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너희는 모래처럼 (8)
날이 서서히 밝아온다.
하루 만에 그라스미어에 갔던 건 처음인가. 이중구조로 된 거대한 성벽이 보였다.
〈접근 금지〉
꽉 닫힌 성문.
한 번에 뛰어넘는 건 무리고.
[흡착吸着 Lv.5 발동!]
성벽에 붙어 가며 간단히 안으로 넘어갔다.
허공에 전개한 포스 실드를 밟아 올라가도 되지만 이쪽이 훨씬 더 안정적이다.
멋은 좀 부족하지만.
커다란 내성을 무심코 바라봤다.
그 지하는.
제국의 절반을 지배했던 주술사의 무덤이 있는 곳.
가지 않는다고 다짐하며,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찾아온 것은 상인.
진네이 유베의 그라스미어 거점, 〈붐비는 선인장〉으로 향했다.
이번 생은 녀석이 바토 시마라는 가명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찾아 들러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일방적인 방문이다.
‘탐지.’
일찌감치 깨어나 장부를 정리하는 녀석을 바라봤다.
一 털썩.
은괴들이 가득 든 묵직한 자루가, 고풍스러운 탁자 위에 올려졌다.
깜짝 놀란 진네이 유베가 장부를 품에 안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장부부터 보호하나.”
“.당신은 누구십니까?”
말도 더듬지 않는 간담은 칭찬할 만하다.
“자루부터 확인하지.”
“은괴입니까? 환산하면 4천 로티 정도 되겠군요. 저처럼 작은 상인에게 갑자기 이런 거래라니 조금 부담 스럽습니다만.
아마 그 정도일 거다.
탁자에 올리는 자루 소리를 듣고 단번에 알았다는 건가.
“뭘 사려고 하십니까?”
곧바로 거래 단계로 들어간다.
기척 없이 나타난 이상, 언제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본 거겠지.
쓸데없이 뻗대지 않는다.
현명한 선택이다.
“에라스트의 작위 분쟁에 대해서 알고 있나?”
다른 안건이라도 걱정하던 걸까.
진네이 유베가 약간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나는 질질 끌지 않았다.
“좋아. 그 싸움에서 레이 루비아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줘.”
인간들의 은화를 쓰는 방법이면, 나나 루비아보다 녀석이 훨씬 더 잘 알겠지.
유베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아는 분도 아닌 것 같은데, 저를 굉장히 믿으시는군요.”
“싫은가?”
“아닙니다. 상인에게 높은 신용만큼 기쁜 건 없지요. 처음 하는 거래니
이만큼만 받겠습니다.”
유베는 자루에 손을 뻗어 절반을 가져갔다.
상인이 가격을 책정하는데 내가 끼어들 필요는 없다.
나머지 자루를 가져가며 유베에게 물었다.
“근처에 용병 같은 건 없나?”
유베에게 의뢰하는 것과 별도로, 루비아의 안전을 위해서 뭐라도 더 붙여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상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난색을 표했다.
“있기는 한데. 제국 쪽은 실력
없는 녀석들뿐입니다. 실력 있는 용병의 70%는 중립국가 엠버메어, 30%는 연합에 있지요. 원하시면 제가 수도에서 찾아볼까요?”
“그 정도인가?”
“제국에서 실력이 있으면 기사를 꿈꾸니까요.”
“.일단 위치부터 말해라.”
후작이 오기까지 2주.
수도에서 찾으면 늦는다.
레이 커크 주변에 있는 무리를 막아 낼 정도면 된다.
“여기.
유베가 툭 펼친 지도를 바라봤다.
그는 에라스트와 국경,남쪽 해안 사이의 한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 멀지는 않지만.
아직 가 본 적 없는 곳.
지도의 위치를 보자 정말 기대가 사라졌지만,한 번은 확인해 보기로 하고 돌아 나가려 할 때였다.
“존함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의뢰 결과는 어떻게 말씀드리죠?”
“필요 없다.”
“그럼 이거라도.
유베는 또다시 상인 연합의 검은 카드를 건네다가 묻지도 않고 받는 내 반응을 보고 흠칫했다.
이 카드도 이미 여러 장 받아서 이젠 익숙한데,지나치게 자연스레 받는 게 충격이었던 것 같다.
“역시. 아시는군요?”
“그렇긴 한데. 많으면 좋지.”
