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아무 대가 없이 (20)
불길이 스쳐 지나가면서 한 번에 수십 명을 태웠다.
하얀 냉기가 병사들의 숨구멍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지만 수백 수천을 쓸어버리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지,마법사들도 힘겨워 하고 있었다.
얼음과 불의 향연에 얼어붙었던 병사들도,동료의 죽음을 넘어서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주제넘게 끼어든 마법사들을 넘어
서면 제국 수도는 함락되고 전쟁은 일단락된다.
그 도약이 병사들의 공포를 씻고 흥분 상태로 몰아넣었다.
나를 알아보고 상기된 표정으로 함성을 지르는 인간들도 있다.
첫 기습에서 일방적으로 휩쓸리고 있지만,숫자가 이쪽이 압도적이다.
생명의 교환비는 터무니없지만, 전체적으로 혼전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상황이다.
그 사이를 내가 누비면 된다.
‘질주.’
물론 나는 이제 이 싸움에 더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관성이다.
죽인다,라는 관성.
흡수한다,는 관성.
개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달리는 것처럼 정도正道 외도外道 따위는 알 바 없이 눈앞의 큰 흐름에 몸을 맡긴다.
지금까지 허무하게 싸워 온 것도, 아이작에게 철저히 기만당한 것도 전부 잊고 싶었다.
마법사들의 관심이 내게 집중되면
곤란하겠지만.
다행히 워낙 전장이 넓은 탓에, 크게 이쪽에 시선이 쏠리지는 않는 듯하다.
다음 타깃은.
허공을 관찰하기 위해 빙빙 도는 마법사들의 패밀리어가 보였다.
마법사들과 이어져 있는 매.
자신을 잃어버리고,태어날 때는 없었던 목줄과 고삐에 감긴 채로 제 시야를 공유하는 비극에 처한 것들 이다.
새들은 온몸이 날개지만 인간의 조종을 받는 탓에 하늘을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궤도를 절뚝인다.
“사격!”
제대로 교육을 받은 건지,근처의 궁수들이 일제히 패밀리어를 향해 사격을 가했다.
화살이란 화살은 공중의 과녁에 일제히 박혔다.
정신이 장악당한 채로 비뚜르게 날던 새가 온몸에 화살에 꽂힌 채 빙그르르 아래로 떨어졌다.
원래의 비행 실력대로라면 맞지 않았을까.
마지막 순간 매는 지배를 벗어난 듯이 눈을 한차례 반짝거린다.
화살에 빼곡이 꿰인 새의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패밀리어가 죽는 순간 마법사도 약간의 타격을 받는다.
강가에 숨어 쿨럭거리는 기척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보라색 로브를 걸친 마법사가 말 한 마디 없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 서거걱!
미리 지팡이에 저장해 놓기라도 한 듯,날카로운 얼음송곳 열 개가 허공에서 솟아나 나를 향해 날아 들었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얇은 얼음송곳들은 드워프가 만든 갑옷 곳곳을 뚫고 들어왔다.
하지만 대부분은 뼈와 뼈 사이로 허무하게 통과.
“어.? 어어.r
몸 곳곳,특히 마법사의 개인적 취향인지 배 주위에 다섯 발이나 되는 얼음송곳을 꽂고도,내장이
얼어붙지 않은 나를 보고 보라색 로브의 마법사는 경악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몸을 덜덜 떨며 나무에 등을 붙였다.
그대로 앞으로 뛰쳐나가 침엽수와 함께 목을 잘랐다.
잘린 침엽수는 비스듬히 옆으로 쓰러졌고,통째로 잘려 나간 목에서 뿜어진 피가 날카로운 초록 잎들을 타고 흘렀다.
뼈에 맞은 두 개의 얼음송곳에서 뒤늦게 냉기가 전해졌다.
전장 위를 비행하는 새 몇 마리가
목줄이 풀려 하늘 저 멀리로 날아가는 게 느껴졌다.
[결빙 Lv.3을 흡수.]
[질풍 Lv.3을 흡수합니다!]
아까 두 명의 마법사를 죽인 뒤 경험치만 올랐던 스킬들이다.
방금 죽인 녀석을 기점으로 해서 레벨이 한 단계 올라갔다.
정수를 모두 흡수했을 때였다.
불바람이 점점 내 쪽으로 번지고 있었다.
