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아무 대가 없이 (7)
- 스르록.
웨어울프의 발톱이 베고 지나간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눈앞에 보이는 절단면은 무척이나 깔끔했다.
검기로 날카롭게 베어 낸 것 같은 모양새였다.
발톱에 직접 닿지도 않은 부분인 것 같았는데.
놈의 앞발에 서린 회색빛 기운이 한층 더 신경 쓰였다.
- 과직.
웨어울프가 디딘 아름드리나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반쯤 꺾였다.
폭풍 같은 강렬한 도약으로 놈이 나를 덮쳐 왔다.
급히 발을 디뎌 옆으로 피했다.
- 쾅!
서 있던 위치의 나무 두 그루가 단번에 꺾여 나갈 때 부서진 칼을 옆으로 내질렀다.
- 크르르!
하지만 녀석은 검기가 서린 칼을 그대로 맨손으로 잡았다.
손에 힘을 줘,순간적으로 나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며 입을 벌려 물어뜯으려 했다.
눈앞에서 덮쳐 오는 공격에 칼을 놓고 몸을 뒤로 젖혔다.
미끄러지듯 아래로 지나가며 허리
에서 한 자루 남은 다른 칼을 뽑아 늑대를 향해 휘둘렀다.
목표는 심장.
- 팟!
하지만 늑대는 제 공격이 실패하자 마자 허공을 향해 튀어 올랐고, 그 속도와 높이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높았다.
칼에 스친 다리에서 새빨간 피가 흩뿌려졌다.
하지만 칼 한 자루를 버리고 만든 상처치고는 얕다.
피의 양은 적지 않았지만 제대로 걸리는 느낌은 없다.
그라스미어에서 가져왔던 대검을 오래 사용하다 보니 그만 그 길이에 익숙해져 버렸다.
수준 차이가 크게 나는 인간 병사 들을 상대로 할 때는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지만,이 정도 속도를 내는 적 앞에서는 간격을 제대로 다시 잡아야 했다.
‘집중.
피를 흘리는 녀석은 빼곡한 나무 사이로 숨어들어 갔다.
베어야 한다고 생각하자,그동안
별생각 없이 지나왔던 나무들이 유독 우글우글하게 느껴졌다.
‘추적.’
숲속에서도 녀석의 위치는 계속 빠르게 변했다.
상처를 입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속도였다.
오히려 어설프게 베어서 본능을 각성시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녀석은 빠르게 움직였다.
나무 위에 있는지,아래에 있는지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다.
아이작이 데려간 캐빈 애슈턴의 성지에서,다크 엘프에게 숲 적응
스킬을 흡수했었다.
하지만 발동되는 그 스킬이 숲은 상대의 영역이라고 경고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칼을 쥔 채 고요한 숲속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섣불리 파고들지 않고 앞을 향해 녀석에게 물었다.
“왜 동료들과 함께 오지 않았던 거지?”
상당한 강자다.
함께 왔다면,거기서 내가 위기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거냐?”
빼곡한 나무속에 숨은 늑대인간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찐지 짙은 안개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싸움이 만든 공터에 있고, 늑대는 무성한 숲속에 있었지만 달빛이 녀석에게만 환히 비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으로 이어진 피는 흥건했지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역시 들지 않았다.
- 휘이아
축축한 바람이 불었다.
자세를 살짝 틀 때 늑대가 뒤에서 뛰쳐나왔다.
몸을 돌려 칼을 휘둘렀다.
- 콰광!
발톱과 칼이 부딪쳤는데 기괴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 광!
회색빛 기운이 뭉친 발톱이 다시
검기 어린 칼에 적중했다.
무심코 늑대의 다리를 확인했다. 아까 베인 상처에서 흐르던 피는 이미 몇었고,상처도 모두 아물어 있었다.
저 정도면 설원 트롤에 지지 않는 회복력이 었다.
물론 속도와 힘은 트롤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 콰앙!
녀석의 발톱이 깨져 나가고 끝에 쩍쩍 금이 가고 있었는데도,그는
한순간에 연속 세 번을 칼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상처를 회복한다면.
지져 버리면 그만이다.
‘산성.’
- 치이익!
