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49화 (249/458)

250화 아무 대가 없이 (14)

또렷한 글자는 아니다.

환영인가 싶을 정도로 희미하게 배경에 녹아든 글자.

카린과 아이작의 기묘한 대치에 조금 당황해,멍하니 허공을 보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거다.

뭘 감정 중이라는 걸까?

지금까지 시나리오라는 게 생겼던 상황을 돌이켜 보았다.

루비아가 나를 일으켰을 때 처음 시나리오가 열렸다.

두 번째는,레나에게 필요를 느껴 동료로 삼기를 고민했을 때다.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시나리오 활성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기스-제-라이.

그녀가 나에게 일방적인 호감을 가지고 납치했을 때도 마찬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다는 같은 내용이 떴다.

시나리오.

자동으로,만나는 모든 상대마다 이런 게 감정되는 걸까?

그럴 리 없다.

회귀를 시작하고 만난 자들 중에, 시나리오에 관련된 창이 떴던 건 몹시 소수.

상대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누군가가 판단하고 있다는 걸까.

하지만 아이작은,오랫동안 함께 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이 뜨지 않는다.

이 시나리오라는 게 어떤 의지를 갖고 있는 건지,상태창이라는 게

누구의 장난인지는 모른다.

잠시 고민하다,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지금 루비아를 찾는 건 시나리오 메시지 때문만은 아니니까.

〈건방지긴.〉

웃기지도 않다는 듯이 아이작이 말을 홀린다.

그를 이 정도로 동요하게 만든 것 하나로도,눈앞의 인간은 그럭저럭 재능 있는 인간일 거라는 역설적인 생각이 든다.

한 번도 뭔가를 제대로 이뤄 보지 못한 인간들이 뿜어내는 패배감과 정반대의 기운.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 느껴진다.

손을 잡으면,나 역시 그 운명에 연결될 것 같은 인상.

연출이라기보다는-

보통 저런 걸 보고 카리스마라고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곧 익숙한 허무감이 나를 덮쳐 왔다.

제국군과의 전쟁은 내가 좀 도와준 다고 해도,마왕들이 강림하면 어차피

다진 고기가 될 거다.

우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대가 피범벅이 되어 허공에 걸린 모습이 떠오른다.

어쨌건,지금은 그냥 뜯어낼 수 있는 걸 뜯어낼 상대일 뿐이다.

옆에 선 루이 클로드에게 약간의 보고를 추가로 받고,흑발 여자는 말을 이어 나갔다.

“정체도,이유도 묻지 않겠습니다. 제국군 궤멸을 원하신다면, 저희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모든 걸 지원 하겠습니다.”

명쾌하고,단도직입적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 이쪽의 심리를 꿰뚫기라도 한 걸까.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뭐,좋다. 일단 너희가 갖고 있는 최대한의 루-륨을 원한다. 얼마나 가지고 있지?”

“마도공학의 액체 말씀이십니까? 모두 긁어모으면 아마도 두 병은 나올 겁니다.”

“두 병 안 됩니다.”

푸른 단발의 여자가 끼어들었다.

“그것뿐인가?”

아까의 모습에서 짐작은 했지만, 실제로 듣고 보니 더 한숨이 나는

수준이다.

게다가 전부 연합군 주요 전력에 활용되고 있겠지.

“그럼 지금은 관두지. 대신 제국 도시를 함락할 때 나오는 루-룸이 있다면 내가 갖는다.”

“물론입니다.”

〈후후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 하고 냉큼 허락하는군.〉

아이작의 말이 맞다.

수도까지 밀고 올라가서,황실의 비역에 들어가면 루-름 한두 병이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나냐우의 작전조차,황실 비역에 숨겨져 있는 루-륨 일부를 꺼내는 것뿐이었다.

일단 제국 수도를 점령하게 되면, 철저한 수색이 이뤄질 터.

아무리 다른 곳에 빼돌리고 소모했 어도 어마어마한 루-름이 남아 있을 것이다.

고작해야 연합의 철인들에서 긁어 모으는 차원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 더.”

“네,말씀하세요.”

“여자 하나를. 잘 돌봐 줬으면

하는데.”

“여자 한 명이요?”

상대의 눈빛이 바뀐다.

물론 루비아를 마법사들의 탑에서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구해 낸 루비아가 어떤 꼴일지. 어떤 치료가 필요할지도 조금도 짐작할 수 없다.

