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73화 (273/458)

푸른 사자 기사단 최정예들에게 동시에 썰리겠지.

하지만.

방 안에 들어선 순간,레안드로 후작은 내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은폐 능력이다.

만약 유령의 수장인 소녀 공작도 은폐의 가호를 받았다면...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고기 바늘에 매달려 있던 레안드로 후작의 시체.

심장과 목을 깨끗이 관통한 검상.

당시에는 대체 레안드로 후작을 어떻게 그렇게 깔끔하게 죽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의문이 툭 풀리는

기분이다.

후작을 한 번에 찔러 죽였던 게 소녀 공작이었다면 어떨까?

한쪽만 일방적으로 완벽한 기습 기회를 얻는다면.

일대일의 싸움에서 그런 건 유리한 정도가 아니다.

등 뒤에 붙어 급소에 칼을 찔러 넣으면 일격필살.

더 멸어지는 수준에서도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른다.

저울추를 완전히 기울이는 힘.

말파스의 권능보다도 이쪽이 훨씬 실용적으로 느껴진다.

“무슨 편지 말이냐.”

후작이 딱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달려온 기사는 반가운 소식이라도 가져왔다는 듯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기다리셨죠? 이사벨 백작이 보낸 편지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드리기 위해 뛰어..

- 툭.

뒤에 서 있던 다른 기사가 전령의 뒤꿈치를 슬쩍 걷어찼다.

눈도 마주치지 않는 분위기다.

후작은 지금 뭘 하냐는 표정으로 편지를 가져온 녀석을 바라본다.

“공문인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보낸 것 같은데..

“그런 걸 읽을 여유는 없다.”

후작은 편지 봉투를 거칠게 찢었다. 안에 들어 있던 곱게 접힌 종이가 조각조각 바닥에 흩어졌다.

“단장님..?”

편지를 가져온 기사와 함께 나도 당황했다.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피고는 제국 중경中更 이사벨 시몬느의 살해를 인정하는가!]

[피고는 백작위를 가진 여성의 사체로부터 갑옷을 벗겼다! 피고는 살해와 사체 훼손,유품의 강탈을 인정하는가?]

이사벨 시몬느.

녀석은 나를 죽일 때 황제보다도 이사벨과 미유의 죽음에 대해 훨씬 집착했다.

하지만 전달받은 그녀의 편지를 찢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후작의 이름을 팔아 이사벨에게 근위대에서 도망치라고 했을 때, 얼굴을 붉히던 이사벨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헛소리!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사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죽은 뒤 과장되게 추모한 건지도 모른다.

분명 특별한 관계라고 느꼈기에, 후작의 약점이라고 판단했다.

네크론 신사회 단원들에게 특별히 알아 오라고 지시까지 내렸다.

혹시 헛수고였던 걸까.

조금 더 지켜볼 필요는 있다. 후작이 보이는 태도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단호하지만.

“이런 쓸데없는 것까지 하나하나 받아 봐야 하나?”

“그게..

전령이 찢긴 편지 조각을 주우려 하자 후작이 제지했다.

“됐다. 사무실 청소 담당의 권한을 침해하지 말도록.”

찢어진 편지를 슬쩍 발로 밟고 선 레안드로가 주위를 돌아봤다.

“다들 못 들었어? 이제 본업무에

복귀해라.”

“단장님,그래도..

“아니,내가 여기서 나가야겠군.”

“아닙니다,단장님. 여긴 영원히 단장님 방입니다. 정 그러시면. 지금까지 저희가 조사한 자료라도 정리해서 드리겠습니다.”

어딘가 몸이 불편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후작은 그건 거절하지 않았다.

받아 들고 꼼꼼히 챙겨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자료군. 고맙다.”

뒤에서 슬쩍 훔쳐봤다.

리전트 다이아몬드가 사라질 당시 여러 인물의 동향을 빼곡히 정리한 문서였다.

하지만 누가 흠쳐갔는지는 아직 전혀 감도 못 잡고 있는 것 같다.

