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62화 (262/458)

263화 너희는 모래처럼 (4)

- 우르르릉! 쾅!

없던 골짜기가 만들어지고,돌과 흙이 격류가 되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 위이이이잉! 위이잉!

굵은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마저 강한 바람에 묻혀 버린다. 번개가

간간히 하늘을 물어뜯는다.

세상이 온통 비다.

위에서 아래로,아래에서 위로.

산을 호수로 만들어 버릴 것처럼 비가 쏟아져 내린다.

왜 이렇게까지 쏟아져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고인 웅덩이에 물결이 치고,다시 물결이 치고,조금 더 빨리 내리는 방울이 늦게 내리는 방울을 쳐서 허공에 파문을 만든다.

비도 서로 속도가 다르다.

- 쏴아아아.

이 정도의 폭우라면.

전장에 쓰러진 수만 명의 핏물도 씻어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는 전장이 아니다.

- 달그락.

나는 좁은 관에 갇혀 있다.

아래도,옆도 막힌 좁은 관이다.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싶더라도, 여기가 어디인지마저 잊어버릴 수는 없다.

오랜만에 누운 좁은 무덤.

저번 생의 수많은 일이 물소리 섞인 꿈결처럼 느껴졌다.

땅에 떨어져 부서지는 비가 기억 한 방울 한 방울 같았다.

연합군의 철인들이,처음 목격한 기계화 보병들이,제국군 기병대장 오스칼이,네크론의 수하였던 르노 리드바렌이 땅에 닿아 부서졌다.

어떤 빗방울은 관에 닿았다.

연합군 지휘관 카린 크렉소르와 루이 클로드가,다시 만난 진네이 유베와 수도의 보석상 블랙베리가 관 근처에 닿아 부서졌다.

갈비뼈에,손뼈에,어깨뼈에 닿아 부서지는 빗방울도 있었다. 내가 속였던 늑대인간 브로디 발도프가, 잿빛 기사에게 루-름을 흡수당한 T&T의 시조 트로핀 나냐우가 뼈에 닿아 아프게 부서졌다.

부서지지 않는 빗방울도 있었다. 루비아와 레나,아이작이 그랬다.

그리고 후작.

레안드로 후작은 복제됐던 마지막 모습처럼,무수한 빗방울에 나눠져 나타났다.

몸에 닿아 흘러내리는 빗방울은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후작 최후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후작이 담긴 빗방울에 닿기 싫어 무심코 마법을 발동시켰다.

‘포스 실드. 이중영창. 실드.’

- 파밧! 파바바밧!

수많은 빗방울이 일제히 실드에 튕겨 나갔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돌아왔다.

세계는 다시 한 번 변주되었지만

나는 그대로. 특전도,마법도 모두 남아 사용할 수 있다.

- 번쩍!

하늘을 깨무는 번개가 예전처럼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번개에 제대로 맞아도 위험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었고,기묘한 친밀함마저 느껴진다.

천둥의 마탑주에게 뇌전 마법을 홉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아예,번개 정도는 맞아도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기에 그런

건지도.

‘상태창.’

허공에 반투명한 푸른 글자들이 떠올랐다.

[계승되었습니다.]

[68.94%.]

[동화율 70% 이하.]

[시나리오 변경이 반영됩니다.] [상점 권한을 계산합니다.]

[보호가 해제됩니다.]

[견습생 우대:〈사망 기념관〉을 더 이상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다음 특전이 사라집니다.]

- 네크로멘서의 연인(Hero)

허공에 뜬〈네크로멘서의 연인〉 이라는 글자가,희미하게 어른거리다 연기처럼 스러졌다.

메시지가 계속 떠올랐다.

[이름: ]

[해골병사 Lv. 1(259)]

[체력: 121]

[힘: 121]

[민첩: 121]

[지혜: 121]

[보너스 스탯: 5]

[달성한 전직 -〈해골 기사〉]

[해골 기사의 모든 특전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 기동성

- 무장

- 전투 전문가

- 초급 지휘관

- 해골마 소환

- 지정 보호

해골 기사로의 전직은,아이작이 까마귀에 모아 온 루-륨을 홉수해서 이루어졌다.