놈과 마주 보며 녹색 검기로 앞을 휘몰아쳤을 때,늑대인간은 다시 백백한 숲속으로 도망가 버렸다.
비슷한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다섯 번째는.
- 치이익!
내가 검기를 일으키자 놈은 잠시 싸우는 척만 하더니 다시 숲으로 빠져 도망갔다.
녀석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연달아 산성 검기를 일으킨 칼이 조금씩 부식되고 있었다.
전장에서 주운 칼을 내려다봤다. 제국 기병대 지휘관의 장검이다.
잘 버려진 칼이었고,충분히 명검
소리를 들을 만했다.
하지만 늑대가 습격해 올 때마다 검기를 일으키면 내구도가 언제 다 닳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검기를 일으키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 번의 격돌에 칼이 부러 지게 하고 싶지 않다면.
결계 속에서 사라진 대검의 존재가 무척 다시 아쉽게 느껴졌다.
- 달그락.
나는 거추장스럽게 남은 갑옷을 뜯듯이 찢어 버리고 칼 한 자루에
집중했다.
녀석은 단순히 속도만 빠르거나 힘만 센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강요하는 전투 센스가 몹시 탁월하다는 게 느껴졌다.
- 부응!
허공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싸우나? 늑대가 아니라 쥐새끼 같군.”
- 쏴■아•아”
대답은 없었다.
어설픈 도발 따위는 전혀 먹히지 않는 녀석이었다.
느껴지는 방향으로 일부러 팔을 늘어뜨리고 빈틈을 보였다.
그러나 나타나지 않았다.
부러진 발톱이라도 다듬은 뒤에 최적의 상태로 나타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탐지 거리 끝에서 조용히 나를 따라오고 있던 녀석.
유치한 도발에 넘어올 가능성은 역시 없다고 봐야 한다.
아예 몸을 나무에 기댔다.
조금 위험할 정도로 빈틈을 만든 자세였다.
하지만 한 번에 승부를 보려는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늑대인간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살짝 더 벌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무에 기대 가만히 서 있자,느릿 하게 차 가는 달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레 정도면. 만월인가.
‘서둘러라.’
문득 아이작이 달을 흘끗거리며 말하던 게 떠올랐다.
설마 그 이야기인가?
만월이 뜨는 밤,늑대는 폭력으로 세상을 일그러뜨릴 수 있다.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리는 대신 적어도 두 배는 강해진다.
확실히 푸르손에 제단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늑대가 지금보다 더 강해 보였다.
그때도 보름달이었지.
붉은 달 아래 폭주하려는 녀석을 아에자르나 다른 놈들도 겁냈던 것 같은데.
애초에 나를 최대한 멀리서 몰래 미행하면서,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보름달만 기다리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내가 빠르게 접근하니 어쩔 수 없이 지금 뛰쳐나온 거고.
머드캐쉬를 찾는답시고, 탐지를 최대한 활성화하지 않았다면 놈이 있는 줄도 모르고 당했겠지.
취이익거리면서 돌아다녔던 게 완전한 헛짓은 아니었을지도.
어쨌거나.
시간을 끌면 불리한 건 나다.
의도를 파악한 이상 거기 맞춰 줄 이유는 전혀 없다.
‘추적.’
‘질주.’
스킬을 최고 수준으로 발동하고 숲속을 빠르게 헤치고 들어갔다.
무리한 난입인 이상.
습격은 당연.
위쪽이 다.
10미터가 넘는 높은 나무 위에서 뚝 떨어지면서 공격하는 3미터짜리 늑대에게 칼을 들이댔다.
아까처럼 강하게 부딪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칼이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살짝 검기를 둘렀다.
‘흡착.’
- 탁!
발톱과 부딪치는 순간에 스킬을 발동했다.
회색 기운이 서린 흉포한 발톱이 빨아들이듯 칼에 잡혔다.
붉게 달아오른 웨어울프의 눈빛이 흔들렸다.
뭔가 다르다는 걸 깨달은 녀석이 곧바로 나를 패대기치고 도망가려 했지만,눈을 똑바로 보면서 연계 스킬을 발동했다.
‘공포.’
녀석은 아주 짧은 순간 멈칫했다.
