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디딜 수도 없었다.
끈적거리는 커다란 손이 바닥에서 솟아 발목을 붙잡았다.
다시 불꽃을 일으켜 끈적거리는 것들을 모두 태워 버리려고 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마법 봉인이라고?
두 발에 힘을 모으고 앞으로 몸을 솟구쳤다.
‘질주.’
-좌아악!
- 좌악!
- 좌르르록록!
어둡고 축축한 촉수들이 동시에 수십 가닥이 솟아나 전신을 다시 옭아댔다.
[묶여라]
[졸려라]
[잠겨라]
[아파라] [멸려라]
[미쳐라]
[죽어라]
[정신 공격에 저항합니다.]
촉수들에 담긴 힘이.
단순한 물리력이 아니라는 것쯤은 즉시 느낄 수 있다.
갑옷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고, 단번에 체력의 반이 깎여 나갔다. 여기는 공방.
아주 오랫동안 치밀하게 구축된
수십 겹의 거미줄.
나는 그런 곳에 발을 들여놓아 버린 것이다.
공방 안의 마법사야말로 거미줄 위의 거미와 같다는 아이작의 말이 떠올랐다.
적은 거미줄 밖에서도 일방적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이 안에서 내가 이길 가능성은... ‘산성.’
체력을 아낄 의미는 없다.
온몸을 매개로 산성 스킬을 사용했다.
[제법인데? 슬슬 한계인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비틀거리며 앞으로 향했다.
아래에서 계속 발을 잡는 뭔가를 피하기 위한 것처럼 걸어갔다.
나를 처음부터 안으로 유인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뒤로 빠지거나 피하면 훨씬 더 강한 공격이 왔다. 순간순간을 버티기 위해 정면으로 돌파할 수밖에 없었다.
역량을 보일수록 상대는 점점 더 기뻐했다.
공기도,어둠 속에서 딛는 바닥도 점점 더 축축해졌다.
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메마른 폐하수도 같지 않았다.
몇 걸음을 더 걸은 순간이었다.
- 번쩍!
한순간 사방이 밝아졌다.
처음부터 따라오던 노인이 5미터 높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전체 모습인가?’
네 개의 발이 달린 거대한 괴물의 몸 위에 비브리오 공작의 자애로운 얼굴이 솟아났다.
닮긴 했지만 뱀은 아니다.
보티스 그 자체의 모습을 그대로 본뜬 것은 아니다.
뭔가 다른 것의 뼈대를 바탕으로 살을 붙인 모습.
공격이 아예 먹히지 않은 건 아닌지 몸 곳곳에 약간의 진녹색 피가 흘렀다.
하지만 적은 그걸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자애로운 인상의 노인은
고개를 돌려 사방을 주욱 훌었다. 따라 하라는 것 같은 움직임이다. 무심코 그 시선을 따라갔다.
지금까지 잔혹하고 파괴적인 것, 끔찍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더듬고 보아 왔다.
폭력과 상해라면 익숙하다.
망설임 없는 절단과 파괴,말살과 모진 소각에도 그러했다.
내가 쫓은 비브리오 공작이 분명 범상치 않은 존재이며,이 안쪽이 그가 오랫동안 만든 거미줄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떤가? 수도의 지하 광장이.]
산 인간들을 잇고 이어서 하나의 거대한 광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개체와 개체의 경계가 무뎌진 채 온통 붉게 칠해진 광장...
“인간. 들인가?”
저 구멍이,저 꿈틀거리는 구토물 같은 것이 얼굴이다.
부식성 산을 내뿜는 내장 안쪽을 그대로 드러내어 바깥 공기를 쐬게 한 채로,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일그러진 구멍들이 꿀럭꿀럭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살아 꿈틀대는 붉은 바닥에 배를 비비는 뱀이 보란 듯이 말했다.
[그렇지. 모두 살아 있는 거라네. 이 탑은 어떤가?]
뱀이 가운에 있는 시계탑을 가리켰다. 그가 앞발을 뻗어 ‘태엽’을 감았다. 종추가 좌우로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분침과 시침이 교차되는 순간 시계 가운데서 검은 거품이 일어나며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브리오 공작’은 초침이 눈물을 홀리며 거세게 들썩거리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고매한 얼굴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순수한 열기가 느껴졌다. 아이가 공들여 빚은 모래성을 관객들에게 자랑스러워하는 태도였다.