다이아몬드라...

충성스러운 부하들의 면면에 기사 레일리는 없었다.

실이 하나로 엮인다.

수도 주점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리전트 다이아몬드 도난

사건으로 도둑 길드가 와해됐지요. 그때 레안드로 후작의 눈에 들어 기사가 됐습니다.]

레일리가 여기 없는 건 당연하다. 그는 황실의 리전트 다이아몬드를 홈친 도둑 길드의 유망주니까.

‘길드 이름이.〈부드러운 전갈〉 이었나?’

헤메고 있는 꼴을 보니 알려 줄까 싶기도 했지만,곧 그런 마음은 쏙 사라졌다.

뭐 좋은 감정이 있다고 후작 놈을 도와주겠는가?

맨날 죽이기만 했지.

솔직히 알려 준다고 별로 고마워할 녀석도 아니다.

이대로 지켜보자.

“.나도 곧 떠나지.”

부하들이 하나둘 나갔다.

혼자 남은 후작은 편지를 밟고 있던 발을 슬쩍 뗐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뭐 하는 짓이야?’

찢긴 편지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 맞춰 보기 시작했다.

별 내용도 쓰여 있지 않은 편지를

보고 후작은 피식 웃었다.

“홈.”

그러다가 억지로 웃음을 거두고 표정을 굳혔다.

다시 읽고,다시 읽고...

그 정도로 꼼꼼이 읽어야 될 암호 따위로는 보이지 않는데.

살짝 입술을 깨문 후작이 편지를 그러 쥐었다.

- 화르르!

그러쥔 손에서 자연스럽게 푸른 불꽃이 솟았다.

마법도 아닌 것 같은데,검기로 원소의 기운을 만들어 낸 듯하다.

재도 남지 않은 깔끔한 손 위를 후작이 멍하니 바라봤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한다.

한 줄 한 줄을 되새겨 읽으면서 피식 웃던 얼굴.

제 손으로 태운 편지가 있던 손을 뭔가 그리듯 아련히 보던 눈빛.

저런 다양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인간이었나 싶을 정도니까.

역시 이사벨 시몬느를 파야 했다. 방금 전 여럿 앞에서 보인 태도는

이사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있는 거겠지.

내가 네크론 신사회에게 정확한 지시를 내린 것이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밖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마구간에서 풀을 뜯는 말을 향해 걸어갔다.

의미 모를 한숨을 푹 쉰 후작이 흑마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자,미유.”

“히히힘!”

다른 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덩치의 흑마는 순순히 뜯던 풀을 뱉었다.

후작은 둥자를 밟고 말에 올랐다. 후작이 올라타자 말은 오히려 한층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마가 기사단을 빠져나갔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대로 후작을 미행했다.

느긋하게 대로를 걷던 말은 금세 외곽으로 빠졌다.

- 다그닥! 다그닥!

속도가 점점 더 붙기 시작했다. 방향이 엉뚱하다.

수도 안에서 찾아야지,지금 대체 어딜 가는 걸까?

놓칠지도 모른다.

‘질주!’

말을 타고 달리는 놈을 쫓았다.

다행히 터덜터덜에 가깝게 걷는 흑마 덕분에 뒤에 따라붙을 수는 있었다.

대충 걷는 게 이 정도 속도다. 제대로 뛰었으면 분명 놓쳤겠지.

수도를 빠져나간 후작은 한참 더 남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리고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안장을 푼 후작이 드넓은 평야를 바라봤다.

“미유.”

“히히 힘?”

“가라.”

“히히힘!”

흑마는 제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후작이 말의 엉덩이를 쳤다.

“빨리 가라니까. 가 버려.”

흑마는 귀를 뒤로 살짝 젖힌 채, 후작의 손을 파리 쫓듯이 꼬리로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너까지 위험하게 만들기는 싫어. 너 없어도 괜찮아. 다른 말 많다.”

“히힘! 히히힘!”

미유는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꼬리만 더 빠르게 움직여 후작의 손을 후려쳤다.

