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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48화 (248/458)

249화 아무 대가 없이 (13)

“연합군 기갑여단 참전 의원 카린 크렉소르의 보좌관,루이 클로드라고 합니다.”

“현재. 전선의 지배자인 귀공과 가장 가까운 부대입니다. 저 셋을 잠시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침묵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푸른 단발의 여자는 칼을 쥔 나와 쓰러진 철인들을 번갈아 바라본다.

감지하지 못했다.

보여졌다.

어떤 의도로 나를 보고 있었는지, 어떤 능력의 상대일지 모른다.

검주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때가 떠오른다.

게다가.

여태까지의 누구와도 느낌이 다른 인간이다.

태도와 어법은 나무랄 데 없이 깍듯하다.

그러나 가만 볼수록 어떤 열기도, 습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가늠할 수 없는 데가 있다.

내가 검기를 누그러뜨리지 않자,

여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느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투 의지는 전혀 없습니다만. 지금까지의 전장들을 보고,방금 싸움까지 흠쳐본 결과. 싸워도 제가 상대는 안 될 겁니다. 혹시 이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여자는 회색망토를 들어 보였다. 생각해 보면 미묘하다.

상대의 존재를 언제부터 감지하기 시작했더라?

그녀가 앞에 ‘나타나서’가 아니라 걸어 나와 ‘망토를 벗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나타났다고 느낄 만큼 존재감을 못 느끼다가,갑작스레 시야에 들어와 당황했다.

그녀가 망토를 벗었을 때 확연히 존재감이 느껴졌다.

〈상당한 품목이군. 수백 년 동안 기술이라는 게 영 퇴화한 것만은 아니었나. 어떻게 귀한 걸 가지고 있다니. 크렉소르 가문인 데다가 이 정도 수완이라. 거래의 가치는 충분하겠어.〉

아이작은 어쩐지 조금 가라앉아 있는 투로 말했다.

- 알고 있는 장치냐?

〈자신의 존재를 주위와 동화시켜 숨겨 주는 장치. 철인 따위에게 적용되는 과학과는 격을 달리하는 옛 ‘유산’의 열화판. 복제품이다. 하지만 카피를 생산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거야. 어설프게 베끼려고 해도 상당한 이해가 필요 하다고?〉

- 어려운. 건가?

〈마도와 공학을 깊이 탐구한 끝에 힘겹게 따라할 수 있는 물건이지. ‘진짜’ 유산이라면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겠지만,흐음. 지금 네 녀석 감지는 복제품으로도 속일 수 있는 모양이다.〉

나보다 전투력 자체는 약했지만, 감지되지 않던 황실 유령들은.

저런 걸 단체로 가지고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따로 망토를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궁금한 건 많지만,일단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내가 허락해 주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 없다는 듯이 그 자리에 굳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됐다. 녀석들이나 확인해 봐라.”

- 끼기긱.

여자는 부서진 철인의 접합부를 간단히 뜯어냈다.

마치 노련한 정비사가 행하는 둣 자연스러운 분절.

몇 차례의 손짓에,원래 떨어져 있던 것처럼 따로 놓이는 부품들은 어쩐지 함께 붙어 있을 때보다도 정연해 보였다.

〈상당한 실력이군.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저런 처리라.〉

정연하지 않은 것은 피와 뇌수를 흘리며 눈을 부릅뜬 시체들의 표정 뿐이었다.

단발의 여자는 이미 거대한 강철 기계 세 구의 해체를 모두 마치고 뭔가를 손에 들었다.

익숙한 은빛 액체가 출렁거리는 반투명한 플라스크.

긴 주둥이가 서넛 달려 있는 묘한 유리병은 여자의 주먹보다 크기가 작았다.

그나마 유리병 전체 삼 분의 일도 채워지지 않은 상태.

“루-륨 회수인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 생각보다 적은데?

〈웬만한 녀석들은 있는 걸 대부분 그대로 쓴다고. 사치스럽게 ‘소모’ 따위는 하지 않으니까.〉

기존의 규격대로 사용,무리하지 않으면 이 은빛 마력액은 줄어들지 않는다.

〈아마 무리하는 법도 몰랐겠지.〉

아이작이 해체된 세 구의 철인을 훌어보며 말했다.

루-룸은,변혁의 질료로 쓰일 때 비로소 기화한다.

플라스크에 남겨진 액체.

죽음과 마주친 순간에조차 이들은 변혁을 이뤄내지 못했다.

마지막 한 호흡도,선명하게 난 기존의 길을 따라갔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 황실이 가지고 있는 루-륨은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 아닌가 싶었다.

플라스크를 닫아 품에 넣은 여자는 마지막으로 철인 안쪽에 붙은 작은 휘장을 가볍게 뜯어내 손에 쥐고 흔 들었다.

날개를 편 올빼미가 나무를 활짝 감싸는 검은 문장이었다.

