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아무 대가 없이 (6)
사흘째.
- 취이이익,휙,취익!
반향은 없다.
고요하다.
탐지 스킬에 잡히는 것도 없다.
호기롭게 탐험에 나서긴 했지만, 산맥은 넓고 내 발음이 정확하다는 보장은 전혀 없으니까.
“이대로 될까?”
〈안 되면 하지 말까?〉
아이작은 나를 다그치지 않는다. 선택을 맡기면. 계속해서 해 나갈 수밖에 없다.
- 취이이익,휙,취익!
다시 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산을 걸었다.
[명상 Lv.2를.]
[집중 Lv.2를.]
두 스킬을 사용해서,다음에 쓰는 스킬의 효과를 증폭시킨다.
‘탐지.’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고블린 마법사를 생각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과거 이 이야기를 들은 건 네크론 신사회에 의해,심장에서 혈석을 채취당하는 고블린들을 구해 주고 난 뒤의 일이다.
슬라임의 의뢰에 의해서.
하지만 이번 생은 그쪽에 가지도 않았다.
아예 슬라임도 만난 적도 없고.
핏빛 사슴 고블린 부락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지금쯤은 다 죽거나,아니면 아직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나 좋을 대로 생각하면, 붐텅이 해 준 머드캐쉬 이야기에서 그가 고통 받는 동족을 생각한다는 말은 전혀 없었다.
- 투두두두 •
나뭇가지들이 빗방울을 받아치는 소리가 들렸다.
빗줄기는 곧바로 바닥에 디디지 못하고 몇 번씩 튕겨 흘러내렸다. 다시 밤이었다.
몇 번 고블린 소리를 내고 주위의 기척에 집중했다.
수 킬로미터를 뻗어 나가는 감각. 그때 였다.
커다란 그 원 끄트머리에,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뭔가가 잡혔다. 이리저리 헤매는 짐승이 아니다.
목적을 가지고 다가오는 분명한, 이질적이고 강렬한 하나의 존재.
환청 이겠지만.
비를 뚫고 다가오는 낮은 발자국 소리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정말 녀석일까.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발걸음이 절로 조금씩 빨라졌다.
꼭 호의적이지 않더라도 최소한 시험은 치르게 해 주지 않을까.
공간왜곡 아티팩트라는 건 분명 굉장한 쓸모가 있을 거다.
숨겨 놓고 절대 안 준다고 해도, 말을 섞어 보면 다음 생에 활용할
지식은 쌓이겠지.
심지어 머드캐쉬가 다짜고짜 나를 공격해 들어온다고 해도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웬만한 아쥬라의 마법사들도 이미 몇 차례 흡수해 놓은 상태니까.
〈뭐라도 찾았나 보지?〉
아이작이 나를 흘끗 내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숲에 들어오고 난 뒤,아이작은 이 일은 나에게 맡기겠다는 것처럼 별다른 말이 없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약간 설레 고개를 끄덕 였다.
탐지 스킬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만큼 아직 먼 거리지만.
무척 운이 좋다.
아직 광활한 동부 산맥의 십 분의 일도 채 돌아보지 않았는데.
어차피 끝없이 찾을 수는 없으니 이 주 정도만 투자해 보려 했는데, 고작 사흘째 발견한 것이다.
달빛이 내리는 산의 풍경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경계에 걸리는 기척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결계에 걸린 건 아니다.
풍경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고, 아이작도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다만 거리는 그대로.
머드캐쉬는 나와의 거리를 일부러 유지하고 있다.
- 팟!
조금 빨리도 걸어 보고,뛰어도 봤지만 거리는 계속 상대의 뜻대로 조정되고 있었다.
고블린 다리가 짧다고,일부러 배려해 살살 걸어 준 것도 아니다.
적당히 빠르게 뛰었는데도 거리는 여유롭게 유지되고 있다.
두 가지가 여기서 유추된다.
하나.
머드캐쉬는 이 거리에서도 나를 느낄 만큼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
패밀리어 따위를 근처에 놓아둔
것인지도 모르고.
둘.
머드캐쉬는 나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느긋하게 걸으면 느리게,빠르게 뛰면 거기 맞춰 상대가 움직인다. 어느새 숲의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고 녀석의 존재에만 탐지가 집중되고 있었다.
고블린 마법사 머드캐쉬.
이 녀석의 정체는 뭘까?
다시 밤이 되었다.
- 저박
이번에는 거리를 좁히려고 하지 않고 내 쪽에서 조금 벌려 보았다.
그러자 녀석도 천천히 나를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만만하고,꽤나 설레던 심경에 이제 희미한 불안이 조금씩 섞이기 시작했다. 종종걸음으로 빨리 걸어도 거리는 그대로였다.
뛰어도 마찬가지였다.
추격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은신 스킬을 써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에서 레나마저 속일 수 있는
스킬을 썼는데도 불구하고,무려 수 킬로나 떨어져 있는 머드캐쉬는 나를 제대로 쫓아오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밤이 되었을 때였다.
이제는 내가 녀석을 쫓고 있는지 녀석에게 쫓기고 있는지가 혼란스러 워지고 있었다.
슬슬 어떻게 할지를 정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흠.〉
아이작이 하늘을 흘끗 바라봤다.
점점 차오르는 상현上按을 끝에서 끝으로 한 번 차분히 훌어보더니 아이작이 내게 말했다.