반신만 남은 채 손을 맞잡고 있는 시계탑 아래의 연인이 보였다.
마왕의 시절에조차 한 번도 보지 못한 건축이고,공예였다.
단순히 죽이고 죽여, 의미도 없는 고기와 뼈 더미를 그저 쌓아 올리는 행위는 몇 번이고 보았다.
시체에 손질을 하는 취미도 아예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는.
모든 인간이 아직도 살아 있다.
한 걸음을 내디디며 살폈다.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가능할까.
얼마만큼의 노력과 인간의 신체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필요했을까.
하나하나의 인간을 가죽을 가르고 곳곳을 이어붙이면서 의식을 유지하게 하려면...
시계탑의 가운데가 활짝 열렸다. ‘뻐꾸기’가 시계탑 바깥으로 나와 날갯짓을 하며 울었다.
“이런 짓을. 네가 한 거냐?” 비브리오 공작은 씩 웃기만 했다. 너무 당연한 질문이라면 무시해도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가 말을 돌렸다.
[마魔의 아이야. 혼자 그만큼의
힘을 쌓아올려 살아남았다니 정녕 기특하도다.]
주위 광경에 무심코 최대한으로 검기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아무 쓸모도 없을 것 같았다.
뱀의 존재감은 아까보다 훨씬 더 강했다.
길고 거대한 몸통 위에서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하는데,뭐에 단단히 짓눌린 듯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비브리오 공작을 다시 한 번 쭉 올려다보며 물었다.
“뱀 각인은. 없었는데..
순간 노인의 얼굴 부분이 더없이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듯 어깨를 연신 흔들었다.
큭큭거리는 소리가 사방의 축축한 벽을 타고 떠돌아다녔다.
[크하하하하하...]
벌어진 입 사이로 하얀 송곳니와 인간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붉고 긴 혀가 드러났다.
어차피 몸 아래는 이미 수십 미터 길이의 뱀으로 변한 뒤였다.
한바탕 지독히 웃고 난 뒤 노인이
[누가 감히 내게 인장을 찍느냐? 내가 바로 보티의 첫 번째 제사장! 그녀의 완전한 대리자니라!]
“.보티?”
[애칭이다.]
추악공의 대리자라.
그 모습을 보아 어느 정도는 짐작했지만.
정말 네크론 신사회의 종주이자 본령이라는 말인가?
드디어 마주쳤다.
열세 번의 죽음 끝에 예기치 않게 마주한 어마어마한 상황에 가만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제사장이라 자청한다면, 말파스의 대제사장이라는 아이작과 비슷하겠지. 둘의 힘이 비슷하다고 가정했을 때... 여기서 싸워 이길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놈의 결계.
‘어떻게 해야 하지?’
고개를 올려 보티스의 대리자와
눈을 마주쳤다.
이 방에 온 뒤로 녀석은 나를 공격하려는 기색이 전혀 없다.
지금까지도 공격을 가한 뒤 끝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맞받아쳤을 경우 뿌듯한 감탄사만 뱉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비브리오 공작〉의 의도는 적어도 나를 당장 죽이려는 것은 아니다.
뭘 원하는 걸까?
고민하며 바라보고 있자 녀석이 입을 길게 찢으며 말했다.
[너는 아주 강하다. 범상치 않아. 특히. 까마귀..! 더러운 까마귀의 냄새가 나는데...]
까마귀의 냄새.
아이작이 루-륨 회로를 확장하며 새겼던 말파스의 인장을 말하는 것 같다.
노란 눈이 좁혀진다.
푸르손의 추종자들도 판독할 수 있던 힘이니,보티스의 첫 번째 제사장이라는 녀석이 모르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한다.
부정해도 의미는 없다.
“까마귀라고? 그건 그렇겠지.”
내 수긍에,공작은 동정하는 둣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작 가호는 전혀 받지 못했구나.]
말파스의 가호는 전생을 거치며 사라졌으니 녀석의 말은 옳다.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딘가 뿌듯해 보였다.
[가엾은 것 같으니! 보티스는 그런 사기꾼과는 다르다. 아주 다르지.]
녀석이 긴 앞발을 뻗어 제 비늘을 쓰다듬었다.
[사기꾼들에게 속고 다니지 말고 내게 와라. 너처럼 뛰어난 녀석은 아주 확실히 밀어줄 테니.]
예상 밖의 태도다.
