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아무 대가 없이 (16)
바닥을 구르는 머리를 바라봤다. 강철 투구는 곧 수많은 병사들에게 밟히고,머리는 진흙투성이가 되어 굴러가 보이지 않았다.
한쪽 다리를 잘린 제국군 병사가 곧 크리스티나의 쓰러진 몸 위에서 도살당했다.
수많은 창이 뻗어 왔다. 그 위에 시체들이 쓰러졌다.
크리스티나가 대검을 휘둘러 만든
공터 따위는 순식간에 연합군 장창 부대로 뒤덮여 버렸다.
그런 뒤에야 생각이 미쳤다. 크리스티나가 왜 여기 있지?
이유는 곧 떠올랐다.
이번 생은 루비아를 구하고 나서 에라스트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내가 참가하지 않은 토너먼트에서 크리스티나가 우승한 뒤,루비아의 삼촌에게 등용되었다는 거다.
레이 커크.
에라스트의 영주.
성품은 아무 꾸임 없이 추악함 그 자체지만,적어도 강자를 등용하는
일말의 이기심은 있었다.
그 결과로 기사는 여기서 죽어 간 것이다.
학대받으면서도 충성을 다한 제 기사를 잃은 에라스트의 영주는, 발작적으로 밀도가 더 높은 안으로 숨어들었다.
“벼,병신 같은 오우거가! 등용해 줬더니 이런 거 하나 못 뚫고!”
지금의 나조차도,뚫으려면 조금 번거로울 이런 포위망에 몸을 던진 제 기사에게 그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명예. 관용. 강건. 인내. 충성.
기사도라는 게 있다면 그걸 바칠 대상을 천 번은 잘못 골랐다.
극에 당한 충성의 낭비에,그만 실소가 툭 터져 나올 정도였다.
“꺼져라.”
공포 스킬로도 제어가 되지 않는 밀집 대형에,십수 명을 베어 가며 도망가는 에라스트 영주의 근처로 걸어 들어갔다.
삶에 대한 집착으로 길길이 뛰며, 같은 편의 칼날에 거죽이 베이고 곳곳이 뚫린 놈을 쫓았다.
나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 밀리고 밟혀 팔이 꺾이고 다리가 부러져
바닥을 기고 있었다.
주위로 공포 스킬을 쓰자 둘만의 좁은 공간이 생겨났다.
간단히 검집을 휘둘러서 멀쩡한 한쪽 팔을 부러뜨린 다음 물었다.
“루비아를 기억하나?”
끅끅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는 은인일지도 모른다.
놈이 루비아를 지독히도 궁지에 몬 덕에,책만 읽던 영주의 딸이 무덤에서 해골병사를 일으키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으니까.
물론 놈이 보낸 사냥꾼들 때문에
몇 번이고 고생을 반복해야 한 건 불쾌한 요소다.
“루. 뭐? 끄흑,그 개년이 무슨, 저,정말 도망갔단 말이야? 말도 안. 돼. 유블람에까지 연락을 다 취해 놨는데.!”
한칼로 입을 꿰뚫었다. 검기에 이빨이 모조리 털려 나가며 부서진 유리처럼 떨어졌다.
“꿰엑! 꾸에에엑!”
주위가 지나치게 난잡했다.
별로 길게 상대할 기분마저 들지 않았다.
툭 걷어차자,그가 멀리 튕겨 나며
마치 마지막 삶을 불태우는 것처럼 부러진 다리로 일어섰다. 그리고 소리쳤다.
“나, 나느은! 에라스트의 영주다! 모,모두 나를,끄흑,보,호하며 탈출하라!”
피거품이 입에서 튀었다.
- 퍼걱!
뒤로 도망가는 녀석을 어디선가 번개처럼 날아온 창이 꿰뚫었다.
창이 얼마나 강하게 날아왔던지 갑옷 앞뒤와 심장을 그대로 뚫고,
바닥에 박혀 한차례 들썩였다.
하늘을 본 채 꿰인 시체가 짓밟힌 개구리처럼 반동에 푸르르 떨리다 죽 처졌다.
화살처럼 날아온 창은 바깥에서 던져진 것이 아니었다.
“안쪽으로 도망치는 자는!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즉각 참수한다! 전 창기병! 전열을 정돈하고 다시 적을 향해 돌진하라!”
한 마디 한 마디가 병사의 심장을 터트릴 것 같은 절규가 되풀이되며 전선의 타개를 주문했다.
어느새 레이 커크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게 될 만큼 강한 호소력을
지닌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의 2차 우회기동에 안으로 말려든 기병대인가.
