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77화 (277/458)

278화 너희는 모래처럼 (19)

그때 였다.

푸른 사자들의 뒤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무리가 보였다.

기사들은 배후를 완전히 내주고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내 쪽으로만 칼을 겨눴다.

어둠에서 솟아난 무리는 모두 가면 으로 표정을 가리고 있었다.

얼굴 윗부분만 덮는 반쪽짜리 은색 가면도 있었고,전체를 모두 덮는 검은 가면도 있었다.

익숙하고 차가운 느낌.

‘.유령?’

입과 눈이 뚫린 가면을 쓴 자들이 내게 눈빛을 모은다.

은폐의 가호.

보티스의 힘을 빌리는 자들이라고 들은 탓에 반 정도는 기대했지만, 그 칼들은 무방비한 푸른 사자들의 등을 겨냥하지 않았다.

대신 어둠 속에서 통로의 빈틈을 메꿔 주고 있었다.

그 자세를 본 순간 깨달았다.

유령들은 푸른 사자들을 기습하러 온 게 아니다.

기사들을 도와줄 확률도 높다. 상황은 생각보다도 좋지 않았다.

이들을 모두 죽인 뒤,빠짐없이 정수 흡수를 하려 했던 계획이 몹시 허황되게 느껴졌다.

높은 지하 통로의 천장을 흘끗 바라봤다.

도망칠 확률이라도 높이려면... 상태창을 띄웠다.

[이름: ]

[해골병사 Lv.l3(271)]

[체력: 121]

[힘: 121]

[민첩: 121]

[지혜: 121]

[보너스 스탯: 29]

[달성한 전직 一〈해골기사〉] [해골기사의 모든 특전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쌓아 놓은 스랫을 6씩 배분하고, 지혜는 특별히 11을 더 올렸다.

먹살을 손에 쥔 신관의 목을 다시 넓게 베며 사방으로 피를 뿌렸다.

[둔한 눈물 Lv.l을 시전합니다!]

피를 매개로 한 무색무취의 독이 시체의 피에 섞였다.

호흡 기관을 무력화시키는 질식의 극독이다.

칼도,화염도 아닌 신관의 피는

크게 경계하지 않았는지,그대로 얼굴에 맞은 기사들이 숨을 쉬지 못하고 무릎을 꿇으며 고꾸라졌다.

이런 상황에서의 대웅 매뉴얼도 제대로 되어 있는지,주변 기사들은 쓰러진 동료의 상태를 확인한 뒤 입에 해독제를 먹였다.

현명한 판단.

어차피 목적은 살상이 아니다.

‘질주.’

한쪽이 무너진 포위망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 쌔애앵!

한 명의 칼이 팔을 스쳤지만 살짝 긁힌 정도였다.

끝까지 독을 뿌리자 녀석도 급히 뒤로 물러섰다.

가면 사이로 당황하는 유령들의 눈빛이 비춰진다.

후작이 있는 쪽으로 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걸까?

바닥에 떨어진 다이아몬드를 다시 빠르게 주웠다.

[일리엔의 눈을...]

[반경 10미터 내에서 마왕의 권능

빛이 은폐를 빠르게 걷어 냈다.

가면을 쓴 유령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고 흠칫거렸다.

다이아몬드를 쥐고 있는 사이에 머릿속에서도 뭔가가 조금씩 걷혀 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깨끗해진다기보다, 다른 색으로 울퉁불퉁 더 진하게 칠해지는 것 같았다.

덧칠되는 정신이 무거워진다.

- 파광!

유일하게 머릿속에 흐르는 안개를 걷어 내는 것은,통로에서 울리는 거대한 소음.

위협의 말이나 예고 따위도 없는 강렬한 폭력이 지하의 공기를 점점 더 차갑게 만든다.

후작이 가까워질 때마다 머릿속이 깨끗해진다.

한 가지 가정이 떠오른다.

후작이 일리엔의 유물을 황실에 반 납하지 않고 몰래 가졌더라면...

죽는 건 레안드로가 아닌 로랑스 타르티에가 되었을지도.

‘포스 실드. 이중영창..:

두 탑주를 향해 밟고 올라갔던 마법을 다시 사용했다.

목표는 높은 천장의 환풍구.

값비싼 해독제를 먹었는지 독을 풀어 가는 기사들도,이제야 뒤에서 튀어와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쫓는 유령들도 내 정체를 목격했다.

갑옷도 걸치지 않은 해골의 육신.

하지만 거기에 놀라서 흐트러지는 자는 단 하나도 없다.

목격한 대로 명확히 보고하겠지. 모두 죽일 여유는 없다.

- 팟!

빛의 유물을 환기구로 던져 넣고 그리로 몸을 집어넣었다.

좁다.

[뼈의 군주 Lv.l...]

[골격변용#格變容을 사용합니다!]

- 우둑! 우두둑!

후작이 묶은 수갑에서 탈출하기 위해 사용했던 스킬을 다시 한 번

우두두둑!

[비활성화된 ‘공예’ 특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뼈의 군주: 골격 변용에 상승 효과를 발휘합니다.]

마왕의 가호가 나를 응원한다.

다행히 비행 마법이 있는 녀석은 없는 모양.

환풍구로 빠르게 사라지는 나를 푸른 사자와 유령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로 올라간 게 들킨 이상... 빠르게 행동해야 한다.

망설이지 않고 계속 좁은 통로를 기어올랐다.

조금이라도 늦어진다면.

출구로 나갔을 때 후작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집요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가 아닌가?

- 달그락!

좁은 환풍구를 빠르게 기어오르며 상태창을 다시 점검했다.

스킬 경험치 2만.

기사 전직의 선물은 그대로다. 보너스 스탯과 함께 잠시 동안 그대로 놓아둔 경험치.

[스킬 경험치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망설일 필요는 없다.

생각한 스킬에 그대로 경험치를 전부 밀어 넣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은신 Lv.6 -ᅳ 은신 Lv.8]

[특전: 지각방어(B플러스)를 획득!]

- 다섯 차원에 걸쳐 마술로 인한 광역 탐지를 방어합니다.

-〈후각〉〈색각〉〈청각〉〈촉각〉 〈미각〉으로 당신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쓰지 않고 놔두길 잘했군.’

정수 홉수나 검기 스킬에 쓸 수 없다고 해서 미뤄 뒀었다.

천천히 스킬들의 유용성을 비교해 보고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만큼 적절한 타이밍은 없다.

은신 스킬.

보티스가 내리는 은폐의 가호와 중복되어 아까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당장 후작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느 정도로 놈의 탐지를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생겨난 특전의 설명이 범상치 않다.

모험을 한 보람은 충분하다.

다이아몬드를 앞에 내세운 채, 앞을 살피며 기어 들어갔다.

좁은 환풍로 안쪽은 뿌연 먼지와 돌가루,쇳조각으로 혼탁했다.

모서리마다 엉겨 붙은 거미줄이 움직일 때마다 몸에 달라붙었다.

일부러 긁히라고 만든 날카로운 칼날들이 곳곳에 보였다.

이건 어쩌다가 끼인 게 아니라, 설계부터 그렇게 만든 거다.

‘정해진 입구 외에는 아예 출입이 안 되게 만들었군..

뼈의 군주 스킬,숙련도가 쌓인 골격변용이 아니었다면 환풍구를 무너뜨리다시피 하며 앞으로 가야 했을 터다.

갑옷만 입고 있어도 우그러뜨리며 가야 했겠지만...

그건 다행인가.

탐지 스킬로 살펴 가며 뚫린 곳을 향해 계속 전진했다.

시체 한두 구나 독거미 정도는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약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깜깜한 통로를 기고 또 기어 나갔다.

이제 곧이다.

바깥은...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만일에 대비해 한 손에 쥔 검에 검기를 불어넣었다.

쇠로 된 창살을 살짝 구부리고, 밖으로 빠져나온 뒤 복구시켰다.

출구를 빠져나가는 순간.

一 휘이잉...

밖은 차가운 바람만 불어올 뿐. 환풍구 주위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다. 수도 외곽,기척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늘진 다리 아래.

지도를 꼼꼼히 기억해 둔 덕분에

대략의 위치는 알 수 있다.

혹시라도 후작이 나타나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만약을 위해 스킬 경험치를 전부 은신 스킬에 몰아 두기는 했지만, 이걸로 후작의 탐지에서 안전할지 확신할 수는 없다.

- 팟!

일단 비브리오에게 빛의 유물을 빨리 전해 주자.

최대 속도로 질주했다.

뒤에서 쫓아오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따돌리는 데 성공한 걸까?

골목을 몇 바퀴 돌고,괜히 외곽을 빙빙 돌다가 비브리오 공작의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 놓고 있던 비브리오는 들어오는 나를 보고 반색을 하며 물었다.

“너,설마..?”

“네. 가져왔습니다.”

보티스의 대리자씩이나 되어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손에 쥔 빛의 유물을 앞으로 내어 놓는다.

방패 가운데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보고 노인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지만,곧 입을 길게 찢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상극이라 해도 이 정도를 감당하지 못해서야, 추악공의 대리 자가 아니다.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노인이 잔잔한 웃음을 띠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빛의 유물을 빼앗아서,그 많은 유령과 기사들 로부터 탈출했다는 말이냐? 레안드로 녀석에게서도? 크하하. 지붕 위에 올라간 닭 쫓던 개라니!”

재미있다는 둣한 표정이다.

“하지만..

걸리는 것도 있다.

본래의 몸을 비쳐 버렸다.

일단 살아 나왔지만,목격자들이 어떤 식으로 나를 쫓을지 모른다.

내 걱정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말거라. 지금부터 넌 계속 보티스의 힘을 쓰면 되지 않느냐?”

맞는 말이긴 하다.

은폐의 가호를 쓸 수 있는 시간도 한 달이나 남았고.

비브리오 공작만 볼 수 있는 베일 뒤에 숨어 있으면 된다.

“그런데 유령들은 저를 도와주지 않더군요.”

“물론이지. 원래라면 그냥 노예가 되었을 것들인데,우두머리 하나 때문에 조금 애를 썩히고 있다.”

유령들의 우두머리라면.

로랑스 타르티에를 말하는 걸까?

여기서 놈까지 안다고 하면 너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잠자코 들었다.

“잠깐 앙탈 부리는 것에 불과하니 곧 해결되기야 하겠지만. 너는 나에게 큰 기쁨을 준 거다. 놈들이 의도한 대로 유물이 후작의 손에

들어갔다면,이 일을 꾸민 우리의 약점으로 삼으려고 했겠지.”

노인은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일리엔의 유물은 여기서 봉인하겠다.”

“봉인. 입니까?”

“왜,싫은가?”

“유령들이 우리 편이 아니라면, 통제할 장치가 필요할 텐데요.”

노인의 입술이 실룩인다.

“네가 다이아몬드를 쥐고 있어서 유령들을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게 아닙니까?”

“보티스의 가호는 모두 연계되어 있다. 탑의 윗돌에게는,아랫돌이 가진 모든 힘이 무효화되지..

유물을 가져온 내 활약에 기분이 좋은 듯 노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쩌면 중요한 정보를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정점의 지배자는 물론 나 하나. 그 아래는 바로 너다.”

놀라운 사실이다.

“그럼 유령들은..

“놈들은 힘을 베낀 복제품을 빌려 쓰는 처지일 뿐이야. 그것도 내가 권능을 끊으면 모두 없었던 일이

되느니라.”

‘복제품’이라.

놈들이 쓰는 가면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건가.

노인은 문득 표정을 바꿨다.

거기서 더 말해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 달그락.

그는 방패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두 손을 유물의 가장자리에 댔다. 기괴한 파장이 손에서 스멀스멀 나오기 시작했다.

황실의 보물로 고귀하게 모셔졌을 다이아몬드는,사악하게 웃음 짓는 노인의 마수魔手,아니 손가락이 길게 늘어지고 분화한 수십 갈래 촉수觸手에 휘감겨 천천히 그 빛을 잃고 검게 타락해 갔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중심의 다이아 핵이 파르르 떨리며,진한 촉수로 전해져 갔다.

방패를 구성하던 빛줄기는 흐릿하게 사라진다.

어떤 실재의 재료도 아닌 빛으로 만들어진 방패.

남은 건 핵심인 다이아몬드뿐.

그 다이아몬드도 점차 검은 물을 주위로 뱉어 내고 있다.

[진실의 빛이 꺼졌습니다.]

[은폐의 가호가 다시 적용됩니다.]

“된 건가..

굳이 마법 간파를 쓰지 않더라도, 거대한 힘이 노인에게서 빠져나간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급격히 피곤해 보였지만 노인의 눈에 뿌듯함이 감돌았다.

- 과득!

까맣게 변색된 다이아몬드를 작은 상자에 넣자, 상자는 살아 있는 둣 스스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작은 통로 속으로 스스로 사라져 갔다.

“이제 누구도 찾을 수 없다. 이제 약속대로 포상을 내리도록 하겠다. 에라스트. 루비아라는 아이에게 특별히 신경 써 주도록 하지. 그냥

평범한 영주로 만드는 정도로 그칠 생각은 없다. 최고의 힘을 부여해 주도록 하마.”

해냈다!

길고 길게 돌아간 끝에,드디어 루비아 시나리오 클리어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운이 좋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령과 푸른 사자 기사단.

소녀 공작과 레안드로 후작.

그들과 네크론 신사회가 모두 다 동상이몽으로 분열되어 있는 덕에, 보티스의 대리자 같은 강한 존재가

나를 필요로 한 것이다.

밖에서는 단단히 결속된 것처럼 보였지만. 파고들 틈은 얼마든지 있는 모래 같은 녀석들.

잡히지 않고 무사히 다이아몬드를 꺼낸 것도 꽤나 운이 좋았다.

이번 생은, 어떤 어긋남도 없이 착착 하나하나 맞아떨어지는 게 만족스러웠다.

“그럼,머뭇거릴 이유가 있나? 내일 당장 에라스트로 가자고.”

“함께 가자는 겁니까?”

노인이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눈을 마주하자 정신이 흐릿해진다. 모든 게 잘될 것 같은 편안함이 퍼져 나간다. 아무런 불안도,위험도 느껴지지 않는다.