그렇지만 구출 뒤의 계획은 미리 세워 두고 싶었다.

엠버의 싸움이 어떻게 결판날지는 모르지만.

내 개입으로 역사가 변해,연합이 승리한다면 눈앞의 여자는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될 거다.

얼마나 평온이 지속될지는 몰라도 루비아가 잠시나마 인간 세계에서 잘 적응하며 살게 해 주겠지.

루비아를 나와 함께,음지에서만 지내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마왕 강림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 따로 빼내면 되는 일이고.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죠? 바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한 기세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갈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 때가 되면 직접 소개해 주지.”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그분은 제 명예를 걸고 보호하겠습니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묘한 호의가 묻어난다.

대체 뭘 생각하는 걸까.

그때 였다.

〈아주 낭만파들이야?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게 남았다고 해라.〉

아이작이 끼어들었다.

= 뭘 달라고 하려고?

〈그건.〉

이어서 녀석이 속삭이는 이야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심인가?

그걸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시키는 대로 해라. 최단시간에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게 최고다.〉

“으흠.”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조건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슬쩍 주위의 상황도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군의 지휘권을 내게 넘겨라.”

먼저 반응한 건 루이 클로드였다. 그녀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며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언제든 빠르게 칼이 뻗어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설명을 조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기본도 안 되어 있어. 제국군이 허수아비가 아니었다면 너희들은 이미 궤멸이다.”

아이작이 말하는 대로 야영지의 상황을 하나씩 지적하며 개선책을 옮었다.

관련된 지식이 없는 내게는 별로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지만,2년을 지휘관으로서 보낸 상대 입장에서 보기에는 다른 것 같았다.

의원은 어느새 중간에 이런저런 질문을 끼워 넣기 시작했고,내가 유창하게 대답하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카린 크렉소르의 얼굴에서 나를

향한 존경과 감탄이 비춰졌다.

“참모들에게 조언도 듣지 못하고, 미처 생각도 못 하고 있던 부분이 많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지휘권을 정말 넘기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좋아요.”

카린 크렉소르는 그런 터무니없는 요청을 어려울 것 없다는 둣,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고민이 지나치게 짧은 거 아닌가 싶었다.

설마 이런 요구까지도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의원님,진심이십니까?”

푸른 단발의 여자가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물론이지. 전술은 알지 못해도, 사람은 알아보는 게 내 재능인걸. 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는 게 통치의 기본이잖아?”

나를 보고 웃어 보인다.

왠만한 인간이면 충성 서약을 할 정도의 미소다.

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것치곤.

인간이 아닌 것 자체는 알아보지 못하는군.

의원이 말을 이었다.

“그럼. 언제까지 드리면 되죠?”

두 녀석 다 할 말 없게 만든다.

“제국 수도를 공략할 때까지.”

= 내가 전면에 나가는 건 아니지?

장난이 아니다.

마스커레이드 스킬이 있다 해도, 그 한계는 뚜렷하다.

얼굴도 보이지 않은 채 지휘관이 된다고?

〈그거야 당연한 소리지. 얘도 다

알아듣고 하는 말이다.〉

“네 입김이 미치는 부대가 근처에 얼마나 있지?”

“일단은.

카린 크렉소르가 천천히 상황도를 짚어 갔다.

“31연대,14연대가.

세부 사항에 대한 얘기를 끝내고 막사를 나간 뒤,은신 상태로 부대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 무슨 생각인 거냐?

〈나도 취미 좀 즐기면서 가자고.〉

=취미.?

〈특기는 주술,취미는 전술이라는 얘기다. 전장의 예술을 보여 주마.〉

연합군 부대를 보는 건 처음이다.

내가 겪어 온 건 제국군뿐.

곳곳에 배치된 기계 장치들이 꽤나 흥미롭게 보인다.

= 어떻게 의원이라는 것들이 군대 통제권을 갖고 있는 거지?

〈군대는 돈을 먹으니까. 그것도 엄청나게 먹고 생산하는 건 없는 필요악이다. 예산을 통제하는 자가 인맥을 심어 놓기가 쉽지.〉

〈아까 그 녀석이 속한 크렉소르 가문은 예산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사실상 장교들에게 급료를 주는 가문이지. 어느 정도,사병화 되었다고 봐도 좋을지도.〉

지휘소에서 건네받은 부대 내역은 다음과 같았다.

철인 28기.

보병 4천.

기계화 보병 100.

기병 300.

