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너희는 모래처럼 (1)
당황스러웠다.
마법과 관련된 전직이 생길 거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칼의 길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황실의 비역에서 루-름을 찾아서 전직하더라도,기사 따위로 전직할 생각이었는데 리치라니.
생각해 보면,방금 전 어마어마한 마법사 스킬을 홉수한 덕에 전직 가능 직업이 추가 해제된 듯하다.
일단 리치 전직의 장점을 차분히 살펴보기로 했다.
[리치 Lich(희귀)]
그에게 죽음은 입는 옷이고 항상 두르는 띠와 같습니다. 그의 발은 악한 일을 저지르려고 치달으며, 손은 사특한 계교를 꾸미고,입은 정의를 비웃습니다.
- 리치는 강한 마법사가 인간성을 이끼처럼 지워 버리고 오직 힘만을 쫓을 때 나타나는 한 형태입니다. 자신을 리치로 만드는 데는 최소한
천 명 이상의 제물이 필요합니다. 조금 고전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냉기 마법을 원한다면 리치는 몹시 탁월한 선택입니다.
- 종족,스킬 수치,지혜 수치가 충족되어 전직이 해제되었습니다.
그 아래로 빼곡하게 직업 특전이 나타났다.
[특전: 전직 시 자동 취득합니다.]
- 1. 타락
선업을 가진 상대를 지정합니다. 해당 상대의 성향이 악으로 기울어질 경우 [타락] 판정이 주어집니다. 성공적으로 타락시킬 경우 상대는 당신에게 철저히 종속됩니다.
- 1. 강탈
손이 닿는 대상에게서 강제로 생명력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냉기 속성에 저항이 없는 상대는 저절로 마비될 수 있습니다.
- 1. 고통
당신은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대신 당신의 제물들이 강한 고통을 느끼는 만큼,당신의 지혜 수치는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 1. 파열
상대를 아래에서 위로 관통하는 뼈를 소환합니다. 관통이 완벽하게 이루 어질 경우,일시적으로 다음 마법의 치명타 확률이 상승합니다.
- 1. 냉기
당신은 그 존재만으로도 주위를 서늘하게 만듭니다. 당신 주위에 냉기 파장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얼어붙은 상대는 당신에게서 추가 피해를 받게 됩니다.
[페널티: 해당 직업을 유지하는 동안 지속됩니다.]
- 1. 선업을 쌓은 인간을 하루에 하나씩 희생시켜야 합니다. 희생시 키지 않을 경우 체력이 영구적으로 하락합니다.]
시스템이라는 게 우습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리치는 마법사가 인간을 버리고 되는 직업이다. 인간을 버렸는데, 직업 설명은 과하게 느껴질 정도로 인간 중심적이다.
누구더러 보라고 하는 건지 싶은 묘한 기분이 든다.
어쨌건 리치는 직관적으로 슬쩍 봐도 준수한 직업이다.
그야말로 인간이 규정한 악.
격퇴해야 할 사도邪道의 무리.
그런 환상을 모아 놓은 것 같은
직업이다.
하지만 권능만큼은 당연히 몹시 매력적이다.
게다가 괄호 안에 있는 희귀 직업 이라는 말이 시선을 끈다.
검사나 기사,사냥꾼 같은 것보다 숨겨진 힘이나 성장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이야기다.
매일 한 명씩 인간을 살해한다니 간단하지 않은 조건이지만,기꺼이 선택할 가치가 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전직한다.”
그때 였다.
- 띠링!
[루-륨이 부족합니다.]
또 이 현상인가.
생각해 보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저번과 같은 현상.
리치Lich라는 직업의 전직 권한이 풀린 것뿐.
정보가 들어온 것에 불과하다. 까마귀 인형에서 빼앗은 액체로
실제 전직은 할 수 없었다.
아쉬움을 달래듯 마법사의 지팡이 두 개를 차분히 챙겼다.