〈이거 상황이 너무 전형적인데?〉

뭐가 전형적이냐고 묻기도 전에, 루이라는 이름의 여자도 입을 열었다.

“저희 의원님이 공을 세우는 걸 시기하는 무리가 실례를 저지른 것 같군요. 이들은 저희 자유연합. 크렉소르 가문의 가드들입니다.”

“네 주인도 크렉소르 가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하나로 뭉치기에는

너무 강한 가문이라서 말입니다.”

아이작 말대로,전형적인 내분이라는 얘기.

죄송하다기엔 전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사과였지만.

지금은 사과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용건은 뭐지?”

이미 상대도 나도 알고 있다.

애초에 기다리던 녀석들이었고, 심지어 엉뚱한 것들에게 손 흔드는 모습까지 보여 버렸다.

“손을 잡고 싶습니다.”

어차피 예정된 말이다.

“제국군을 치는 게 목적이라면,

저희가 더 효율적으로,더 편하게 활동하실 수 있도록 모든 걸 지원 하겠습니다.”

그때.

멀리서 브로디 발도프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도망가는 자들을 모두 사냥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잠깐. 금방 돌아오지.”

〈야! 어디 가! 같이 가!〉

‘질주.’

곧 루이 클로드의 시야를 벗어나, 달려오는 웨어울프를 막아섰다.

“크르르. 무슨 일이. 있나.?”

내장을 끊어낸 손발톱에 말라붙지 않은 피가 흥건하다.

‘인간’ 형태일 때 지겨울 정도로 말이 많은 브로디 발도프는,신장 3미터가 넘는 웨어울프로 변하면 그 자리를 충격적인 폭력으로 메워 버린다.

물론 폭력의 대상은 한 종種.

인간이 모두 사라져 주기만 하면 안온한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듯, 늑대는 그들을 향해 몸을 던지는 일을

망설이지 않았다.

일방적인 계약으로 묶인 사이이긴 하지만.

미리 말은 해 줘야겠지.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제국을 치기 위해,연합의 군대와 잠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정도만 말했다.

“크르르. 인간 냄새. 싫지만.

싫다는 건가?

“난 네게 이미 한 번 살해당했던 몸이다. 인간의 영역 한가운데. 네가 나를 사지로 끌어가더라도. 싫다고 할 수는. 없다.”

의외로 흥분하지는 않는다.

“루멘. 정보만 준다면.

그토록 싫어하는 인간의 야영지에 함께 들어가도 참을 정도로.

루멘 발도프의 정보를 원한다는 말이었다.

순간 잊고 있었다.

나는 이 늑대인간을 이용하면서, 얼마 안 되는 알고 있는 정보나마 숨기고 있다.

〈뭘 하나 했더니,이렇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어?〉

아이작의 말에 섞인 낮은 조소가 느껴진다. 어차피 처음부터 속이고 있었으면서,라는 말이 선명하게 환청처럼 울린다.

내가 걷는 게 어떤 길인지 다시 한 번 느껴진다.

어떤 기준도 없이 수많은 인간을 학살하며,그 피를 마왕의 강림에 제사 지내고 있다.

누군가의 강렬한 마음을 속여서 이용하는 것 정도는 이미 새빨간 양손에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크르르.

흉포한 울음이 낮게 울려 퍼졌다.

상대의 정체를 모르는데도,브로디 발도프는 아이작를 볼 때마다 매번 새롭게 경계한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인간들의 구역에 가도 되는 건가? 투구. 벗으면.

“그건 괜찮다. 나름 방법이 있다.” 굳이 투구를 벗어 마스커레이드를 보여 주지는 않았다.

스킬 지속 시간은 고작 10분. 재사용은 6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앞으로도 쓸 일이 많을 거라 짐작 할 수 있다.

“넌 기척이 느껴질 정도에만 숨어

있어라. 지금처럼 전선을 올리는 것만 도와주면 된다.”

“알았다.

다시 돌아오자,루이 클로드라는 여자는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긴장을 해서 굳은 게 아니다.

오히려 그쪽이 더 편해 보인달까. 아무리 봐도,인간보다는 바닥에 누운 철인 쪽에 가까워 보인다.

“다시 얘기를 해 보지. 뭘 줄 수 있지?”

단도진입적으로 물었다.

“세부 조건은 제 주인이 말씀하실

겁니다. 하지만. 어떤 조건이라도 좋다고 확언받고 왔습니다.”

방금 전,얼마 안 되는 루-룸을 소중히 회수하는 모습을 보았다.

대량의 루-름은 받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받을 수 있는 대가가 그것 뿐만은 아니다.

“가자. 그럼 네 주인과 얘기하지.”

망설이지 않고 던진 제안에 푸른 단발의 여자는 멈칫했다.

낮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느껴지는 열기.

“왜 놀라지? 네 주인과 얘기해야 진도가 나간다는 거 아닌가?”