사실상 강철의 거인들이 전투의 중심이 되고,기병의 역할은 정찰

정도에서 그친다.

보병은 그들을 받쳐 주는 역할.

= 기계화 보병이라는 건 뭐지?

〈신체에 기계 동력,제어 장치를 구축한 녀석들이다.>

= 왜 따로 빼지?

〈그야 보병 안에 넣고 일괄적으로 굴리기에는 전투력이 너무 뛰어난 탓이지.〉

아이작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들은 단순히 돈이 많다고 해서 자신의 신체를 기계로 갈아 치운 자들이 아니다.

평화로운 시기에서도 극히 위험한 임무에 차출되어,사선을 몇 번씩 넘어온 자들.

일반병과 비교되지 않는 압도적인 전투 경험과 센스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을 기계화 보병으로 만드는 비용은 국가,즉 연합 의회의 예산 위원회에서 결정된다.

달리 말하자면-

〈크렉소르 가문에서 나온 돈이란 이야기다.〉

나는 몸 여기저기서 차가운 빛을 내뿜는 무리들을 바라봤다.

커다란 공터에,다섯 명이 느슨히 대기하고 있다.

‘장착하고’ 있는 신체들은 모두 다 다르다.

작전 중의 결손을 대체한 걸까.

팔 대신 철편,손 대신 톱날.

뼈와 살이 있어야 할 곳에,적을 찢는 날카로운 강철을 두른 자들.

일상생활에 지장에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저들의 ‘일상’은 아마도 다른 인간들과 좀 다르겠지.

= 저들이야말로,이 부대에서 카린 크렉소르에게 충성도가 높을 거란 말인가?

아이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크렉소르’만이다. 너를 공격 하려던 자들이 기억나지 않냐? 가장

위협적일 수 있는 것들이야. 물론 다른 ‘가문 후계자’들이 제거된다면 카린에게 충성하겠지만.〉

녀석이 딱,부리를 부딪치며 말을 이었다.

〈능력을 보여 준다면 어떨지.〉

“전리품이 너무 많아서. 다 주울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나는 언덕 위에 선 채 또 한 번의

승리를 내려다봤다.

크게 소리치는 피로 물든 기계화 보병의 뒤쪽으로,밧줄에 묶인 채 끌려오는 제국군 포로들이 보였다.

동료들의 죽음이 거의 없었던 것 때문인지 연합군 병사들은 제국군 포로들을 그다지 혹독하게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다운 전투도 해 보지 못하고,귀신에 홀린 듯이 패배한 그들을 동정하는 기색마저 보였다.

어쨌거나 포로들은 모두 아이작이 명령한 바에 따라 소중한 정보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으음.〉

아이작의 지휘를 받고,두 달이 지났을 때.

카린 크렉소르는 제국에 들어온 연합군 4개 사단과 16개 여단, 총 11만의 병력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터무니없는 전과를 보여 준 탓에, 참모진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의원들이,전술적인 조언을 계속 요청해 온 탓이었다.

결과는 전선 전체의 연전연승.

“정말 대단하군.”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 그 자체보다도,시체들에서 전리품을 빼앗는 데 항상 더 많은 시간이 소모됐다.

카린은 모든 인맥과 역량을 당장 제공할 수 있는 루-륨을 습득하러 다니는 데 쓰는 듯했다.

혹시 내가 협조를 그만둘까 봐.

하지만 승리의 주역인 아이작은 의외로 가라앉은 기색이었다.

〈.너무 저항이 없다.〉

“네가 잘한 거 아닌가?”

허를 찔렸다거나, 포위당했다고 곧바로 두 손 들고 항복한 병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나름대로 한 명 한 명이 치열하게 이쪽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본 터.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아이작이 항상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적군들은 뭔가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다. 장교들을 심문해 봐도 수뇌부에서 제대로 된 지휘를 못 받는 게 느껴져.〉

“그래?”

〈올라올 테면 올라와 보라는. 왠지 그런 느낌이야. 제국 황제란 놈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엠버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나?”

〈그쪽은 아예 들어갈 수가 없는 상태인 것 같고.〉

어쨌거나.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여기서.

“올라간다.”

느긋하게 전진해도,연합군 11만 병력이 제국 수도에 도착하기까지 고작 사흘이다.

벌써 반이 넘게 온 거다.

이 속도라면.

루비아를 구하는 게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조금씩 들뜨는 감정을 억눌렀다. 이미 2년을 늦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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