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아무 대가 없이 (22)
고통의 바다 위에서 제정신으로 서 있는 것은 오직 나 혼자.
- 휘이이이잉!
나는 하얀 가루를 날리는 바람을 반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 와중에도 만 명은 되어 보이는 인간들이 고통에 물어뜯겨 비명을 지른다.
상상할 수 없는 환각에 사로잡혀 자기를 찌르고,상대를 찔러 가며 벌벌 떨며 발악한다.
고통의 최대화를 철저히 목표한 대량 살상 무기.
이것이. 마법사라는 건가?
마법사는 이렇게까지 터무니없는 존재여도 좋은 것인가?
[질풍 Lv.5를••••••.]
‘마법 장전,더블 캐스팅
[질풍 Lv.5를 발동합니다!]
스무명의 마법사에게 흡수해서 레벨 5로 올라간 바람 마법에 다시 한 번 구조를 겹쳐 올린다.
이미 자연스러워진 이중영창.
마력 소모가 몹시 크다는 단점이 있지만 높은 지혜 수치 덕분인지 오히려 여유가 느껴진다.
거듭된 정수 흡수로 희귀 등급에 달한 질풍 마법은,기존에 구축된 바람을 탐욕스레 타고 올라 폭풍에 가깝게 진화한다.
- 휘이이이이잉!
전장 전체를 뒤집을 능력은 없다. 하지만 한 점에 집중한다면.
- 피이이익!
허공에 떠 있는 두 명의 마법사를 노리고,죽음의 가루를 가득 안은 풍창風槍이 날카롭게 던져졌다.
- 히에에에엑!
가루가 위쪽으로 올라오려 하자, 두 마법사가 깜짝 놀라며 뒤로 한참을 물러갔다.
고통 속에 죽은 수만 명의 시체 위에 내가 서 있었고,두 마법사는 허공에 떠서 나를 노려봤다.
하얀 가루를 뿌리던 흑발 남자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눈빛만으로 나를 찢어발길 기세.
음성마법이 시전되는 상태에서, 꼴사나운 비명을 수만 명에게 모두 들려줘 버린 것이다.
“이. 이이이.
생각보다도 더 분노하고 있다.
안전한 곳에서 킥킥거리며,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이 상황을 통제하던 절대적 입장이 흔들려서일까.
“호오. 전사가 있었나.”
바람만 쏘아 내던 다른 마법사가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백색 가루도,그걸 나르던 바람도 모두 멈췄다. 두 마법사의 시선은 내게 집중됐다.
바람에 거꾸로 걸어 나간 건 역시 자살에 가까운 행동이다.
하지만 어차피 이번 생에 그렇게 큰 미련은 없다.
이들과 한번 전신전령으로 싸워
본다면.
내 실력을 가늠할 수 있겠지.
발을 돌려 도망간다 해도,어차피 저들에게 발각당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쓰러지면 최소한 4만 명의 시체 위에 함께 쓰러지는 것.
적어도 외로울 일은 없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흑발의 남자가 지팡이를 내밀었다.
“탐색(시력의 헌신).”
“속박(돌의 농도).”
“약화(취약점의 순도).”
말이 되지 않는 기괴한 글자들이 허공에 떠오르며 나를 구속했다.
장난처 럼 흩뿌려지는 삼중영창.
이 세계는,나보다 저 구부정한 남자의 호소를 훨씬 잘 들어주는 모양이다.
“터져라.”
- 콰광! 콰광! 콰광!
짧은 적발의 남자가 부린 바람이, 내 근처로 모두 몰려들어 갑옷을 타고 흘러내리듯 폭발했다.
‘포스 실드. 더블 캐스팅.
드워프가 제작한 풀 플레이트에 두 겹으로 포스 실드를 두른다. 호화로울 정도의 방어.
하지만.
“계속 터져라.”
- 콰과과과과과광!
조금의 성의도 없는 언령言雲에,
나를 둘러싼 마력은 지독할 정도로 폭발을 거듭한다.
속박을 건 채로,사방을 둘러싸고 계속되는 폭발인 탓에 날아갈 곳도 없다.
발이 묶인 채로,사방에서 치열히 공격을 당하는 형태.
한 번 한 번의 폭발이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다.
성급한 돌격이었지만,나름대로의 이유는 있다.
어차피 이번 생은 끝.
다음 생을 준비해야 한다.
시작하는 곳은 에라스트.
검주는 아직 무리겠지만,그곳의 유령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인가?
레이 커크를 살해하면 나타나는 ‘내사과장’을 처리하고,루비아를 정말 에라스트의 영주로 앉혀 볼 수 있을 것인가?
그걸 여기서 판단해야 한다.