“.네. 지휘소로 안내하겠습니다.” 열 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주종 관계,사실 그렇고 그런 주종 관계 아니야? 상대방 그림도 막 그려지려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저 녀석,왜 내가 정작 의원과 만난다니까 놀랐지?

〈눈치는 좀 늘었네. 생각해 봐라. 이렇게 험악한 짓을 하고 다니는 수라 나찰,귀신을 아무 보호막도 없이 사랑하는 주인과 만나게 하고 싶겠어? 그만큼 너랑 손잡는 일이 절실하다 던가. 아니면.〉

= 아니면?

〈뭐,글쎄.〉

아이작이 말을 얼버무렸다.

산 위쪽 요충지에서 내려오면서 보아서 그런지,한 시간 정도 걷자

멀리 포진한 군대가 보였다.

/刀C ᄌᄌ 刀炎.\

\ 乂,、乂 ./

뭘 생각하는 건지,웃기게도 혀 차는 소리를 짧게 흉내낸 아이작은 다시 침묵했다.

계속 걸어갔다.

숲을 베고 군대가 세운 야영지에 가까이 오자,멀리 있는 브로디의 기척이 한층 신경 쓰였다.

으르렁대면서 인간에 대한 적의를 불태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리해서 데려오지 않은 게 역시

잘한 선택이다.

보초를 통과해 들어가며 야영지 안쪽을 여기저기 살폈다.

병력은 약 5천 정도로 보인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간간이 인간들 가운데 몸에 기계장치를 달고 있는 자들을 볼 수 있었다.

중간중간의 공터에는, 연합군이 가진 무력의 상징인 강철 기계들이 우뚝 서 있다.

이곳이 함정이라면 어떨까.

하지만 아이작의 말대로 몸 하나 정도는 언제든 빼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붙는다.

굳이 변수라고 말할 만한 것은, 지금 눈앞에서 나를 인도하는 루이 클로드라는 이름의 인간이지만.

〈과연 개판이야. 형태부터 전부 틀려 먹었어. 참호를 이따위로 구축할 거면 세우지를 말든가.〉

아이작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태도로 주위를 휘휘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 뭐가 마음에 안 드냐?

〈너가 해라.〉

= 뭘?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날개로 태잉올 휘감은 올빼미가 있는 막사에 도착했다.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는 양손에 스파이크가 박힌 모닝스타를 들고 있었는데,자동으로 돌아가는 기어 몇 개가 부착된 모닝스타는 양팔과 아예 연결되어 있었다.

전투용 의수義手로 보였다. 날카로운 눈빛의 병사는 루이를 보고

즉시 옆으로 길을 비켰다.

“으음. 이쪽입니다.”

루이는 조금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쪽에 서 있던 검은 머리카락의 인간 여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정중한 말씨에 걸맞지 않게 꽤나 굳어 있던 안내자와는 딴판으로, 진심 어린 환대의 웃음이었다.

“카린 크렉소르라고 합니다.”

흑발 흑안의 미녀는 내 정체도,

어떤 것조차 묻지 않고 양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 회의용 원탁으로 안내했다.

“그런가. 여기까지 나를 들인 걸 보면. 어지간히 뒤를 쫓고 있었나 보군.”

“맞습니다. 뵐 날만 기다렸지요.”

막사 안에는 아무도 없다.

의원이라고 했던 눈앞의 여자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무방비하다.

목을 내놓고 있다고 봐도 좋다.

어디를 어떻게 해도 지금 간단히 즉사시킬 수 있는 순간 투성이다.

“방금 백여 명의 인간을 죽이고,

방화까지 저지른 나다. 널 살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나?”

장식 하나 없는 새까만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는,흑요석이 떠오르는 두 눈을 자신감 넘치게 빛내며 말했다.

“그럼 그게 제 운수라는 거겠죠? 하지만 저에게 그렇게 죽을 운명 따위는 없습니다.”

여자는 수련의 흔적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검지를 펴고,머리 위를 가리키며 이어 단언했다.

“운명이,저를,각광합니다.”

살기 따위는 조금도 없다.

무력이라고는 전무한 상대.

하지만 어쩐지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었다.

여자가 쓰는 단어가 이상하다는 생각도,지휘소의 방비가 지나치게 허술하다는 생각도,뭘 뜯어내야 할까 싶은 생각도.

확신에 찬 자장평場에 휘말려서 하류로 쓸려간다.

〈개소리.〉

아이작의 냉소에 찬 소리가 쓸려가는 하류를 얼어붙인다.

〈제까짓 게 감히 무슨 자신감으로 누구 앞에서 세상의 주인공인 척 지껄인단 말이냐?〉

갑작스러운 아이작의 일갈.

나를 놓고 두고 벌이는 두 녀석의 황당한 기 싸움에 좀 멍해져 있던 탓일까.

문득 내 눈앞에 떠오른,배경과 간신히 구분될 정도로 몹시 희미한 메시지가 우연처럼 눈에 들어왔다.

[감정 중.]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시나리오 활성이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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