〈그거,거리를 유지하고 있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아이작이 동부 산맥에 들어선 뒤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쫓아가야겠다.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상대를 따라잡아라. 나는. 위에서 알아서 가마.〉
그 정도까지?
- 파드득!
아이작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머드캐쉬가 호의를 갖고 있을지, 적의를 갖고 오고 있을지 모른다.
고블린 부족이 처참하게 죽은 걸 안다면,그 원흉을 나라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자기를 찾는 암호를 고문을 통해 알아냈다고 여길지도.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 달그락.
나는 전장에서 주운 장검을 고쳐 쥐었다.
두 자루를 줍고 한 자루는 등에 메어 놓은 상태였다.
어쨌건 만나 보자.
[질주 Lv.7을 발동합니다!]
[500%의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 [남은 시간 - 24:59]
- 파앗!
빗줄기가 비명을 질러대며 갑옷 사이사이를 날카롭게 베어 왔다.
- 쎄애앵!
[질풍 Lv.2를 발동합니다!]
2년 동안 결계 안에서,맨몸으로 마법을 쓰는 법을 조금 더 터득한 상태.
바람을 뒤쪽에서 불게 해서 순간순간 앞으로 빠르게 치고 나갔다.
갑작스런 폭주에 상대도 당황해 빨리 거리를 벌렸지만,어느 순간 속도가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한 장소에 머물러 있었다.
300미터.
200.
100.
50.
숲속에 솟아 있는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기척은 그 뒤에서 느껴졌다.
멀리서는 알지 못했는데,가까이 다가갈수록 작은 크기가 아닌 게 여실히 느껴졌다.
- 우드득.
나는 칼을 꽉 쥐고 다가갔다.
머드캐쉬가 여기 있다.
40미터.
다짜고짜 마법으로 덮쳐 올까?
30미터.
하지만 그럴 생각이었다면 거리를 벌린 상태에서 공격을 해야 옳다.
마법 공격을 퍼부을 생각이라면 이렇게 가까이 접근을 허용해서는 곤란하다.
20미터.
혹시 시험을 낼 생각일까?
10미터.
자기를 따라잡은 걸 시험이라고 하고 공간왜곡 주머니를 그냥 줄 가능성은 없을까?
그건 너무 갔나.
고블린 부족에 대해 물어 올까? 어쨌거나.
바위 앞으로 다가간 뒤,사흘간 내던 소리를 다시 반복했다.
“취.
- 파꽈•앙!
바위 뒤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순식간에 거리를 없앤 뒤 주먹으로 내 배를 쳤다.
바위 뒤에 숨어 있던 녀석이 내게 몸을 날리는 소리,주먹을 날리는 소리,갑옷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동시에 겹쳐 울렸다.
- 까강! 광! 쾅!
상대는 거대한 손으로 내 어깨를 꽉 잡은 뒤,다른 주먹으로 배와 가슴과 얼굴을 연달아 타격했다.
미처 검기를 두르지 못하고 처음 내민 칼은 첫 일격에 수수깡처럼 부러져 날아갔다.
순식간에 몇 대를 맞았는지 셀 수 조차 없었다.
- 파광!
전장에서 주웠던 새 갑옷은 이미 상대의 악력과 주먹에 종이처럼 다 찢어져 버렸다.
두 팔을 들어서 간신히 쇄도하는 주먹을 막아 냈지만 이번에는 발과 무릎이 양쪽에서 폭풍처럼 휘어
들어왔다.
일격에 쇠를 부러뜨리고 바위를 산산조각 낼 힘이었다.
몸이 잡힌 상태라 아예 맞아서 뒤 쪽으로 날아갈 수조차 없었다.
[주의! 체력이 80% 이하로 떨어졌 습니다!]
이대로라면 곤란하다.
‘결빙. 더블 캐스팅. 뇌전.’
간신히 마법을 응축한 손을 들어 쇠기둥 같은 상대의 두꺼운 팔을 잡았다.
- 파지지직!
하얗게 얼어붙은 팔을 타고 노란 뇌전이 번쩍거렸다.
“크윽
그나마 타격을 받았는지.
얕은 신음을 뱉어 내며 팔에 힘을 푸는 녀석의 뺨을 다른 쪽 손으로 후려갈겼다.
‘격발. 질풍.’
- 화르르!
주먹을 매개체로 끌어낸 바람과 불길의 힘이,3미터가 넘는 거대한 상대의 몸을 뒤로 날리며 태웠다.
2년 동안 결계에 갇혀서 수련한 거라곤 맨주먹으로 마법을 쓰는 것밖에 없었다.
칼이라는 매개체를 갖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예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뒤로 나가떨어졌던 상대는 다시 튕기듯 일어나 발톱으로 나를 휩쓸어 왔다.
- 쌔애앵!
회색 번개 같은 움직임.
붉은 눈동자가 마주치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다.
두 번째 보는 녀석이다.
사슴 아에자르와 함께 있던 늑대.
당연히,놈이 머드캐쉬의 변장일 가능성은 없다.
“역시. 강하군.
바위 뒤에서 튀어나온 웨어울프가 회색빛을 일렁이는 눈으로 날 보며 중얼거렸다.
3미터가 넘는 쇳덩이 같은 몸의 뒤에는 마치 그를 수호하는 것처럼 상현上按이 은은히 비치고 있었다.
“동료의. 복수를. 하러 왔다.”
달빛이 그의 손톱에서 회색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