아까처럼 불을 담당하는 인간과,
바람을 담당하는 인간이 함께 조를 이룬 것 같았다.
불길은 점점 범위를 넓혀 가면서 병사들을 덮치고 있었다.
근처에 마법사에게 대응할 만한 병력도 없이,가운데 밀집해 끼어 있는 장창병 부대가 산 채로 불에 타들어 가며 울부짖고 있었다.
바닥을 구르고, 서로에게 수통을 부어 갔지만 역부족이었다.
활활 일어나는 불 가운데로 뛰어 들었다.
두 마법사들은 불쾌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중얼거렸다.
“저놈이 미쳤구나.”
“살살 해 줬더니 감히.
하지만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말투 아래 희미하게 깔린 공포가 분명히 느껴졌다.
바람이 및었다.
一 후와아아악!
사람 머리만 한 불덩이 둘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수백 명을 뒤덮은 불길에 비하면 크기는 작았지만,그만큼 압축된 강렬한 기운이 응집되어 있었다.
그대로 맞으면 쇳덩이라도 폭발을 일으키며 녹아 버릴 힘이었다.
“다들 비켜라.”
적당히 몸 전체를 가릴 법한 방패 하나를 주웠다.
겉이 까맣게 그을렸지만 아직은 쓸 만한 녀석이었다.
[포스 실드 Lv.4를 발동합니다!]
루-름을 수송하던 마법사.
알로히스에게 흡수한 스킬이다.
이미 구현된 형形에 포스 실드를
덧씌워 발동하면,그저,아무것도 없을 때 구현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효율의 방어력을 보장한다.
이것도 아이작이 내게 가르쳐 준 방법이다.
〈마법은 세계를 구성하는 매질을 말랑한 상태로 만들고,그걸 빚어 내는 일.〉
〈세계를 추상화하고,다시 입맛에 맞게 구체화한다.〉
〈하지만 아케인 하트와 상상력을 동시에 갖춘 녀석은 무척 드물지. 그 탓에 전형(오스노브)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화염구라든가. 얼음
미사일이라든가.〉
〈너는 특히 상상력이 부족하니까, 새로운 걸 하려고 하지 마라. 그냥 뭔가 덧씌울 걸 마련해라.〉
지금도 녀석이 떠오르는 게 몹시 우스웠다.
아무 대가 없이 이용당했다고만은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희미하게 올라오는 미련을 옆으로 털어 냈다.
모서리만 금속판.
나무를 압축한 이후 코팅한 것에
불과한 방패 본체가,
- 과광!
이글이글 타오르는 직경 1미터의 불덩어리를 간단히 쳐냈다.
튕겨진 불덩이가 허공으로 날아가 폭발했다.
밀집된 장창병 무리에 떨어졌다면 한순간에 쉰 명은 증발했을 법한 강렬한 폭발이었다.
화염구를 쏘아 낸 마법사들 역시 불티와 충격파에 뒷걸음질 쳤다.
- 펑!
또다시 나에게 날아오는 마법을 튕겨 냈다.
일렁이는 뜨거운 공기 속에 바로 앞으로 뛰어나가 마법사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이. 이이.!”
앞으로 뻗은 지팡이에서 불꽃이 폭발했다.
하지만 검기는 그 불꽃을 투과해 지나,처음 얼음송곳을 시전했던 마법사의 배를 찔렀다.
마법사는 배에 칼이 박힌 채 털썩
무릎을 꿇고 몸을 경련했다.
옆에 있던 마법사가 이를 악물고 나를 향해 지팡이를 겨눴다.
“중력 강화.”
- 쿠궁.
갑자기 몸을 무언가가 강렬하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힘이 발을 꽉 붙잡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억지로 발을 떼어 보려고 했지만 바로 되지는 않았다.
“제법이군.”
내 두 발을 땅에 묶어 놓은 채, 자신은 뒤로 미끄러져 도망가려는 다른 마법사를 향해 허리를 힘껏 돌린 힘으로 칼을 내던졌다.
- 째애앵!
중력 마법의 힘은 내 하반신에만 작용했다.
칼은 도망가던 마법사에게 날아가 두개골을 그대로 꿰뚫고 한참을 더 날아갔다.
머리에 커다란 구멍이 난 인간은 그대로 죽었다.
[중력 조작 Lv.l을 흡수합니다.]
빛을 다 빨아들인 시체에서 손을 뗐다.
