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아무 대가 없이 (19)
한참 허망한 기분으로 서 있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막사가,내가 핏물에 발을 깊이 담근 이 전장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이작이 떠나자 같은 공간이라도 전혀 다른 것 같았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떠날까,싶을 때였다.
익숙한 기운이 빠르게 다가왔다.
- 펄럭!
건장한 그림자가 빠르게 막사를 열어젖혔다.
“정찰 다녀왔다.”
인간형으로 변한 브로디 발도프.
대답하지 않자 녀석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나?”
신경 쓰지 말라고 하자 브로디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풀며 정찰 결과를 이야기했다.
“몇 마리의 패밀리어와 조우했다. 북쪽에서 마법사들이 빠르게 오고 있는 건 확실하다.”
아무래도 좋은 기분이었다.
이제는 관심 없는 몇 가지를 더 전해 들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이었다. 브로디 발도프가 어색하게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전선이 결국 여기까지 밀렸군. 약속대로. 루멘의 정보를 나에게 알려 주지 않겠나?”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끄덕였다.
“좋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 상황에서 늑대인간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손에 어마어마한 피를 묻혔다.
물론 브로디 발도프 스스로,인간 살해를 일종의 숙명처럼 여기는 것 같긴 했지만.
“루멘 발도프. 그는 지금 엠버에 있을 거다.”
정확하지도 않은 추측을 전한다.
하지만 브로디의 얼굴에는 오히려 화색이 돌고 있었다.
“엠버메어?”
“그래. 암살교단 레드 플레이크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지. 그들을 수
소문해 봐라.”
암살집단을 찾으라는 이야기다.
몹시 막막한 이야기다.
어디서부터 찾으라는 건가?
게다가 엠버메어는 제국의 정예가 모두 몰려가 있어 지극히 위험한 상태.
하지만 브로디 발도프는 태연한 표정이다.
“고맙다.”
그 감사가 몹시 의아했다.
“고맙. 다고?”
“원래부터 허세는 느꼈다.”
“우리쯤 되면 반드시 실체 있는 냄새만 맡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다른 녀석들의 기분이라든가 실력, 기억 같은 것마저 냄새의 감각으로 맡을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이어지는 긴 말들에 슬쩍 고개를 돌려 피했다.
“그래도 네 말에 진실 한 조각은 묻어 있다고 봤지. 그 한 조각이 생각보다 괜찮은 정보군. 고맙다.”
마음 어딘가를 커다란 웨어울프가 슬쩍 파고들어 오는 것 같았다.
조금 찡해졌다.
이 작고 볼품없는 정보를 가지고, 브로디는 지금껏 잔뜩 이용당한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그럼 이만 가오.”
녀석이 고개를 한 번 돌려보더니 내게 말했다.
“함께해서,사실 나쁘지 않았소. 언젠가 다시 한 번 보자고.”
웨어울프는 마치 냄새라도 기억 하려는 것처럼,내 쪽을 향해 코를 몇 번 킁킁거렸다.
- 펄럭!
곧 늑대는 밖으로 나갔다. 그마저 사라지자 막사 안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갔다.
날아간 아이작을 생각했다.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이용당했나 싶었지만,아이작이 떠난 뒤에도 내가 가진 마왕의 힘은 여전하다. 마왕 말파스는 지금까지의 공물에 분명히 대가를 치러 준 거다.
탁자 위에 놓인 카린이 두고 간 열쇠를 바라봤다.
나중에라도 쓸 수 있겠지.
일단 루비아의 생사부터 조금 더 확인해 봐야겠다.
누군가의 말을 무턱대고 믿는 건 이제 질색이었다.
슬쩍 포로 수용소로 숨어들었다. 어디에 어떤 녀석들이 있는지는 대충 다 안다.
정보를 가지고 있을 만한 놈들을 찾아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르노 리드바렌.
보티스의 하수인인 종교 재판관.
그 녀석의 부하들이 목표였다. 은신으로 간수들을 가볍게 뚫고, 안에 묶여 있는 놈들을 심문했다.
공포 스킬을 사용해 심장이 및기 직전까지 몰아세우고, 풀어준 뒤 다시 몰아세우기를 반복했다.
루비아의 정보를 물었다.
몇 명인가가 기억하고 있었다.
놈들 입장에서는 정말 별거 아닌 정보였는지,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술술 불었다.
아무래도 루비아는,인간 가운데 확연히 눈에 될 정도로 아름다운 모양이다.
아름다운 것은 짓밟는다.
하나씩 뜯어낸다.