루-륨으로 인한 변화는 유지된다. 그런데 분명히 바꾼 직업이,예전 처럼 해골병사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특전과 스킬은 그대로. 이득은 전부 가진 채,다시 2차 전직의 기회가 주어졌다.

스킬창을 계속 확인했다.

[뇌전 Lv.5]

[다음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 마비,확산, 연쇄,마력 파괴

[마법 간파 Lv.3]

[중첩 증폭 Lv.2]

[마력 왜곡 Lv.l]

[마도 화학 Lv.3]

[독안毒眼 Lv.3]

[식물 재료 채집 Lv.2]

탑주들에게 흡수한 스킬과 특성, 아이작에게 얻은 각종 전술,주술 지식까지 당연한 듯 남아 있다.

〈리치〉로의 전직마저도 해제시킨 탁월한 권능들.

이대로 루-름을 계속해서 모으면, 그쪽으로의 전직도 가능해지겠지.

해골 기사로 전직하며 얻은 스킬 경험치 2만도 그대로다.

스킬 경험치 2만.

안타깝게도 정수 흡수 스킬이나

검기 스킬에는 사용할 수 없다.

반복적으로 사용했을 때 경험치가 오르는 스킬에만 적용되는 듯하다.

스킬 목록을 쭉 바라봤다.

일단,스킬들의 유용성을 하나씩 체감해 보고 나서 경험치 투자를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

다음으로.

빼곡한 스킬과 특전,압도적으로 오른 능력치.

하지만.

암흑 특전은 보이지 않는다.

말파스와의 계약은 끊어진 건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메시지가 계속 떴던 걸로 볼 때, 마왕과 계약 상태면 아무래도 나를 지켜볼 수 있는 것 같다.

까마귀의 가호가 놀라울 정도로 강하기는 하지만,처음부터 관음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내가 싸울 때마다 마왕이 강해지는 것도 꺼림칙하다. 정확한 내용도 모르는 계약에 묶인 것보다 이쪽이 차라리 낫다.

- 투두두두둑.!

실드 위로 멀리 비가 튕겨진다.

후작의 모습은 더 이상 빗방울에 담겨 있지 않았지만,굳이 마법을 해제하지는 않았다.

5레벨의 포스 실드.

무게를 싣는 것은 물론,반탄력을 주는 것도 가능하다.

누운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처음의 나는 상상조차 못 할 힘을 가지고 있다.

검술은 물론.

이제 어딜 가서도 마법사로 나를 내세우기에 부족하지 않다.

높은 스탯 상승에다,연구할수록

깊게 활용될 자잘한 스킬들까지.

예전보다 훨씬 입체적인 전투를 할 수 있다.

긴 삶이었지만,그 이상으로 거듭 강해진 것이다.

게다가.

2차 전직의 공통 특전으로,레벨 상승 시마다 스탯이 2씩 증가하는 건 여전하다.

성장 가능성까지 2배.

하지만 제국 황실에 저항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지금까지 별별 일을 다 겪었다고 생각했지만,이건 상상하지 못했다.

아쥬라의 탑주들에 이어,후작을 복사한 애벌레 서른 마리가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올 줄은.

외모뿐만이 아니다.

본신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호신강기까지 뿜어내고 있다.

순수한 검기로만 보면 나보다 위.

어떻게 그런 것들이 나타난다는 말인가?

운이 따른 데다,하나씩 상대해 그나마 둘이나 처리했다.

셋만 동시에 달려들었어도 손도 못 쓰고 당했겠지.

사실 두 마탑주조차도 내 힘으로

처리한 게 아니다.

자기희생이라는 황당한 인과로, 짧은 시간이나마 현신한 아이작이 살해해 준 것에 불과하다.

