즉사한 상태였다.
아이작은 기껏 잡은 뱀이 죽은 게 조금도 아쉽지 않은 둣 킥킥거리며
즐거워했다.
〈캬. 아주 멋져! 어떻게 한 번에 인질 셋이 죽어 버렸냐? 응?〉
- 파득! 파드득!
아이작은 즐겁다는 듯 잘려 나간 뱀 머리를 들고 전장을 누볐다.
〈기념 비행이다!〉
한 바퀴 돌고는 곧 하피 시체를
움켜쥐고 나무 위를 빙빙 돌았다. 붉은 내장과 피가 후드득 아래로 떨어졌다.
비행을 마친 녀석이 다시 근처로 돌아와 어깨를 발톱으로 토닥였다.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솔직히 별로 들을 것도 없었을 거야.〉
“.알았다. 그런데 역시 네가 뭘 했던 거냐? 적들을 쉽게 죽일 수 있도록.
〈하긴 뭘 해! 네가 쓸데없이 과한 걱정을 했을 뿐이잖아. 정말 별거 아닌 녀석들이었다고.〉
녀석의 말대로 걱정했는데.
아이작이 끼어든 건 마지막 순간뿐 이었다.
〈전부 네 힘으로 해치운 거야.〉 정말일까.
처음 압박감을 느꼈던 건 예전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와 지금의 나 사이의 격차는 실로 아득하게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검주 레안드로 후작도 두 번이나 홉수했고,역대 최강의 네크로멘서인 기스-제-라이 역시 두 번이나 홉수한 데다가, T&T의 창립자 트로핀 나냐우도 흡수했다.
이 정도는 해야 될지도.
받자마자 사용해 봤던,말파스의 축복도 상상보다 더 놀라운 효능을 발휘했다.
전투력 전체의 상승.
나를 집어서 한 단계 위에 가져다 놓아준 듯하다.
스탯도 결국 하나의 기본 요소일 뿐이라는 게 느껴진다.
강함에 영향을 주는 건 생각보다 훨씬 많다.
아이작이 어깨를 다시 쿡쿡 존다.
〈그거 안 하냐? 그거.〉
“뭐?”
〈빨리 흡수해야 될 거 아니냐.〉
“.해야지.”
목이 잘려 나간 뱀과,반으로 잘린 하피에게서 미약하나마 초록빛이 쁨어지고 있다.
정수 홉수의 시간.
녀석들에게 손을 뻗었다.
- 띠링.!
연달아.
단정왕端正王, 푸르손의 교리를 홉수했다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영 쓸모없어 보이는 교리였지만. 레벨 3까지 흡수하자,대분지에서
본 조각들의 의미가 깨우쳐졌다.
‘그건 침윤浸潤. 마계에서 통치하는 영토를 뜻하는군.’
‘과거,현재,미래. 보물이라는 뜻인가.
[•"교리 Lv.4를 흡수했습니다!]
그 외의 스킬은 없었다.
교리만 잔뜩 흡수하고 시체에서 서서히 빛이 꺼진 탓에 허무함을 느낄 때였다.
- 띠링!
[스킬: 정수홉수 Lv.2의 숙련도가 상한선에 도달했습니다.]
뭐라고?
[에픽 스킬 보유자의 숫자가 정상 범위(1)로 확인되었습니다.]
[진화 프로세스 완료.]
[승급을 허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