장렬한 목소리로 부르짖은 남자가 말 위에서 투구를 벗었다.
짧은 백발이 피바람에 흩날렸다. “나 오스칼! 제국 백작이기 전에 적을 돌파하는 한 기의 창기병!”
- 째앵!
기병용 할버드가 주위의 연합군 세 명을 단숨에 베어 버렸다.
잔상을 그리며 마치 공격 범위가 갑자기 늘어난 듯한 공격이었는데, 내측 다리를 꾹 밀며 흑마와 함께 움직인 절묘한 마술馬術이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최대 범위로 할버드를 강하게 휘둘렀고,막아 내려던 장창 다섯 자루는 한 번에 잘렸다.
“추격! 적을 살려 보내지 마라!”
압도적으로 밀리는 전장 상황에도 불구하고,백발의 남자는 기백으로 마치 제국군이 승기를 잡은 듯한 착각을 강요했다.
한 명의 기세에 늘린 수백 명의 장창병이 움찔 뒤로 물러난 탓에
기병대가 정말로 짧게 돌격할 만한 공격이 만들어졌다.
오스칼이라.
운이 좋다.
여기서 제국군 기병대 총대장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서른 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할버드를 흘끗 바라봤다.
- 슈우우응!
검은 검기가 칼날을 타고 미친 둣 폭주했다.
‘질주.’
- 팟!
나는 백발의 창기병이 만들어 낸 공간에 그대로 뛰어들었다.
검기를 압축한 칼을 곧바로 말에 탄 창기병을 향해 휘둘렀다.
- 까앙!
- 히히힝!
창기병은 간신히 한 합을 막았고,
말은 그대로 뒷다리가 꺾였다.
하지만 백발의 창기병은 다리로 말을 감싸고 다시 할버드를 강하게 휘둘렀고,흑마가 다시 일어나며 그 공격에 탄력을 더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공격에 나는 두 다리를 땅에 버티고 선 채 칼을 올려쳤다.
- 챙강!
할버드가 부러져 나가며 창기병의 주름진 손아귀에서 피가 터졌다. 어지간히 악물었는지, 입가에서
피를 홀리는 창기병에게 뛰어올라 가슴에 칼을 박고 뺀 뒤 다시 목을 베었다.
“저,적군 대장이 죽었다!”
“오,오스칼 님!”
“으아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수십 기의 기병이 돌진해 왔지만 방금 죽인 남자의 반의반도 따라가는 자는 없었다.
찔러 오는 헤비 랜스를 한 차례에 두셋씩 쪼개며 목을 날렸다.
이곳의 제국군 기병대가 살아 나갈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흡수.’
나는 푸른빛을 뿜어내는 오스칼의 시체에 손을 뻗었다.
괜찮은 환경에서라면, 장창기병 300으로 1만을 격파하는 일을 해낼 수도 있을 법한 녀석이다.
- 우우웅.
[마상 창술 Lv.l을 습득!]
[마상 창술 Lv.2를.]
[마상 창술 Lv.3을 습득했습니다!]
- 카우치드 랜스(Couched Lance)를 터득했습니다.
- 2인 이상을 한 번에 관통할 경우 추가 경험치가 부여됩니다.
이어서.
승마 스킬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들린다.
웬만한 말보다야 내가 빠르지만, 나중에 명마를 만날 때를 생각하면 손해 따위는 전혀 없다.
생각보다도, 이것저것 흡수되는 스킬들이 많다.
대단한 녀석을 잡아 버린 듯하다.
[승마 Lv.4를 습득했습니다!]
[승마 Lv.5를 습득했습니다!]
[특전: 조련(리를 획득!]
- 승마 레벨 상승에 따라,특전이 부여되었습니다. 말뿐만 아니라,‘탈 것’ 이라고 인식되는 상대들을 순종시키는 능력.
- 당신이 탑승하는 말의 경험치가 빠르게 상승합니다.
묘한 능력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오스칼의 몸은 빛을 잃었다.
남은 적 지휘관은 르노 리드바렌 한 명인가?
주인 잃은 말들의 등을 디뎌 가며
전장을 살폈다.
뒤를 뚫어 도망가려는 적군의 중보 병단이 보인다.
아니,원래는 기사였나?
말에서 내린 마흔 명 정도의 기사가, 다리에서 피를 흘리는 누군가를 감싸고 혈로를 뚫으려 든다.
보호받는 남자는 난전 중에 발사된 화살이 허벅지에 묘하게 꽂혀 말을 탈 수 없게 된 모양이다.