서로 몇십 년을 알아 온 것 같은 굳건한 신뢰와 끈끈한 유대감이 노인과 나 사이에 이어져 있다.

“혹시 싫은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아닙니다.”

오히려 내 쪽에서 부탁하고 싶다. 루비아가 영주가 된 모습을 직접 확인해야 하니까.

소식으로만 듣는 건 아쉽겠지.

이번 생의 레이 루비아는 준비된 영주로 보였다.

그녀를 따르는 많은 부하들에다, 삼촌 대신 본성을 점거한 영향력만 봐도 알 수 있다.

내 은밀한 지원을 얻어서 그녀가 잘 해내는 모습을 본다면 그것만큼

뿌듯한 일은 없겠지.

흐릿한 정신을 뚫고,머릿속으로 빛의 상狀이 맺히는 듯하다.

루비아를 생각하자 곳곳의 작은 틈으로 삐져 들어온 차가운 빛이 사선으로 흐른다.

어딘가로 빠르게 미끄러져 가던 정신이 잠시 멈춰 섰다.

나는...

이래도 되는 걸까?

아니다.

어쨌거나,착실히 루비아를 위한 길을 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 편안해졌다.

노인은 밖으로 나가 걸었다.

은폐의 가호 속에서 노인을 따라 이동했다.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걸까.

“제사장님!”

검은 얼룩.

이번에 나타나는 녀석들에겐 목이 아닌,이마나 눈가에 작은 점처럼 검은 문신이 새겨져 있다.

“.특별 외출이십니까?”

저번에는 이런 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정기 외출이 아니라면 이들이 반응하는 모양.

저런 자들을 어디서 봤더라?

잠시 생각하다 기억을 떠올렸다.

애벌레 사육장.

물론 같은 녀석들은 아니었지만, 목이 아닌 다른 곳에 검은 문신이 있는 건 비슷하다.

사육장의 광경이 떠오르며 문득 궁금해진다.

애벌레는 전쟁용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자유 연합과의 전선에서 애벌레 비슷한 것들은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애벌레를 목격한 건 두 마탑주를 죽이고 수도에 온 뒤였다.

여기저기가 끈적끈적하게 부풀어 오른 채,형태를 바꾸던 후작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그 말은,그 시점까지 애벌레가 양산이 안 됐다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준비된 개체들은 엠버에 투입됐다는 말이었을까?

자세한 사정은...

‘제사장’의 신뢰를 얻는다면 좀 더

들을 수 있겠지.

나는 녀석을 믿고...

믿음은 편안하다.

“아아,그래.”

노인은 새로 나타난 부하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의 도시. 에라스트로 간다. 작위 분쟁에 대한 조정이다. 준비 하도록 해라.”

“예,제사장님.”

“에라스트라면. 레이 커크 쪽을 편들어 주시는 겁니까?”

“그 반대다.”

노인을 수행하는 두 명의 부하는

놀라지도,따지지도 않았다.

“그러면 굳이 행차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부하들은 모두 우리 쪽 수족입니다. 자살을 명하시고,말을 안 들으면 그냥 죽이셔도 깔끔하게 끝납니다.”

비브리오 공작은 내 쪽으로 슬쩍 윙크하며 손을 내저었다.

“신경을 좀 더 써야 하는 일이다.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부하들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십여 분을 더 걸었다.

길 멀리서 화려한 마차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스-제-라이의 암살에서 보았던, 황제의 것에 버금갈 정도로 화려한 마차였다.

네 필의 말이 끄는 공작의 마차.

멋진 제복을 차려입은 두 마부가 의자 위에 앉아 있었고, 보란 듯 고급스런 장식이 사방에 가득했다.

하지만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만한 장비는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다.

물론 저 마차를 공격하는 순간, 어떤 인간이건 사산死産되지 않고

태어난 걸 후회하겠지만.

노인이 만든 광장을 떠올렸다.

뼈는 바닥에 발라지고 부드러운 살은 둥글둥글 부풀어 오르겠지.

인간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건. 배울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살육이 아닌,구축.

거기에는 낭비가 없다.

공포를 넘어서는 완전한 지배다. 노인은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그 모습을 보며 뒤를 쫓았다.

일리엔의 동상을 지나서,경사진 도로를 올라갔다.

드넓은 ‘하얀 광장’이 펼쳐진다. 아침부터 낮이라면,걸을 때마다 묶이지 않은 빛이 반사되며 시선을 어지럽히겠지.

저녁의 광장은 붉었다.

어디서 쓸려 오는지 모를 석양이 대리석 광장 위에 주저앉아 흐느적 대고 있었다.

적막한 ‘붉은 광장’을 비브리오의 마차가 지났다.

커다란 성문을 향해 다가갈 때.

- 다그닥! 다그닥!

빠르게 추격해 오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드넓은 광장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몇 기의 기사가 있었다. 엉겨 붙는 석양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갑옷은 선명한 푸른색을 유지했다.

선두에 선 인간은 이제 누구보다 익숙한 얼굴.

발각될 일은 없겠지만,뒤로 슬쩍 물러나 간격을 확보했다.

빠르게 달려온 기사들은 화려한 마차를 둥그렇게 포위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따지려는 수하들을 노인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혹시 나를 추격해 온 걸까?

어딘가 추적 가능한 흔적을 남겨 버렸을지도 모른다.

[안심해라.]

긴장한 채로 몇 미터 떨어져 지켜 보는 내게,노인의 뜻이 머릿속으로 전달됐다.

[이 녀석이 쫓아와 주지 않았다면, 굉장히 서운했을 거야.]

직접 정신에 울리는 메시지.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노인과 점점 깊은 유대를 맺어 가는 중거일지도 모른다.

[별거 아니다.]

비브리오의 말이 나를 편안하게 가라앉힌다.

하긴, 리전트 다이아몬드는 이미 봉인을 끝낸 상태.

이제 와 후작이 뭘 할 수 있을까.

- 히히힝!

미유가 노인을 사납게 쏘아봤다.

“무슨 일인지..?”

후작은 말을 토닥거렸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의례적인 수색이지요. 잃어버린 유물을 찾는 과정입니다.”

기사들이 말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마차를 둘러쌌다.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으려는 원형 진이었다.

노인은 그들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둣이,계속 후작에게만

눈길을 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나 급히 직접 오신 건. 내가 뭐 특별히 잘못한 거라도?”

“스스로 짚이는 게 없으면 아무런 문제도 안 되겠죠. 참, 가택도 현재 수색 중입니다.”

“그 작은 집까지? 허허. 거기서 뭘 뒤질 게 있다고 그러나. 공은 나한테 너무 관심이 많다니까.”

“이미 제가 왜 왔는지까지 전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혀 모르겠는데 말이지. 어쨌건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군 그래.”

“마차나 집 안에 숨기실 정도로

허술할 거라고 생각 안 합니다만, 저도 하는 데까지 해야죠.”

“뒤져 봐야 늙은이 냄새밖에 달리 나겠나? 영지도 없는 명예 작위 좀 하사받았다고 뭐 이리 괴롭히는지 모르겠군.”

노인은 입술을 이죽거리며 후작을 도발했다.

뭘 어쩌건,너는 절대로 유물을 찾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이다.

무시하고 담담히 마차를 뒤지려는 후작에게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 이사벨 시몬느라고 했나. 근위단장 좀 신경 써 주고 그러게. 모친이 아프다고 했던가?”

후작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지만 곧 다시 가라앉았다.

나를 쫓아올 때는 보여 주지 않던 냉정한 면모다.

원래 저런 차가운 절제가 가능한 인간이었나.

이사벨도,미유도 아직 살아 있는 상황에서는 저게 레안드로 후작의 성격인 건지도 모른다.

속을 드러내지 않는 인마人魔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마차 수색해. 빈 공간은 전부 다 확인해라.”

명을 받은 기사들이 비브리오를

그대로 지나쳤다.

손짓으로 마부들을 내리게 하고 내부를 하나씩 뜯어 가며 뒤졌다.

“이거 감당할 자신은 있고?”

“제가 무모한 사람 같습니까?” 무모한 인간 맞는 거 같은데...

빛의 유물에 더해,이사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서 한차례 속을 더 긁어 놓았다.

그 탓일까.

후작은 굳이 노인을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네 정보는 확실해. 이사벨이 놈의 약점이라니,둘을 한 몸으로 이어 줄까 싶은 생각도 드는군.]

노인이 말하는 한 몸은 꽤 색다른 의미겠지.

하지만 역량이 지나치게 차이 나는 둘을 한 몸으로 만들면,레안드로 후작의 효율이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따로 쓰는 편이 좋지 않을까. 의사소통이 일방적인 탓에 지금 내 의견을 전달할 방법은 없다.

원래 모양인 빛의 방패가 아니라, 다이아몬드만 남았더라도 찾을 수 있을 만큼 살살이 뒤졌는데도 찾지 못했다.

노인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후작이 다시 눈썹을 꿈틀거렸다.

몸까지 수색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 정도 크기면 몸을 수색해 봤자 나오지도 않을 테지만.

“실례했습니다.”

후작은 비브리오 앞에서 형식적 이나마 사과의 말을 뱉어 낼 수밖에

없었다.

비브리오는 환하게 웃으며 후작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니,나한테 뭐 미안할 거 있나. 당연한 결과가 나온 것뿐이지.”

“그런데 어디를. 가십니까?”

“아직 몰랐나? 에라스트로 가네. 후계 분쟁이라던가. 나처럼 한가한 늙은이가 다녀가야겠지.”

후작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그런 일에는 전혀 관심 없는 표정이다.

“가택 수색은 적당히 해 주게나. 죄다 부수지만 말아 주길 바라네.

늙으면 노숙은 좀 무리라고?”

“.파손은 저한테 청구하시죠.” 후작은 그 말을 남기고 말머리를 돌렸다.

[자네.]

비브리오가 나를 부르고 있다.

[잠깐 수도에 남아 줄 수 있겠나? 오래는 아니야. 후작이 내 가택을 수색하는 것만 보고 오면 돼.]

어렵지 않은 부탁이다.

노인은 어둠 속에 숨은 내 쪽을 보고 계속 말을 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내 가장 믿을 만한 대리자는 바로 자네란 말이야. 할 수 있겠지?]

물론이다.

내가 비브리오의 가장 믿을 만한 대리자라니 기뻤다.

후작이 남아서 무슨 일을 하는지 나도 궁금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어둠 속에 숨어 기사들을 조용히 따라갔다.

뒤를 밟는 건 어렵지 않았다. 미행에서 중요한 건 거리 조절.

놓치지도 들키지도 않게 따라가는 부분이 어렵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이 붙더라도 들킬 일이 없다면 일은 쉬워진다. 기사들은 곧바로 비브리오의 집에 도착했다.

레안드로는 텅 빈 집을 훑어보고 한숨을 쉬었다.

“정리가 끝난 건가.”

그는 곧 한숨을 곁으로 밀어내고

근처에 심어진 커다란 버짐나무와 은행나무 아래부터 시작해서,문을 열어젖힌 뒤에는 가구에 있는 작은 공간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뒤졌다.

비브리오의 가택은 무척 작았고 후작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한 시간 정도의 수색 끝에 후작은 기사단을 전원 귀가시켰다.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찾는다.”

“단장님..!”

“역시 빼돌린 걸까요? 비브리오 공작이 정말 맞는 거겠죠? 심증은 확실한데..

물증은 없다는 건가.

“그만.”

마치 누군가 보고 있을 가능성을 의식하는 것처럼,후작은 부하들의 입을 막았다.

“아. 죄송합니다.”

“전원,작전에서 이탈한다. 지금까지 잘해 줬다.”

레안드로 후작의 단호한 말투에 기사들은 조용히 돌아섰다.

대머리가 튀어나왔던 바닥의 비밀 통로도,검은 상자를 넣은 통로도

역시 이곳의 은폐는 터무니없이 강력하다.

노인은 보티스의 대리자.

아쥬라의 탑주들을 훨씬 뛰어넘는 마법사다.

이 집은 그런 강자의 공방이고,결계.

후작이 그가 쳐 둔 질긴 은사銀絲 위에 걸린 나비로 보였다.

혼자 남은 후작은 아예 집 안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뭔가 느끼려는 듯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명상에 돌입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후작이 천천히 칼을 들어 올렸다. 달이 떠오르는 게 저렇게 느린가 싶을 정도로 느린 속도였다.

저런 태도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하지만.

칼끝이 상단의 한 점에 찍힌 채, 아래로 그을 준비를 하는 모습에서 낯선 공포가 느껴졌다.

인간의 감각을 희롱하고,생각을 왜곡시키는 귀마鬼魔의 거미줄.

시각으로 볼 수 없다. 촉각으로 만질 수도 없다. 힘으로 부술 수도, 빠르기로 잡을 수도 없다.

하지만 그곳에서 먹잇감을 노려, 원하는 나비의 사지를 언제든 잡아 찢는다.

후작은 분리된 세계를 읽어 내듯, 몸에서 완전히 힘을 빼고 허공의 한 적막을 겨누었다.

면面과 면面 사이,선과 선 사이, 점과 점 사이...

조그만 점들이 천천히 회전한다.

줄 끊어진 초승달이 기울어지듯 비스듬한 사선斜線의 검격.

이사벨을,자신을,제국을,결국 인간이라는 종족을 잡아먹으려는 귀신이 친 결계를 베려는 순간.

- 과광!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황명이오! 레안드로 후작은 당장 패악질을 멈추시오!”

그 순간 칼에 모여 있던 집중이 흐트러졌다.

미묘하게 초점이 어긋난 검격은 거미줄 한 가닥은 베어 냈지만, 은막銀幕을 벗겨 내지는 못했다.

후작의 칼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베었음에도,이 세상의 것이 아닌 보라색 액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에 막 문을 박차고 들어왔던 기사들은 아연했다.

실패. 한 건가?

방금 후작이 한 공격은 내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하지만,위험했다는 것만은 분명 느낄 수 있다.

차원의 단면을 깎아 내는 공격.

칼이 움직이는 순간 나와 후작의 거리가 급격히 좁아짐을 느꼈다.

‘여기’의 차원을 깎아 내,‘저기’에 숨은 비가시의 적을 친다.

날카롭게 깎은 쇳덩이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차원의 경계를 넘는 공격이 가능하다니.

