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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67화 (267/458)

268화 너희는 모래처럼 (9)

북쪽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눈이 안개처럼 내렸다.

걸어도,걸어도 눈 가운데였다.

도시〈아만〉이 가까워짐을 알리는 표지판이 갑자기 나타난 게 마치 거짓말 같았다.

잠시 망설이다가,두 갈래 길에서 아만 방향을 택했다.

고위 암살자와 정보상들의 임시 평화지대.

〈등불〉달리아크가 있는 도시다.

내가 수도에서 레나와 만날 만한 접점은 T&T 근거지뿐.

만약 지난 생에 트로핀 나냐우가 루-륨을 모두 빼앗긴 탓에,T&T가 약해지거나 혹시라도 사라졌다면.

수도에 가 봤자 레나를 만나기는 어렵다.

애초에 그곳에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상황. T&T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는 필요하다. 일단 달리아크에 들르는 게 낫다.

레나의 상황이 변했는지 아닌지는, 달리아크에 가서 정보를 사 보면 확실히 알겠지.

혹시 T&T가 완전히 궤멸됐다면, 그곳에서 즉시 후작에 대한 정보를 구해야 한다.

은신 상태에서 간단히 아만으로 들어갔다.

처음 레나와 함께 왔을 때 사용한 그라스미어의 신분증도,루비아와 함께 왔을 때 아이작이 발휘했던 최면술도 필요하지 않았다.

두 번째 장벽인 달리아크 결계도 간단히 돌파했다. 이미 아이작의 설명을 따라 넘어간 적이 있다.

주술 지식까지 갖춰진 상태였다. 두 번이나 돌파한 결계를 또다시 넘어가는 건 간단했다.

‘이것도 점점 쉬워지는군.

이런 식이면,머잖아 황실 비역도 돌파하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곧 커다란 건물이 서른 채 넘게 이어진 여관 달리아크에 도착했다.

지금까지는 탄탄대로.

처음 왔을 때 나를 안내했던 하얀 가면을 쓴 여자와의 만남도,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인간들의 시선도 없었다.

내가 아무리 흘끗거려도 이쪽에 뭐가 있는지 상상도 못 하는 듯한 인간들을 보면서 자유롭게 안으로 들어갔다.

‘흐음.

이왕 발각되지 않은 거,처음에 안내받은 것처럼 〈비회원〉구역이 아니라〈회원〉구역으로도 가 볼까 싶은 마음이 솟아났다.

무리 없이 잠입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당장은 루비아 시나리오 클리어에 집중하기로 결정했기에, 괜한 위험은 최소화하는 게 낫다. 원래 목표인 경매장을 향했다.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장막 반대편에서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강한 분이군. 결계에 영향을 안

받은 걸 넘어서,은급 감시자들의 이목까지도 돌리셨다니. 그래,어떤 정보가 필요하시오?”

아직 은신은 풀지도 않은 상태.

“종족에 따른 가격 차등은 없소. 다만 귀하가 찾는 적절한 상품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군.”

볼 때마다 느끼지만.

대단한 녀석이다.

순간 다른 무엇보다도 장막 너머 녀석의 정체가 궁금해졌지만,물론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T&T 길드의 대략적인 현 상태. 또한 레안드로 후작에 관한 정보를 원한다.”

“흐음. 두 가지라.”

침묵하던 남자가 말을 이었다.

“좋소. 당장 살 수 있는 정보는 10세이론부터 40세이론까지요. 물론 경매에 참가해도 좋고.”

기억을 더듬었다.

후작이 황실에 암살됐다는 정보는 80세 이론이다.

지금 들을 수 있는 건 그 정도의 고급 정보는 아니라는 거다.

놈이 맡은 임무나 다른 인간관계,

세력에 관한 정보 정도일까.

“일단 그럼.

그 순간.

터무니없는 실수를 깨달았다.

돈이 없었다.

사실 그동안은 돈이 필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레나와 다닐 때는 로티 한 닢까지 그녀가 과할 정도로 알뜰살뜰하게 챙겼고,아이작은 반짝이는 것들을 내가 싸울 때조차 혼자 모아 갔다. 루비아도 은괴 따위를 주면 적절히 아껴 가며 지출했다.

내가 인간의 돈이라는 걸 이러쿵 저러쿵 의식할 건 없었다.

자잘하게 회수하는 일도 알아서, 쓰는 것도 과도하지 않게 나눠서 쓰는 동료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합리적으로 지출을 계획하면서, 대신 머리를 싸매 줄 동료가 없자 터무니없이 헤프게 돈을 써 버렸다.

“혹시 돈이. 없나?”

지나치게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아. 그게.

정말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이건 안 되나?”

노인이 만든 무기들을 내보였다.