자신이 말에 못 탄다고,주위의 기사들에게 명령해 말에서 내리게 만든 모양.
최후까지 기병으로 죽어 간 오스칼
백작과 비교되는 녀석이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기병들도 저런 놈의 명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을지도.
- 쾅!
말에서 내린 기병들은 철인들에게 완전히 진영이 무너지고 있었다.
헤비 랜스 대신 장검을 든 기병의 몸이 강철 기계에 밟혀 으깨졌다.
칼끝에 미약한 오러를 발휘하는 녀석도 간간히 있었지만,칼로는 두꺼운 철판을 제대로 뚫지 못하고
반격하는 주먹에 맞아 피거품으로 변했다.
한 번에 두셋씩 죽어 가는 호위를 돌아보며, 가운데 있는 남자는 제 옆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붕어처럼 뻐끔대는 입을 멀리서 읽기는 곤란했다.
‘탐지.’
[탐지 Lv.7를 활성화합니다!]
“마법사님! 지금입니다! 지금 힘을
발휘해서 저희를! 아니,저,저라도 꼭 구해 주셔야 합니다!”
마법사?
얼마나 강한 상대일지 모른다.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도 힘을 쓰지 않은 게 묘하다.
스크롤과 만다라,시약을 필요로 하는 수준이라면 크게 겁날 것도 없 지만.
남자는 가볍게 펄럭이는 로브만 걸치고 있다.
지팡이조차 어디 숨겼는지 보이지 않는다.
저런 복장이면 당장 다진 고기가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난무하는 창칼과 화살비, 철인들의 광란이 남자를 슬쩍슬쩍 비껴가는 듯했다.
쉴드에 부딪혀 튕긴 것도 아니고, 불꽃에 태워진 것도 아니다.
모든 공격이 조금씩 그를 피해서 빗나가고 있었다.
“대체 뭘 하시는 거요! 여기까지 나를 지키러 오신 거 아니오?”
로브를 쓴 남자는 질 나쁜 농담을 들었다는 듯한 어조로 대꾸했다.
“응? 아닌데. 당신 같은 인간이
구태여 살아 봐야 똥 만들기밖에 더
하겠소?”
“뭐! 뭐라고! 아니다. 내가 말을 잘못 들은 걸로 하겠다.”
“그러시든지.”
“제국 후작으로서 명령한다! 당장 포위망을 뚫어서 날 살려 내라!”
“말했지 않소. 당신 따위를 살려 봐야 대체 어디에 쓸데가 있소? 이 군대를 혼자 쓸어버리는 것도 무리고. 관찰이 끝났으니 나는 이만 가겠소. 그동안 함께한 정이 있으니 자살을 권하지.”
“이,이 새끼가 미친 건가! 나는 종교 재판관이다!”
공포와 분노로 인해 눈이 뒤집힌 리드바렌 후작은 마법사에게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목으로 똑바로 날아간 칼은 기묘하게 휘청거리며 한참 상대의 몸을 벗어나 있었다.
막은 것도,옆으로 튕겨 낸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엉뚱한 쪽으로 칼을 휘두른 듯한 결과였다.
“수고하시오. 자살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거요.”
착각이었을까.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는 내 쪽에 흘끗 눈길을 주곤 전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 서걱!
칼이 갑옷을 반으로 갈랐다.
르노 리드바렌을 호위하던 마지막 기사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혼자 남은 녀석의 배을 밟고 서서 아래로 칼을 겨눴다.
“끅,끄으으으.!”
리드바렌 후작은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둣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턱 밑에 바로 칼날을 들이댔다. “레이 루비아를 기억하나?”
“루,어? 뭐라고? 레이 루비아.
“네가 종교 재판에 넘긴 여자다. 정말 기억하지 못하나?”
기억에 잠긴 그의 눈빛이 한층 더 흐릿해졌다.
“그,그런 사소한 것까지 전부 다 기억할 수는 없는데. 나,나한테 투항하면 만남을 주선하지!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파멸로 몰고 간 여자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무신경하게, 당연한 듯이 지속된 일이라 감정도 기억도 남아 있지 않은 표정이다.
놈에게는 이런 일이,기억 안 날 정도의 일상이라는 사실에 할 말을 잃었다.
고문이 기억을 도와줄지 모른다.
어쨌거나.
죽이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좀 더 물어볼 게 남았다.
“아까 같이 있던 남자는 누구지? 마법사인가? 아는 대로 말해라.”
“그,그는.”
바로 그 순간.
르노 리드바렌 후작의 목덜미에, 새까만 점이 빠르게 뱀의 형상을 갖춰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