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64화 (264/458)

265화 너희는 모래처럼 (6)

일행 셋은 폭우가 내리는 산길을 걸어갔다.

예전에 봤던 루비아라면,이런 험한 날씨에는 침대에 째근쎄근 잠들어 있는 모습이 어울린다.

다시 햇볕이 1 때까지 창문을 꼭 닫고,하얀 침대 시트를 살짝 쥐는 행동이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미친 듯 비가 내리는 험한 산길을 가뿐가뿐 걷는 모습에서 제 삶을

짊어진 분위기가 느껴진다. 걸음걸이는 천둥에도,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규칙적이었다.

몇 번이고 넘어지던 인간인데. 뿌듯한 느낌이었다.

이 세계선에서는 루비아를 처음 보는 거지만,저런 당당한 모습에 분명히 일조하긴 했지.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에라스트에는 세 번 방문했었다. 하지만 일어나자마자 여기로 내려가는 건 두 번째.

처음은 레나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뒤, 무척 오래간만에 루비아와 조우했을

때였다.

뭐든지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고, 삼촌 무리를 모두 쓸어버리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었다.

그녀의 삼촌을 따르는 패거리는 즉시 정리했지만,결국 숨어 있는 최정예 유령들에게 단 하루 만에 살해당했다.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따라갔다.

- 쏴•아아아.

에라스트 성문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있는 것도 아닌데,루비아는 성문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아,오셨습니까.”

그녀를 막아서며 도망치라고 했던 경비들.

- 끼이익.

그들이 바로 성문을 열었다.

상황이,달라졌다.

레이 루비아는 평생 자란 성에서 도망치던 유배자가 아니다.

어쩌면 저들도 이미 루비아 편에

붙었는지 모른다.

끼어들 필요는 없다.

성문 안으로 들어오자 에라스트의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두 블록을 지나 광장에 이르렸다. 예전에 흉물스러운 처형대가 설치되어 있던 장소에,지금은 좌판과 난전이 벌어져 있었다.

폭우에도 거둬들이지 않은 천막이 많았다. 처형대보다는 당연하게도 훨씬 활기가 도는 광경이었다.

두 번째 방문 때는 이즈음에서 루비아에게 화살이 날아왔었는데. 하지만 아까부터 활성화하고 있던

탐지 스킬에는 아무 위협도 잡히지 않는다.

루비아를 노리는 화살도,사람도 없다.

망루 곳곳에 느껴지는 경비들이 그녀의 편인지도 모른다. 루비아는 가파른 내성 계단을 올라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일곱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이 합류하자 숫자는 열이 되었다.

“오셨습니까?”

기다리던 자들이 일제히 인사를 건넸다.

루비아는 돌바닥에 물기를 툭툭 털고 겉옷을 한쪽에 걸며 말했다.

“다들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정된 회의인 것 같았다.

나를 찾으러 산을 탄 뒤,곧바로 이런 일정이라니.

분명 그렇게 막 굴러도 되는 체력 수치는 아니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루비아의 등장과 동시에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몸이 미묘하게 긴장되었다.

확실히 그녀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단순히 전 백작의 딸이라서 보내는 존경이 아니다.

루비아 개인의 역량.

“영주님,일단 오늘 저녁까지의 상황을 보고드리겠습니다.”

루비아가 손을 내저었다.

“그 호칭은 완전히 이긴 다음에 쓰도록 하죠.”

몇몇이 작게 웃었다.

방에 모인 인간들 중 몇은 대충 기억난다. 루비아를 따르다 감옥에 갇혔던 자들.

외상 감옥에 갇혔던 총관 노인은

지금 루비아의 곁에 시립해 있고, 내성 망루에 설치되어 있던 적의 쇠뇌는 사라져 있다.

인간 사냥꾼에게 쫓기던 루비아는 에라스트의 안건들을 보고받으며 매끄럽게 회의를 이끈다.

벌써 자정에 가까워졌지만 그녀는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구석에 있던 여자가 종이 한 장을 돌리며 말했다.

“다음은 가장 중요한 건입니다. 저번에 작위 계승자를 정해 달라고 황실에 요청한 건에 대해,심사관 후보들을 추려 봤습니다.”