“현물은 안 받아서. 그렇게까지 특별한 무기도 아닌 거 같군. 그럼 이만 나가시오.”

칼같이 자른 남자는 날 보고 뭔가 추가로 말하려다 멈칫했다.

“뭘 말하려는 거지?”

“흠. 아무것도 안 샀는데 말해 줄 필요는 없지. 그냥 나가시오.”

한번 확 엎어 볼까 싶었지만.

레드 플레이크를 사칭하고 여기서 난동까지 부릴 만큼 앞뒤 가리지 않고 날될 생각은 없다.

달리아크는 중립지역.

평화를 강제하는 장소다.

저 장막 안에 있는 인간이 얼마나 강할지도 모르고,녀석으로 끝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

내 실력을 알고도 저런 태도다.

무엇보다도,이건 당연히 돈을 안 가져온 내 잘못.

얌전히 돌아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미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정보상인을 보며 물었다.

“나한테 수배령이 발동됐나?”

“아.

놀라는 기색이다.

“달리아크 내에서의 무력 사용을 방관하는 건가? 평화지대라니 그저 말뿐이군.”

남자가 한충 더 흠칫한다.

- 파르륵!

뭔가 미안한 듯 접힌 종이 하나를 던진다.

“이게 뭐지?”

“2주 내에 재방문하면 정보료 50% 깎아드리겠소.”

일단 종이째 챙겨 뒀다.

애초에 남자가 하려던 말이,왠지 이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미 이야기는 끝났다.

어쨌거나. 밖에 있는 건.

그때와 같은 느낌.

이대로 나가면 예전과 같은 일을 당한다.

내 동선도,여기 온 시간도 전혀 다르다.

하지만 같은 함정.

예언자 샤루니안의 능력이다.

저번에도 녀석의 예언으로 내가 여기 있던 타이밍에 맞춰 왔다.

어쨌거나.

언제까지 여기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 쉬이이이익.!

‘마법장전.’

왼손에는 바람.

‘이중영창.

오른손에는 얼음.

‘질주.’

발아래 포스 실드를 띄우고,막사 밖으로 몸을 솟구쳤다.

- 파박!

밖에 나가는 순간 땅 아래서 접촉 하는 것을 모두 마비시키는 강한 주술의 힘이 느껴졌다.

허공에 뜬 실드마저도 굳어 가서 재빠르게 다른 실드를 띄워 위를 밟았다.

내 목덜미를 잡기 위해 뻗어 오던

손이 발아래로 스쳐 지나갔다.

안에서부터 모은 마법을 날렸다. 중첩된 냉기 폭풍이 터지며 골목 전체가 얼었다.

충격파로 몸이 한층 솟아올랐고, 회색 로브가 휘두른 낫은 한참 아래 에서 허공만 스쳤다.

입구 오른쪽에 있던 하얀 묘족은 벙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봤다.

가까스로 품에 손을 넣어 잡히는 부적 몇 개를 날렸지만 준비되지 않은 공격이라 피하기는 쉬웠다.

훌쩍 물러서 골목 담 위에 서자 묘족이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설마 보법 함정을 알아챈 거야? 너,정말. 대단한 녀석이구나?”

묘족 옆에 서 있던 회색 로브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가자.”

“끄응. 포기하자고?”

“아무리 그 아이와 관련된 거라고 한들,여긴 달리아크다. 더 이상의 소란은 어려워. 아쉽지만.

- 팟!

회색로브가 등을 돌렸다.

옆에 선 묘족도 어둠 속으로 빠져 나가려 할 때였다.

앞으로 한 발을 디디며 외쳤다.

“트로핀 나냐우!”

회색 로브가 발을 멈췄다. 그녀가 낫을 다시 들고 천천히 돌아섰다. 고급스럽게 낡은 회색 로브 사이로 긴 은발이 비춰졌다.

“나를. 아나?”

어딘가 오래된 느낌의 억양.

T&T의 시조 트로핀 나냐우.

그녀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 예전에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 우아하게 서 있었다.

안도감과 반가움이 느껴졌다.

잿빛 기사에게 루-륨이 모두 빨려 나갔지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 거다.

내가 여덟 병을 건넸던 레나 때와 완전히 다르다.

어쩌면,내가 관여하는 루-룸만 세계를 변혁시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간다.

모든 존재가 루-룸에 개입할 때 세계선이 변한다면 내 삶이 항상 똑같이 시작할 리가 없으니까.

생각에 빠져 있을 때.

- 철컥.

나냐우가 긴 낫 손잡이를 가로로 잡아당겼다.

낫자루에 90도로 꺾인 손잡이가 뒤로 젖힌다.

낫 끝에서 쏘아질 것은 속도조차 측정할 수 없는 은빛 주화走火.