말파스의 인장이 새겨졌으면서도, 정작 마왕의 가호는 하나도 받지 못했다는 오해가 기묘하게 호의적인 태도를 만든 것 같았다.
적에게서 버림받은 유망주라면, 주워 내 것으로 만든다는 걸까.
생각해 보면 효율적인 자세임에는 틀림없다.
“그런가... 내가 그리 뛰어나다는 생각은 안 해 봤는데.”
녀석을 적대하는 대신 관심 있는 것처럼 말을 섞었다.
승산이 없다면 네크론 신사회에 대한 정보라도 캐내야 한다.
슬쩍 캐어물었다.
“사실 궁금한 게 있다. 보티스는 추종자들에게 전혀 힘을 나눠 주지 않는 것 같던데.”
네크론 회원들의 목을 새까닿게 덮고 일어난 뱀 문신이 떠올랐다.
비밀을 누설하면 곧 살해당한다. 그러면서도 마왕의 권능은 전혀 사용하지 못한다.
이래서는 이득이 없지 않은가?
공작이 저 높은 곳에 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게 많구나. 옳은 말이다. 보티스는 어중이떠중이에게 힘을 나눠 주지 않는다. 노예는 노예로 쓸 뿐. 오로지 엄선된 마魔에게만 은총을 집중하노라. 너 정도면.
기분 좋은 싁싁거림이 말소리에 섞였다.
몸 곳곳에 박힌 노란 눈동자들이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고 깜빡였다.
거짓말일까?
하지만 나는 이미 거미줄에 잡힌 상태다.
더 속일 이유는 없겠지.
어차피 마왕과의 계약도,가호도 죽은 뒤에는 다시 사라지는 것. 지금은 황실의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게 중요하다.
“고마운 이야기군.”
고민하는 척하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당장 계약을 한다고 하면 오히려 수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이것들은 다 어떻게 만든 거지? 무척. 고통스러워 보이는데.”
[후후후...]
보티스의 대리자가 입을 옆으로 길게 찢었다.
건축에 관심을 가져 준 게 역시
즐거운 느낌이다.
취미는 개인의 영토와 같다.
관심을 가지고 감탄사를 보낸다면 손님은 어디서든 환영받는 법이다.
아니,이건 말 그대로 이 녀석의 영토이기도 하니까.
공작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상태창이 떴다면.
호감도가 5 정도는 올랐다고 나올 법한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공작은 인간인 부분의 등을 바로 곧추세우고 정연한 자세로 교리를 설파했다.
[이들이 창조된 목적은 고통이다. 나는 그것을 조금 더 완전히 실현시켜 주려고 할 뿐이지.]
공작은 진지했다.
얼마나 너절한 논리를 뒤에 깔고 있는지는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귀 기울여 듣는 것이 녀석의 호감을 사는 방법이다.
연기의 필요성은 충분하다.
“고통이. 인간의 이유라고?”
그 순간이었다.
본체에서 뻗어 나온 고기 촉수가 나를 강하게 조였다.
옆구리 뼈가 으스러졌다.
체력이 떨어진다는 상태창이 연신 어지럽게 떠올랐다. 곧바로 뻗은 다른 촉수가 손목뼈를 부러뜨렸다.
일부러 툭툭 친 것 같은 장난과는 차원이 다른 공격이었다.
뼈의 군주 스킬을 쓰거나,아주 오랫동안 쉬기 전까지 회복을 하지 못할 거다. 비브리오 공작이 나를 바라봤다.
[신경 쓰이지?]
“당연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브리오 공작은 새빨간 혀에서 핏물처럼 미소를 흘렸다.
[그래,그렇게 신경 쓰인다는 것. 잘못된다는 느낌만으로 충분하다.]
- 꾸르륵,
뭔가가 꿀렁거리며 내 발밑으로 깔렸다.
끈적거리는 길고 붉은 덩어리가 바닥에서 솟았다.
[보아라.]
- 좌악!
위로 솟은 붉은 덩어리가 그대로 양옆으로 잡아 뜯겼다.
내가 딛고 선 바닥 근처가 지독한
경련을 일으키며 꿈틀거렸다. “이건..
[이들은 고통스러워한다. 어디에도 쓸데없는 감각... 생존에 필요한 정도를 완전히 뛰어넘은 아우성, 몸부림. 고통 받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다.]
“그래서,네크론 신사회라는 걸 만들어서 온갖 짓을 다 저지르고 다니게 한 건가?”
적당히 말을 받아치면서 녀석의
몸을 더 자세히 살폈다.