후작은 한 번 더 말의 엉덩이를 손으로 후려쳤다.

붉은 자국이 남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히히히힘!”

미유는 흠칫 놀라서 긴 귀를 머리 뒤로 감추고,억지로 몇십 미터를 빠르게 달려갔다.

“그래.”

하지만 곧 다시 말머리를 돌려서 후작을 향해 달려왔다.

입술을 살짝 말아 올려,서운함과

분노를 표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유와의 거리가 다시 줄어들자 후작은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위험하다니까. 언제 죽을지 몰라. 아니,네가 먼저 다칠 거다. 가라.” “히힘! 히히힘!”

“넌 아무것도 몰라. 제발 내게서 멀리 도망가..

“히히히힘!”

미유는 후작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기도 했지만,떠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엉덩이를 맞기는 싫은지 후작의 주위를 빙빙 빠르게 돌기만 했다.

달리는 모습을 봐서, 후작이 말을 놓고 도망간다고 쫓아오지 못할 것 같지도 않았다.

“너처럼 제멋대로인 녀석은 필요 없다. 정말 꼴 보기 싫으니까 빨리 사라져라.”

“히히힝..

미유의 두 눈이 촉촉이 젖어 갔다. 그런 말을 들어도 녀석은 떨어지지 않고 계속 후작 옆에 붙어 있었다.

“넓은 초원에서 놀면 될 텐데. 정말 죽을 생각이냐.”

후작이 깊게 한숨을 쉬고 미유의 긴 목을 부드럽게 몇 번 긁었다.

황실을 침식한 마왕들과 싸우는 비극의 주인공 후작과 애마 미유의 이야기라도 쓰려고 하는 건지.

둘이 연출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내가 왜 보고 있어야 하는 건지.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결국 후작은 쫓아내길 포기한 듯했다.

풀어헤친 안장을 말 위에 얹지도 않은 채,손에 들고 뒤돌아 다시 수도로 걸어갔다.

말은 놓치지 않겠다는 둣 그 뒤를 따라갔다.

“히힘! 히히힘!”

둘은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라도 단단히 묶여 있는 듯이,앞서거니 뒤서거니 가까이 붙어 걸었다.

결국 한참 걷던 후작이 말갈기를 적당히 긁어 주자,말은 머리를 낮게 내렸다가 높이 들며 원을 그렸다.

심각한 레안드로와 달리 즐거워 보이는 모양새.

‘후작 녀석..

애마까지 억지로 야생으로 쫓아 보내고,이사벨은 물론 푸른 사자 기사단과도 거리를 둔다.

제 곁에 있으면 위험하다는 걸까.

‘노려진다는 것을 아는 건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뭘 할 생각일까.

보티스의 대리자도,황실도 그를 회유하려고 할 거다.

항상 죽게 되는 걸로 봐서 거기 고분고분 응하지 않는 거겠지만.

성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후작은 그제야 주변 시선을 신경 쓰는 듯 미유 위에 안장을 올리고, 슬쩍 올라탄다.

위험한 싸움에 몸을 던지기 전에, 호흡을 맞춘 애마를 놓아 버리려 했던 모습이 인상적이다.

두 눈에서 푸른 줄기를 뿜어내며, 미유의 이름을 부르짖고 죄 없는 말을 죽였다고 발작하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저렇게까지 놓아주려 애썼는데도 죽어 버리니 화가 났을 만하다.

어쨌거나.

이렇게 따라다니는데 후작 같은 실력자가 눈치도 채지 못한다.

정말로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건가.

보티스의 권능이 대단하긴 하다.

후작을 따라가며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황궁 쪽으로 들어가 봐도 되지 않을까?

아이작도 결계 때문에 정탐할 수 없다고 했던 비역을,지금이라면 간단히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방향이야...

대충 기억나기도 하고.

하지만 곧 단념했다.

은폐의 권능은 보티스의 것.

유령들이 그 권능까지 빌리는 데다 애벌레를 생산하는 황실은 철저히 보티스와 결탁하고 있다.