나는 허공에 뜬 인간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너희는. 아쥬라의 탑주들이냐?”
“그렇다.”
내 주위에 폭발을 일으키고 있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무죄’의 탑주 엘란드.
나는 ‘천둥’의 탑주 화인 알 굴.”
“너희에게 물어볼 게 있다.”
“얼마든지.”
녀석이 슬며시 폭파를 느슨하게 풀어 줬을 때였다.
[투창 Lv.3을 발동합니다!]
- 째애앵!
나는 구부정한 자세의 남자에게 냅다 창을 내던졌다.
최대한의 힘을 던져진 창은 수십
미터의 거리가 없는 것처럼 날아갔다. “이런!”
- 까앙!
하지만 꼿꼿한 남자가 지팡이를 마치 검처럼 휘둘러 창의 가운데를 힘껏 쳐냈고,창은 빙그르 돌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져 땅에 꽂혔다.
애초에 투창이 목적은 아니었다.
‘포스 실드. 더블 캐스팅
나는 갑옷에서 완전 해제한 포스 실드를 허공에 계단처럼 전개해서 앞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질주.’
- 팟!
잿빛 기사의 결계에 갇혀 있을 때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놀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원론적으로,누구나 계단 두 개만 있으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놈들에게 도전한 것은 아니다.
[해당 행위를 ‘곡예’로 판정.] [체술 Lv.7이 보정됩니다.]
[아드리안 무투武圖 Lv.2가 추가 보정 됩니다.]
[특전: 암흑 발동.]
- 공격력이 35% 증가합니다.
[검기 Lv.3 최대출력!]
[산성 Lv.5.]
[기합 Lv.3"•.]
[공격력이.]
‘발도.’
가볍게 쳐진 기본 실드를 향해, 모든 스킬을 중첩한 일섬一閑.
- 화악!
걸렸. 나?
묵직한 감각과 함께 새빨간 피가
허공에 솟구쳤다. “끄아아아악!”
- 툭.
아쉽게도.
걸려든 건 구부정한 남자의 한쪽 다리뿐이다.
“흑,끄흐흑. 히힉. 헤헤헤. 으하하하하.!”
목을 노려 칼을 휘둘렀지만 힘껏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보니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모양이다.
- 과과광!
맑게 갠 하늘에서 천둥과 함께 무거운 벼락이 떨어졌다.
내가 아니라 아래를 노리는 공격.
강렬한 벼락에 포스 실드는 즉시 흩어졌고,나는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하고 시체로 가득한 땅으로 다시 추락했다.
떨어진 즉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미 마법사들은 허공 100미터.
칼로 벤 순간,붉은 머리 남자가 구부정한 남자의 뒷덜미를 낚아채 위로 올린 모양이었다.
- 휘이이잉.!
붉은 머리 남자는 이미 바람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다.
준비는 만반.
이제 녀석들에게 도달할 방법은 없다. 끝인가.
- 콰광!
주위의 마력장을 적에게 완벽하게 장악당한 상태.
더 이상 쉴드를 만들어 낼 수조차 없다.
- 콰광! 과광! 까강!
드워프가 만들어 준 갑옷이 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하얀 뼈가 드러났다.
“호오.
연합군에 의해 발각되어 버릴지도 모르지만,이미 제정신을 가지고 이쪽을 볼 정도의 녀석은 없다.
모두 필사적으로 도주할 뿐.
거리도,방향도,정신도 나를 보고 있을 만한 것은 아니다.
“기괴한 존재로다. 리치도 아니고, 죽음의 기사도 아니고. 인간들과 함께 싸운다니?”
- 뿌드득!
금이 간 뼈 곳곳이 부러진다.
체력 수치가 내려간다는 상태창이 연달아 눈앞에 떠오른다.
끝은 결국 시간문제.
- 콰광!
폭발과 함께 갈비뼈 두 개가 다시 부러진다.
허공이 폭발하고,제 주인을 벤 주위의 무기들은 춤을 추다 바닥에 꽂힌다.
쇄골에도,골반에도 쩍쩍 실금이 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가져갈까.”
“내 다리를 가져간 놈이야. 내게 넘기라고.”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는 다리로 생색내지 마라.”
“대가를 치르면 되잖아.”
“뭘로?”
“뭐든지. 데려가서 몇십 년이고 실험체로 사용해 봐야겠어.”
팔뼈도,다리뼈도 단 한 치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땅으로 내려온 붉은 머리 남자가, 지팡이에 마력을 실어 내 목뼈를 잡아 들려 할 때였다.
거부감에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대부분의 뼈가 부서진 상태였다.
손짓은 마치 첫 번째 생의 어설픈 스킬들처럼 허공을 갈랐다.