스무 개가 넘는 지팡이가 전장에 굴러다니고 있었지만,전부 하나씩 챙길 여유는 없었다.
두 탑주의 것이 압도적인 가치를 갖고 있겠지.
감정 스킬이 없는 탓에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지만.
[부패의 줄기]
지팡이 옆에 새겨진 이름 정도는 읽을 수 있다.
소유자의 구부정한 자세만큼이나 이리저리 비뜰어진 녀석이다.
길이는 140센티미터 정도.
마치 나무의 뿌리로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얽히고설켰다. 디자인이 아닌,재료의 형태를 그대로 살린 것처럼 보였다. 재질을 알 수 없는 몇 개의 링이 중간중간에 끼워져 있었다.
- 스응.
가볍게 휘두르자 음침한 소리가 허 공에 울려 퍼졌다.
독이 나오는 장치라도 있나 싶어 이모저모로 뜯어보았지만,특별히 여는 방법을 찾기는 힘들었다.
다음은 그보다 훨씬 더 긴,160센티 미터에 달하는 지팡이였다.
검처럼 허리에 차고 있던 지팡이.
땅이었다면 바닥에 질질 끌려서 불편했겠지만, 지팡이의 소유자는 상공 50미터에 오연히 떠 있었기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다음은.
[달빛축성]
다른 탑주의 지팡이다.
곧게 뻗은 단순한 형태였다. 가죽 손잡이 위의 커다란 링은 레이피어 같은 느낌조차 풍겼다.
나무 안쪽의 특별한 금속은 굳이 탐지 스킬을 쓰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스릉.
천둥의 탑주가 뽑지도 못한 얇은 블레이드가 드러났다.
새로 드러난 칼날 아래의 삼각형 보석이 우아한 패턴을 만들었다. 은빛 칼날이 광원 없이도 스스로 빛나고 있다.
그리고 칼자루에는,
더듬더듬 읽을 수 있는 고대어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트로핀 나냐우에게 홉수한 Lv.3의 고대어가 발휘됐다.
“린. 트. 부. 름?”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존재에게 들은 단어를 마주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을까.
처음 죽어 가는 기스-제-라이에게 그 단어를 들었다.
이후 아이작이 해 준 설명으로, 가장 강한 용종種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용.
이미 멸망한 종족이라고 했다.
용의 거처에서 찾은 지팡이라도 되는 건지,아니면 천둥의 탑주인 화인 알 굴이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관심이 있는 건지 모른다.
어쨌거나.
보관할 가치는 차고 넘친다.
지팡이 두 자루를 등에 묶었다.
부서진 까마귀를 바라봤다.
어둠보다 새까만 까마귀의 잔해가 햇볕에 짙게 말라 가고 있었다.
어둠의 향香이 짙어지는 착각마저 일어난다.
온갖 주술을 사용하고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조언을 하며,처음부터 나를 속였던 까마귀는 거짓말처럼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특별해 보이는 재료도 없이,그저 부서진 채 버려져야 할 쓰레기밖에 남지 않았다.
잠시 바스러진 날개를 바라보다 허공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전직은 가능하다.
예전에 미뤄졌던 세 개의 선택이 자신을 선택하라는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검사. 기사. 사냥꾼.
짧은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전직을 미루고,루-름을 홉수한 뒤 리치나 다른 직업으로의 전직을 하는 방안도 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경험해 보았지만 제국 수도는 마경 그 자체. 어디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여유를 부릴 때는 아니다.
일단 지금 이 순간 최선의 무장을 갖추고 나서 진입해야 한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허공에 떠오른 반투명한 메시지에 손을 뻗었다.
- 띠링!
[전직을 시작합니다.]
[선택한 직업: 해골 기사]
선택은 간단하다.
원거리 무기를 쓰는 것도 아니다. 결국 선택지는 검사와 기사 중에 하나로 좁혀진다.