바티엔느 폰 레안드로라는 인간의 재능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후작은 허탈한 눈으로 칼에 묻은 보라색 액체를 털어 냈다.

“•••뭐냐?”

꿈틀거리는 자그만 빨판 같은 게 검신에 묻었다가,바닥에 떨어져

들어오는 기사들 쪽으로 꾸록꾸록 기어갔다.

“뭘. 베신 겁니까?”

기세 좋게 문을 열어젖힌 기사가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칼로 빨판을 내리찍었다.

겁이라도 잔뜩 먹었는지 칼끝에는 은은한 검기가 서려 있었다.

퍼걱,하는 소리와 함께 보라색 빨판이 터져 나갔다.

“너희가 끼어들어서 방해한 덕분 에 실패했지.”

“크흠..!”

처음 문을 걷어찼던 각진 얼굴의

남자가 커다란 흉터를 실룩거렸다. 슬쩍 눈치를 보니 들어오는 즉시 후작을 체포하려고 한 모양이다.

터무니없는 짓인 걸 잘 알고 있는 모양인지,기사들은 서로를 보며 어물쩡거리기만 했다.

“야,안 하냐?”

각진 얼굴의 남자가 주위를 보며 재촉하자 다들 억지로 칼을 뽑아 후작을 겨눴다.

— 久、S * -릉>

어지간히 싫은 임무인지 기사들의

표정은 죄다 썩어 있다.

“무슨 의도지?”

쓸데없이 길기만 한 삶을 여기서 끝내려는 건가,라고 묻는 것 같은 느낌으로 후작이 주위를 돌아봤다.

“귀족회의에서 연명으로 탄원서가 올라왔고,폐하께서 황명도 내리신 상태입니다. 현 시간부로 리전트 다이아몬드 도난 사건은 타르티에 공작 각하에게 넘어갑니다.”

“이유는?”

“제국의 주요 전력인 푸른 사자 기사단원이 둘이나 사망한 데다, 빛의 신관께서도 소천하셨습니다. 후작의 임무 수행 능력을 믿을 수

없다는 의도입니다.”

남자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씹어 삼키듯 말했지만,후작의 눈치를 살피며 겁먹은 게 보였다.

물론 그런 건 핑계일 뿐이다.

네크론 무리에게 보고받은 바로, ‘교육된 가축’들은 여러 귀족들에게 은밀하게 전해진다.

철저히 취향을 맞춘 선물 덕분에 받지 않는 쪽이 드물고,받은 쪽은 약점을 잡혀 네크론의 개가 된다.

비브리오를 철저히 수사한다면...

‘선물’을 받는 인간들도 큰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레안드로 후작은 남자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너희 단장은 어디 있지?”

“.각하를 저지할 이유가 없다며 목소리를 높이다가,임시로 대기 조치를 받으셨습니다.”

근처에 서 있던 한 명의 기사가 결국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후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조사를 저지하고 싶다면. 좋다.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다이아몬드 수색은 여기서 종료한다.”

후작은 바깥으로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그 뒤를 제국의 기사들이 멍하니 바라봤다.

후작이 멀리 사라지고 난 뒤였다.

“조사. 하실 겁니까?”

어린 얼굴의 기사가 물었다.

“하긴 뭘 해,짜식아.”

각진 얼굴의 남자가 핀잔을 주고 주위를 돌아봤다.

“얼른 가자. 어휴. 명이 십 년은 줄어든 거 같다.”

그들까지 사라지자 노인의 가택은 다시 고요해졌다.

조금 전 후작이 허공에 칼을 긋던 모습을 생각했다.

그 공격이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정말 결계를 포착해 베어 냈을까?

마계와 이어진 대사제의 거미줄을 자르고,비밀을 열었을까.

어쨌건 후작의 탐지 능력으로도 방의 비밀은 찾아내지 못했다.

부하 기사들도 곳곳에 칼을 꽂고 수색했지만 아래로 향하는 통로를 찾을 수 없었다.

어쨌건,지금까지 본 일들은 모두 비브리오에게 보고할 가치가 있다.

모두가 밖으로 나갔을 때.

비브리오가 전해 준 비밀 지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덜컥.

바닥을 열었다.

기사들이 아무리 칼로 찔러 대도 발견되지 않던 통로가 간단히 입을 벌렸다.

혀를 날름거리는 계단을 따라서 아래로 내려갔다.

춥고 어두운 미로는 불청객들을 찌그러트릴 함정을 곳곳에 마련해 놓은 것 같았다.

표지판 따위는 없지만 비브리오의 지도 덕분에 헤매지 않았다.

수도 아래에 좁게 뚫린 지름길.

나냐우가 사용하던 비밀 통로와 연결되어 있을지,혹시라도 황실의 비역과 통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알아봐도 좋겠지.

지금은. 에라스트가 먼저다.

여러 갈래로 나뉜 길을 선택하며 빠르게 도시 밖으로 향했다.

- 쿠구궁-

수도 아래를 가로지르는 통로를 지나 붉은 여우 평원으로 나왔다.

이제 에라스트만 가면 된다.

서늘한 바람이 몸을 가만히 스쳐 지나갔다.

비브리오의 도움으로 영주가 되어 있을 루비아를 생각했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몽롱한 정신이 살짝 깨어났다가, 다시 흐릿하게 흩어졌다.

빠르게 달리고 달려 에라스트에

다다랐다.

회색의 성이 눈에 들어온다. 저번보다 훨씬 나은 상황일 거라고 확신했다.

처음 영주가 될 때와는 다르다.

심복들은 감옥에 갇혀 고문당하던 상태가 아니고,루비아도 훨씬 더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그때조차 루비아는 탁월한 활약을 보였다.

지금은 어떨까?

그녀의 머리 위에 반투명한 통치 레벨이 떠오르던 모습을 회상했다.

영지는 발전하고,주위 인간들의

신망은 두터워질 것이다.

루비아의 에라스트 영주 생활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안정적이고 편안하겠지.

성 안 거주지로 숨어들어 갔다.

“정말 루비아 아가씨가 영주님이 됐다고?”

“그럼. 소식이 너무 늦구만?”

“다른 도시에 다녀오는 바람에. 잘됐어,정말 잘됐어!”

서로 껴안고 눈물을 글썽여 대는 주민들이 보인다.

이 정도 반응일 줄은 몰랐는데. 이번 생의 루비아는,평생에 걸쳐

에라스트에 쌓은 선행이 많은 것 같다.

고블린 부락을 구할 때와 비슷한 우스운 뿌듯함이 느껴진다.

내성으로 숨어들어 갔다.

‘.탐지.’

비브리오에게 내가 도착했다는 걸 알리기 전에 일단 루비아부터 찾고 싶었다.

하지만 성 안이 어딘가 흐릿하게 느껴졌다.

꿈틀거리는 아지랑이 같은 것들이 윤곽을 왜곡하고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내성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흐릿해졌다.

결계인 걸까?

루비아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노인이 만들어 준 건지도 모른다.

일단 비브리오부터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성 곳곳에 목이 뱀 문신이 새겨진 네크론 무리가 보였다.

은폐를 풀고 나타나자 인간들이 기겁하며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비브리오 공작은 어디 계시지?”

놈들은 숨 및을 듯 기겁했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 준비라도 한 둣 곧 침착함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아. 어,어서 오십시오,나리!

대사제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부디 이,이쪽으로..

예상한 둣 나를 안내하는 자들을 따라 들어갔다.

응접실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화난 듯한,기괴한 비음이 섞인 목소리가 문 너머로 울려 퍼졌다.

“흐응,어서 내놓으란 말이에요!” “뭘 내놓으란 말씀인가?”

“이런 식으로 할 거예요? 정말..! 레안드로처럼 건강한 아이면 몰라, 당신과 치는 장난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아이. 그만해요.”

익숙하다.

굵은 목소리에 억지로 만들어 낸 가성이 불협화음으로 얹힌다.

소녀 공작,로랑스 타르티에다.

설마 여기까지 다이아몬드의 행방을 찾아서 노인을 추격해 온 건가?

생각한 것보다,서로 간의 분열이 더 심한지도 모른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리전트 다이아몬드 하나를 놓고 세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소녀 공작의 기괴한 설득은 물론 노인에게 전혀 먹히지 않는다.

“너무해..!”

문이 열리는 순간.

무심코 몸을 숨겼다.

역시 안에서 튀어나온 건 2미터에 가까운 장발의 거한.

밖에서 기다리는 안내자들을 보고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뭘 자꾸 보고 계시나요? 못생긴 너희 얼굴에서 두 눈이 사라졌으면 좋겠나요?”

“아,아닙니다.”

안내자들이 황급히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잔뜩 불쾌한 표정의 소녀 공작이 씩씩거리며 나갔다.

레안드로 후작을 죽인 자.

압도적인 힘으로 펜던트을 깨고, 나를 장난처럼 죽인 녀석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숨어 있는 것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보티스의 아래에서는...

내가 녀석보다도 윗줄.

묘한 우월감이 느껴진다.

그가 저 멀리 나간 뒤,활짝 열린 문으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오호! 충직하고 믿음직한 자네가 왔군.”

노인의 음성은 호의로 가득했고, 만면에 미소를 늘어뜨리고 있다.

따듯한 눈빛을 마주하자 마땅히

편안한 기분, 나른하고 감사하며 황홀한 기분을 느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아직 꼭 쥐고 있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루비아는. 어디에 있죠?”

“아하! 저기 걸어오고 있다네.”

- 다각.

왼쪽 긴 복도에서 작은 발소리가 울렸다. 천천히 다가오는 루비아를 보고 한 걸음 비켜섰다.

마주할 필요는 없다.

잘 지내는 것만 확인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잘 꾸며져,인형처럼 우아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복도의 거울이 그녀의 옆모습을 비췄다.

예전보다도 훨씬 집요하게 꾸민 모습이었다.

걸음을 멈춘 그녀는 이쪽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째서인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 기억이 남아 있는 건가?

하지만 그 흔들림은 곧장 아래로 침잠해 들어갔다.

남은 건 텅 비어 있는 눈동자.

“자네가 신경 쓰는 아이가 맞지?”

“그렇습니다.”

“흐흐. 특별히 노력했다네.”

“특별히. 말입니까?”

노인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영주로 만들어 달라지 않았나? 암살의 위협에 강한 영주로 만들어 주었다네.”

비브리오가 말을 이었다.

“이 영주는 호위가 필요 없다네. 한번 공격해 보게.”

루비아를 공격해 보라고? 터무니없는 소리다.

“그건 곤란합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불쾌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내 정체를 바로 드러내 버렸다.

그런데 레이 루비아는,나를 보고 놀라지도 않는단 말인가?

불안한 무반응.

어딘가 크게 망가져 있다.

게다가 성안의 분위기도 예전과 전혀 달랐다.

호위라면,크리스티나에게 특별히 부탁해 두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크리스티나의 기척은 없다.

그녀뿐이 아니다.

총관도,시녀장도 보이지 않는다. 에라스트에서 루비아를 지지하던 충성스러운 인간들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온통 뱀 문신이 새겨진 네크론의 무리뿐.

“자네가 싫다면야. 다른 노예를 시켜 보자고.”

노인이 노랗게 눈을 빛내며 옆에 있던 두 인간을 바라봤다.

[영주를 공격해라.]

“으읍..

비브리오의 말이 떨어지는 즉시, 두 남자는 실에 매인 꼭두각시처럼 앞으로 튀어나가며 칼을 휘둘렀다.

[자넨 가만히 있고.]

두 남자를 막아서던 다리가 멈칫

- 좌아아아악!

루비아를 공격하려던 두 남자의 몸이 한 순간에 네 동강이 났다.

정면으로 두 번.

깨끗이 허리가 잘려 나간 두 구의 시체는 바닥에 피와 내장을 쏟으며 뒹굴었다.

- 쩌억.

노인도,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루비아도. 위치는 마찬가지다.

나는 한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활짝 열린 루비아의 〈어깨〉에서 빠져나온 얇은 칼날들이 3미터에 달하는 길이를 과시하며 느릿하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하나,둘,넷,여덟...

“어떤가? 아껴 오던 귀한 재료를 전부 다 털어 넣었다네. 역작이. 될 수밖에 없었지.”

노인은 뿌듯한 눈빛으로 루비아를 천천히 훌어보았다.

활짝 전개된 루비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광경을 할 말을 잃고 바라봤다.

드러난 뼈는,음울한 룬이 거꾸로 새겨진 칼날로 교체된 상태.

어떤 칼날들은 화살처럼 쏘아질 준비가 되어 있고,어떤 칼날들은 아주 얇은 채찍처럼 늘어져 다양한 궤도로 휘둘러져 오려는 둣 준비를 마치고 있다.

칼날에 얽힌 신경,확장된 근육, 맥동하는 혈관에서 장인의 집념이 느껴진다.

“그녀는. 특별해. 하나의 신경도

죽이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썼다네. 몸이 활짝 열리는 감각을 온전히 느끼게 해 줘야지.”

들뜬 어조로 설명하는 비브리오가 억지로 상상을 강요한다.

제 부하가 신경 쓰는 특별한 인간, 이라는 재료를 정열과 유열을 다해 빚어냈음이 느껴진다.

°1--.

이 정도의 공예는,노인으로서도 집념과 운,아낌없는 투자의 산물 이겠지.

아니,머릿속에 흐르는 생각들을 모조리 게워 내고 싶었다.

상처 난 정신을 찢고 꾸물거리는 붉은 감정이 터져 나왔다.

이를 악물고 피눈물을 흘리는一

루비아라고 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를 인형의 소리 없는 흐느낌이 두꺼운 안개를 걷어 냈다.

“감상을 말해 주지 않겠나. 혹시 기능이 불만족스러운가? 이 정도면 굉장히 준수한 건데..

표정에도,어조에도 농락의 뜻은 보이지 않는다.

비브리오는 내게 진지하게 묻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놈을 향해 칼을 뽑았다.

“흐음? 무슨 짓이지?”

처음부터 잘못됐다.

그늘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온 공포와 분노가 정신에 달라붙었다.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잘못됐군.”

[복종해라... 잘 만들어진 인형을 보며 감사하고 기뻐해라...]

무언가 머리를 광광 두드렸다.

