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이라는 건가.
네크론 신사회가 정리한 자료를 쭉
들여다봤다.
그곳에는 이사벨이 쓰는 갑옷과 방패에 있는 문양이 어떤 효능을 가졌는지도 일부 적혀 있다.
전투력은 형편없더라도,기본적인 정보 수집망으로 활용하기는 좋은 무리다.
T&T 같은 정보 길드에도 마수를 뻗고 있어서일까.
“짧은 기간에 많은 걸 알아냈군.”
보고를 하던 남자가 씩 웃었다.
“흐흐흐. 잘 조교된 고기 인형의 수요는 폭발적이니까요. 법률 집행 기관에 있는 녀석들에게 특히 수요가
많지만 자금은 없고,거래를 하는 순간 우리에게 약점이 잡히지요. 그게 네크론 신사회의 힘입니다.”
고기 인형... 자아를 말살한 기구.
가학심이라는 인간 고유의 본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무리를 슬쩍 훑어보며 물었다.
“석화 괴저라는 건,신성력으로도 치료가 안 되는 거냐?”
이사벨의 직위는 근위기사단장.
그 정도라면 수도에 있는 인간들 가운데서도 최상급의 위치다.
“치유야 꾸준히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일시적으로 증상 완화만 될 뿐, 한 번 척수에 스며든 바실리스크 포자는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잠복하고 있다가 계속해서 활성화된다고 하는군요.”
“그런가.”
중간에 다른 녀석이 끼어들었다.
“사실 모를 일입니다. 신관들은 완치할 수 있어도 증상만 완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번 치료하면 그걸로 끝이니까요.”
신관들 아래에서 일하고 있다는 녀석의 말이었다.
“완치보다야,신성력을 베풀어야 하는 입장이 훨씬 좋으니까요.”
“그런가..
이사벨에 대한 조사 자체는 꽤나 수월하게 이루어진 것 같았다.
다만 놈들이 제출한 자료에 후작과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즉,후작의 약점이 이사벨이라는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던 거다.
이사벨을 쥐고 제대로 흔들면, 레안드로도 넘어올 확률이 높다.
이제 들을 이야기는 없다.
남아 봤자 놈들의 집요한 가학에 어울려 줘야 하겠지.
은폐의 가호도 없는 녀석들에게 후작을 조사하라고 하면 골목에서 시체로나 발견될 확률이 높으므로, 더 이상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난 이만.”
자리를 빠져나가 비브리오 공작의 집으로 향했다.
황실과의 거래로 수많은 작위와 편의를 얻어,저 아래 폐하수도에 마경을 개척한 마왕의 대리자. 평범한 인간 하나에 마魔가 씩여 저렇게 변한 것인지,혼자 마계를 뚫고 나온 선봉대인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집 주변에 도착하자,은폐의 가호가 풀리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문이 열렸다. 지켜보고 있다는 건가.
내가 후작에게 하던 짓을 그대로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온몸에 벌레가 달라붙은 기분이었다.
“어때,뭘 좀 알아냈고?”
거대한 육신은 폐하수도에 두고 오기라도 한 걸까.
처음과 같은 마른 체형의 노인이
마치 신이 제 창조물을 바라보듯 자애로운 표정.
[보티스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상태창에 떠올랐던 그 말이,몹시 무겁게 다가왔다.
후작의 증표와 미유에 대한 애정, 이사벨에 대한 이야기까지 모두 다 털어놓았다.
노인은 따스한 표정을 지으면서
천사의 양털.
그 증표를 말해 주면 이사벨에게 어떻게 악용될지 모른다.
철저히 착취되겠지.
하지만 그녀가 가엾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디고 어두웠다.
무뎌진 감각 사이로 무언가 뚫고 올라올 것 같았지만,결국 뭉툭한 느낌만 주다 말 뿐이다.
빛은 새어 들어오지 않았다.
“허허..
노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보고를 흡족하게 음미하는 태도가 온몸에서 드러났다.
“정말 훌륭한 임무 수행이었다. 그자를 회유할 가능성이 훨씬 더 커졌구나.”
물론 후작이 그럴 리는 없지만.
내가 실패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러쿵저러쿵할 필요는 없었다. 비브리오 공작은 마음에 든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너는 네 쓸모를 입증했노라..
[당신을 향한 마왕의 신뢰가 한층
[마왕 보티스가 당신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고 있습니다.]
[오염된 정신이 드러납니다.] [일상어가 영향을 받습니다.] [은폐의 가호가 30일 연장됩니다.]