거대한 뱀의 육체는 상당 부분이 인간을 빚어서 확장한 티가 났다.
꽤 긴 팔다리가 달려 있었는데, 단순한 뱀이라기보다 역시 도약이 가능한 도마뱀처럼 보였다.
저 몸뚱이로 된다면 대체 얼마나
높을까?
비행 마법을 써서 위에서 공격을 퍼붓는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위쪽을 관찰하자 긴 실 같은 것이 천장에 이리저리 매달려 있는 걸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약점처럼 보이지는 않았고,그저 이〈광장〉의 곳곳을 조종하는 용도인 듯하다.
[고통을 가하길 좋아하는 무리를 모아 봤을 뿐이다. 고통을 주는 일을 즐기는 무리들은 놀라울 정도로 널려 있으니까.]
“인간들은 다 어디서 구했지?” [그만.]
보티스의 대리자가 나를 한차례 더
[이제 말해 보거라. 왜 나를 쫓아 왔느냐?]
샛노란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릴 수 있었다.
이 녀석이 지금까지 이렇게 술술 말해 줬던 건 그야말로 나에 대한 예외적인 호의고 배려.
내 앞에 선 뱀은 제 부하들 목에 각인을 박아서,자잘한 정보 하나 흘리지 못하게 숨통을 끊는 존재.
아무리 마음에 들었다 해도,아직 보티스와 계약도 안 한 내게 민감한 정보를 줄 리가 없는 것이다.
더 이상의 정보를 조금씩이라도 얻어 내려면. 녀석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의심 많은 녀석을 상대로는 진술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지금의 첫 대답이 모든 걸 결정할 확률이 높다.
머리를 굴린 뒤,결론을 내리고 대답했다.
“나는 인간 세계에서 힘을 찾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와중에.
황실과 마왕의 세력이 결탁한 것을 알게 되었지.”
당연한 이야기다.
이런 수도 한복판에서 인간들이 실종되고 있다면,황실에서 눈감아 주거나...
곳곳에 널린 수갑들을 바라봤다.
지하 감옥에서 하루하루 썩어 가는 수감자들을 아예 공급했을지도.
물론,지금까지의 삶에서 경험한 일들이 무엇보다 이 가정을 확실히 뒷받침하지만.
“세계는 인간의 것이다. 완벽하게 지배하려면 일단 인간에 대해 깊이
[옳은 말이로다.]
녀석이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할수록 풍미를 더욱 진하게 즐길 수 있다. 고통,슬픔,육욕, 기쁨... 훨씬 다양하고 깊은 맛을 낼 수 있노라. 그렇기에 너를 한층 높이 평가했도다.]
높은 평가라는 말에서 짚이는 게
T&T 제국 지부 단원들의 면면을 따라 할 정도라면,그 안에 이목이 닿아 있는 건 당연한 일.
루비아를 도와달라고 한 사실을 놈은 전부 알고 있겠지.
지금껏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여기서 내가 엇나갈 경우 루비아를 이런 방 안에 있는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채로.
“그러니 인간 세계에서 누구보다 넓게 발을 뻗은 당신을 찾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황실과 결탁이라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좀 더 양념을 쳐 볼까.
“당신 짐작대로다. 예전에 말파스의 사제에게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어서. 당신이 어떤 자인지 파악 하려고 했지. 몰래 따라붙었던 이유다.”
아이작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크게 뒤통수를 맞은 건 사실이긴 하다.
질척거리는 바닥을 네발로 디딘 도마뱀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보티스의 대제사장이라면. 마왕의 힘을 내가 받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바라던 바지.”
[네가 관심을 가졌던 루비아라는 인간도 내가 도와주겠노라.]
전율이 흘렀다.
보티스의 대리자는 루비아에 대해 알고 있다.
끝까지 거절하며 저항했다면? 그녀가 어떻게 됐을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에라스트에서 내가 한 일까지는 물론 모르는 느낌이었지만,T&T 단원들에게 루비아를 도와달라고 말한 게 새 나간 건 분명하다.
[싫으냐?]
놈이 거대한 몸을 꿈틀거렸다.
“아니,전혀 그런 건 아닌데.”
손을 내저었다.
이 정도까지 대화가 진전된 이상 싫다고 하면 순순히 놓아줄 일은 절대로 없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황실의 흑막,보티스의 대리자가 루비아의 편에 서겠다니.