모노클을 끼고 있는 여자가 하얀

종이를 들고 말을 이었다.

“일단,이런 영지의 주인을 정할 정도라면 최소한 대상조의 관직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백작위를 정하는 일인 만큼 아무래도 후작 이상이 심사관이 되는 게 매끄럽습니다.”

흡수한 지식을 되새겼다.

제국 법률에는 후계 분쟁이 있을 경우 황실에 그 심사를 회부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아무래도 그 이야기인 것 같았다.

심사 회부는 루비아 측에서 했던 모양이다.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삼촌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더라도, 황실과 어긋난다면 가차 없이 살해 당할 테니까.

황실의 인정을 받겠다는 거다.

하지만 과연,황실이 그녀의 편을 들어줄까?

내가 지금껏 보아 온 제국 황실은 둘도 없는 마굴이다.

그녀의 삼촌 따위도 어차피 쓰고 버리는 패에 불과하지만,그래도 고분고분한 제 노예를 영주로 앉힐 가능성이 클 텐데.

이야기가 이어졌다.

“제국 대상조는 모두 아홉뿐이고, 실무를 처리하는 분은 다섯 정도. 그중에 후작 이상은 셋입니다.”

긴 목록을 슥숙 그은 총관이 말을 꺼냈다.

“이거,정해진 거나 마찬가지구만. 혼자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그분이 올 거 같습니다.”

“레안드로. 후작이겠죠?”

루비아의 물음에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본인이 검주니 호위를 붙일 필요도 없고,기사단 관리도 부하에게 일임한다더군요.”

레안드로 후작이라고?

순간,생각이 막혔다.

정말 그놈이 에라스트로 온다는 말인가?

영주를 결정하러?

지독한 악연이구나 싶은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만났던 일들을 되짚어 보면 처음부터 놈은 여기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고,나와 부딪치는 건 꽤나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손 놓고 볼 수만은 없는데.

“그럴 가능성은 높습니다만,계속

끝까지 알아보겠습니다.”

모노클을 쓴 여자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증거를 모으니,레안드로 후작에게 어떻게 대응하느니 등의 논의가 활발히 벌어졌다.

정말 녀석이 온다면,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확률이 높다.

증거 채택도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겠지.

하지만 제국 수도에서 배운 적이 있다는 일리아르 총관은 레안드로 놈을 매우 좋게 보고 있었다.

“뇌물! 접대! 이런 게 아예 이빨도

안 들어가는 분입니다. 잔혹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법대로 하는 분입니다.”

그놈이?

어이가 없어서 총관 노인을 빤히 쳐다봤다.

내 시선을 의식하기라도 했는지, 놈이 갑자기 헛기침을 한다.

착각에도 정도가 있지.

배 위에서 놈이 보인 모습은 그냥 미치광이다.

아이작이 침착하게 미친 거라면, 그놈은 그냥 미친 거다.

내 생각과는 별개로.

루비아는 계속 진행되는 회의를 부드럽게 잘 이끌었다.

예전에도 하루뿐이었지만,그녀를 영주위에 올렸을 때 좋은 모습을 보여 주기는 했다.

약간의 초기 보정만으로,그녀가 처한 위치가 이만큼 달라졌다.

‘여기서 조금만 더 도와준다면.’

루비아가 완전히 영주위를 가진 상태에서 삶을 시작하는 것도 꿈이 아니다.

회의가 끝났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여자에게 루비아가 말을 걸었다.

무덤까지 따라온 심복이었다.

“서기관도 퇴근하세요.”

여자가 잠시 멈칫했다.

“그. 사령술은. 이제 다시 안 가시는 겁니까?”

루비아가 피곤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내가 뭐에 홀렸나 봐요. 혼자 갈 일 없으니 걱정 마요.”

“알겠습니다.”

여자가 물러갔다.

회의실 안에 혼자 남은 루비아는 연결된 안쪽 방에 들어갔다.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제한되어

있는 안전한 방이었다.

혼자 남은 걸 확인하고,루비아는 사뿐사뿐 베란다로 나갔다. 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넓은 처마 아래 있어서 크게 젖지는 않았다.

