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너희는 모래처럼 (10)
“어떻게 알았죠?”
놀라는 기색이다.
“그걸 지금부터 말해 줘야지.”
레나에게 안긴 채 나를 바라보는 샤루니안의 눈이 반짝인다.
옆에 서 있는 나냐우도 내가 무슨 말을 하나 듣고 싶은 기색이다.
이들에게는 사실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회귀를 털어놓을 정도는
아니다.
지금은 레나에게만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
내가 입을 떼지 않자 레나가 슬쩍 고양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단번에 내 의중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나냐우,샤루니안. 잠시 둘이서만 대화했으면 해요.”
“.저 녀석과?”
트로핀 나냐우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바닥에 내려진 샤루니안은 말도 안 된다는 둣 고개를 내저었다.
나냐우가 말을 이었다.
“위험해. 정체를 모르는 녀석이다. 무척 강하기도 하고.”
나냐우에게 무척 강하다고 평가될 정도라니,새삼 감개가 무량했다.
“샤루니안의 주술 함정을 간단히 예측하고,갑자기 덮치는 내 손을 피했다. 그게 가능한 녀석은 길드 내에서도 한 손 안에 들어.”
사실 이미 경험했던 함정이기에 피한 거지만,모르는 입장에서는 저런 생각이 자연스럽다.
“제 결정이 틀린 적 있었나요?”
“안 돼. 너를 저런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어. 너는 길드의 최고 자원이다.”
바닥에 놓아진 고양이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양보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묶어도 좋다.”
“.뭐?”
나는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룬 수갑을 채워라. 처음 걸려던 주술도 그대로 걸려 주마.”
칼을 아래로 내렸다.
“나를 납치하려 했던 건물로 바로 들어가도 좋다.”
“그걸. 어떻게.?”
고양이가 엉덩이 부분에 꼬리를
바짝 붙였다.
“냐옹.”
[점술이라도 즉석에서 저런 건 불가능해. 이건 궤를 벗어났다고!]
묘하게 의미가 전달되고 있었다.
“재밌네요. 그러면 된 거죠?”
냉큼 앞장섰다.
그 뒤를 나냐우와 고양이가 나를 감시하며 뒤따랐다.
골목길을 돌다 덩그러니 의자만 하나 놓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파갓.
룬 문자가 반짝이는 수갑이 양팔 뒤로 채워졌다.
초급 수준의 룬어 레벨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이 이어지며 하얀 번개가 튀었다.
양다리에도 같은 재질의 족갑이 채워졌다.
부드러운 털을 가진 흰 고양이가 살금살금 내 위로 올라와 전신을 톡톡 두드렸다.
아예 발을 땅에서 델 수 없었고,
주변에 뭐가 있는지 탐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완벽한 봉인이었다.
꽁꽁 결박당해 앉혀진 나를 보며 레나가 한쪽 입꼬리를 숙 올렸다. 맺힌 웃음이 묘하게 선명했다.
“이제 둘만 있을게요.”
“흐음.
나냐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면 나도 빠져나가기 쉽지 않겠군. 가자고.”
흰 고양이가 나를 보고,바닥에 꼬리를 툭툭 치다 밖으로 나갔다.
항의라도 하고 싶은 건가.
제 영역을 내가 침범했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다.
“이제 됐죠?”
레나가 씩 웃으며 말했지만,나는 고개를 저었다. 둘만 남겨 놨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다들 아직 듣고 있는데.”
레나의 표정이 묘하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참나.
감각마저 봉쇄된 상태.
하지만 느낄 필요도 없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밖에 나가서 잠시 소란을 피우고 온 레나가 다시 물었다.
“쫓아냈어요. 당신이 누군지 말해 봐요.”
연극인지 진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굳이 더 끌지 않았다.
이번 생의 레나는 저번보다 내게 한층 더 호의적이다.
거기에 대해 저번 생처럼 ‘꿈’을 꾸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네 꿈은. 꿈이 아니다.”
그 한마디에 레나의 붉은 입술이 긴장으로 말랐다.
그녀는 태연한 척조차 하지 않고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게 무슨 소리죠?”
“전부 실재했던 ‘과거’다. 그리고 내가 그 과거를 변화시켰고.”
레나에게 하나둘씩 설명했다.
동굴에서 만나고 검술을 가르쳐 줬을 때부터,함께 여행한 순간과 그녀의 동생에 관한 이야기들까지 쏟아 냈다.
