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 스킬은 지금도 있지만,이건 완전히 궤가 다른 것이다.
비브리오 공작이 나를 바라봤다. 중개자로서 성공을 확신한 듯한 표정이다.
[네가 받은 힘은. 세계를 속이는 고유 권능. 느껴지나?]
[어떤 강자들에게서도 네 기척을 숨길 수 있다. 공격할 때도 그렇다. 마지막 한 점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은폐’해 버리면... 의식도 못 하고 당해 버리지.]
그야말로 암살에 최적화된 가호.
이 힘으로 후작을 죽이라는 건가 싶었을 때,생각을 읽고 있다는 둣 노인이 말을 이었다.
[임시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은 최대한 끌어왔다. 네가 받은 건 아직 그 정도는 아니지만,미행은 충분하지.]
곧 사라질 가호를 내린다.
그 안에 승부를 보라는 건가.
[일단 녀석의 약점을 조사해 봐라.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 후작. 제국 수도에서 가장 거슬리는 장애물... 쉽진 않겠지만. 부수는 것보다야 회유가 훨씬 낫지. 계약자로 만들 가치는 차고 넘친다.]
약점과 욕망을 읽어 내 이쪽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이야기.
하지만 레안드로 후작의 선택은 명백하다.
그가 비브리오의 손을 잡았다면, 내가 본 것처럼 비참한 최후 따윈 맞지 않았겠지.
협력할 리가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미리 다 아는 척할 수도 없는 노릇.
어차피 믿지도 않겠지만.
‘적당히 약점이나 찾으면 되나.’ 이번 일이 싫을 이유는 없다.
무척 좋은 기회다.
보티스의 가호는 또 언제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고,후작의 정보는 두고두고 사용할 수 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너무 덤석 받아물면 오히려 조금 이상하게 볼지도 모른다.
짐짓 떠보았다.
“그만큼 강한 인간이 굳이 마왕과 계약을 맺으려고 할까?”
[굳이 계약이 아니더라도. 이미 은폐의 힘을 빌리는 인간은 많다.]
은폐의 힘을 빌린 인간들.
문득 짚이는 게 있었다.
에라스트의 유령들은 그 기척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그들 하나하나의 능력으로 본다면 나보다 못한 이도 많다.
그라스미어에서도 여럿을 상대해 보았던 터다.
하지만 싸우기 직전까지 이상할 정도로 탐지되지 않았다.
“혹시..
비브리오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뭐 아는 거라도 있느냐?]
“황실의 유령이라고 불리는 비밀 요원들이. 당신에게 힘을 빌려간 건가?”
비브리오가 입을 좌우로 찢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유령들까지 알고 있는 것이냐? 볼수록 마음에 들어. 그 말대로야.
“존재 정도만 알지. 한데 계약도 안 했으면서 힘을 빌려준다고?”
가면을 쓴 유령들.
목에 뱀 문신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유령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탓일까.
어차피 나를〈보티스가 지켜보고〉 있어서일까.
비브리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길들임이다. 처음에는 내 쪽에서 권했지만,은폐의 권능에 젖을수록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거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언제든 거둘 수 있는 힘이라면, 손에 쥐어 주는 걸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
[한번 누려 본 혜택은 여간해선 벗기 어렵거든. 처음에 먹이기만 하면 된다...]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하다.
소녀 공작도 보티스의 힘을 받은 걸까?
유령들이 아닌 나에게 레안드로 후작을 조사하라고 시키는 것은, 아직 그들을 충분히 장악하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나를 시험하려는 의도인 걸까.
[그래서 하겠느냐? 어쩌겠느냐? 더 이상의 질문은 일을 끝낸 뒤에 받으마.]
비브리오는 노랗게 눈을 빛내며
나를 내려다봤다. 당장의 계약으로 얻은 신뢰는 여기까지겠지.
당연하지.
“물론.”
레안드로 후작.
놈을 조사하는 일은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다.
한두 번 만난 게 아니니까.
어쩌면 운이 좋은 건지도 모른다.
[좋다. 지원은 필요하겠지. T&T를 사용할 거냐? 원한다면 노예들을 소개시켜 주마.]
“.네 노예들이 좋겠군. T&T는 나와 취향이 맞지 않는다.”
[호오,그래?]
“마음껏 사용하기 뭣하다. 당신을 찾기 위해 일시적으로 쓴 거니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비브리오의 정보망이 닿는 곳에서 레나의 펜던트를 보여 버렸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주워 담으려, T&T가 불편한 척을 했다.