벙해 있는 유베를 보고,녀석을 만난 김에 상인 연합의 의도에 대해 물어볼까 싶었다. 호의로 강자들을 모으는 이유가 뭘까?
제국의 중심은 황실.
비밀스러운 의도와 목적이라면, 황실에 반하는 게 되지 않을까?
나와 같은 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찐다.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짧게 고민했지만,여기서는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카드 다섯 장은 모으고 나야 말이 통하겠지.
첸들러의 부친인 전 그라스미어 영주도 완전한 회원권을 가지고, 높은 실적을 쌓은 뒤에야 ‘제안’을 들었다고 했다.
아직 회원권조차 없다.
지금은 어떤 협박을 한다고 해도 상인 연합의 숨겨진 의도를 듣지 못할 거다.
괜히 유베의 경계를 사고,관계를 망치는 미련한 짓이 되겠지.
- 팟!
나는 유베가 알려 준 용병 길드로 향했다.
지도에 짚어 준 걸로 봐서 길드는 도시에서 좀 떨어져 있다.
슬라임이 운영하던 보육원 같은 식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다만 위치는 평야가 아닌 산속. 어제 내린 폭우로 질척한 산길을 걸어갔다.
아직 유베가 말해 줬던 위치까지 한참 남았는데,희미한 인기척이 탐지됐다.
조심스레 접근했다.
- 부응! 부응!
기척은 점점 커졌다. 마치 누군가 산속에서 수련이라도 하는 듯한 소리였다.
- 째애앵!
바람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제법이다.
“흐아압!”
기합 소리까지 듣고,몸을 숨긴 채 빠르게 그쪽으로 향했다.
- 부응! 부응!
“여기 있었다니.
나는 불어난 계곡 근처에서 혼자 수련 중인 인간을 보고 작게 중얼 거렸다. 진흙투성이가 되어 이리저리 밟히던 잘린 목이 떠올랐다.
뒷모습이 근육으로 꽉 찬 여자가 한참 수련하다,상의를 탈의한 채 폭포에 몸을 씻고 수련하기를 다시 반복했다.
유베가 말한 용병 길드까지 굳이 갈 필요도 없었다.
믿을 만한 인간.
아직 유령은 몰라도,커크 무리 따위는 충분히 짓이길 만한 인재가 여기 있었다.
“하아.
그녀는 탈의한 제 가슴팍을 보고, 다시 갑옷과 가슴을 번갈아 보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잘 만든 몸인데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 걸까.
역시,검술 쪽이 고민이겠지.
- 저벅.
나는 대장장이 노인에게서 빼앗은 칼 두 자루를 든 채 무심코 그녀를 향해 나아갔다.
일부러 기척을 드러내자 그녀가 내 쪽을 바라보며 대검을 겨눴다. 무기를 소중히 다루는지,평범한 강철 대검이었지만 날이 잘 살아 있었다.
“다가오지 마시오.”
그라스미어에 있을 때,하루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움이 필요한 거 아닌가?”
“도움. 이라니 무슨 말씀이오?”
- 쨍그랑.
칼 한 자루를 대충 던졌다.
유블람의 대장장이가 만든 검은 정확히 크리스티나 한 걸음 앞에 떨어졌다.
손만 뻗으면 바로 닿을 위치였다. 크리스티나가 화들짝 놀랐다.
“이런 훌륭한 검을 아무렇게나. 뭐 하자는 거요?”
“어차피 칼은 많다.”
어깨를 으쑥하고 말을 이었다.
“가져도 좋다. 그걸 줍든,아니면 손에 들고 있는 큰 걸 쓰든 맘대로 해라.”
“갑자기 무슨.
크리스티나는 대검과 땅에 떨어진 장검을 번갈아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칼을 들면 이유는 나중에
고민해라. 간다.”
- 쎄앵!
나는 곧바로 크리스티나의 머리, 배,다리를 향해 칼을 찔렀다.
그녀는 대검의 넓은 면으로 칼을 간신히 막았지만 손목이 흔들리며 두 걸음이나 뒤로 물러갔다.
“내가. 뭘 잘못했소?”
“그런 질문이 문제지.”
산속에서 칼을 들고 공격해 오는 낯선 적을 마주하고도 제 잘못부터 찾고 있다.
크리스티나의 검술은 그 성격부터 극복해야 했다.