두꺼운 피안개가 다시 흐릿하게 정신을 덮으려 든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지금 덮이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조금 아깝지만. 의식을 지워도 쓸 만한 녀석일 테니...]

머리가 흐릿해지고,투명한 힘이

내 팔을 잡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새벽을 잡아먹는 뱀.

어떤 식으로 싸워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시도할 수 있는 공격은 기껏해야 한 번.

이대로라면.

루비아의 곁에서,완전히 의식이 무너진 노예가 되어 기나긴 세월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완전히 마음이 꺾이기 전에...

- 콰직!

마지막 남은 의지의 파편을 모아, 입을 벌리고 칼을 안쪽으로 강하게 찔러 넣었다.

최후의 순간 의지가 부족한 탓에 무릎까지 꿇어 가며 머리를 강하게 칼에 꽂았다.

[어...? 어어?]

몸을 지배하던 안개가 한순간에 흩어져 가는 대신,의식이 까맣게 암전되 었다.

- 파사삭.

두개골 조각들이 에라스트 내성 바닥에 떨어졌다.

보티스의 힘을 빌려.

루비아를 영주로 만들려는 계획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소리였다.

- 우르르릉!

천둥이 머리 위를 구른다.

- 번쩍! 콰과광!

꼬리를 휘젓는 번개들 속에 우습게 나른한 기분이 든다.

쏴아아아,하는 소리를 내며 산을

순식간에 시궁창으로 만드는 폭우, 콸괄 쏟아지는 급류,자신을 한껏 쏟아내는 먹구름,이 세계의 모든 것이 온통 그림자다.

그림자가 지축을 흔들고 사방을 물어뜯는다.

무너지고,쏟아지고,내려 흐른다. 하지만 배고픈 그림자들은 점점 뚜렷해진다.

- 투둑...

떨어지는 빗방울이 두개골 위에서 수십 갈래로 흩어졌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옆으로 돌아눕지도, 앉지도,무덤 위로 올라가지도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 쏴아아...

빗방울은 아직 옛 세계에서 살고 있는 나를 조금씩 긁어냈다.

뼈를 파고드는 빗방울이 누군가의 갈라진 몸과,흐르는 피와 울음을 지워 버린다.

어둠 속에 잠긴 비명들이 허공을

타고 거듭 올라가다가 빗물에 맞아 사라졌다.

뭘 하면 달라지기는 할까?

누굴 위해서 움직인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을까?

경험을 쌓고,강해지고...

허탈한 기분으로 오랫동안 위를 바라봤다.

생각과 감정이 거미줄처럼 빗물과 빗물 사이를 이었다.

허무했고, 절망했고, 비브리오에 대한 분노와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뒤엉키고 허물어졌다.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거짓말이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한심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루비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마지막 순간 그녀를 죽여 주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사라진 세계에서 루비아는 계속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비브리오가 앞에 버티고 있는 이상 루비아에 대한 공격은 실패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일말의 희망조차 없이 정신이 침식당해서, 루비아 곁에서 비브리오의 완전한 노예가 된 채로 살아가야 했겠지.

무기력이 정신을 침식한다.

하지만.

이대로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지는 않다.

회귀를 거듭할수록 정보가 점점 쌓여 가는 것도 분명하니까.

게다가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 그 과거는 저장된다.

다시 떠올리자.

지금까지의 삶들을.

분명히 내가 원하는 대로 미래를 창조해 낼 가능성이 있다.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일단 상황부터 파악하자.

‘.상태창.’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반투명한 푸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계승되었습니다.]

[67.74%...]

[이름: ]

[해골병사 Lv. 1(271)]

[체력: 127]

[힘: 127]

[민첩: 127]

[지혜: 132]

[달성한 전직 -〈해골기사〉] [모든 특전을 그대로 유지...]

[뇌전 Lv.5]

[다음 특성을...] - 마비,확산,연쇄

[은신 Lv.8]

[특전: 지각방어(B플러스)]

- 다섯 차원에 걸쳐 마술로 인한 광역 탐지를 방어합니다.

-〈후각〉〈색각〉〈청각〉...

경험치 2만을 투자한 은신 스킬은 그대로다.

빛의 유물을 든 채로 도망가며, 레안드로 후작에게 당장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스킬.

당시엔 보티스의 가호와 중복되어 아까웠지만,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제대로 된 결정이었다.

다시 보티스 밑에 들어갈 생각은 절대로 없으니까.

상태창을 계속 아래로 내렸다.

새로 생긴 특전이 보인다.

[보티스의 정신오염을 자력으로 극복했습니다.]

[특전: 항마抗魔(A마이너)를 획득.]

- 원하지 않는 빙의,세뇌,암시와 착란에 대한 차단 성공률이 크게 상승합니다.

몹시 높은 랭크의 특전.

루비아의 끔찍한 고통을 보면서 얻어 낸 특전이라는 걸까.

비브리오 덕택이 아니다.

놈과 함께 지내며 얻은 건 마왕의 가호뿐.

물론 보티스의 가호는 계승되지 않고,결국 놈이 나에게 해 준 건 아무것도 없다.

새삼스레 분노가 치민다.

혹시 지금 놈에게 간다면,이용할 만큼 이용하며 정신오염은 안 받는 이득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아니,위험한 생각이다.

정신오염의 차단이 발각될 경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을 거다.

오염은 안 되고 가호만 받아 가는 나를 누구보다 경계하면서 어쩌면 봉인하려 들겠지.

놈은 적수를 찾기 어려운 최강자.

일이 틀어질 경우,내 수준에서 내뻘 방법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인간을 탈을 쓴 녀석의 자애로운 미소를 잠시 떠올렸다.

황제에게 직접 온갖 작위를 받은 비브리오 공작.

네크론 신사회를 노예로 부리는, 보티스의 대리자.

취미는 인체 공예...

루비아를 영주로 키울 생각이라면 그런 자와 함께할 수는 없다.

네크론 신사회가 놈의 노예라는 사실을 본다면,비브리오는 치우고 소각해야 할 장애물이다.

- 달그락.

일단 일어나자.

멀리서 루비아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무기력하게 누워서 루비아를 맞고 싶지는 않았다.

올라오는 모습은 확인해 볼까.

곧 인간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라도 성에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악몽의 대상을 찾아 일으키신다니... 사실 뜻하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지만 대화의 내용은 달랐다.

“아가씨?”

“악몽의 대상이 아니에요.”

한 마디가 흐른다. 비에 젖었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머리에 꽂힌다.

“종종 침대가 흠백 젖을 정도로 악몽을 꾸시지 않습니까? 그 꿈에

나온다는..

다른 일행이 옆에서 거든다.

“설명하긴 복잡한데. 그는 저를 돕고 싶었을 거예요.”

악몽이라니.

비브리오에게 받은 고통이 아직도 꿈으로 남아 있다는 건가?

아름다운 기억은커녕,터무니없는 악몽을 심어 버렸다니.

내려놓고 싶은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았다.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거리는 속절없이 가까워졌다.

허리에 세검을 찬 루비아는 다시 내 무덤에 다가온다.

갈대숲에 숨은 채 그녀의 반응을 확인했다.

“꿈에서. 분명히..

멍하니 중얼거린다.

같은 반응.

충격을 먹은 표정이었다.

일그러지는 그녀의 얼굴이 전보다 한층 더 애잔하게 느껴졌다.

아쉬움,의아함,실망,안타까움. 동요어린 얼굴에는 온갖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야 할까.

안타까웠다.

애틋한 마음에 저절로 주먹이 꾹 쥐어진다.

하지만 에라스트에 대해 알수록 나를 드러낼 생각은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도 그녀를 미행하는 유령이 있을지 모르니까.

지난 생 같은 일이 결코 발생하지 않게 대비하는 것이 먼저다.

그녀는 그 얼굴을 오직 내 쪽에만 보여 주고는,빗물을 닦는 것처럼 손을 들어 표정을 쓸어 냈다.

그리고 단련된 무표정으로 뒤를 돌았다.

“.돌아가죠.”

“예,아가씨.”

돌아서는 그녀의 상태창을 허공에 띄웠다.

스탯과 직업은 예전 그대로.

별다른 추가적 보정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보티스의 대리자.

지독할 정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녀석이었다.

축 쳐진 걸 티 내지 않으려는 둣 씩씩하게 걷는 그녀를 뒤에서 쫓아 내려갔다.

성의 상황은 예전과 비슷했다.

루비아는 더 이상 도망자 신세가 아니었고,내성도 그녀의 것이다.

레안드로 후작이 내려올 거라고 예측하는 회의가 재현되는 것까지 확인한 뒤 밖으로 나갔다.

- 투두둑...

빗방울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비처럼 생각도 사방으로 어지럽게 튀어 올랐다.

어떻게 할까?

일단 비브리오를 만나기 전까지는 실수라고 할 만한 게 없다.

거기까지는 그대로 가도 되겠지. 에라스트는 ‘은폐의 가호’를 받은 유령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빛의 유물을 손에 넣지 않는 한 그들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일단 에라스트는 벗어난다.

- 팟!

유블•람 경비대장의 은괴를 모조리 회수하고,상자에 들어 있던 상인연합 카드까지 습득한 뒤 유블람 성으로 숨어들었다.

저번보다 미세하게 빨리 도착한

덕분인지,성벽에 선 경비 근처를 막 지날 때 벤슨 프레쳐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는 활을 쏴 볼까..

가볍게 경비병을 기절시키고 활을 빼앗아 들었다.

‘흐음.’

딱히 멋은 없었지만,그라스미어 대장장이였던 노인의 작품인 건지, 내구성은 그럭저럭 뛰어나 보인다.

- 끼기긱

궁술 스킬은 Lv.l에 불과하다.

[터무니없이 높은 민첩 스탯이 궁술을 보정합니다.]

[터무니없이 높은 힘 스탯이 궁술을 보정합니다.]

[황당할 정도로 높은 ‘탐지’ 스킬이 궁술을 보정합니다.]

[‘집중’이 발동됩니다.]

[질풍 Lv.5를...]

이건 좀 과했나.

- 피이이이잉!

내쏘아진 화살은 자신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터무니없이 강한 회전이 걸리며 날아간 화살은 벤슨 프레쳐의 이를 부수고 혀를 찢고 목 뒤로 빠져나왔다.

두꺼운 깃털이 뚫린 목 안을 연신 괴롭히는 것 같았다.

목에 화살이 꽂힌 채 부들거리며 죽어 가는 놈을 보고 다음 타깃으로 향했다.

아스포데와 그 부하들까지 전부 활로 비슷하게 죽이고,대장장이

노인의 집도 턴 뒤,크리스티나가 혼자 수련하는 장소로 향했다.

“당신은..?”

“덤벼 봐라.”

- 까앙!

예전처럼 재능을 각성시켜 준 뒤, 크리스티나에게 은괴를 다 맡기고 루비아의 호위를 부탁했다.

일단,안전한 행동은 여기까진가. 산속에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당면한 목표는 루비아 시나리오의 클리어.

그게 쉬운 게 아니라는 사실이 점점 와닿고 있다.

영지 분쟁의 판결을 내려 주게 될 비브리오는 네크론의 종주宗主.

에라스트 곳곳에 불명의 이유로 빼곡히 깔린 최정예 유령들.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도움 받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차분히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가진 선택지는 뭐가 있을까? 첫 번째로. 레나.

가장 신뢰할 만한 선택지다.

말을 믿었다.

게다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호감을 보였다.

인간이라는 종種에 대해 편집증적 혐오를 보이며 먼지를 털어 내듯이 살해하는 것과 달리,단 한 번도 나를 배반하거나 버린 적이 없다.

그녀를 참전시킨다면.

트로핀 나냐우나 샤루니안 같은 T&T 소속 강자들이 나와 한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비브리오가 T&T에도 침투한 것 같았는데 그것도 경고해야 하고.

문제는,그녀를 내 싸음에 절대로

희생시키기 싫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레안드로 후작. 비브리오에게 가장 날카로운 날을 세우고 있는 녀석이다.

결계를 아예 칼로 베어 낼 것 같던 황당한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집념과 실력과 성향을 생각하면 역시 누구보다 우선해서 손을 잡고 정보를 공유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안드로는 아무래도 적의 적은 친구란 말을 믿지 않을 것 같다. 친구라는 개념이 있기는 할까?

세 번째는 기스-제-라이.

최강의 네크로멘서.

미안함,고마움,걱정,부채감...

네크로멘서를 생각하면 그것들이 지칠 정도로 마음을 두드린다.

린트부름의 태양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 줘야 한다.

하지만,나를 믿어 줄까?

처음 만남에서 내가 회귀한다는 말을 듣고는 낄낄거리며 미친 해골 취급으로 끝났다.

게다가 성향을 보면 비브리오와 루비아 가운데 비브리오를 응원할 확률이 높다는 생각마저 든다.

개조나 공예라는 취미를 그녀가

나쁘게 생각할 것 같지는 않으니.

네크로멘서의 연인 특전도 상실한 지금,오히려 예전보다도 발언력이 줄어들었을 가능성도 있고.

네 번째 선택지는 아이작.

추악공 보티스의 정신오염을 일단 경험하니,말파스 정도면 괜찮은 계약 상대라는 게 느껴진다.

게다가 루비아가 끔찍한 꼴이 된 직전의 삶을 생각해 보면.

아이작이 납치되어 가는 루비아를 살해한 것도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어떻게 하지..

곰곰이 생각할수록.

아이작이라는 선택지만 남는다.

지금까지 알아낸 수많은 정보를 그 녀석이라면 정말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선택지’들과 어떤 식으로, 어떻게 접촉할지에 대해서도 좋은 조언을 주겠지.

정신 방어력이 생긴 만큼 녀석의 수작에 넘어갈 확률도 꽤 줄어들지 않을까?

녀석은 지나가다 툭 던진 말로도 내 회귀를 꿰뚫어 봤고,상태창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상대다.

게다가 망하더라도 왠지 죄책감이 덜 느껴질 것 같기도 하고.

- 팟!

결정한 이상.

지체 없이 그라스미어로 향했다.

지하 무덤에 누워 있는 주술사를 일으키기 위해서.

좁고 험한 길이다.

곳곳에 솟은 굵직한 돌부리들은 걸려 넘어지기 좋다.

이 길을 함께 걷는다면 루비아는 아직도 넘어질까?