세월에 쉽게 남루해지지 않을 단단한 돌로 된 처마였다.

세찬 바람이 불었다.

루비아는 옷을 여몄다. 머리칼이 휘날리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빗줄기는 점점 얼어붙었다.

몇 번째로 만나는지 모를 소녀가 멍하니 차가운 새벽을 바라봤다.

사람들을 대하던 조금 전까지의

모습과 완연히 달랐다.

무덤에 왔을 때,심복으로 보이는 둘과 함께일 때도 유지하던 당당한 태도는 사라진 채였다.

낮고,작고,어둡고,자신을 애써 달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루비아가 중얼거렸다.

“분명히. 분명히 약속했잖아요.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한걸요.”

그녀가 힘없이 벽에 몸을 기댔다.

칼과 석벽이 부딪쳤다. 짤랑,하는 소리가 빗속에 떨궈지듯 묻혔다.

그대로 부서질 것 같은 표정으로 루비아가 눈을 감았다.

상태창을 확인했다.

호감도는 11.

하지만 저 반응은 진짜였다.

반투명한 메시지들이 못 반영하는 것들도 있을지 모른다.

- 휘이이이잉!

슬쩍 마법으로 풍향을 바꿨다.

비가 처마 바깥으로 휘몰아쳤다. 루비아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저기. 계신. 거죠?”

애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설마 뭘 느껴 버린 건가?

그럴 리는 없다.

〈은신 Lv.6>

기척을 지워 버리고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수준이다.

자취말소 특전까지 붙어 있는데 루비아에게 발각당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냥 우연.

단순한 혼잣말이겠지.

지금이라도 앞에 나타나고 싶은 마음을 치웠다.

완전히 상황을 정리하고,확실히 도와줄 수 있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꽉 조인 생각이 끊어지면 곤란하다.

“착각이겠지.

루비아가 힘없이 베란다 안으로 들어갔다. 자는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레이 루비아를 죽이고,사냥하고, 고문하려는 위협들은 일단 이 방

주위에는 없었다.

일단 다가오는 가장 큰 위협은• 레안드로 후작.

- 투두두둑.

두꺼운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가 루비아의 작은 숨소리와 섞인다.

폭우 속에 있으니 철퍽철퍽 말을 몰던 후작의 복제품들이 떠오른다.

어차피 그런 꼴을 당할 놈인데.

혹시 같은 편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을까?

흉악한 녀석이지만,공동의 이해관계만 성립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아군일 텐데.

검주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황실에 깊숙하게 닿아 있는 데다 실력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제국 최강의 무력 집단 중 하나인 푸른 사자 기사단의 전투원수로, 이름난 기사들의 전폭적인 추종도 받고 있겠지.

뭔가 수상한 게 걸리기만 하면, 파고들 수 있는 공식적인 직함도 갖고 있다.

그 녀석이 어차피 황실에게 살해

당한다는 걸 알려 주려면 뭘 증거로 제시해야 할까.

젓빛 기사에 대한 지식?

애벌레에 대한 지식?

하지만 그걸 레안드로 놈도 알고 있을까?

알아도 문제 삼을지 관심 없을지 모른다.

고민이 깊어졌다.

일단은.

[지정 보호를 발동합니다!]

[스킬 레벨: 1]

[1 시간 동안 〈레이 루비아〉에게 가해지는 타격을 대신 흡수합니다.]

[범위: lkm]

짧은 시간이고,저 범위 안에서만 돌아다닐 생각은 없다.

하지만 기분 탓 때문에라도 스킬을 사용했다.

색색거리며 정신없이 자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바람만 불면 날아갈 듯 잎새처럼 잠들어 있다.

검술 스킬이 생겼지만,꽉 잡으면 부러질 것처럼 희고 가는 팔목에

시선이 간다.

너무 피곤했던 걸까?

루비아는 베란다로 통하는 문도 닫지 않고 잠에 들어 있다.

이런 걸 보면 처음 만났던 때의 어설픈 모습이 떠오른다.

자기에게 빼앗을 게 뭐가 있냐고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

잠시 더 바라보다,나가며 문을 닫고 내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 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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