그쪽에서 내 잠입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갑자기 그런 짓을 하면 뭉텅이로 신뢰를 잃어버리겠지.

루비아의 존재까지 비브리오 놈이 알고 있는 상황에서 무모한 모험을 할 생각은 없다.

지금은 놈의 장단에 맞춰 주면서, 안정적으로 루비아의 시나리오를 끝내는 게 현명하다.

나는 후작을 계속 따라갔다.

이 미행에서 레안드로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그것도 충분한 이득.

언제 이렇게 몰래 따라붙을 수 있을까?

앞으로도 두고두고 써먹을 정보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

‘상태창.’

[특전: ‘은폐’를 사용 중입니다.] [기한 - 36:42:14...]

두 개의 역린을 재확인했다.

스스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따라다닌 지 12시간도 안 지나서, 몇 번의 삶 동안 알아낸 것보다 더 많은 걸 캐낸 기분이다.

그리고.

‘36시간이라.’

시간은 세 배나 남았다.

36시간.

1:1로 겨루면 나를 압살할 후작이 여지없이 내게 비쳐지고 있다. 아무런 감지도,공격도 못 한 채로 무력하게.

그는 나를 해칠 수 없다.

기묘한 감정의 고양이 일어났다. 후작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어딘가가 부풀어 오르는 듯 진득한 쾌감이 치민다.

또 어떤 약점을 나에게 노출할까 흥미마저 생긴다.

그러나.

앞서의 열두 시간과 달리 후작은 활발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쌓인 서류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검토할 뿐이었다.

현안인 다이아몬드 도난과 전혀 상관없는 서류도 많았다.

그는 치밀한 집중력으로 서류들을 하나하나 살해하듯 정리했다.

머릿속으로 굉장히 빠르게 계산이 돌아가고 있을 거다.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다 정하고

있겠지.

후작의 판단은 정확하다.

그는 결국 도난당한 다이아몬드를 찾아내니까.

혼자서 도둑 길드를 와해시키고 황실의 보물을 찾아온다.

그리고 길드의 유망주인 레일리를 설득해서 푸른 사자 기사단에 넣어 버린다.

대단한 능력이고,독단이다.

그리고 레일리는 후작의 죽음이 살해라는 확신을 갖는다.

푸른 사자 기사단의 그 누구보다 강한 확신을.

후작과 가장 짧은 시간을 함께한 기사 레일리가 진실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다니,흥미로운 일이다.

도둑 길드의 유망주로 키워졌던 만큼 다른 전투기계들보다 훨씬 더 눈치가 빨랐을지도.

그러나 그런 레일리마저 정확한 적은 파악하지 못했다.

레안드로는 정확히 어디에 칼을 겨누려 하는 걸까.

후작이 뭘 얼마나 알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계속 지켜봤다.

잠은 세 시간밖에 자지 않았고,

자면서 하는 수련법이라도 되는지 몸에서 유형화된 기운이 안개처럼 모공으로 뿜어져 나왔다.

은폐가 4시간이 남았을 때.

별다른 소득 없이 이대로 끝나나 싶었는데,잠에서 깬 후작이 어딘가로 몸을 솟구쳤다.

감시를 알아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빠른 움직임에 거의 그를 놓칠 뻔했다.

곧장 질주로 따라붙었다.

‘어딜 가는 거지?’

연붉은 새벽노을이 천천히 돌담에 번지고 있을 때.

후작이 처음으로 예민하게 주위를 살폈다.

보티스의 가호를 믿고 있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걸음걸이를 보아 무척 익숙한 방향 으로 가는 것 같았다. 한두 번 가 본 게 아니었다. 아예 습관처럼 다니는 길인 것 같았다.

‘.탐지. 추적.’

스킬을 최대 수준으로 발동했다. 그제야 겨우 골목과 골목을 누비는 후작을 잡아낼 수 있었다.

그는 인파 속에 섞여 들기도 하고, 지붕과 지붕을 훌쩍 뛰어넘기도 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도약과 집중까지 써 가면서 겨우 미행에 성공했다.