높의 악령에게 공포를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더 짧은 찰나의 반응.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굳은 놈을 끌어당겨서 발로 턱을
올려 찼다.
- 빠악!
강렬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늑대 머리가 뒤로 재껴졌다.
인간이었으면 머리가 뜯겨서 나무 몇 개는 뚫고 날아갔을 텐데,실로 경이로운 목 근육이었다.
타격을 받기는 한 건지,녀석은 비틀거리면서 바닥을 굴러서 뒤로 도망가려고 했다.
녀석의 다리를 밟고 칼을 가슴에 찔러 넣었지만,밟힌 다리가 힘을
- 퍽!
두꺼운 나무에 등이 부딪혀 주욱 아래로 미끄러졌다.
중량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쫓는 쪽은 나였고,한자리에서 제대로 싸우면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칼은 이미 벌써부터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인적도 없는 빼곡한 숲속이다. 무기가 될 만한 걸 찾을 가능성은 없었다.
맨몸으로 부딪친다면
- 달그락.
승산이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살짝 긁기는 했나.
칼끝에 막 묻은 늑대의 피를 툭 털어 냈을 때였다.
- 파드득!
위에서 날아오고 있던 아이작이 근처에 내려앉았다.
〈넌 진짜. 저놈이랑 대련이라도 해 주고 있는 거냐?〉
다짜고짜 잔뜩 비꼬는 어조였다.
= 대련이라니?
〈아니면 뭐,재 놀리고 있냐?〉
= .놀리다니. 그런 적 없는데.
아이작이 기가 차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장난해? 만월도 아닌데 뭘 이리 다 맞아 주고 있어?>
= ♦••그게,그러니까.
〈계속 맨몸으로 푸르손의 가호에 부딪치다니! 그렇게까지 유리하게 계약을 체결해 줬는데,말파스의 힘은 전부 어디에 팔아먹었어?〉
녀석이 뭘 말하려는지 안다.
‘.까마귀의 힘.’
부인할 수만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오랜만의 대결에 흥미를 가졌던 건지도 모른다.
2년 동안 결계에 갇혀 있었다. 나와서 처음 끼어든 전장.
서로 격돌하는 인간의 군대 3천 가운데,내 칼을 두 번 받아 내던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무료한 학살 뒤.
달빛을 받은 웨어울프와의 싸움은 분명 나를 묘하게 고조시켰다. 추격과 추적.
서로 당장 보호해야 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의 자유로운 싸움.
어쩌면 이 싸움을 끌고 싶었던 건 웨어울프보다도 나였을지 모른다.
사실 말파스의 힘을 쓰는 데 약간 거부감도 있었다.
너무 달콤한 힘이다.
무엇보다 나를 ‘지켜보는’ 녀석의 존재가 의식된다.
아직 쓰지 않은 기술들도 있다.
마왕의 힘을 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루비아는 갇혀서 실험체로 고통 받고 있다.
장난하고 있냐는 아이작의 말이 분명히 옳았다.
‘암흑.’
[공격력이 25% 상승합니다.] [방어력이 40% 상승합니다.]
[‘까마귀의 날개’: 이동 속도가
15% 상승합니다.]
즉시 솟아난 검은 기운이 칼날에 크게 일렁거렸다.
‘참격.’
그어떤 준비 동작도 없이 칼을 앞으로 휘둘렀다.
새까만 기운이 칼과 몸을 감싸자
뒤로 몸을 돌렸다가 베는 따위의 동작이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 스르록.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나무 여덟 그루가 부러지는 소리조차도 없이 동시에 베여 나갔다.
감각의 확장.
훨씬 가벼운 몸이 숲속으로 튀어 나갔다.
의지만으로 발동되는 어둠의 힘은 정말 놀라웠다.
- 쎄앵!
다시 한 번 웨어울프가 몸 전체를 무게로 실어 공격해 들어왔다.
지금까지라면,형편없이 튕겨 나가 나무들을 부수면서 한참 뒹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부딪쳤다.
‘포스 실드.’
부딪치기 직전 일렁이는 반투명한 방패가 나를 중심으로 생겨났다.
루-름을 수송하는 알로히스라는 마법사에게 흡수한 스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