넘어지는 루비아도,그렇지 않은 루비아도 좋다.

평온했던 순간들이 떠오르다가도, 가차 없이 뜯어낸 끔찍한 최후로 무성해진다.

단 한 번도 부드러운 이별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어떻게든 시나리오를 끝마쳐서, 행복한 삶이 ‘이미 일어난 과거’가 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앞으로 조금 더 가니 익숙한 덫이 보인다.

‘아직. 걸리지 않은 건가.’

하루 정도만 지나면 새끼 늑대가 껑껑거리며 괴로워할 거다.

오랜만에 한번 볼까 싶었지만, 괜히 녀석의 삶에 필요 이상으로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 까앙!

잘린 덫을 치우고 멀리 던졌다. 앞쪽에도 커다란 및이 보였는데, 잠깐 고민하다 잘라 버렸다.

설원 트롤.

녀석이 나를 한 번 죽이긴 했지만 결국 남편의 복수 때문에 광란에 빠졌던 거니까.

- 파앗!

한참 위로 올라가자 곧 쌓아 올린 산장이 보였다.

예전에 밤톨이와 달렸을 때 서너

시간이 걸렸던 거리였는데,지금은 십 분 정도면 도착이다.

- 캉!

강철 자물쇠를 한 번에 잘라내고 곧장 안으로 진입했다.

어두운 산장 안에 있는 건 트롤 한 마리.

몸집이 작은 수컷 하나만 박제된 상태다.

흘끗 바라보다 위로 올라갔다. 이곳에 온 목적은 하나.

캐빈 애슈턴의 책은,보란 둣이 침대 옆에 놓여 있다.

이미 읽은 내용을 다시 꼼꼼하게 뒤로 넘겼다.

〈깨진 조각들과 접촉할 것〉

필기체로 써 놓은 마지막 문장이 자연스럽게 읽힌다.

〈3/7〉

문장 아래 숫자가...

변했다.

‘으음..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손으로 써 놓은 문장이 말하는 ‘깨진 조각과의 접촉’과 이 숫자가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

책에 숫자가 처음으로 생겨날 때, 그리고 하나씩 늘어났을 때 접촉한 존재들에 대해 떠올렸다.

루비아나 레나와의 만남을 먼저 떠올렸지만 곧 배제됐다.

숫자의 변동이 맞지 않는다.

뭐가 일곱이지?

뭘 지금까지 셋 접했지?

지금껏 겪은 일을 모두 돌이켜도, 정확히 들어맞는 숫자는 없다.

조각...

- 꽈■드득.

별안간 주먹이 꽉 쥐어졌다. 〈세계의 비공식적인 무력 집단에 대하여 - 1〉라는 이름의 책에서 봤던 시를 회상했다.

어디에나 있는 하나의 조각이 내 시체를 곱게 정리하고 있다

#41

무슨 소리지?

하지만 찾는 의미는 없다 작은 조각이었기 때문에

암살교단.

레드 플레이크를 홍보하는 시들. 정규 회원도 일곱.

분명히 ‘조각’은 레드 플레이크를 말하겠지.

별빛청여우를 만났을 때 처음으로 1이라는 숫자가 생겨났다.

루멘 발도프를 만난 뒤에 숫자가 2에서 3으로 변했다.

유일한 문제는. 중간의 공백.

‘누가 레드 플레이크지?’

이 가정이 옳다면,내가 무심코

지나친 자들 중에 레드 플레이크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자신을 제대로 소개하지 않은 자. 대체 누굴까?

여러 후보가 머릿속을 스쳤지만,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 채 마지막 장을 덮었다.

- 띠링!

[지혜가 1 올랐습니다!]

동화율도 변하지 않는다.

책을 챙긴 뒤 산장을 나섰다.

아이작에게 가져가면 뭔가 새롭게 읽어 낼지도 모른다.

몸을 숨긴 채 그라스미어 성문을 가볍게 통과해서,유베가 거점으로 삼는 여관으로 향했다.

묵는 방까지 정확히 아는 터.

입구를 지키는 세 남자를 지나, 장부를 확인하는 유베를 바라봤다.

점심을 먹고 식곤증이 밀려온 둣 살짝살짝 조는 모습이었다.

“어이.”

유베의 코앞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끄흐읍!”

나른한 표정으로 장부를 확인하던 유베가 숨을 기괴하게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몸을 크게 들썩여 뒤로 넘어갈 뻔한 의자를 잡아 준 다음, 책상에 놓인 종이칼을 집었다.

- 우우응!

“거,검기..!”

칼 전체를 완전히 뒤덮는 새파란 검기를 본 유베의 얼굴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왔든,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인간답게 소리쳐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보다시피 나는 검기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 꿀꺽.

유베가 침을 삼키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거,검주급에 준하는 실력자이신 걸로 보입니다만..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 파작

“마법도 쓸 수 있지.”

손끝에 번개를 만들자,그는 다시 한 번 흠칫 놀라며 가슴을 아래로 쓸어내 렸다.

“정말 대단하신 걸 알겠습니다. 제가 뭘 해드리면 될지..

유베의 반응에 머쑥해졌다.

그 짧은 순간에 갑자기 들이닥친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고 대응하는 모습이 놀랍다.

잠시 멈칫하자,유베는 자연스레

품을 뒤져 검은 카드를 꺼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저희 명함 비슷한 겁니다만..

황당할 정도로 대담한 녀석이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손을 뻗어 카드를 받아 냈다.

“의뢰를 하나 하려고 한다.”

“뭐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다른 상인이 아닌 제게 와 주셔서 영광 입니다.”

이미 긴장은 다 풀린 것 같다. 어쩐지 한심한 기분이 들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꿋꿋이 말을 이었다. “에라스트의. 레이 루비아에게

적당히 신경 써 줄 수 있을까?”

“후계자 분쟁 말씀이십니까? 그리 큰 도움은 못 될 것 같습니다만.”

“됐어. 편하게 가능한 정도로만 부탁한다.”

유베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쪽에 대한 빚은 나중에 갚도록 하지.”

말을 남긴 뒤 다시 은신으로 여관을 빠져나갔다.

골목을 달려 내성으로 향했다.

‘저긴가.’

익숙한 구조의 복도를 지나,안쪽 영주실로 향했다.

유베 앞에서 민망함을 겪은 뒤라, 영주 앞에 갑자기 나타나는 일은 관두기로 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정식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들어오. 당신은 누구요!”

여기까지 들어오는 걸 허용했다면 목숨은 내놓은 거라고 여긴 걸까.

영주는 비상종을 울리거나 소리를

삶이 너무 고단해 그만두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일단...

‘마스커레이드.’

나는 투구를 벗었다.

“굉장한 미남이시군. 누구시길래. 연락도 없이 오셨소이까?”

영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영주 뒤에서 훨씬 더 놀란 시선이 느껴진다.

가장무도회가 모사模寫하는 건, 영주의 저 시선을 공유하는 인간.

아이작도 이걸 보고 있다면 이게 무슨 일인지 굉장히 궁금할 거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말파스의 사자다. 세상에서 자기 혼자 잘난 줄 알고,제멋대로 행동하려는 녀석이 오늘 밤 너에게 빠져나갈 것이다.”

말이 좀 심했나.

곧이어 챈들러 가문과 아이작에 대해 아는 사실들을 모두 차례로 이야기했다.

영주는 한참 입을 열지 못하다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말파스의 사자시군요..

예전에 왔을 때와도 또 다르게, 그라스미어 영주는 아예 고민하는 기색조차 없다.

내 말을 완전히 굳게 믿고 있는 기색이다.

이게 외모가 가진 힘일까?

묘하게 불편한 기분이 들어 다시 투구를 썼다.

“.전당을 열어라.”

“아,알겠습니다.”

[퀘스트 활성화]

[고분 속의 주술사...]

영주는 집사를 불러 사정을 모두 설명하고,전당으로 안내했다.

문이 열리고 난 뒤 일행을 밖에 세워 뒀다.

먼저 커다란 상자 안에 담겨 있는 ‘타이탄 저격기’를 회수.

처음에는 160cm 정도의 대포처럼

보이지만.

포신 안에 손을 넣어 작은 돌기를 당기고,아이작이 말한 대로 조작 하면...

- 파캉!

1미터 직경의 대포가 한 손으로 월 수 있는 형태로 변한다.

아이작이 쓸모 있다고 말한 드문 물건이다.

좀 더 안에 들어가서 석벽에 박힌 대검을 회수했다.

브로디 발도프가 안내해 준,지하

〈하지만 프리모파이트라면. 우리 실력으로는 조수나 서야 할 거야.> 〈일단 맡기게. 부락 차원이라면 충분히 처리해 줄 수 있다네.〉 〈작업은 그냥 해 주겠네. 꼭 좀 경험해 보고 싶어. 부담 없이 갖고 오게나.〉

일단 가지고 오기만 하라던 말들.

당시에는 젓빛 기사가 친 결계에 칼이 녹아 없어져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한번 가 보고 싶기도 하다.

안쪽에 섞여 있는 특수한 금속만 정제하면 마력/검기의 효율이 크게 증가한다고 했다.

슬라임의 감정을 믿는다면.

- 투두둑.

아이작과 함께 들어갔던 기억을 되살려,바닥 한쪽의 부스러기를 치우고 까만 부분에 칼을 꽂았다.

- 드르륵.

옆으로 돌리자 돌바닥이 아래로 쿵,쿵,울리며 내려가기 시작한다.

아래에 있는 건 처음의 목적이던 까마귀 조각상.

[격발의 플레어...]

딱딱한 크리스탈 표피의 목덜미를 잡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새의 눈에 붉은 불이 들어왔지만, 아이작이 들어가 있을 때와 역시 느낌이 전혀 다르다.

영주의 피가 담긴 유리병를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벨’호멧 아이작의 전당...]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거대한 황동 골렘들을 지나,다시 아이작의 석관 앞에 섰다.

이것도 일이군.

“어이. 듣고 있나? 금빛 새벽의 주主이자 마왕 말파스와 직계약을 맺은 대제사장이고,제국 남부를 지배했던 대주술사님.”

석관에 더 가까이 간 뒤 영주의 피가 든 유리병 뚜껑을 따고 말을 이었다.

“여신들에게 저주받은 덕에 꽁꽁 숨어 있기나 했을 텐데,이제부터 나랑 제대로 한번 놀아 보자고.”

몇 번이나 뒤통수를 맞은 탓일까. 녀석에게 의지하러 왔는데도 말이 곱게 나오지 않는다.

가져온 피를 알 곳곳의 틈새에 죽 부어 버렸다.

- ^.e^e__e.

열리는 건가.

녀석이 나에게 빙의를 시도할지 어떨지는 모른다.

하지만 빙의가 시도된다고 해도 정신 간섭에 대한 항마력도 있다.

인질로 잡힐 만한 루비아도 없다. 크게 꿀리는 건 없었다.

- 화르르!

틈새에 칼을 꽂아 넣은 뒤 불을 질렀다.

- 펑!

튀어나온 새까만 연기가 얌전히

까마귀 인형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왜 이렇게 순종적이야?”

빙의도 시도하지 않고,화도 내지 않는다.

“어이,세기말 천재.”

여전히 침묵하던 까마귀 인형은, 흠칫한 눈빛으로 살포시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우리. 친했었냐? 내가 아마. 너한테 잘못했겠지?]

어떻게 살아왔으면 저런 제 발 저리는 태도를 취하는 걸까?

완벽한 조사와 준비를 끝낸 채, 그를 찾아올 건 복수의 귀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이 정도로 아이작을 알면 굉장히 가까웠던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모든 걸 너에게 알려 주지. 대신 조건이 있다.”

[무슨. 조건이지?]

어떤 상상을 하는지,마음속으로 나를 대체 누구로 생각하고 있는지 몰라도 아이작은 어울리지 않게 꽤 위축된 모습이다.

녀석을 바라보며 한 음절 한 음절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나한테 비밀이 없어야 한다.”

[비. 밀?]

“아무것도 속이려고 하지 마라. 그럼 두 번 다시 너에게 오지 않을 테니까. 진실을 들을 기회는 영영

[너무. 무리한 요구 아니냐..?]

나름대로 협박이었는데.

진심으로 말하는 아이작을 보며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만을 안 하는 게 어떻게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는 걸까?

하지만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보 다는 차라리 이쪽이 낫다.

사실 거짓말을 안 하는 아이작도 어색하긴 하지.

물론 양보할 생각은 없다.

아이작이 아니라도 다른 선택지가 많으니까.

[내가 거절하면. 다른 녀석에게 갈 생각이구나. 그렇. 지?]

실로 대단한 눈치다.

“잘 아네.”

[좋다. 앞으로 삼 년 동안은 절대 너를 속이지 않으마.]

“고작 삼 년?”

[그다음은 그때 생각해야 될 것 같은데...]

삼 년씩 연장하면 되겠지.

어차피 지금까지 삼 년 동안 살아 남은 적도 없으니까.

- 달그락.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은 사풋사풋 주위를 걸으며 초조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내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몰라,긴장해서 날갯짓도 못 하는 모양새다.

그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라도 나올 것 같다.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얼마나 말할까?

숨기면 곧바로 알아차린다.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 정도의 통찰력을 갖고 있기에 내 등장에 당황한 거다.

지금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인지 누구보다 잘 알 테니까.

아이작에게 솔직하기를 요구하며 내가 속일 수는 없었다.

이번 생은 믿기로 했다.

정신간섭에 대한 저항력도 있고, 비브리오를 경험한 뒤라 녀석에게 비교적 신뢰도 간다.

“나는,창천의 구멍을 본다.”

아이작이 얼어붙는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 나에게 꽂힌다.

자신을 미치게 만들었던 개념을 아무렇지 않게 술술 털어놓는 나를 보고 속이 좀 탈 거다.

나도 잘 모르는 이야기이긴 해도, 아이작을 낚는 데 이만한 미끼가 없다는 건 확실하다.

“나 자신에 대해 ‘읽을’ 수 있지. 어때,이 정도라면 정직한 시간을 3년 더 연장해도 되겠지?”

〈•••좋아.〉

“함께 애슈턴이 안배해 놓은 힘을 획득하자고.”

역시 반응은 강렬하다.

