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63화 (263/458)

264화 너희는 모래처럼 (5)

바람이 바람을 불렀다.

나뭇가지를 꺾을 만큼 세찼지만, 실드를 침범하지 못하고 양쪽으로 찢겼다.

나는 깜빡 잊은 물건을 확인하듯 묘비를 바라봤다.

역시 예전처럼 훼손되어 있어서 쓰인 이름은 알아차릴 수 없었다.

헐떡이는 바람이 묘비를 몇 번씩 휘감고 지나갔다.

혹시 무덤 주위가 특별한 곳인가

싶어 주위를 쭉 둘러봤다.

아이작에게 흡수한,5레벨의 주술 지식으로 본다면 혹시 색다른 게 보일까 싶었다.

하지만 산,물,바위,나무 같은 어느 걸 보더라도 특별한 법칙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명당도,흉지凶地도 아닌 아무런 특징 없는 무연고 묘지다.

특별히 살殺이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마법이나 천문,음양도의 기원도 느껴지지 않는다.

묘할 정도로 무색무취.

[마법 간파 Lv.3를 발동합니다!]

그 아이작이 내 진명을 찾다 갇힌 장소다.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하긴,뭐가 있으면 아이작이 먼저 발견했겠지.

달빛 한 점 내리지 않는 수풀을

바라봤다.

두명의 인간 사냥꾼과 몇 번씩 싸웠던 장소. 망치와 석궁을 들고 오던 그 녀석들마저 없다.

추적이나 사냥의 흔적은 없다.

몸부림의 흔적도, 피 냄새나 체액 냄새도 나지 않는다.

모든 일이 끝난 뒤는 아니다.

혹시 너무 일찍 깨어났나 했지만, 천둥이 치는 패턴이나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모습,흙들이 파헤쳐진 모습을 보면 일어난 시간은 그때 그대로다.

사라져 버린 건 루비아뿐.

그녀는 대체 무슨 일을 당했기에 여기서 사라져 버린 걸까?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 우르릉! 쾅!

번개가 쳤다. 몸 깊숙이 천둥이 울려 퍼졌다.

질척한 흙을 밟고 걸었다.

체중을 실어도 흙이 굳을 생각을 하지 않고,아래로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다. 진흙이 빗물에 쓸려 내려왔고,봉분을 쓸린

무덤이 다시 진흙 더미로 물컹하게 덮여 버리기도 했다.

안쪽에 누운 시체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이야기였다.

아니,사실 찾아올 이 하나 없는 무연고 무덤이니 어차피 모두에게 상관없겠지.

루비아 같은 이를 빼면.

그녀는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아예 에라스트로 가서 확인해 볼 생각을 하고 있을 때.

- 투둑. 투둑. 투두둑-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빗소리,바람 소리,벌레 소리도 아니었다.

거센 빗방울이 인공적인 물체에 튕겨지다 흘러내리는 소리.

‘우. 산?’

그리고 다가오는 발걸음.

사냥꾼들일까?

곧바로 탐지 스킬을 활성화하자 인간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세 명의 인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는 노인 한 명과,낯선 여자의 목소리다.

“아가씨,이게 옳은 선택일까요? 도움을 요청할 방법은 많습니다. 선대의 인맥만 해도.

“사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갑자기 사령술이라는 건.

회의적인 목소리들이었다.

그 둘 사이에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니요. 저는 확신해요.”

수천 명의 외침 속에서도 단번에 구분해 낼 수 있는 목소리.

바로 옆에서 천둥이 쳐도 또렷이 알 수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루비아는 사라지지 않았다.

저 아래에서,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오고 있다.

“만에 하나 전부 아가씨 말씀대로 된다고 한들. 해골병사 하나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노인이 말을 잇는다.

직접 봐야 확신하겠지만,분명히 들은 적 있는 목소리다.

루비아는 아예 말을 딱 잘랐다.

“이 일에 관한 논쟁은 그만하죠. 원하면 다들 돌아가도 좋으니까.”

“에이.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까.” “크흠! 저 또한.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걸고 모시고 있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이것만큼은 제가 원하는 대로 할 거예요.”

“예. 어떤 선택을 하시든 저희야 따라갑니다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지?

지금껏 루비아가 여기로 올 때는 힘겹게 넘어지고 미끄러지며,비에 젖어 혼자 왔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힘든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다.