마지막에는 정말 기척을 놓칠 뻔했지만.

‘.판단을 시행한다.’

[설정을 변경하시겠습니까?]

‘예.’

[왼쪽 길로 가세요!]

[서북쪽의 새하얀 건물이 당신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다음 발동까지 - 167:59:53...]

펜던트의 직감까지 사용해 가며 간신히 따라잡았다.

대체 누굴 만나러 가길래?

생소한 방향이었다.

거대한 신전이 보였다.

온통 하얀 신전 위로 새벽 별빛이 드문드문 떨어지다가,곧 더 많은 별빛이 달려와 기둥부터 외벽까지 꽉 채우기 시작했다.

‘저기는?’

별빛을 외면하듯이 신전 앞 한쪽 골목에 몸을 숨긴 후작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신전에서 익숙한 갑옷을 입은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흉갑,완갑,각반까지.

기하학적인 문양이 빼곡히 새겨진 미스릴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강한 추적 마법도 걸려 있겠지.

후작은 주위를 둘러보고는,걸어 나오는 이사벨을 향해 슬쩍 기척을 드러냈다.

신전에서 나오는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근위단장.”

“아,각하..!”

“잠깐 실례하지.”

후작이 손을 움직였다.

꺼내 든 철사가 서로 다른 열두 방향으로 꺾였다.

무척 독특한 모양이었다.

“•••천사의 양털이다. 기억하나?” 빤히 바라보던 이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안드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철사를 다시 꼿꼿하게 펴서 바닥에 버렸다.

“혹시라도 뭔가 전할 게 있다면 그걸 보여 주겠다. 아무도. 아무도 믿지 마라.”

“각하..?”

후작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대로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이사벨은 멍한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철사를 바라보다가,슬쩍 주워서 후작이 만들었던 대로 이리 저리 구부렸다.

비상한 기억력 덕분인지 아까와 비슷한 ‘천사의 양털’이 완성됐다.

나는 그 순간,옛 기억이 한 번에

떠오르며 제대로 된 건을 잡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후작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소. 아주 안전한 상태지. 난 그에게서 부탁을 받고 온 거요.]

[증표는 있나?]

기스-제-라이가 황제를 암살할 때 이사벨을 회유해 보려 했다.

이사벨은 내가 후작의 말을 듣고 왔다는 중표를 요구했다.

한데 아무렇게나 만들 수 있는, 철사로 꼰 문양이 그 정체였다니.

엄청난 정보를 얻은 것이다.

나는 머릿속에 철사를 꼬는 법을 제대로 입력해 두었다.

황제 암살에서 이사벨 시몬느를 빼낼 확률이 크게 올라갔다.

그나저나...

[특전: ‘은폐’를 사용 중입니다.] [기한 - 00:42:14...]

슬슬 시간이 아슬아슬하다.

바로 네크론 신사회 수도 본부로 돌아갔다.

레안드로를 계속 감시 못 하는 게 안타깝지만 일단 소득은 충분했다.

“으어억! 아,악마 나으리!”

“히 히!”

허공에서 내가 갑자기 나타나자 네크론 간부들은 기겁했지만,얼핏 그 공포를 즐기는 둣도 했다.

한 명이 대표로 보고를 시작했다.

“숙소,신전,훈련. 그게 그년의 일과 전부입니다. 기이할 정도죠. 인간이 어떻게 그리 사나 싶은데. 숙소에서 단원들을 하나씩 불러서 뒹구는지는 파악 못 했습니다.”

“신전?”

가호가 끝나 가서 급하게 오느라 이사벨이 방문했던 신전을 정확히 확인하지 못했다.

지도를 보면 알 것 같은데...

“빛의 여신 일리엔의 신도입니다. 그 어미가 석화 괴저라는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몸 곳곳이 굳어 가는 저주죠. 저 멀리 서북쪽에 살 때, 바실리스크가 뱉은 포자에 감염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신전 안에서 꾸준히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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