그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소란을 피울 수 없어 물러가는 거다. 끝까지 해볼 생각이면 물론 거절하지 않는다.”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그게 아니고.”

아직 그대로 온몸에 은빛 액체가 흐르고 있을 나냐우를 다시 한 번 훑어보며 말했다.

”너희,애초에 날 납치해 가려고 한 거 아니냐? 지금 당장 순순히 따라가면 되잖아.”

“.뭐라고?”

말을 믿지 못하는 눈빛이다.

옆에 서 있던 묘족,샤루니안도 예언자답지 않게 입을 떡 벌렸다.

이것까지는 예언 못 했나.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나온 경매장과,멍해 있는 두 녀석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대신. 돈 좀 있냐?”

“돈?”

나냐우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돈 있냐는 말을 처음 들어 본 듯한 표정이다.

그녀가 무심코 로브 여기저기를 뒤졌지만 나오는 건 은빛 탄환밖에 없었다.

“•••이거 아마,비쌀 텐데. 가격은 모르겠지만 아주 비쌀 거야.”

저 탄환의 위력은 이미 내 눈으로

목격한 바 있다.

물론 귀하겠지.

하지만 나냐우의 특수 무기 외에 범용성은 전혀 없을 거다.

슬쩍 고개를 저었다.

“돈 있냐?”

나냐우가 옆을 바라봤다.

“아니? 하지만 난 복채를 받으면 되잖아. 돈이야 금방 생기거든?”

샤루니안이 푸른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코를 내밀며 말했다.

허점을 찔리자 애써서 도도하게 보이려는 모습이었는데,그 반대로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지금은?”

“없는데.

T&T의 최고위 간부 두 명이 은화 한 푼도 안 가지고 다닌단 말인가?

둘의 모습을 보자 내가 괜히 더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나지만,저 녀석들도 보통이 아니다.

저렇게까지 주변머리가 없는 것도 신기하다.

규격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도 왜 푸르손 추종자들에게 내부에서 밀렸 는지 알 것 같다.

- 타닥. 타닥-

자신을 숨길 의향 따위는 조금도 없다는 듯한 신발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휴우. 저를 놓고 간다고 그렇게 우기더니. 무슨 소란이에요?”

흑적색 후드를 뒤로 확 젖힌 채 새로 나타난 인간이 중얼거렸다. 익숙한 얼굴이 드러난다.

그녀가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을 쥐었다 폈다.

방금 전까지 책상에라도 앉아서

일이라도 하다 온 분위기.

“어서 들어가! 위험해!”

“네가 여길 왜.! 우리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다급히 말하는 둘을 보고 레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상위 간부 셋이 여기 있는데 위험할 정도면 길드 문 닫아야죠.”

“그래도. 내 주술 함정을 피한 녀석이야. 너는 다치면 안 되니까 어서 들어가라옹!”

새침한 척 말하던 묘족이 스르록 고양이로 변하며 레나 앞에 섰다.

고양이 모습일 때 최고 주술력을

발휘한다는 이유인 것 같았는데, 크지도 않은 고양이가 인간 앞에 서자 누가 누구를 보호한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레나가 앞에 선 고양이를 양손에 안아 들었다.

“니 아아아옹.”

고양이는 그대로 만족스러운 듯한 울음소리를 냈다.

어처구니없는 녀석이다.

“당신.

레나가 말을 걸어오려 할 때.

‘상태창.’

나는 조금 전 띄워 놓은 반투명한

글자들을 빠르게 읽어 내렸다.

[완료한 시나리오입니다.]

[달성 호감도(70) 에 따른 보정이 반영되었습니다.]

[달성 레벨 (60) 에 따른 보정이 반영되었습니다.]

[클리어 보정 반영.]

[클리어 이후 추가 호감도를 지속 적립했습니다.]

[호감도가 추가 보정됩니다.]

[이름: 레나]

[호감도: 30]

호감도가. 올랐다고?

“당신,생각한 것보다 대단하군요. 혹시 지금 정보를 사겠다고 T&T 간부들한테 돈 뜯는 건 아니죠?”

“으.

“제가 길드에 있는 한 그런 꼴은 못 봐요. 꼭 저기서 정보를 사이: 되는 건 아니겠죠?”

물론이다.

애초에 여기서 만날 줄 알았다면 수도에 갈 필요도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자 레나가 피식 웃었다.

“따라와요. 나도 당신에게.

나는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말을 끊어 냈다.

“묻고 싶은 게 많으니까?”

T&T 제3본부장 레나.

처음 사슴 아에자르의 자리였던 것을 차지한 인간 여자는,상황을 이해 하려고 나를 바라보며 잠깐 눈을 깜빡거렸다.

레나를 보는 순간 정했다.

솔직하게 모두 털어놓기로.

그녀라면 충분히 신뢰할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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