[특전: ‘충술’이 주어집니다.]
[특전 레벨: 1]
- 아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도, 추악공의 벌레에 갉힌다면 최소한 고통에서만큼은 꽤나 짙은 생애를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 ‘티키’를 소환합니다. 티키는 대상의 귀로 들어갑니다. 올바른 정보를 캐낼 때 꼭 필요한 섬세한 녀석입니다.
- 티키는 자체 분열로 개체 수도 늘릴 수 있습니다. 부하에게 맡겨 길러 보세요!
아래쪽으로 자세한 사용 방법과 효과가 쭉 서술된다.
읽어 보니 유블람의 여관 주인을 고문했던 그 녀석인 것 같다.
이건 어떻게 쓸지 몰라도...
충술 레벨이 올라갈수록 다양한
벌레들을 부릴 수 있는 모양.
어쨌거나,은폐 가능 기간이 크게 늘어난 건 환영이다.
“공헌에 따라 점점 놀라운 권능을 받으리니... 쓸 만한 녀석을 만나 몹시 반갑구나.”
좋아하는 노인을 향해 물었다. 처음부터 궁금하던 거였다.
“그런데. 당신이 직접 활동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새벽을 잡아먹는 뱀.
그런 호칭까지 뜨게 하는 공포의 대상이다.
“스스로 수도를 돌아다니는 일은
최소화할 수밖에 없느니..
어째서 최소화해야 하는지 생각할 사이도 없이,비브리오는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이제 또 다른 보상을 내리겠다. 네가 신경 쓰던 그 인간을 확실히 영주로 만들어 주겠노라.”
그 과정이 어떻든 크게 궁금하지 않았다.
애초에 수도에 오고,비브리오에 접촉하려 한 게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였다. 생각보다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루비아는 영주가 되고,시나리오 클리어를 향해 계속 영주 레벨을
올리면 된다.
공정한 거래다.
“그럼 에라스트로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
“음. 물론입니다.”
거절할 이유는 없다.
루비아가 영주가 되는 걸 옆에서 보고 싶었다.
마음이 점점 어두워져도,그것만은 아직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때 였다.
- 똑똑!
문이 아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비밀 통로?’
감지도 하지 못했는데...
역시 이곳도 결계의 일부겠지.
- 덜컥!
타일 하나가 위로 젖히며 땀에 젖은 대머리가 솟았다.
튀어나온 인간은 노크도 간신히 했다는 듯 다급한 표정으로 빠르게
말했다.
“신이시여! 큰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이야?”
“레안드로 후작이,다이아몬드의 행방을 알아챈 것 같습니다! 감시 중이던 푸른 사자 기사단원 몇몇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뭐라고? 벌써?”
“예, 엄청난 속도입니다!”
“그 새끼가 정보를 홀린 거겠지. 멍청한 짓을..
그 새끼?
누구를 이야기하는 걸까?
구멍에서 튀어나온 대머리는 처음 보는 녀석이다.
옆머리만 조금 남고,검은 눈썹이 ▽자로 짙다.
손에는 어딘가를 오르기 편한 긴 쇠 손톱을 착용하고 있고.
보티스의 대리자에게 비밀 통로로 직접 보고하는 걸 봐서 네크론의 핵심 중의 핵심일 텐데.
군데군데 기운 검은색 수도복을 흘끗 바라봤다. 대머리가 고개를 숙인 채 눈치를 보고 있다.
“지금 위치는?”
“길드 입구로 이미 진입했습니다. 한 번에 도착한 걸로 봐서 미로를 이미 파악했다고 봐야 합니다.”
“어디로 도망쳐도 잡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나..
눈치만 보는 대머리와,침음을 흘리는 보티스의 대리자를 보니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리전트 다이아몬드 도난 사건.
도둑 길드의 배후에는 보티스의 대리자가 있다.
“혹시 우리가 한 겁니까? 황실의 보물을 훔친 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귀찮게 구는 레안드로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거였다고.”
짧은 설명이 이어졌다.
후작의 약점을 알아내 회유하려는 동시에,당장 이목을 돌리기 위해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설명.
황실의 보물을 가짜 계획을 세워 훔쳐 낸다.
대담하다.
네크론 신사회에 쓸 만한 인간이 없다지만,간접적으로 제국 곳곳에 뻗은 손의 규모는 파격적이겠지.
계획을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런 분위기는 아니다.
대머리가 쫓기는 토끼처럼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령들에게 빨리 물건을 빼돌려 달라고 할까요? 그러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