여기까지는 이미 나눴던 이야기.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몇 번의 삶을 너와 함께했다.”

아이작이 흠칫 한 걸음 물러난다.

첫 번째 삶부터 내가 겪었던 일을 하나하나 차분히 이야기했다.

상태창과 용사 포인트,예메라의 신전과 수수께끼를 내는 와들루스, 레안드로 후작과 보티스의 대리자 비브리오와 엮였던 일도 숨김없이 모조리 털어놓았다.

의심하는 표정은 전혀 없었다.

아이작의 통찰력이라면 증거 따위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말을 끝냈을 때,까마귀 인형은

••아이 작?”

한 걸음 다가가자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정말 받아들이기 싫군...〉

“뭐가 말이지?”

〈내가 아닌. 다른 녀석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사실 말이다.〉

아이작은 세계가 ‘주민’과 ‘손님’

이라는 개념으로 양분되어 있다는 캐빈 애슈턴의 설정을 받아들였다.

‘손님’들에게만 띄워지는 푸른 창.

그걸 녀석은 주인공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는 건가?

〈어쨌건 네 녀석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껏 말한 상황 모두, 너는 정확히 내가 보일 만한 행동을 말하고 있어.〉

그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두 탑주로부터. 너를 희생해서 나를 구해 준 것도 말이냐?”

머족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었다.

수만 명을 단둘이서 학살해 가던 탑주들의 머리를 뚫어 죽이던 그가 떠올랐다.

아이작은 피식 웃었다.

〈도박에 실패한 거지.〉

“도박. 이라고?”

〈저번 생의 나는 너를 배신하고, 속이고,장난감처럼 휘둘렀다.〉

〈그러던 중 마지막에 네 회귀를 알아차린 것 같군.〉

‘다시 시작하는 편이 좋았을 거다.’

고작 그 한 마디로 곧장 눈치를 채다니,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아이작이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곤란한 상황이지. ‘다음’에 네가

어떤 보복을 할지 모르잖아? 신뢰 회복을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지, 아니. 해야지. 다시 네가 나한테 오게 만들 필요가 있었어. 그딴 건 희생이 아니다.〉

“그럼,도박에 성공한 거잖아?” 마지막 행동으로,아이작은 내게 마음의 빚을 지웠다.

한 번의 생은 건너뛰었지만 결국 아이작에게 다시 오게 만들었다.

죽으며 남긴 녀석의 유언.

다음에는 솔직해지자는 말을 지금 눈앞에서 이행하고 있다.

하지만 까마귀는 씁쓸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가 날 찾아오리라는 건 확실한 계산이야. 한 번 건너될지, 두 번 건너될지는 몰라도 이리저리 치이다 결국 ‘나’한테 왔겠지.〉

미미한 조소가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로 여기까지 와 버린 이상 부정할 수도 없는 말이다.

고작 한 번.

한 번의 생을 건너뛰고 녀석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

〈도박은 다른 부분이야.〉

“그게 뭐지?”

〈너를 위해 희생한 그 주술사는, 지금의 내가 최소한 착각에 빠진 상태는 될 거라고 생각했겠지.〉

“착각이라고?”

〈기억을 가진 복제품이. 자신이 부활했다고 생각하는 거 말이다. 하지만 너와 어떤 삶을 지냈는지 몰라도 나에겐 아무 기억이 없어. 널 보면서 느껴지는 감정이 한 톨도 없지. 그러니까...〉

아이작은 씁쓸하게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전생의 ‘그 녀석’,결국 ‘나’ 좋은 일만 시켜 준 거잖아?〉

감정과 기억의 계승.

개개의 시나리오가 있는 루비아와

레나에게서는 분명히 일어난다.

루-륨을 통해 과거를 개변하거나 시나리오를 끝내지 않아도 기억은 저장된다.

특히 내가 되살려 주려고 한다면 더욱더.

감정 역시 그렇다.

그러나 아이작은 아니다.

기억도 감정도 없다.

‘변경된’ 스킬마저도.

저번 생에 죽은 녀석과,지금의 녀석 사이엔 어떤 연결고리도 없다.

과거의 아이작을 기억하는 것은 오직 나뿐.

속인 기억도,희생한 기억도 없는 상대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평범한 궤를 벗어나 있고, 점점 더 벗어날 일밖에 없다.

이런 기억의 괴리가 계속 쌓이게 되면 내 정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씁쓸함과 쓸쓸함이 텅 빈 마음에 이리저리 꽂혔다.

〈그건 그렇고. 네 목적은 뭐냐?〉

고민할 것도 없는 질문.

〈구해서 월 어떻게 할 건데?〉

“에라스트 영주로 만들어야겠지. 시나리오를 끝내고 싶다. 그녀를 지켜 주고 싶어.”

〈시나리오를 끝내서? 다음에는? 인간을 꼭두각시로 세워 장막 뒤의 지배자라도 하고 싶은 거냐?〉

사실 그다음은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다.

퀘스트.

시나리오 클리어.

그저 눈앞에 주어진 목표를 따라 발버둥 치며 살았을 뿐.

〈열세 번의 삶이 지나도록,아직 창천의 구멍에 휘둘리며 살고 있을 뿐이라는 거냐? 네가,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데?〉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걸까.

추궁이 이어진다.

답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 세계를. 알고 싶다.”

무심코 나온 말이었다.

아이작이 납득할 거라고 생각해 던진 이야기.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볼수록,나를 계속되는 삶에 묶은 세계에 대해 알고 싶었다.

루-름은 뭘까?

동화율은?

내가 왜 용사 포인트를 받지? 시나리오는?

질문은 좀 더 깊어진다.

나는 왜 토벌당했지?

캐빈 애슈턴은 누구?

서큐버스님은..?

언제부터. 인간은...

여기저기 심어진 질문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막막하다.

사나운 어둠이 사방을 덧칠한다. 어떤 답도 알 수 없다.

오직 떠오르는 푸른 메시지一 상태창은 나를 어느 방향으로인가 몰고 가려고 한다.

어떤 장막 너머로 유도하는 걸까? 혹은 그 너머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내가 도약하고 싶다는 사실이다.

‘자유’를 찾아 역설적으로 자신을 봉인될 처지로 내몰았던 아이작.

그 마음이 조금씩 이해되고 있다.

〈크크크...〉

아이작은 킥킥거리며 알 조각상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도 역시 마왕 말파스를 탄 채로 세계의 위로 날아올라 보고 싶다고 했다.

〈좋아. 뜻이 통했으니 직진해야 하지 않을까?〉

“직진이라면?”

〈일단 비브리오의 휘하에 들어가. 은폐의 가호를 써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나냐우를 살해해라.〉

“그게 무슨-

〈오염에 대한 저항이 생긴 이상 비브리오가 너를 경계해 받아 주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나한테 와라. 희생하라고 해. 나를 일시적으로 강림시켜서 나냐우를 죽이고 피를 흡수해라.〉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

나는 사도의 피라 불리는 루-름을 얻을 때마다 비약적으로 강해진다.

동화율의 하락과 함께 터무니없는 혜택을 받는다.

하지만.

“아니. 그건 거절하지.”

T&T의 시조.

트로핀 나냐우는 나를 구해 줬다. 그녀의 루-름을 모조리 흡수하면 다음 생에서 나냐우의 존재가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트로핀 나냐우 한 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행동이 레나에게 어떤 효과를 일으킬지 알 수 없는 일.

사정을 간략히 말하자 아이작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러니까 네가

그 능력을 갖고 여기밖에 못 왔지. 뭐. 그런 너에게 맞춰야겠지만.〉

하지만 아이작도 그리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다시 원점으로 말을 돌렸다.

“일단 루비아부터 구해야 한다. 지금도 시간이 지나가고 있어.”

당장 2주 후의 판결이 문제다.

손 놓고 있으면 비브리오가 오게 될 거다.

저번 생처럼 내가 비브리오에게 부탁하지 않는 한,그는 네크론의 레이 커크를 영주로 만들겠지.

만에 하나 루비아에게 눈독이라도 들인다면 훨씬 최악의 결과.

예전처럼 개조되어 버릴 거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까마귀가 말을 받았다.

〈네 생각은 어떤데?〉 “내". 생각이라고?”

아이작에게 다 맡기려고 했는데 역으로 질문을 던져 온다.

〈내 제안을 거절했잖아? 그러면 대안이 있을 거 아니야. 지금까지 네가 말한 모든 일을 열 번도 넘게 죽으며 직접 겪었지? 스스로 한번 생각해 봐. 방금 들은 나보단 훨씬 좋은 답을 내놓을 텐데?〉

“그건..

누군가를 보는 통찰력이라면 결코 예사롭지 않은 아이작이다.

녀석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자.

이미 한 번 복기한 내용이다.

생생하게 겪은 경험을 되살리며 다시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 가장 이용하기 쉬운 상대는 레안드로 후작이겠지.”

〈좋아. 다음은?〉

“그에게 빛의 유물이 어디 있는지, 비브리오의 비밀 아지트로 향하는 폐하수도는 어디 있는지 알려 주면 어느 정도 견제가 되지 않을까?”

빛의 유물.

일리엔의 눈물을 가지고 있으면

주변에 쳐진 보티스의 가호를 모두 무효화시킬 수 있다.

일단 은폐의 가호를 통한 암살이 먹히지 않는다.

비브리오와 싸울 때의 직접적인 전투력에도 크게 영향을 끼치겠지.

〈계속해 봐. 그래서?〉

“후작이 눈엣가시가 된 황실은. 비브리오 대신 후작을 여기로 보내 버릴 확률이 높아. 둘은 결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니까.”

후작이 보티스의 대리자를 결국 물리치든.

아니면 황실이 그걸 막든. 결론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셈이다.

〈역시 훌륭해. 그런데 거기서 좀 불안한 게 있어.〉

아이작이 끼어들었다.

〈너,진짜 황제는 아직 한 번도 만난 적 없잖아? 후작을 여기로 ‘보낼’ 상대는 아예 꽁지조차 보질

기스-제-라이의 황제 암살 사건도 아이작에게 전달했다.

녀석은 내가 만난 황제를 가짜로 확신한다.

제국 황제...

아래에는 레안드로 후작을 포함한 네 명의 검주를 두고,하늘을 걷는 아쥬라의 탑주들도 그 권위를 존중 하여,마법사를 파견하는 자.

마왕의 대리자와 대등한 계약을 맺고 작위를 내린 자.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다.

그런 자가 별 반항도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을 리 없다.

그럼 진짜 황제는. 대체 누구지? 나는 아이작을 바라봤다.

“황제에 대해 뭔가 알고 있나?”

〈아니. 그라스미어 영주의 시야를 줄곧 공유했지만,나도 허수아비 인형밖에 보지 못했어. 쭉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야.〉

“선대도 그랬다는 거냐?”

〈봉인이 너무 강한 탓에 기억이 드문드문하긴 해도. 맞아. 외부로 도는 황제는 전부 별거 없었어. 하지만 최소 400년간! 제국 황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지. 누구도 감히 도전하질 못했다고.〉

황제의 정체는 제국에 섬뜩하게 드리워 있다.

그가 누리는 힘은 어떤 걸까? 목적은?

여기서 파악할 수는 없다.

- 휘우우응!

모래바람이 북쪽을 향하는 길까지 휩쓸어 온다.

당장의 목표는 후작의 접촉.

물론 나나 아이작이 직접 녀석과 담판을 짓는 일은 없다.

녀석은 꽤나 인간 중심적이니까. 가장 신뢰할 만한 상대.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상대는. “곧 달리아크다. 거의 다 왔어.”

점점 뒤쪽으로 처지는 까마귀에게 말을 건넸다.

〈알아! 달리아크에 누가 더 많이 가 봤다고 생각하는 거야,애송...〉

- 파드득!

그 순간.

무리하며 날갯짓을 하던 까마귀가 갑자기 아래로 추락했다.

황급히 품에 안아 들었다.

차가워진 날개.

부리가 힘없이 벌어졌고 까마귀의 눈에는 빛이 꺼져 있다.

“아이작?”

비행이 무리였던 걸까?

다시 마력을 충전해 주면 괜찮아 질지도 모른다.

‘뇌전. 이중영창..

- 파지지직!

손을 대고,주욱 뇌전의 힘을 불어 넣었다.

하지만 충격으로 몸만 들썩일 뿐 생명의 기운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마력을 넣어도 마찬가지다. 봉인된 채로도 400년이나 의식을 유지해 온 대주술사.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고?

이럴 수가 있나?

갑자기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않는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녀석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아이작? 아이작!!”

아이작이 갑자기 기절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일단 쓰러진 녀석을 안아 든 채로 주위를 둘러봤다.

혹시라도 여신들의 봉인이 갑자기 강해졌을 가능성은 낮다.

수도에 가려면 한참이다.

보이는 신전도 없고.

전에 아이작과 함께 달리아크까지

멀쩡히 오지 않았나?

고작 모래 폭풍 따위에 탈진해서 쓰러질 녀석은 아니다.

너무 많은 정보 때문에 과부하가 걸린 거라면,처음 이야기를 들을 때 쓰러졌어야 한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쓰러지다니.

까마귀 깃털 하나하나가 불안하게 바람에 흔들린다.

“아이작..

물론 기본적인 계획은 정했다.

녀석이 없다고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건 아니다.

아이작도 말했다.

열 번도 넘게 죽으며,모든 일을 직접 겪은 내가 자신보다 훨씬 더 좋은 답을 내놓을 거라고.

하지만.

죄책감 없이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고,옆에서 냉정히 핵심을 짚어 주는 존재를 또 어디서 구할까?

.일으켜야 한다.

불길한 주술 기계를 안아 든 채 아이작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원래 루-룸으로 작동하는 거다. 방금 같은 식으로 하면 계속해서

기본적으로 루-룸으로 작동한다는 까마귀 인형.

마력 충전이 안 되면 그 액체를 녀석에게 넣어 주면 되지 않을까?

내 몸 안에는 이미 많은 루-름이 흐른다.

아이작의 말로는 한계가 안 보일 정도로 들어간다고 했다.

뼈를 열어서,회로에 흐르는 걸 부리에 흘려 넣어 준다면...

- 우우응!

검기를 일으켰다.

억지로 회로를 열어 보려는 순간.

- 파드득!