악마숭배 혐의로 기소된 그녀에게,
그런 가학성을 발휘할 기회를 노린 자들이 많은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루비아는 호송 중에 사망했다.
“틀림없습니다! 아쥬라의 탑으로 데려가는 길에.
몇 차례에 걸친 교차 검증이었다.
루비아는 죽었다.
확실하다.
공포 때문에 오줌을 지리고 있는 인간들을 놓아두고 그대로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수도 함락에 참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우습다.
결국 아이작이 처음에 시킨 대로 해 버리는 거다.
물론 카린과 함께할 수는 없다. 나에게는 연합군 11만을 통솔할 전략 따위는 없다.
혼자 움직이는 게 당연하다.
몸을 숨기다,연합군이 돌격하면 살해된 마법사들을 흡수한다는 게 기본 계획이었다.
여기서 죽어도 상관없다.
쉽게 강해질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레벨 업 속도도 이제 몹시 느리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이번 삶을 굳이 이어 나갈 의지는 없었다.
진군하는 11만 군대의 옆쪽에서 몸을 숨긴 채 천천히 따라 걸었다. 루비아는 죽었다.
아이작도,브로디 발도프도 없다. 이제 정말 혼자다.
어차피 나는 오랫동안 혼자였다. 그동안이 너무 북적거렸던 거다.
애써 그렇게 생각해 보려 했지만 텅 빈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일부러 행군하는 병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날 막사에서 헤어진 후 카린의 눈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을 풀어 찾는 것 같았지만,그 정도도 못 피할 건 아니다.
여자는 그림자 전술가를 잃은 것치고는 그럭저럭 의연하게 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편제가 조금 조정된 것 같았다. 거대한 발리스타와,석궁병 부대를 앞에 내세우고 연합군이 전진했다.
저걸로 나타난 마법사들에게 일제 사격이라도 할 생각인가.
그걸로 대비가 충분할지는 나도, 아마 카린 자신도 알 수 없겠지.
여신의 힘이 미친다는 붉은 여우 평원을 지났다.
이어 11만 군대 앞에-스무 개의 작은 점이 나타났다.
“정지.r
“정지! 정지! 정지.!
펄럭이는 로브와 커다란 지팡이.
저 멀리서도,마법사라고 외치는 듯한 복장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상대는 스무 명.
이쪽은 아예 보이지도 않을 만큼 많은 숫자였다.
그럼에도 잔뜩 긴장했는지, 몇몇 연합군 지휘관은 이마에 한 줄기 땀을 홀리고 있었다.
“사격!”
“쏴라!”
- 티디디디디디딕!
- 투두두두두두두두!
짧은 시간 안에 수천 발의 화살이
스무 명의 인간을 향해 쏟아졌다.
하찮은 인간의 근력 따위가 아닌 몇 차례 감은 기계 태엽의 힘으로 날아간 화살들이 섬뜩한 직선으로 적을 겨냥했다.
- 피이이이익!
- 푸슝! 푸슘! 푸슘!
각종 공성무기들까지,아예 적이 있는 공간 자체를 갈아엎을 기세로 앞쪽의 마법사들을 꿰뚫고-
- 쾅! 콰과광!
- 파바바바밧!
꿰뚫고,그대로 지나갔다.
수천 발의 화살과 돌덩이가 아무것도 치지 못하고 땅에 박혔다.
“환영.?”
굳이 마법적인 지식이 아니라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감이 빠른 누군가는 벌써 알아차리기 시작할 때였다.
- 휘이이이잉!
군대의 좌익에서 강렬한 돌풍이 불 어왔다.
은폐장이라도 펼쳐져 있었는지 탐지 스킬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던 곳에서 마법사 열 명이 난데없이 솟아났다.
“화염 광란.”
다섯 명의 마법사가 손을 뻗었다. 손에 잡힌 지팡이 끝에서,뜨거운 불꽃이 다른 다섯 명의 마법사가 만들어 내는 돌풍이 힘입어 군대를 덮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화염의 덩어리들이 넓게 퍼져 군대를 휩쓸기 시작했다.
그건 쉽게 부스러지고,작아지고 꺼져 버리는 불꽃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들의 고통과 비명을 잡아먹고 제 덩어리를 점점 키우는 망령이 었다.
이글거리는 화염에 싸인 병사들의 몸이 양초처럼 녹아내렸고,어떤 곳 에서는 몸이 안쪽에서부터 펑펑 터지는 자들도 있었다.
“살수! 살수차!”
- 좌아아악!
불이 붙어 너울거리는 병사들을
향해 살수차가 몇 대씩 동원되어 물줄기를 뿌렸다.