숨소리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고 수행까지 딸려 있다.

거리는 곧 가까워졌다.

- 투두두둑-

한 번도 본적 없는 광경이었다.

레이 루비아.

영지 에라스트의 정당한 계승자를 자처하는 그녀는,커다란 우산이 받쳐진 채 두 수행원과 함께 내가 빠져나온 무덤으로 걸어왔다.

루비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똑바로 내 무덤을 보며 걸어왔다.

일 년에 한 번씩 참배하는 부모의 무덤이라도 저 정도로 똑바로 가기 쉽지 않겠지. 방향에는 단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 철벅.

진흙이 가볍게 튀었지만 루비아는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낡은 진회색 로브도 아닌,어설픈 세미 드레스도 아닌 활동하기 편한 칠흑의 야회복을 갖춰 입은 채로, 레이 루비아는 내 무덤 옆에 섰다.

프레쳐를 말에서 떨어트려 죽인 비탈 즈음에 서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허리에 차고 있는 건 장난 같은 단검이 아니다.

제대로 장식된 세검.

뽑으면 무뢰한의 목 정도는 간단히 찌를 수 있는 수양이 쌓여 있음은 걸음걸이를 통해 이미 짐작된다.

혹시 사라져 버린 건 아닌가 싶어 그랬던 건지,다시 보는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을 정도로 반가웠다.

그렇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

일단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음. 아가씨? 여기가 맞습니까?”

- 회•르르!

옆에서 따라오던 노인이 내 무덤 쪽으로 횃불을 들이댔다.

방금 내가 올라와,텅 빈 무덤을 흔들리는 횃불이 불안하게 비췄다.

조금 더 누워 있었으면 루비아가 날 어떻게든 깨우려고 했을까.

방금까지만 해도 당당하던 표정의 루비아가,비어 버린 무덤 안쪽을 바라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심한 동요였다.

“여기가 맞는데. 맞는데.

두 수행원은 서로 눈을 마주 보고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히. 여기 있어야 하는데.

꼭 같이 있어 줘야 하는데. 루비아의 어깨가 쳐졌다.

내가 저 무덤에 있는 걸 어떻게 확신한 거지 싶었다.

물론 수행원들은 당연한 일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그럼 이제 내려가시는 겁니까?”

루비아는 비를 맞으며 흠쁴 젖어, 비가 되어 버릴 것처럼 진흙 위를 걸었다.

“아가씨!”

수행원이 황급히 우산을 씌웠다.

“꿈에서. 분명히 계시가. 무덤으로 내려가려는 그녀를 옆의 수행원이 말렸다. 어차피 텅 비어 있는 무덤은 밖에서도 보일 텐데.

두고 보기 안타까운 모습이다.

꿈이라면一 짐작 가는 바는 있다. 레나 역시 그러했다.

호감도를 60까지 쌓고 동굴로 다시 회귀했을 때,나는 레나에게 꿈의 형태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게 지금 루비아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걸까?

‘상태창.’

- 띠링!

눈앞의 푸른 창을 차분히 하나씩 읽어 내렸다.

[이름: 레이 루비아]

[호감도: 11]

[호감도 상한: 50] (플러스)

[시나리오가 진행 중입니다.]

[달성 호감도 (50) 에 따른 초기 보정이 이루어집니다.]

[혹독한 기다림 - 해당 캐릭터는

마지막까지 당신만을 기다리다가 죽었습니다. 초기 보정이 추가로 이루어집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가 지독하게 느껴진다. 나를 기다리다 죽은 루비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묵직하게 얼어 붙었다.

억지로 생각을 돌리며 루비아의 상태창을 계속 훌어봤다.

[군주 Lv.1] (플러스)

[사령술사 Lv.2] (플러스)

[사서 Lv.3] (플러스)

[체력: 12] (플러스)

[힘: 13] (플러스)

[민첩: 16] (플러스)

[지혜: 21] (플러스)

[다음 특성이 강화됩니다.]

- 언어 재능: 대부분의 언어를 매우 빠르게 익힙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언어도,표본만 충분하다면 그 체계에 익숙해지는 재능입니다.

- 선의를 받는 자: 성향이 극악이 아니라면,그녀를 적대하는 자들은 알 수 없는 죄의식을 느껍니다. 중립을 선호하는 존재들도 그녀의 편을 들어 줄 확률이 높습니다.