〈야! 장난이야! 장난!〉

“뭐라고?”

〈큭큭큭,이것 좀 봐. 완전히 겁에 질렸잖아?〉

〈너,내가 죽었을까 봐 무서웠어? 뼈 좀 그만 떨라고. 장난이었어.〉

까마귀 인형이 품 안에서 날개를 파득거리며 낄낄댔다.

모래 속에 깊숙이 파묻어 버릴까 싶었지만,그가 멀껑했다는 사실이 기뻐서 분노도 금방 식어 버렸다.

“장난칠 기분 아니다.”

〈에이,별로 화 안 난 거 같은데?〉

〈길도 지루한데 재밌잖아? 그냥 경고를 좀 주려고 한 거라고.〉

“무슨 경고?”

〈첫 번째 계명. 네 안에 흐르는 루-룸을 절대 다른 것들에게 나눠 주지 마라.〉

아이작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내 교단,예메라의 신전,무덤의 골렘까지... 네가 개입한 루-름은 그 변경이 회귀한 뒤에도 유지돼. 그런데 그걸 다른 것들에게 주면 너한테 무슨 변화가 있을 줄 알고? 지나치게 위험하다고.〉

아이작이 씹듯이 말을 맺었다.

〈나한테도 주지 마.〉

위화감이 느껴져서 녀석을 멍하니

“네가 웬일로 나를 걱정해 주냐?”

〈어이. 웬일이라니. 전생의 내가 뭘 했는지 나는 전혀 모른다니까? 그리고 6년은 솔직히 도와준다고 했잖아. 선입견을 갖지 말라고.〉

3년 더하기 3년인가.

〈뭘 그렇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보는 거야. 이렇게 생각해 보라고. 네 루-룸이 사라지면,나한테 오는

미래에 변화가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 싫어.〉

마력 충전 후에는 몰라도,처음 쓰러진 건 진짜 같았는데.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스스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워 걱정스레 녀석을 바라봤다.

- 파드득!

아이작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다 왔군.”

이제 희미한 윤곽만으로도 도시의 풍경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안의 건물과 골목과 인간들이 양감의 윤곽 안에 모두 그려진다.

〈호오. 벌써 아는 거야?〉

“너는 300년 만이겠군.”

〈회귀하는 건 알겠으니까,내가 할 말은 빼앗지 말아 줄래?〉

뾰루퉁하게 대꾸한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근데 어떻게 들어갈 거냐?〉

“성문 정도야 은신으로 지나가면 되는 일이고. 안에 결계가 있다.”

〈예전에 나랑 왔다면,결계 정도는

“당연하지.”

상태창을 슬쩍 확인했다.

[결계 지식 Lv.5]

- 다음 개념을 이해합니다.

- 이중결계,결계압축,결계침식, 결계해방,허위모사.

이제 달리아크에 쳐진 결계는... 민망할 정도로 훤히 보인다.

살아 움직이지도 않는 듬성듬성한

밧줄의 직조,손만 뻗으면 간단히 움켜쥘 수 있는 핵.

- 터벅. 터벅...

조심스레 속도를 늦추지 않아도, 굳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이미 결계는 파훼되어 있다.

〈훌륭해. 순진하긴 해도 교육은 제대로 받은 것 같군. 아니,정수를 흡수한다고 했었나?〉

“그래.”

〈정말 터무니없군. 홉수 계열의 부작용은 계획성 없이 그릇이 금방 차 버린다는 건데. 넌 대체...〉

눈을 몇 번 깜빡인 아이작이 앞을 부리로 가리켰다.

〈일단 레나부터 찾아봐.〉

새하얀 가면을 쓴 여자를 은신으로 그대로 지나쳤다.

아이작도 동조되어 있는 상태.

〈이쪽으로 향하는 시선은 하나도 없군. 대단한 은폐야.〉

녀석의 칭찬에 머쑥해진 채 골목 안쪽을 찬찬히 살폈다.

트로핀 나냐우와 샤루니안은 어둠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냥 경매장으로 들어갈까?”

〈그런 식의 만남은 재미없잖아? 이번에는 네가 그 애송이 머리채를 잡아채 봐. 나냐우에게도 다 말해 주기로 했잖아?〉

〈말의 신빙성을 높이려면,당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곤란하거든. 네가 짠,하고 뒤에서 나타나면 얼마나 심장이 떨어지겠어. 일단 놀래 준 다음 설득하라고.〉

몇 시간 넘게 경매장을 중심으로 골목을 헤떴지만,나냐우의 기척은 잡히지 않는다.

아이작의 말에 따라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장난 좀 칠 줄 아는군. 바닥에 주술 덫을 깔았어. 기다려 봐...〉

“그냥 만나도 될 거 같은데.”

〈쉿...〉

[의수義手...]

[의족義足...]

[의안義眼,의혈義血,의심義心...]

개념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그림자로 만든 손이,팔이,눈이,살과 피가 생겨난다.

[혼의 설계는 가짜,생의 목적은 저주의 반사...]

경악으로 몸이 굳어졌다.

아이작에게 주술 지식을 홉수한 지금이라면 알아볼 수 있다.

사역 마.

보통의 마법사는 정신을 제압한 동물과 의지의 파편을 잇는다.

지능이 낮을수록 제압이 쉽기에, 크기에 비해 지능이 떨어지는 새가 자주 패밀리어로 쓰인다.

마음과,욕구와,시야의 공유.

패밀리어의 죽음은 마법사에게도 큰 타격을 입힌다.

하지만 지금 만들어 내는 사역마는 오로지 죽는 것이 목적이다.

진흙 같은 그림자(망상)에서 태어나,

자신이 밟게 될 함정의 설계자에게 저주(응보)를 고스란히 반사.

아이작에게 함정 제작자의 정보는 전달해 주면서,죽을 때의 타격은 안전하게 단절...

Lv.5의 주술 지식으로 알아낼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죽는 건 아니지?”

바닥에 깔렸다는 함정은,레나를 유독 아껴 주는 샤루니안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크크,아쉽게도 그러기에는 힘이 한참 부족하다고. 원래의 ‘검은 진흙’

이라면 혼의 침식까지 일으킬 수 있겠지만,지금은 뭐. 위치 파악 정도일까.〉

- 좌르록!

사람의 모양을 한 그림자 인형이 골목 곳곳을 걷는다.

땅에서 솟은 무형의 기운에 팔이 묶이고,다리가 결박되고,시야가 가려지지만 오히려 ‘검은 진흙’이 부서지며 무형의 기운을 침식.

〈저기다.〉

아이작이 백여 미터 떨어진 골목 위를 가리켰다.

안개 속에 진흙이 따라붙는다.

“너,인형 속에서도 이런 주술이 가능했던 거냐?”

〈악의의 음미와 반사는 이 몸의

특기...〉

- 털썩.

이번에야말로 잔뜩 무리해 버린 둣,

아이작은 아예 날개도 쪼그라뜨리며 내 품 안에 쓰러졌다.

인형의 눈을 벌려도 완전히 빛이 꺼져 검게 반들거릴 뿐.

“골치 아픈 녀석이군.”

작아진 까마귀 인형을 갑옷 안에 넣은 채,샤루니안의 뒤로 빠르게 접근했다.

안개의 소용돌이로 진흙을 떨쳐 내는 묘족이 보인다.

아무래도 나냐우와는 행동을 따로 하는 모양.

하지만 아이작도 쓰러진 시점에서 지금보다 인상적인 등장은 어렵다.

“샤루니안,싸울 생각은 없다.”

털을 잔뜩 부풀린 고양이가 뒤를 돌아봤다.

주술력을 한창 발휘하는 중인지, 인간의 몸을 했지만 얼굴과 손발은 그대로 흰 고양이다.

“이. 이이. 넌 대체 뭐야?”

지금 아이작은 정신을 잃었다.

아이작도 내가 이 정도는 혼자서 헤쳐 나갈 거라고 믿고 마지막 힘을 끌어 쓴 거겠지.

“내가 여기 올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히 맞췄으면서,같은 편이라는 사실은 예측하지 못한 건가?”

인간형을 유지할 정신도 없는지, 아예 몸까지 고양이로 변한 그녀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예전보다 좀 마른 것 같다.

힘든 일이라도 있었나?

“너. 예측하기 힘들었어. 관절이 쑤시는 정도가 아니었다고. 너만큼 알기 어려운 녀석은 처음이었어. 대체 정체가 뭐야?”

앙칼진 말에 갸르릉거리는 울림이 섞여 있지만,경계심보다는 고양이 특유의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더 느껴진다.

“나냐우와 레나까지 함께 모여서

“.그렇게 된 거다.”

나냐우와 샤루니안은 멍한 얼굴로 눈만 껌백거렸다.

“하아/’

레나가 무언가를 떠올리듯 허공을 바라보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기억이..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 미묘한 물기가 열 번이 넘는

죽음으로 황폐한 마음 안쪽을 톡톡 건드렸다.

그녀의 삶은 희극보다는 아무래도 비극에 가까웠을 텐데.

“.채워지고 있어요.”

양쪽에 서 있던 두 T&T의 간부가 레나를 바라봤다.

“정말? 나는 전혀 아닌데?”

“나도 아니지만..

트로핀 나냐우가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눈가를 찌푸렸다.

“300년을 함께 지내도록 상상도 하지 못했군. 루-름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새하얀 피부 아래 일어나는 동요를 굳이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저 아래 흐르는 건 뜨겁고 붉은 혈액이 아닌 차가운 은색 마력액.

“수도에 오게 되면 내 연구실로 와 주길 바란다.”

샤루니안이 눈을 세로로 떴다.

“시조도 믿어? 이 녀석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거야?”

“.그렇겠지.”

“분명해요.”

기억이 떠오른다는 레나의 반응을 제외하더라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루-름 탈취 계획.

수도 아래에 있는 ‘자유의 길’. T&T 간부들의 성격과 구성.

모두 예전에 접촉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다.

레나가 말을 이었다.

“좋아요. 그럼,후작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빛의 유물을 취득하는 건 전부 저희에게 맡기세요.”

레나가 분위기를 잡았다.

“루비아라고 했죠? 그 아가씨도 힘껏 도와줄 테니까 맡겨요.”

“정말인가? 대가는..

뭘 줘야 할까 고민했지만 품에는 기절한 아이작밖에 없다.

“정보 길드도 몰랐던 고급 소스를 잔뜩 던져 놓고 뭘 더 주시려고.”

레나가 침묵하는 나를 향해 피식 웃으며 주위를 돌아봤다.

“다들 월 그렇게 멍하니 가라앉아 있죠? 전 오히려 머리가 깔끔해진 느낌인데. 더 해 줄 건 없나요?”

나는 머릿속에 있던 질문을 잊지 않고 던졌다.

“혹시. 레드 플레이크의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그건 절대 곤란!”

샤루니안이 작게 갸르릉대며 털을

바싹 세웠다.

더없이 단호한 말투였다.

레나가 눈을 부드럽게 치켜떴다.

“일단 ‘여기’서는 조금 어려워요. 서로 정보를 유출하지 않게 조약을 맺은 상태거든요.”

나는,시나리오를 한 번 끝냈다는 이유로 철저히 이용하려 하는 인간 여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는 여기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

이 단어를 뱉은 것만으로도 무척 높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겠지.

“다들 신분을 위장한 채로 ‘여기’

저기 따로 다녀 정보 수집이 쉽지 않기도 하지. 세부 프로필 입수는 극단적으로 어려울 거다.”

“어? 시조까지?”

샤루니안이 황당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나냐우가 말을 이었다.

“네가 루-룸 연구에 협조한다면, 너는 나에게 언제나 가장 환영받는 손님이다. 수도에서 기다리겠다.”

너무 자세히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살해하고 피를 빨아먹은 잿빛 기사를 이야기했을 때.

언제나 덤덤했던 나냐우의 표정은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흔들렸다.

“그럼. 최적의 동선을 위해..

레나가 등을 돌렸다.

“우리는 위로 올라갈게요. 당신은 당신의 계획이. 있겠죠.”

그녀의 마지막 말은,어쩐지 조금 쥐어짜 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마 앞으로 가서 그 표정을 다시 확인해 볼 수 없었다.

“자,빨리 가야겠네요. 길드에서 비브리오와 내통하는 자들을 어서 쳐내야 될 테니까요.”

연락은 알아서 하겠다는 마지막 말만 남기고 T&T 간부들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딘가 몰아붙여진 기분으로 골목에 기댄 채 아이작에게 마력을 주입했다.

- 파직. 파지직.!

몇 번의 주입 끝에 아이작이 눈을 떴다.

똑바로 시선을 마주친 아이작이 천천히 입을 걸었다.

〈으으. 꿈이 아니었군...〉

“꿈 농담은 자제해 줘.”

〈흥. 거래는 성공적으로 끝났냐?〉

“아마도. 아까는 무리한 거지?”

〈양심적으로 루-륨 섭취도 없이 지내니 그럴 수밖에.〉

“아이작,레드 플레이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아까 T&T 녀석들이 가기 전에 조사해 달라고 물어봤어야지.〉

“이미 물었다. 비밀 엄수 조약을 맺은 상태라더군.”

〈뭐야,그렇다고 힌트도 안 줘?〉

〈그래? 그 정도면 다 알려 줬네. 여기는 기본적으로 만남의 장소야. 상주하는 인원이라고 해 봐야 극히 드물지. 직원들 중에 하나겠지.〉

그동안 이곳에서 봤던 인간들이 하나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멍하니 있던 ‘비회원’들,골목의 흰 가면을 쓴 여자,이상할 정도로 강한 정보 경매상...

정보 경매상.

“으음..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까마귀가 끼어들었다.

〈뭐,그렇다고 당장 달리아크를 쑤시는 건 참아 줘. 비브리오 건이 끝나면 T&T가 먼저 연락할 거야. 그때 만나도 돼. 너는 먼저...〉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나를 따라와라.〉

“어디로 가려고?”

〈지하. ‘루비아’의 감정과 기억이 보존되고,그게 이 세계의 과거를 영구히 변화시킨다면...〉

- 딱.

까마귀가 부리를 부딪쳤다.

〈그녀를 고작 영주에서 멈추게 할 이유는 없지. 전-혀.〉

“에라스트 영주에서. 멈추게 할 이유가 없다고?”