뭘 생각하는 건지.
높은 곳에서 비웃듯이 싁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부디 트로핀 나나우와 샤루니안 같은 간부들이,레나를 곁에서 잘 보호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흐흐. 한계가 명확한 것들이지. 좋다. 내 노예들을 부려라.]
넓은 전당 안에 도열한 인간들을 바라봤다.
어두운 감개가 마음 군데군데로
젖어 나갔다. 이게 네크론 신사회의 간부들이라는 건가.
그토록 쫓으려 애썼던...
하지만.
‘형편없군.’
유령급의 녀석은 한 명도 없다. 너무 높은 기대를 한 걸까. 비브리오가 나를 반가워했던 게 이해될 정도.
제대로 마계가 강림하지도 않은 시점이라면, 제정신으로 보티스의 노예가 될 만한 인간은 없겠지.
좋은 배경을 가진 자는 많지만, 스스로를 단련해 경지에 오른 자는
드물다.
물론 기대에 비해서 엉망이라는 이야기.
프레쳐나 유블람 경비대장급의 인간들보다 강한 자는 많다.
“나으리! 사냥, 유희,도축 중에 어떤 걸 즐기십니까?”
잔혹한 표정의 남자가 내 눈치를 살핀다.
가장 강해 보이는 인간.
〈가축교관〉갈라파돈이라는 자다.
진득한 핏물 같은 눈동자가 꾹꾹 눌린 폭력과 육욕에 대한 갈증을 말해 주고 있었다.
놈만 해도 각성 전 크리스티나에 버금간다.
게다가 변칙적으로 온갖 함정을 파서 싸우기 시작한다면...
열에 아홉은 그녀가 지겠지.
이 정도만 되더라도 인간 중에서 강한 자로 꼽히겠지.
물론 이 무리는 쓰레기일 뿐이고, 비브리오가 나에게 전력을 숨겼을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했을 때.
- 띠링!
[퀘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네크론 신사회에 대한 정보가 대량으로 추가되었습니다.]
- 마왕 보티스의 대제사장과 그의 노예들로 이루어진 집단입니다.
- 흑막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 고위 서열의 간부 13인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 Extra: 마왕 보티스와 계약에 성공하셨습니다!
- Extra: 고위 서열 간부 13인이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퀘스트 클리에]
[네크론 신사회의 정체를 훌륭히
알아내셨습니다.]
[지금까지의 활약을 환산합니다.] [추가 보정으로 용사 포인트가 375% 가산됩니다.]
[23,750포인트 획득!]
- 위이잉...
[현재 구매력: 25.6%]
오른쪽 빈 공간에 있던 한 자리 숫자가 단번에 폭증한다.
25%.
1/4을 넘어선다.
하지만,아직 용사 상점은 이용이 불가능하다.
세계부정이라.
괜한 객기를 부렸는지 모르지만, 이 정도 속도라면 해 볼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거나.
이들이 정말 비브리오의 숨김없는 전력이란 이야기.
도열한 인간들의 면면을 찬찬히 훌어봤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건 이들. 해골의 모습을 드러내도...
히히덕거리며 좋아할 뿐이라는 건 그럭저럭 편리하다.
“악마 나리! 얼마 전 좋은 가축이 들어왔습니다. 아직 칼 한 번 대지 않은 아주 깨끗한 가축입니다.”
〈목장주〉가 말을 잇는다.
돼지나 소, 양 따위를 말하는 건 아니다.
이들은 동족을 사냥하고 고문하며 가축이라고 부른다.
끌려온 인간 여섯을 슬쩍 바라봤다.
〈가축〉들은 공포로 멸면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움찔거렸다.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몰라,일단
다양하게 데려왔습니다. 완전히 교육이 끝난 것도 있고..
숨통이 조이던〈가축〉이 컥컥대며 길게 혀를 내밀었다.
위를 올려다보는 소녀의 눈빛은 텅 비었다.
거기에는 무언의 호소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뭉개지고,흐려진 혼이 뒤편에서 비치는 것 같았다.
피하고 싶은 눈빛이었다.
문득,페이지마다 등급과 가격이 적혀있던 네크론의 노예 장부가
떠올랐다.
레나의 이름도 적혀 있던 장부. 어디를 어떻게 교육했다느니... 바로 앞에 주범들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판을 엎으면 비브리오의 의심을 산다.
“한심하군.”
“예..?”
어느 정도 장단은 맞춰야 한다. 아이작이라면 뭐라고 했을까.