주위를 돌아봤다.
불길이 그치자 병사들이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게 느껴졌다.
“전 방향에서 마법사를 쏴라!”
합성궁을 든 병사들이 재어 놓은 시위를 힘껏 당겼다.
이백 명의 병사가 한 명의 인간을 겨냥하는 모습만으로도 서늘함이 느껴졌다.
“발사!”
깃이 달린 빗줄기가 단 한 명에게 쏘아졌다.
- 슈슈숙!
- 슈숙!
퍼붓는 화살비에 부담을 느낀 듯 마법사들이 다시 뒤로 숨었다.
그저 운이 좋아서 아케인 하트를 타고났을 뿐인 인간들.
사선은 이미 몇 번이고 넘어서, 전투 경험이라면 그런 마법사들을 압도하는 기계화 보병들이 사냥을
시작했다.
설령 그 마법사가 상대라도,언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직감으로 알고 있는 베테랑들은 산개했다.
지휘관의 명령 따위는 필요 없는 단독 행동.
몸이 불에 타고,얼어붙고,번개에 지져져서 실신하더라도.
몸 곳곳을 강철로 대체한 병사의 돌진은 로브 속 인간들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죽어라,마법사!”
처음으로 연합군에 의해, 한 명의 마법사가 목숨을 잃었다.
잘린 팔꿈치에서 쏘아진 투창에 허벅지를 맞은 뒤,회전 장치가 부착된 철퇴에 팔다리가,두개골이 계속해서 반죽처럼 으깨어진다.
- 퍼버버벅!
화살에 화살이 겹쳐,전신에 꽂힌 마법사가 퍼덕거리지도 못한 채로 숨이 끊어졌다.
죽은 마법사가 쓰러진 자리,다시 한 번 수백 발의 살이 꽂혀 피에 젖은 땅 위에서 부르르 떤다.
마법사들이 진작 내려와,군대와
함께 활약하는 게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쥬라의 마법사들은 왜 군대와 함께 싸우지 않는 거지? 부대마다 한 명씩만 딸려도 훨씬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을 텐데.〉
〈아케인 하트를 갖고 태어난 놈은 자기가 선택된 인간이라는 사실에 쉽게 경도된다. 보조자로서의 자신 따위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지.〉
매 순간마다 녀석이 떠오른다.
머리를 흔들어,억지로 떨쳐내듯
싸옴에 집중했다.
둘,넷, 여섯.
굳이 연합군을 도와주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죽일 만한 가치가 있는 쪽이 아쥬라의 마법사들일 뿐이다.
일반병 1만을 죽여 봐야 빛 한 점 나오지 않으니까.
- 팟!
시체를 밟고,중량을 실은 쉴드로 마법을 튕겨 내고,화염에도 영향 따위는 받지 않은 상태로.
우측의 마법사 여덟을 베어 냈다.
내가 처음 그들이 기척을 죽인 걸 발견하지 못했던 것처럼,그들도 내가 기척을 죽이고 접근하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처음 나타났던 마법사들 가운데 스무 명이 죽었다.
거기 맞선 연합군의 피해는 대략 1만 정도.
철인 한 기가,마력을 소진하고 온몸이 화살에 꿰뚫린 마법사의 머리를 거대한 손으로 꽉 쥐었다. 바삭거리는 소리가 강렬하게 울려 퍼지며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 정도면. 별것도 아니잖아! 우리가 이겼다!”
“마법사들을 이겼다!”
“아쥬라의 마법사들을 이겼다!”
“와아아아아!”
1만 대 20.
한 명이 오백을 살해했다.
그 가운데 내가 여덟을 죽였으니, 사실 교환 비율은 1 대 800이 훌쩍 넘는다.
그 교환비를 어떻게든 잊고 싶은 듯이 병사들은 동료의 시체 위에서 함성을 질러 댔다.
어쨌거나,당장 수도를 지키러 온
아쥬라의 마법사들을 모두 죽였다.
자신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했거나 수도 따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본 마법사가 많았는지는 모른다.
추가적인 파견이 있을지 몰라도一 일단 수도 진입은 성공이다.
황실의 비역이란 곳은 뒤져 볼 수 있겠지.
최소한 눈앞에 있는 루-름은 먹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 휘이이이
‘하늘’에서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무심코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하는, 나른할 정도로 깨끗하고 부드러운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