붉은 머리 남자는 지팡이에 힘을 실어 내 두개골을 겨냥했다.
“한 대 맞고 가야겠군.”
- 부응!
강한 타격 마법을 실은 지팡이가 머리를 향해 휘둘러지는 순간.
- 펑!
〈천둥〉의 탑주 화인 알 굴은 강한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물러섰다. “마. 말도 안돼.
“뭐야? 왜 그래? 웬 헛짓이야.”
“때릴 수가. 때릴 수가 없다.”
“뭔 헛소리야? 백 년 넘게 살더니 노망이 들었나. 아무것도 없잖아?”
“아니. 안 된다.”
“장난치는 거 아니야?”
마법 병기 이스카리옷의 개발자, 〈무죄〉의 탑주 엘란드는 공중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탑주는 완전히 무력해진 내 앞에 서서,지팡이를 들고 머리를 향해 내려쳤다.
- •부.
내리치던 지팡이가 허공에서 다시 위로 올라갔다.
“뭐야,이계?”
마치 실 달린 장난감 인형을 누가 조종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 인형 자리에 아쥬라의 탑주가 들어간다면.
대체 누가 그런 자들을 인형처럼 조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였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질 둣, 아름다운 미성美聲이 텅 빈 허공에 또렷이 울려 퍼졌다.
“안 그래도 머리 나쁜 녀석이다. 거기서 더 때리면 지금 누구더러 그걸 감당하라고 하느냐?”
“뭔. 크헉!”
낯선 목소리의 등장에 허공으로 솟구치려 했던 두 남자가 곧바로 땅 아래로 처박혔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숲 쪽을 향해
탑주들이 고개도 들지 못한 채로 거의 동시에 말했다.
“혹시. ‘뱀’이십니까?”
숲속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경멸이 가득 들어찼다.
“서클의 말석도 못 들어갈 것들이 탑주라니. 무능한 탓에 뱀 새끼의 힘까지 빌리려 하는 거냐?”
“무슨.!”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난 두 명의 탑주가 이를 악물고 제 지팡이를 앞으로 겨눴다.
그 끝에는 그 어떤 까마득히 높은 기준이라도 우습게 충족할 것 같은
흑발 흑안의 미남이 서 있었다.
가만히 숨만 들이쉬어도 주위를 어지럽게 만들 만한 미남이 앞을 보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무죄의 탑주 엘란드는 그 표정을 보자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자신은 지금 당장 자살해야 하는 죄를 지은 게 아닐까?
“저. 뭐 때문에.?”
“홀리지 마! 매료다!”
하지만 엘란드는 이미 동료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미남은 그걸 왜 모르냐는 둣이 짜증을 냈다.
“머리색이 나랑 같잖아.”
- 화르르!
엘란드의 긴 검은 머리에 새까만 불꽃이 피어올랐다.
“흐. 흐거헉!”
엘란드는 어찌나 놀랐는지 항상 구부정한 허리마저 쭉 펴고 머리에 붙은 불을 황급히 꼈다.
하지만 이미 홀랑 다 타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힘을 합쳐라! 저게 신이든 뭐든 죽여 버린다!”
정신을 차린 두 탑주가 지팡이를 맞대는 순간,착 가라앉은 표정의 미남자는 간단히 맺은 수인만으로 그 마력을 흩어 버렸다.
“말도 안 돼.
“놀아 줄 수도 있지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나를 제약한 여신들을 원망해라.”
- 푹!
미남자는 마탑주들의 눈앞으로 나타났다.
아기에게서 사탕 빼앗는 것보다
쉽게 지팡이 둘을 빼앗아 든 뒤, 두 마법사의 두개골에 서로 교차해 꽂아 넣었다.
아쥬라의 이름 높은 마탑주 둘은 선 채로 눈을 뜨고 죽었다.
미남자는 지팡이를 뽑았다.
누렇게 흐르는 뇌수를 획 바닥에 뿌려 내고 계속 쓰러져 있던 나를 보고 말했다.
“시간 없다. 11만 명 다 죽었으면 더 오래 현신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중간에 끼어들었어? 쯧쯧쯧.”
의식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간신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정말? 나 본 적 없다고? 천천히 다시 한 번 봐라.”
요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 였다.
수많은 자의 철천지 원수일 것 같았고,원수를 죽이겠다며 칼을 품고 간 협객이 그 기운에 홀려서 충성을 맹세할 것 같았다.
“너는.
조금 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분명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주 흐릿하게.
마치 꿈속에서처럼 본 적이 있는 녀석이다.
“말파스와의. 계약.
내 손목을 잡고 까마귀에게 인도했던 남자다.
“이제야 알아보니 서운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