레나의 손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걸 모를 정도로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말을 멈췄는데도,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휴우.
멈췄던 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한참 동안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던 그녀가 뭔가에 집중하듯이 눈을 꼭 감으며 말했다.
“계속해 주세요. 기억이 채워지고 있으니까.”
기억이 채워진다고?
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의 밀도도,호감도도 전부 다 올라간 건가.
집중하고 있는 그녀에게 ‘클리어’ 이후의 생에 대해서 설명했다.
수도 내부의 비밀통로.
매장 작전과 그 실패까지.
“.그러니 루-름을 탈취할 생각은 접는 게 좋겠지.”
“애초에 하지도 않은 생각이지만, 만약에 황실이 우리 쪽으로 통로를 뚫기 시작하면 상황이 분명 그렇게 굴러가긴 할 테니.
레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조금은 진정된 듯했다.
“황실 내부의 주 정보원이 이보트 후작이라는 사실에,스티글리츠의 존재까지 알고 있다니 당신 말을 믿을 수밖에 없겠군요. 그럼.
품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얇은 금 속판을 꺼내 들었다.
- 파갓!
레나가 수갑과 족갑을 모두 풀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요.”
“아니. 그럴 건 없는데.
“나를 구해 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암울한 삶이었다는 거잖아요?”
미묘하다.
레나는 저번 생과 달리 더 이상 나를 경계하지 않는다.
눈을 감고 미간을 좁혔다.
내 이야기로 기억을 맞추고 채워 가는 모습이었다.
이제 굳이 내가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레나는 질문을 이었다.
“그 뒤의 세계는 어떻게 되나요? 전쟁이라던가. 재밌는 거 있으면
알려 주세요.”
날씨를 묻는 듯 태평한 어조.
받아들였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백히 필요 없었다.
대단한 개방성이다.
웬만한 녀석이라면,머리를 며칠 싸매고 끙끙 앓아누워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하고 머릿속에 떠도는 기억들은 무시할 수도 있는데.
“완전히. 받아들인 건가?”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여기까지 왜 왔겠어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세상이라는 게,별로 제대로 되어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 무슨 일이 못 일어날까.”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태도였다.
레나의 부탁대로 그녀가 죽은 뒤 전쟁의 진행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제국과 연합의 정예들은 모두 다 엠버메어에서 격돌을.
한참을 들은 레나는 꽤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굉장한 정보들이네요. 앞으로도 무척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내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집어넣는 레나를 보며 물었다.
“좀 이상한 게 있는데.”
“뭐죠?”
“샤루니안. 예언의 권능을 가지고 있지 않나? 황실 루-름을 탈취하는 작전에 그녀가 아무런 경고도 안 했었다고?”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것까지 맞춘 예언가가,라는 말이 생략된 것을 레나도 알아챈 듯하다.
“당신에 대해서는 내가 자세하게 이야기했으니까. 모르는 상대를 한 점술은 추상적인 결과밖에 낳을 수
없어요. 그래도.
살짝 침을 삼킨 레나가 말했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길흉 정도는 읽을 수 있었을 텐데. 젓빛 기사의 존재는 샤루니안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던 것 같아요.”
트로핀 나냐우나 기스-제-라이도 살해한 존재다.
아예 힘을 측정할 수조차 없었다. 놈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상한 범위를 훌쩍 벗어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왜 그. 귀여운 아가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거죠?”
“아가씨. 라니?”
“마음 따듯한 아가씨 있잖아요. 계속 같이 다니던. 꿈속에서도 꽤 신경 쓰였는데.”
놀랄 수밖에 없다.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훨씬 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기억도 감정도 훨씬 많은 파편이 남아 있는 모습.
클리어 이후에는 계속 호감도가 누적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 아가씨,인간이면서도 당신을 무척 아끼는 것 같았는데. 재밌는 인간이었어요.”
“사실 말하려고 했는데.
미묘하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며 레나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에라스트 영주 분쟁에서 루비아라는 아가씨 편을 들어주고 싶다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판관이 될 걸로 예상하는 후작을 섭외하길 원하시고.”
“그렇지. 좀 부드럽게 흘러가면 좋겠는데.
“그런 양산형 쓰레기보다,나랑 저번 생에 만난 분이 영주가 되는 편이 좋겠죠. 나중에 소개도 시켜 주시고. 하지만.”
문득 레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지?”
“일단 전제가 틀렸어요. 레안드로 후작은 안 내려갈 거예요.”