“사냥,유희,도축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물색과 포착부터 차근차근
이루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모든 과정이 나의 것이어야 한다.”
“오오,역시..r 억지로 내뱉는 금뜬 연기.
하지만 상관으로서 하는 말이라 그런지 별 이의는 없었다.
적당히 감탄하고 넘어가는 모습.
조만간 저 〈가축〉들에게 편안한 죽음이라도 떠넘기리라 생각하며 장내의 네크론 단원들을 훌었다.
“첫 번째 임무를 내린다.”
“예,나으리!”
“.근위기사단장 이사벨 시몬느를 조사해라. 파고들 만한 약점을 찾아
내도록.”
후작에 대해 아는 점은 두 가지. 황제보다도,근위기사단장 이사벨 시몬느의 죽음을 보고 분노해 혼자 바다를 건너 나를 쫓았다.
‘.미유에게도 집착했지.’
그 말은 후작을 쫓으면 자연스레 보게 될 터.
내 말에 흘을 채운 네크론 단원 모두가 고개를 조아린다.
”분부에 따르겠습니다,나리!“ 비브리오 공작을 신처럼 섬기는 무리다.
불복종은 없었다.
”나는 레안드로 후작을 담당한다. 관련 자료를 제출해라.”
레안드로 후작이라는 이름은 홀에 늘어선 녀석들에게도 먹히는 건지, 다들 조금씩 움찔거리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자 움직이는 건 당연했다.
보티스의 가호도 못 받은 자들은 걸리적거릴 뿐이다.
‘게다가 별 자료도 없었고.’
이사벨 시몬느와의 관계도 지금은
드러나지 않은 것 같다.
후작은 정보 통제를 제법 철저히 하는 녀석인지도 모른다.
푸른 사자 기사단 집무실을 향해 빠르게 몸을 날렸다.
속전속결.
일반 기사들에게 걸릴 정도라면 가호는 어차피 의미가 없다.
‘저기인가.’
푸른 사자 기사단의 넓은 훈련장이 보이는 장소까지 도착했다.
안에 있는 전력을 생각해서인지 바깥의 경비는 기사단원 두 명이 전부다.
물론 수백의 병사가 순찰을 돈다고 나를 잡아낼 수 있을 리는 없다.
가볍게 담을 넘어 통과.
코앞을 지나는데도 기사 두 명은 일말의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놓고 가는데 이 정도라면...
계획한 대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활성화한 탐지 스킬에 반경 수십 미터가 생생하게 파악됐지만,굳이 누구를 피할 것도 없다.
목표는 기사단 사무실.
보티스의 가호가 후작에게 먹힐지 아닐지가 판명되는 순간.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주위의 공기가 바싹바싹 말라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모든 생각이 잊힐 정도였다.
마지막 커다란 방 하나에서 모든 기척이 느껴졌다.
이 안에 레안드로 후작이 있다. 아직까지 발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이걸 열 자신까지는 없었다.
나는 바깥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군행관.”
“옛! 단장님!”
“소리 안 쳐도 들린다. 너희들은 이제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
“하지만,지금까지 아무 실마리도 못 잡았는데 단장님이 어떻게 혼자 찾으십니까?”
“더 이상 너희들의 손을 빌리고 싶지 않다. 우리 기사단의 문제로 만들고 싶지 않아.”
“단장님. 그러니까 힘을 합쳐서 빨리 해결해야..
“원래 나 개인이 받은 문제였다.
군행관,집법관, 너희가 끼어들면 일이 실패했을 때 기사단 전체의 이름이 멸어진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가 다이아몬드를 찾지 못하면 세상은 레안드로가 황실의 임무에 불성실했다고 말할 거다. 황실에 순종적이지 않고,그저 제멋대로 구는 검주. 세간에 나에 대한 말이 그렇게 돌지 않나?”
“으흠...”
“그러니까. 누구냐?”
“예?”
그때 였다.
설마 발각당한 건 아니겠지? 당황스럽다.
마왕의 가호가 이렇게 간단하게 날아간다면,기껏 계약한 보람이 전혀 없다.
여기서 끝나는 건가 싶어 한순간 아연했지만.
밖에서 빠르게 뛰어드는 인간의 기척을 느끼고 안심했다.
나를 지나친 기사가 닫힌 사무실 문을 열었다.
후작은 아무래도 이 녀석을 감지한 것 같다.
“단장님! 편지 왔습니다!”
문을 연 시점에 바로 기사의 뒤에 따라붙었다.
도박이다.
여기서 걸린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