다른 게 어떻게 되건.
루비아가 에라스트 영주가 되는 것만 생각한다면,그보다 완벽하고 편한 방법은 없지 않을까?
놈의 도움으로 루비아 시나리오를 안정적으로 끝내면,과거가 유리한 방향으로 고정될 확률이 높다.
그녀는 처음부터 영주가 된 채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차피 회귀가 시작되면 마왕과의 연결 같은 건 모두 끊겨 버리고.
어떤 경우라도 내가 손해 볼 일은
전혀 없어 보인다.
게다가 계약을 맺은 뒤 보티스의 가호가 뭔지 파악할 수도 있고.
향후 놈들과 적대하게 되더라도 훨씬 편하게 대할 수 있겠지.
결정을 내리고 비브리오 공작을 향해 말했다.
“좋다. 비브리오 당신을 통해서. 보티스와 계약하겠다.”
[후후후. 현명한 선택... 하지만 노예가 아닌 동지로 너를 대접하기 위해서는 시험이 필요하다...]
[계약으로 강한 힘을 받는 만큼. 강한 제물을 바쳐야 한다.]
“제물이 뭐지?”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그 인간 정도면 네가 계약자로 서기 위한 훌륭한 제물이 될 거다.]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혜택은 잔뜩 줄 것처럼 말해 놓고 결국 가서 죽으라는 소리 아닌가?
이런 헛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역시 네크론의 배후다운 놈이다.
“나 혼자 검주를 죽일 정도였다면 당신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
그때 였다.
[직접 죽이라는 게 아니다. 임시 계약으로 힘은 먼저 나눠 주마...]
- 쉬이이이익...
광장이 꿀렁거리며 거대한 원을 그렸다.
두 겹의 바깥 원 사이에 인간의 육신으로 만들어진 글자들이 붉게 솟아올랐다.
[아무도 그대의 눈꺼풀을 들어 올리길 원하지 않는 자,추한 자, 참은 숨을 조심스레 내뱉는,결코 드러낼 수 없는 본성을 가진 자, 끈적하고 어둡고 치덕치덕한 구멍으로 통할 수밖에 없는 자,괴롭게 부서진 영혼의 절망을 핥아 목을 축이는 자,
허용되지 않은 허기로 가득해 몰래 쫓기고 훔쳐 먹을 수밖에 없는 자, 물컹하게 썩은 욕망을 끌어안고 그것과 함께 도리 없이 살아가는 자...]
[모두 나에게 오라.]
광장이 연꽃처럼 잎을 펼쳤다.
저 너머의 경계가 느껴진다. 강제적인 몰입.
말파스와의 계약과 달리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미 5에 달하는 주술 지식으로 살펴본 결과...
이곳은 이미 완벽한 제단.
제물의 ‘살아 있음’ 자체가 대가로 봉헌되고 있다.
진녹색 기운을 풀풀 뿜는 광장이
내 몸을 한차례 스쳐갔다.
기묘한 글자들도,문양도,두 겹의 원도 서서히 사라졌다.
허공에 상태창이 떠오른다.
[보티스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대가 없는 각인을 발견한 마왕이 당신을 동정합니다.]
[신뢰도가 상승합니다...]
[가호가 임시로 주어집니다.]
[특전: ‘공예’를 획득했습니다.] [특전: ‘은폐’를 획득했습니다.] [기한 - 48:00:00]
[특전: 공예]
[특전 레벨: 1]
- 인간의 몸을 이용해 음울하거나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낼 수 있게 됩니다.
- 조형을 할 때 대상의 사망률이 크게 떨어집니다.
- 레벨이 올라갈 경우 조형물이 느끼는 감정에 따라 부가 효과를 붙일 수 있게 됩니다.
- 공예가 시작되면 대상은 대부분 미쳐 버리게 되지만,스킬 숙련도가
올라갈 경우 정신이 강제로 유지될 확률이 상승합니다.
[특전: 은폐]
[특전 레벨: 3(임시)]
- 추한 당신은 세계로부터 자신을 숨기는 데 필사적입니다.
- 보티스의 가호로 당신은 임시로 마계에 걸칠 수 있습니다.
- 이 세계에 개입하기 전까지, 기척은 완전히 소멸됩니다.
- 마계에 걸쳐 있는 동안,점차 정신이 오염됩니다.
첫 번째 특전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인다.
두 번째 특전은 놀랍다.
다른 세계에 걸치는 은폐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