아이작.

잠시 고민에 빠진다.

그라스미어로 녀석부터 찾아가야 할까?

모든 걸 털어놓고,물어 가면서 그의 의견대로 움직여야 할까?

하지만 아이작이 처음부터 나를 철저히 기만한 사실이 떠오르자, 울컥하는 마음이 밀려오다가 다시 슬며시 사라졌다.

대신 궁금중이 들었다.

대체 왜 나를 위해서 희생했을까?

‘터무니없는 인과율’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내가 보아 온 아이작이 자신을 스스로 희생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회귀한다는 걸 확신하고 모든 걸 걸기라도 한 걸까?

다음 생의 자신을 위해?

어쩌면 당시의 아이작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회귀한 이후의 내 분노를 사기는 싫었을 테니까.

임기응변이었던 건지도.

일단은 그를 만나러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일단 아이작과 함께하면 지나칠 정도로 휘둘릴 가능성이 높다.

뻔뻔하게 행동하는 데다 나 정도는 금방 속여 넘길 수 있으니,중심을 못 잡고 말려들어 가는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차분히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첫 번째. 곧 일어나는 전쟁.

엠버,제국,연합의 강자들은 모두 초반부터 엠버에서 발이 묶인다.

그에 반해.

대다수의 인간은 긴 전선에서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벌인다.

아이작에게서 흡수한 풍부한 주술 지식 덕분일까.

그들이 공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압도적인 힘으로 한 번에 죽이면 공포와 절망밖에 뽑아낼 수 없다.

그 맛도 물론 좋지만 풍요로움이 부족하다.

엇비슷한 자들이 만드는 첨예한 싸움이라면.

흥분,광란,저항,아쉬움,기쁨, 초조,긍지,만족,비통, 멸시 같은 압도적으로 풍부한 감정들이 계속 만들어진다.

질리지 않는 풍성한 만찬이다.

어쨌거나,당장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째.

레안드로 후작은 살해당한다.

황실에서는 그를 명백한 걸림돌로 보고 있는 모양.

기스-제-라이의 암살에 관여해서, 근위기사단 이사밸을 잿빛 기사가 살해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다.

세 번째.

제국이 수도까지 밀리면 아쥬라의

탑주들이 등장하며,그들은 ‘뱀’을 의식하고 있다.

네크론이 섬기는 마왕,보티스와 높은 확률로 연관되어 있겠지.

네 번째.

제국군 총대장 르노 리드바텐은 마왕 보티스의 노예다.

종교재판관 르노 리드바렌.

루비아를 악마숭배자라고 몰아간 녀석은,온몸의 뼈와 피,내장이 검은 뱀으로 변해 뿜어지며 최후를 맞이했다.

열 번이 넘는 회귀 끝에,결론이 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인간 세계의 한 축,제국.

그곳 황실은 마왕 보티스에 의해 철저히 지배되고 있다.

혹은 완전히 결탁했거나.

결탁이라고 한다면 황실에 마왕과 격에 맞는 협상자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도달한다.

그게 누굴까.

그 정체를 알 수 없지만,황실을 위협할 때마다 등장하는 잿빛 기사 일지도 모른다.

어쨌건 당장 황실 비역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천천히 힘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태창을 모두 들여다보고,지난 생까지 곰곰이 정리한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 쏴아아아.

조용하다.

아니,물론 조용하지 않다.

누워 있기 불안할 정도로 천둥이 치고 폭풍이 울부짖는다.

그러니까.

당연히 들려야 할 소리,예상했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언제나 듣던 어설픈 부름아

한참을 기다려도 마찬가지였다.

- 달그락.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그녀가 사라져 버린 건가?

하지만 루-륨에 관련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레나에게 했던 것처럼 여덟 병을 건네는 것 같은 일도 없었다.

‘처음’으로 돌아온 상황.

과거가 개변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쏴아아아.!

빗줄기를 맞으며,가볍게 한 번에 몸을 튕겨 무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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