- 이 특성은 용모가 아닌 존재의 근원적 분위기에 의한 것입니다. 이성과 동성,종족을 가리지 않고 적용됩니다. 단,그 용모에 대하여 집요한 훼손이나 변형이 이루어질 경우 상황에 따라 특성이 회수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섬뜩한 이야기다.

메시지들은 악의를 숨길 생각을 하지 않는 듯하다.

루비아의 상태창을 쭉 내렸다.

예전에 있던 스킬들은 모두 보존되고 새로 붙은 스킬들도 있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를 2레벨의 검술 스킬까지 붙었다.

게다가 군주라는 직업.

어떤 걸 기준으로 저런 게 생긴 건지는 모르지만.

역시,상황이 변했다.

- 쏴•아•아•아•아

텅 빈 무덤을 바라보는 루비아의 모습이 유난히 쓸쓸했다.

“아가씨,이만 들어가시는 게. 옆에 선 여자가 말을 걸었다.

눈치가 빠르고 일을 잘할 듯한 샤프한 인상의 여자.

다른 쪽에 선 노인은 역시 본 적 있는 얼굴이다.

총관 일리아르.

에라스트를 혼자서 함락했을 때, 루비아가 감옥에서 구출한 터프한 인간이다.

루비아의 달라진 능력치가 영향을

끼쳐,주변 환경까지 바꿔 놓은 것 같았다.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인간들이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다.

지금이라도 나타나야 할까?

망설여졌다.

그녀는 나 때문에 지난 생에 악마 숭배자로 몰려 죽었다.

지금 곁에 있는 두 명은 그녀의 철저한 심복이겠지만,작은 위험도 피하고 싶었다.

사령술을 쓴다고 왔지만,텅 빈 무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성으로 돌아가는 것과 실제로 나를

만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평범한 인간들이 받아들이는 게 전혀 다를 터다.

쓸쓸한 표정을 짓는 루비아에게 노인도 말을 걸었다.

“성을 오래 비워 두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커크 놈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 할지 모르니까요.”

“.하아.”

루비아가 작게 한숨지었다.

“좋아요. 돌아가요.”

그녀가 터덜터덜 에라스트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멀쩡히 그곳에 살고 있는 건가. 하루만 슬쩍 빠져나온 모양새다.

지금 삼촌이라는 놈도 그 성 안에 머무르는 것 같은데.

혹시.

[탐지 Lv.7를 활성화합니다!]

하지만 빗소리와 계곡물이 빠르게 불어나는 소리뿐,루비아 일행을 쫓고 있는 인간들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은 이대로 안전한 것 같다.

나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밟으며 고민에 빠졌다.

여태까지 루비아가 나를 깨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어설픈 사령술에 감응해서 무덤 속에 있던 내가 일어났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번 일로 명확해진다.

루비아가 근처에 오기도 전 이미 깨어 있었다.

내가 일어난 것과 그녀의 존재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걸까?

상태창은 루비아가 내 마스터라고 설정되어 있고,그에 따른 혜택도

크게 받았다.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녀를 마스터라고 인식한 덕분이었을까.

그녀가 나를 무덤에서 일으켰다고 믿고 있었기에 그런 힘이 작용한 건지도 모른다.

아이작을 마스터라고 생각하거나, 트로핀 나냐우를 마스터라고 생각 했으면 그게 적용되었을까?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축 쳐진 채 걷는 루비아를 보며 느껴지는 안타까움이 혼란을 묻어 버렸다.

지금이라도 나타나야 할까. 나를 기억하고 있냐고 말할까.

레나처럼 희미한 감정과 기억이 전해진 것이라면,루비아는 나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 전폭적으로 의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一 그건 나름대로 무책임한 행동인 것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걸리적거리는 것들 전부를 해결해 줄 수 없다면 아예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혹독한 기다림 - 해당 캐릭터는 마지막까지 당신만을 기다리다가

죽었습니다. 초기 보정이 추가로.]

반투명한 푸른색 글자들이,내가 드러나는 걸 몹시 망설이게 했다.

루비아에게 희망 따위를 던져 줄 생각은 없다.

줄 건 오로지 확실한 결과뿐.

일단 상황을 보기 위해,그림자에 숨어 그들을 따라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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