하지만 지금 당장 강해지는 건, ‘선禪’이나 ‘깨달음’ 따위의 특전을 가진 검사보다는 기사였다.
- 우드드득!
- 우득! 끄드드드득!
전신의 뼈가 부러지고,뒤틀리고, 다시 한 번 맞춰지고 있었다.
척추부터 가슴우리,팔다리 뼈대와
심지어 두개골까지 완전히 새롭게 구성되고 있었다.
- 끄드드드득! 빠직!
통각이라는 게 있는 녀석들이라면 수백 번은 넘게 기절했을 테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뼈가 꺾이고,다시 구성되는데도 당연하게도 그냥 좀 개운한 느낌만 들고 말 뿐이다.
한참 뼈 갈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동안 묵은 건지 회색이 된 햇가루가 아래로 부스스 흘러내렸을 때였다.
- 띠링!
[해골기사로 전직했습니다.]
[2차 직업입니다.]
[레벨 업 시 올라가는 스탯이 2로 증가합니다.]
[골격이 올바른 형태로 구성되며,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스킬: 지정 보호를 습득합니다.] [특전: 무장을 습득합니다.]
[특전: 기동을 습득합니다.]
[특전: 전투 전문가를 습득합니다.]
“이건.
전체 능력치의 퍼센트 상승. 전직이라는 건 생각보다도 훨씬 엄청난 보상을 안겨 주고 있었다.
대체 지금까지도 전직을 안 하고 뭘 한 거지 싶은 생각마저 든다. 후회라고는 한 톨도 되지 않았다.
몸은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그야말로 최적화된 느낌.
레벨 업을 했을 때 느끼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느낌이었다.
“•"이건가.”
낯선 성취감이 가슴을 뻐근하게 메웠다.
기사로의 전직은 성취했다기보다 제시된 것에 가까웠지만,존재의 절정에 이르는 것 같은 체험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진짜였다.
한순간의 폭발적인 스탯 상승에 의한一 새롭게 태어난 듯한 황홀함.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스킬: 해골마 소환을 습득합니다.] [현재 능력치를 환산 중.]
[영웅급 명마까지 가능합니다.] [전설의 주인공인 설화급,별도의 신격이 부여된 신화급을 제외하면 모든 말을 당신을 위해서 강제로 일어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애초에 설화급,신화급 말 따위는 들어 본 적도 없다.
지금까지 본 가장 강한 말은. 레안드로 후작이 아꼈던 거만한 흑마 정도인가.
어쨌건,지금은 아쉬운 대로 여기 있는 말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나는 수만 명의 시체가 깔려 있는
전장으로 걸어갔다.
눈을 뒤집고 입에 피거품을 물며 자해한 시체의 바다에 멀쩡히 죽은 말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단념하기는 싫다.
수도에 들어가기 전이라면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았다.
‘질주.’
- 팟!
연합군의 시체를 아예 다 지나서, 아이작의 작전대로 제국군을 포위
섬멸한 붉은 여우 평원을 향했다.
2만 기병대의 총대장이 타던 녀석 이라면. 그럭저럭 쓸 만하겠지.
오스칼의 시체가 어디 있었는지는 기억난다.
“.소환.”
습득한 스킬은 직관적인 사용이 가능하다.
- 스스숙.
시체에서 피와 살점이 연기처럼 떨어져 나갔다.
뼈와 안장,갑옷밖에 남지 않은
말이 푸른 눈빛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희귀 등급의 해골마를 소환하셨 습니다.]
[충성도: 낮음]
- 히히힝
썩 반가워하지는 않는 건가.
주인을 죽인 걸 알아보는 건지도 모른다.
그때 였다.
[해골마가 무의식적으로 다정했던 전 주인을 그리워합니다.]
[그와 비슷한 면모를 보여 준다면 해골마의 충성도는 더욱 올라갈 것입니다.]
오스칼과 비슷한 면모라.
외모를 흉내 낼 수는 없고.