그녀가 뒤로 물러난 만큼 곧바로 다가가 목을 찔렀다.
급히 막아 냈지만,대검의 운용이 불안해졌다.
몇 번 공방을 더 반복하자 그녀는 불어난 계곡물에 빠졌다.
강하게 쳐낸 크리스티나의 칼이 빙글빙글 날아가 폭포 아래 진흙에 처박혔다.
“대체 누구시오? 내가 졌.
나는 흙바닥에 박힌 대검을 다시 뽑아서 크리스티나에게 건넸다.
“다시.”
크리스티나의 손바닥에 붉은 피가 터졌다. 그녀 자신의 행색보다도 소중히 여기던 강철 대검은 이미 군데군데 이가 빠져 있었다.
다시 한 번 칼을 그녀의 급소로 날렸다.
- 까앙!
완전히 안전한 공격은 아니었다. 크리스티나가 방어를 포기하거나 역량을 발휘하지 않는 순간 충분히 그녀를 해칠 수 있는 공격이었다. 비슷한 실력의 검사와의 생사결. 나는 그걸 모의하며 크리스티나를 깨워 주고 싶었다.
- 퍽!
부츠를 신은 발에 강하게 손목을 걷어차인 그녀가 칼을 떨어트렸다.
“다섯 번 죽었다.”
차가운 칼등을 그녀의 목에 댔다.
크리스티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내 칼끝에 스스로 쇄골을 가져다 댔다.
근육 위에 방울방울 피가 맺혔다.
“으음?”
“다시. 합시다.”
크리스티나는 내가 칼을 주워 주길 기다리지 않았다.
몸을 굴려 칼을 주웠다.
공격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어설프게 몸을 수그려,가슴팍을 가리려던 자세도 완전히 버렸다.
하루가 지났을까?
이틀?
아니면 사흘?
그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 털썩.
몸 곳곳이 얇게 베인 크리스티나가 흙바닥에 쓰러졌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쓰러진 그녀의 몸 위로 폭포수가
어지럽게 튀었다.
“푸하.!”
정말 죽어 버린 건가 싶은 순간, 옆으로 몸을 돌리며 크리스티나가 거칠게 깊은 숨을 터트렸다.
“하아,하아, 하아.
달라졌나.
“죽이시오.”
“죽이라고? 내가? 널?”
홁바닥에 쓰러진 그녀가 긍정하듯 눈꺼풀을 내렸다가 올렸다.
“지금이. 내. 인생 최고의 순간 이니까. 이대로 죽여 주시오.”
웃기는 소리였다.
크리스티나를 며칠 동안 훈련시킨 이유는 즐거운 죽음을 맞게 해 주기 위함이 아니다.
‘확실히 많이 발전했군. 며칠 동안 붙잡고 있었더니. 그라스미어에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낫다.’
그녀의 재능은 지금까지 보아 온 인간들 중에 최고 수준이다.
제대로 된 스승만 만났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바닥에 은괴 한 덩이를 던졌다.
“여비다. 적당한 장비를 마련해서 에라스트로 가라.”
“에라. 스트?”
“레이 루비아라는 여자가 있다. 그녀를 도와라.”
이 정도면 되겠지.
칼을 수납하고 뒤로 돌아갔다.
“이름. 당신의 이름이라도 알려 주시오!”
대답하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 크리스티나는 충성을 바칠 대상만 찾아다니고 있는 타입이다. 성품도 재능도 뛰어나다.
루비아의 안목은 훌륭하니 분명히 크리스티나를 받아 줄 거다.
호위 정도로 써 주면 좋겠는데.
그래도 모르는 일.
다시 내성에 있는 루비아의 방에 들어갔다. 남은 은괴를 전부 침대 옆에 놓고 종이에 글씨를 썼다.
〈은괴는 선물. 호위 기사 하나를 보내니 잘 받아 주길.〉
종이 아래 선대의 인연,이라고 끄적거린 뒤 빈방을 나갔다.
근처 대회의실에서 안정된 톤의 루비아 목소리가 들린다.
잘하고 있군.
약간은 홀가분한 기분이다.
이 정도면 근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것 같다.
자잘한 지원과 신변의 안전.
세 번째는. 정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남았다.
레안드로 후작을 루비아의 편으로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할 차례.
나는 북쪽을 바라봤다.
수도로 가서,레나를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