잘 준비된 모습이다.
가장 강한 공격마법은 불꽃 계열. 거기에 대항한다는 건가.
하지만 고작 열 명의 기습 공격에 이미 천 명 이상이 몸이 타올랐다.
그리고 그 세 배 이상의 전열이 완전히 흐트러졌다.
온몸이 일그러져 섬뜩한 비명을 질러대는 병사들을 보니,아이작이 있다면 어땠을까 싶다.
이런 공격은 어떻게 대처할까. 예방했을까?
아니면 아이작도 마법사의 기습은 어쩔 수 없었을까?
녀석의 생각을 억지로 지워냈다.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번쩍!
샛노란 전격이 허공을 깨물었다.
열 명의 마법사는 지팡이 끝에서 일제히 전격을 뿜어냈고,살수차가 뿜어낸 물로 젖은 땅 위를 뇌전이 미친 듯 좌우 사방으로 내달렸다.
- 쿵! 쿵!
처음 마법사들을 보고 달려가던 두 철인이 감전되어 제자리에 허무하게 쓰러졌다.
그 뒤를 이어 시간 차이도 없이 수백의 인간이 일제히 쓰러졌다.
살수차를 운용하는 병사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제법 충실하게 방화복을 입고 있었지만,정작 필요했던 건 방뇌복이었다.
연합군을 둘러싼 전장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곳곳에서 돌풍과 함께 불기둥이 솟았다.
“에비아 루미오 일럼,룬 플래시-용암 채찍!”
- 치이익!
무거운 불덩어리가 파편처럼 튀며 거기에 맞은 인간들의 몸이 커다란 구멍이 뻥뻥 뚫렸다.
어느새 내 근처에서도 두 명의 마법사가 지팡이를 휘둘러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실력이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에게 살해당한 황실 마법사들에게 그리 뒤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 명은 공격을 전담하고,다른 한 명은 전력으로 쉴드를 전개하고 있었다.
- 탕! 타당!
눈먼 화살 따위는 쉴드에 튕겨나 마법사를 다치게 하지 못했다.
불을 뿜고 번개를 뿜는 지팡이가 어딘가를 향할 때마다,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최소한 십수 번씩은
겹쳐 울렸다.
갑작스런 기습에 연합군은 아직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었다.
꼭두각시처럼 움직인 카린이 지금 몹시 당황하고 있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쉴드를 전개하는 마법사의 등 뒤로 조용히 들어갔다.
산발적으로 조를 이뤄 활동하는 두 명.
두 명 정도는 크게 주목받지 않고 잘라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처음에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두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해 볼까.’
전력으로 검기를 끌어냈다.
굳이 밖으로 줄줄 흘리지 않은 채 차분히 칼 그 자체에 갈무리했다.
[특전: 암흑을 발동합니다.] [공격력이 35% 상승합니다.] [방어력이 50% 상승합니다.]
- 쿵!
가장 가까운 발리스타에서 발사된
쇠창이 쉴드를 가격했을 때,바로 뒤에서 마법사를 대각선으로 내려 베었다.
약간이나마 신경이 분산된 사이에 가한 공격이 치명타.
마법사는 뛰지도 눕지도,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단 한 번에 쉴드가 깨져 나가며 그의 몸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바로 옆에 서 있는 다른 마법사가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하는 사이에 칼을 옆으로 휘둘렀다.
어두운 섬광이 맑게 피어났다.
뒤로 몸을 뱉 사이도 없이 칼을
휘둘렀고,깨끗이 절반으로 잘린 마법사의 허리 위가 아래로 스르르 흘러 떨어졌다.
발사되지 못하고 맺혀 있던 불꽃 마법이 지팡이에서 터졌다. 피해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다.
[화염 저항이 발동합니다!]
[지혜가 매우 높습니다.]
[화염 저항에 추가값이 큰 수치로 보정됩니다!]
마법사의 피도 불꽃도 그 자리에 툭툭 털어냈다.
“와아아아아!”
“그분이 오셨다!”
살아남은 주변의 연합군 병사들이 마치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듯이, 발작적으로 함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내 존재를 보고 사기가 올랐다고 해야 하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저번 회전에서 지나치게 눈에 띈 듯하다.
적 지휘관 두 명을 혼자 베었으니 당연한 건가.
너무 시선을 끈다면 마법사들의
협공을 당할지도 모르는데,조금 곤란해졌다.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초록색 빛을 한 손으로 홉수하며,옆에 쓰러진 철인을 밟고 올라가 슬쩍 전장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