근처에 놓인 긴 마상 랜스 하나를 주워서,창날에 검기를 불어넣고 강가에 있는 바위에 던졌다.
두 다리로 서서 던지긴 했지만, 분명히 오스칼에게 흡수했던 마상
창술의 응용.
창은 그대로 바위 안에 깊이 박혀 파르르 떨렸다.
이런 거라도 흉내 내 줘야지.
- 히힝!
막 일어난 해골마가 그걸 보고는, 내 쪽으로 다가와 올라타기 편한 자세를 취했다.
[해골마의 충성도가 올라갑니다.] [낮음 一 보통]
괜찮은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대로 남아 있는 안장에 가볍게 올라탔다.
[특전: 조련(리가 적용됩니다.]
높은 승마 레벨에 이어,특전까지 적용되자 녀석이 위에 올라탄 나를 한층 편하게 느끼고 있었다.
[충성도 상승 중.]
그 모든 걸 끝낼 때까지도 시체로 가득한 전장에는 까마귀 한 마리 맴돌지 않았다.
무죄의 탑주가 뿌린 백색 가루를 알아보는 건지도 모른다.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가볍게 말을 몰아 그대로 수도를 향해 움직였다.
건국된 이후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다는 제국의 수도.
발리스타나 투석기의 공격 따위는 웃으면서 튕겨 낼 정도로 단단하고
두꺼워 보였다.
도시 전체를 두른 성벽은 높이도 어마어마했다.
아직 1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데도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문으로 들어가려 할 때와 성벽을 부수고 들어가려 할 때의 기분은 전혀 달랐다.
곧 거대한 성벽의 돌 하나하나가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글거리는 화염이 저 벽에 적중 한다면 어떨까.
튕겨 내는 보호 마법이라도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
[마법 간파 Lv.3를 발동합니다!]
하지만,거대한 도시 전체를 보호 마법으로 두르는 건 무리인 건지.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의외로 성벽에 걸린 마법은 없다. 성문도 마찬가지.
이대로 부숴도 좋을까,생각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높은 벽 위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저기 부서진 허름한 갑옷을 얼기설기 꿰매 입은 기사였다.
‘누구지?’
얼굴 전체를 덮은 투구를 쓴 탓에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딘가 눌어붙은 시선이 명확하지 않은 불안을 부추겼다.
그 시선은 침략자에 대한 적의로 일렁이지도 않았고,공포를 담고 있지도 않았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담담하고 평온한 척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어딘가 미끈거렸고 비틀어져
있었다.
누더기 철갑을 입은 기사는 금방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 수도 성벽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기괴한 일이다. 모두 어딘가로 도망갔는지도 모른다.
황실 비역만 알아보면 그만이긴 하지만.
성문에 점점 가까워졌을 때였다.
- 끼이이이익.
성문이 열렸다.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여기저기가 움푹 들어가,녹여서 고철로 써도 될 만한 갑옷을 입고, 누렇게 바랜 투구를 쓴 기사들이 의욕 없이 걷는 말에 탄 채로 푹 고개를 숙이고 다가왔다.
허리에 찬 칼도 녹이 슬 대로 슬어 제대로 뭘 자르기나 할지 의문스런 것들이었다.
기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갑옷은 몹시 낡았다는 것 말고는 하나같이 모두 달랐다.
투구 역시 철저할 정도로 얼굴이 전혀 안 보인다는 것을 제외하면 마찬가지다.
- 다그닥.
그럼에도 그들의 체격은 기묘할 정도로 동일해 보였다.
무엇보다,의욕 따위는 없다는 듯 거의 절뚝거리다시피 발굽을 질질 끄는 검은 말들은一
하나같이 완전히 동일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가까워지자 기사를 태운 말들은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발작하듯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서른 마리 말은一 모두 방금 전 해골마를 일으키며 상상했던 대상.
레안드로 후작의 애마,미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