적잖이 놀랐다.
분쟁 중인 두 무리 모두 레안드로 후작이 내려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는데.
“정말인가?”
“네,아까 말한 황실 내부자에게
입수한 정보예요.”
이보트 후작에게 직접 나온 정보. 그 신빙성은 변방의 에라스트에서 떠드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레나가 살짝 손을 쥐었다 편 뒤 말을 이었다.
“레안드로는 최근에 황실의 극비 도난 사건을 맡았어요.”
도난 사건이라.
기억이 간질간질하다.
뭔가 떠오를 것 같은데.
“아직 뭘 도난당했는지는 우리 쪽 내부자도 알 수 없었어요. 아무튼 그게 해결되기 전까지 다른 일은
맡지 않을 거예요.”
레나가 살며시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 사건이 끝난 뒤에는 서북쪽 바실리스크 토벌에 가기로 정해져 있어요. 비밀 사건도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겠죠. 에라스트는 무리에요.”
안도와 걱정이 교차했다.
레안드로 후작과 엮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절대로 루비아의 편을 들지 않을 녀석이 올 가능성에 대한 걱정.
“그럼. 누가 오는 거지?”
“사실 올 만한 후보라고 해 봐야 무척 적어요.”
레나가 종이를 꺼냈다.
거기 몇 개의 이름들을 쭉 쓰고 내게 내밀었다.
모노클을 쓴 여자가 그어 버렸던 이름들.
레나는 내 쪽에 읽기 편하게 향한 이름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지우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고,이것도 아니고. 다들 일정이 있어요. 일단 확인은 다 한 번씩 해봐야겠지만. 여기.”
레나가 한 군데 펜을 멈췄다.
루비아의 부하인 모노클의 여자가 가차 없이 그었던 이름이다.
“.비브리오 공작?”
두 번째 접하는 공작위의 인물. 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명예 공작. 명예 대상조.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에요. 갑자기 나타나서,황제가 내릴 수 있는 작위는 죄다 받았어요.”
“으음.”
“하지만 모두 명예직이라,수당도 받지 못하고 보조 인력이나 영지도 없어요. 관사조차 주어지지 않죠.” 후작에게 흡수한 제국법이 문득
떠올랐다. 명예직은 어떠한 땅의 보유도 금지된다. 영지를 지키는 병력의 보유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재판관으로 행차하는 건 가능하다는 이야기.
“활동이 없는 만큼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어요. 나이도 많이 들었고, 집밖으로 나오지 않아요. 사생활도 조용하고요. 후작이 안 간다면 이 사람밖에 없는데.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같이 가요.”
“같이. 가자고?”
“네,제가 도와드릴게요.”
같이 가서 도와준다니.
이제부터의 삶이 훨씬 편하리라고 느낄 수 있었다. 시나리오 클리어 이후 적립한 호감도가 계속 그대로 유지된다면.
회귀한 다음 레나부터 찾아가면 되는 게 아닌가?
T&T의 치밀하고 막강한 전력을 내 것처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이 가자는 말에는,그 정도의 의미가 담겨 있다.
- 달그락.
고민하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거절.? 왜죠?”
순전히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다.
제국 수도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검주급 인간들이라면 내 존재를 간파하리라.
수상하게 여기고 따라붙겠지.
거기서 레나를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내 앞에서 레나가 죽는 걸 두 번 다시 볼 수는 없다.
“나냐우는?”
“푸르손의 추종자들과 관련해서 해야 될 일이 있어요.”
“나냐우랑 같이 다녀. 부탁이다.”
그쪽이 훨씬 더 안전할 거다.
레나가 한쪽 입꼬리를 쓱 올렸다.
“이거,거미굴에서 저를 가둬 놨을 때가 떠오르는데요?”
“으음.
피식 웃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모르겠어요. 전생과 지금의 제가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솔직히 웬 인간이 와서 은혜를 갚으라고 했다면 저는 개소리 말라고 하면서 허벅지를 칼로 쑤셨겠죠
“다음 생의 저를 잘 부탁한다는 말 따위도 취향이 아니에요. 그냥,”
레나가 숨을 가다듬었다.
“뭐,이 세상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지금은 당신이 좋아요. 마음에 드니까 돕겠다는 거죠. 그게 전부에요.”
“도움을 받는 건 좋다. 하지만. 나는 잠시 망설이다 크게 외쳤다.
“트로핀 나냐우!”
언제부터 다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부른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얘 좀 데려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