〈물론. 시나리오라는 건 루비아를 영주로 키우라고 했지만,이 상황에서 고작 영주의 힘으로는 절대 영지를 키울 수 없어.〉

아이작이 부리를 위로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봐. 곧 전쟁이 일어난다며. 그럼 에라스트 영주 따위가 태평히 영지를 발전시킬 수 있겠나?〉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전쟁을 반대한다면,살해당하는 또 다른 확실한 길이 그 인간 앞에 펼쳐지는 거라고.〉

“전쟁에 찬성한다면?”

사실 루비아의 성격상 그러리라는 기대는 낮지만.

하지만 아이작은 조금도 망설이지

〈찬성하면 더 지옥이지. 연합에 가까운 에라스트는 초반에 휩쓸릴 텐데,고작 영주 하나가 그 흐름을 벗어날 수 있나?〉

옳은 말이다.

에라스트 영주였던 레이 커크도 영지를 빼앗긴 채 붉은 여우 평원에서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좋은 대안이 있나?”

〈크흐흐. 그 정도 죽었으면 슬슬 시야를 넓혀 봐. 커다란 영향력을 가져야 전쟁을 막든지,거기에서 이득을 보든지 할 거 아니겠어? 일단 재밌는 가능성을 하나 보여 주도록 하지.〉

- 파드득!

지하로 간다던 아이작은 누구보다 높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를 따라 다시 남쪽으로 가도를 되돌아간 지 이틀째,무기의 도시 그라스미어에 도착했다.

아이작과 함께 성문을 슬쩍 지나 내성으로 진입했고,영주와 인사를 나눴다.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왔다.”

“그럼요! 어디든 다 둘러보십시오! 망할 놈의 주술사가 쓰던 지하는 모두 사자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럼.”

빈말이 아니었다.

영주는 전당 열쇠를 아예 나에게 넘긴 뒤,지하 무덤에 향하는 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좋아. 그대로 들어가라고.〉

아이작의 관이 있는 가장 안쪽.

[혼자 드러나는 붉은 꽃,벗겨지는 재현의 베일,모든 것은 아이작의 시선과 함께 시작된다...]

둥그런 알 뒤쪽에서,예전에 봤던 비밀 통로가 생긴 게 보인다.

하지만 1미터 정도의 좁은 통로가 아니라 세 배는 넓게 활짝 열렸다.

온갖 곳에 말파스의 인장을 찍고 겨우 들어간 나와 비교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물었다.

“궁금한 게 있다. 네 주문은 대체 어디서 온 거냐?”

지금까지 그는 주술을 쓸 때마다 온갖 기다란 주문을 다양한 언어로

읊어 왔다.

처음엔 어떤 규칙에 따라 정해진 거라고 생각했는데,자기 이름도 아무렇게나 넣는 걸 보니 의문이 솟아올랐다.

〈뭐긴? 당연히 내가 지었지.〉

“크음. 그렇게 막 지어도 되냐?”

〈취미에 시비 걸지 마. 어릴 적 내 꿈은 항상 시인이었다고.〉

“믿기 어려운 얘긴데.”

〈왜,지금도 시인 같아서? 어?〉

뾰루퉁하게 뱉은 녀석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입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와 봤다고 했었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까마귀 조각상들은 다시 봐도 아름다웠다.

한참을 걸어 통로 끝에 다가가자 시야가 훨씬 더 밝아졌다.

- 스스스스,

어둠 속에서,새하얗게 타오르는 액체가 춤을 췄다.

“여기로 들어가는 거냐?”

거대한 문.

소녀 공작이 몇 번이나 두드려도 흠집도 나지 않던 마계의 문이다.

까마귀는 고개를 저었다.

- 팔락.

아이작은 왼쪽 날개를 펼쳤다. 부적이나 주문 따위는 없었다.

그림자가 날개 끝에서 길게 뻗어 너울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불꽃의 그림자,긴 사슬의 그림자, 거울의 그림자가 펼쳐졌다.

그리고 오른쪽 날개를 펼쳤다.

날개에서 나타난 바람이 천천히 왼쪽 날개에서 솟은 검은 그림자를

휘둘러 주변을 뒤덮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돌연히 ‘문’이 생겨났다.

마치 아이작의 마음으로 실제의 벽에 ‘문’이라는 개념을 씌운 듯한 착각이 일었다.

〈오래 유지는 힘들다. 빨리 와.〉

- 파드득!

홀린 듯 문을 지나자 깊고 넓은 구멍이 펼쳐졌다.

어느새 사다리를 잡고 있는 내가

신기했다.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아래쪽에 먼저 날아간 아이작이 말했다.

〈말해도 너는 모르는 다중결계. 무형의 심상방벽이다. 비밀 통로를 발견한 뒤,아무도 못 찾게 내가 직접 덮어씌웠던 결계지.〉

“.이건 못 따라하겠군.”

〈그걸 말이라고 하냐? 혼자 오게? 또 오고 싶으면 나한테 들여보내 달라고 해야지.〉

사다리를 빠르게 내려갔다.

아래로 갈수록 지하 통로는 점점 넓어졌다.

- 툭.

30미터 정도 아래로 내려갔을 때 바닥에 발을 디뎠다. 안내를 따라 걸으며 주위를 봤다.

묘하게 익숙한 양식이다.

자유의 길.

트로핀 나냐우가 보여 줬던 수도

비밀 통로와 비슷했다.

나냐우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천 년 전,사도에게서 피하려고 인간들이 판 땅굴이야.]

[세상에 흩어진 루-륨을 찾다가 내가 발견한 장소지.]

“이건. 옛 인간들의 비밀 통로 아닌가? 남부에도 있을 줄이야..

아이작이 괜히 내 다리를 부리로 콕콕 두드리며 웃었다.

〈흐흐. 이걸 수도에서 봤었다고 했었나? 범위는 오히려 여기가 더 넓을 거야.〉

묘하게 웃는 아이작의 다음 말에 나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블람,에라스트,그라스미어, 에렌데일,대븐홀,콜체스터. 다섯 도시를 연결하는 통로니까.〉

“이게 다섯 도시나 연결한다고? 한데 대븐홀,콜체스터라니. 그건 대체 뭐지?”

에라스트,유블람,그라스미어는 물론 익숙하다.

에레데일은 남중부의 도시.

아이작의 옛 교단 근처에 있다.

하지만 다른 두 도시는 아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예메라 년이 태워 버린 도시야. 지금은 쓸쓸한 모래 언덕이지만, 옛날에는 잘나갔던 것 같아.〉

아이작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화려했던 문명을,환락을 여신이 억지로 참회시켰다는 이야기.

금서로 분류된 옛날의 서적들에서 읽은 이야기라고 했다.

사막 지역까지 뻗은 통로라니.

지하의 숨겨진 문명이라도 봐도 좋을 정도의 스케일이다. 아이작의 이런저런 설명을 들으며 아래를 계속 돌아봤다.

천 년 전 사용됐다던 지하 통로는 슬쩍 봐도 수천 명 이상의 인간이 생활할 만한 공간이 있었다.

숙소,경작지,병기고,무덤...

비밀 기지나 통로라기보다 오히려 지하 도시에 가까웠다.

천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먼 삶의

흔적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예전에는 대피소였지만,지금은 어떨까. 세력을 구축해도 지상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

아이작이 부리로 앞을 가리켰다.

유독 눈에 띄는 원형의 거대 돔이 있었다. 직경 100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넓이.

통로 안에서도 특히 인위적으로 조성된 넓은 공간이었다.

당연하게도 아무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돔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얌전한 자세로 무너져 있는 수많은 뼈가 눈에 들어왔다.

싸우다 죽은 듯한 녀석은 이곳에 하나도 없었고,모두 각자의 작은 공간을 점유하거나 서로를 안은 채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였다.

“이건. 대체..

- 파드득!

가만히 있던 아이작이 한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부리로 작은 일지를 물어 내 앞에 놓았다.

특수한 재질의 종이인지,천 년이 지났음에도 퇴색되었을 뿐 여전히 묘한 매끈함을 유지하는 일지였다.

아이작이 부리로 첫 장을 넘겼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매 순간마다 사도들이 우리를 발견할지 두려워하며 고문과 죽음을 생각하는 건 더 이상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뭐야? 그냥 술술 읽잖아? 이거. 상당히 어려운 문법인데?〉

고대어 스킬을 홉수하긴 했지만 더듬더듬 읽는 수준이다. 일지를 보는 순간,글자가 읽힌다기보다 내용이 자연스럽게 먼저 인식됐다.

“나도 모르겠군.”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68.65% — 68.49%...]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동시에 일지의 글자들이 한층 더 눈에 잘 들어왔다.

“.죽음으로의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구차하게 살아왔다. 마지막 지하 수맥도 슬슬 고갈되어 간다. 밖으로 나간 수색대도 1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숨만 붙어 있을 뿐,이미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

〈구질구질하지? 지하 수맥은 다시 복구됐다고.〉

“여럿이 돌아가며 적었군.”

〈집단 자살이니까.〉

일지는 계속 이어졌다.

외부를 탐사하러 나간 동료들이 돌아오지 않는 절망,수맥의 고갈, 오랜 지하 생활의 절망감이 이들을 단체 자살로 몰아넣은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세이론이 구해 줬을지도 모를 텐데 말이야.〉

“비슷한 시기인가?”

까마귀가 어깨를 으쪽했다.

〈그냥 추측이야. 어쨌건 건국제가 수도에서 일어난 건 확실하거든.〉

아이작의 말을 홀려 들으며 계속 일지를 넘겼다.

통제실 일지에는 경작에 관한 사항과 대피소의 다양한 일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일지를 읽던 도중 이상한 부분을 보고 아이작에게 물었다.

“.보안 구역이 어디지?”

〈흐흐. 따라와라.〉

아이작이 미묘한 웃음을 홀리며 날개를 퍼덕였다. 돔의 반대편을 지나자 무척 넓고 기괴한 공간이 펼쳐졌다.

그곳에는 정육면체로 된 거대한 철제 우리들이 있었다.

어떤 우리는 흑철로 만들어진 데다 창살 굵기가 10센티에 가까웠다. 검기라도 쓰면 몰라도,힘으로는 오우거도 못 구부릴 창살이었다.

안쪽에는 인간의 뼈,짐승의 뼈, 트롤의 뼈,짐작이 가는 마물들의 뼈와 뭔지 짐작도 안 가는 뼈들이 우리마다 널려 있었다.

정육면체 철창 안의 흠집이,안에 있던 수감자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해 주는 것 같았다.

“여기인가.”

일지의 기록에 따르면,마물들을 가둬 놓고 실험했다던 장소다.

우리 안에는 손 뼈 크기만 해도 인간의 상반신 전체를 잡을 만큼 큰 것들도 많았다.

〈어. 자살을 선택할 만큼 존엄한 분들도,결국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었던 거라고. 오락이란 게 무척 중요하거든?〉

‘보안 구역’에 도착하자 미묘하게 분위기가 고조된 녀석이 계속 말을 이었다.

〈이런 장소라면 뭐든 할 수 있지. 실험을 할 수도 있고,병력을 잔뜩 키울 수도 있지. 천 년이 지났지만 경작도 가능하다고. 기스-제-라이 라고 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안에 갇힌 친구들 좀 봐. 잔뜩 다시 되살려도 다들 한 가닥 하겠는데? 안 그래?〉

그 부분만큼은,확실히 동의할 수 있었다. 쉽게 형상이 상상이 가지 않는 거대한 뼈였다.

기스-제-라이가 온다면 이 뼈들만 일으켜도 굉장한 군세가 되리라고 생각될 정도로,‘보안 구역’은 무척 광활했다.

“너는 여길 어떻게 썼지?”

〈솔직히 나도 제대로 여길 연구해 보지 못했어. 발견 당시에는 한창 바쁠 때였거든.〉

“부하들에게 조사를 맡기면 되지 않았나?”

〈다른 녀석을 어떻게 믿고 이런 꿀 같은 곳을 알려 주냐? 뭐가 튀어 나올지 모르는데.〉

“흠 •

〈또 다른 하나의 세계인 셈이지.

기가 막히게도 각 도시의 내성과 통하는 건 알아 놨어.〉

성 내부의 땅굴.

웬만한 군사력이 있으면 점령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

굳이 점령이 아니라도 서로 간의 지원과 소통도 쉽게 되겠지.

반군 활동을 벌이기에도 대단히 유용해 보인다.

생각에 잠기자 아이작이 옆에서 조용히 침묵한다.

내 판단을 유도하는 걸까?

녀석이 처음 충고한 대로,수많은

회귀를 거쳐 모든 걸 경험한 것은 나 자신이다.

스스로 생각하라고 했던가.

루비아를 키우는 게 목표라면... 일단 그라스미어.

핵심적인 도시다.

나는 그라스미어 영주에게 은혜를 입혔고,첸들러 남작이 애벌레가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현 그라스미어 영주라면 몰라도 그 아들의 성향이라면 분명 이쪽에 회유될 가능성이 크다.

‘.대충 성격도 알지.’

그라스미어 자체가,자유연합과의

최전선에 있다.

황실의 뜻대로 전쟁이 벌어질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을 도시이기도 하고

두 번째.

유블람은...

레안드로 후작이 근처에 복무하던 부하를 영주로 세운 게 떠오른다.

후작이 여기로 내려오고.

현 유블람 영주의 죄를 증거하면 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역시 후작만 끌어들이면 세 도시 연합은 완성된다.

“.그런 거다.”

생각을 말하자 아이작이 흐뭇한

〈나쁘지 않군.〉

“그런데. 에레데일이라는 도시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 거긴 어떻게 해야 하지?”

〈그곳은 거의 쇠락한 것 같던데. 아직 가 본 적도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 교단 근처라.

장사하러 나온,마커라는 상인을 만난 기억 정도만 있다.

다시 위치를 떠올렸다.

테레지아 마커.

그 도시에서 밖에 나와 장사하던 녀석인지도 모른다.

내가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자, 까마귀가 주의를 환기시켰다.

〈좋아. 그럼 우리 계획에 최고급 윤활유를 조달해 보자고. 도시들을 서로 쫙쫙 잘 붙게 하는 아교라고 해도 되겠어.〉

〈뭐겠어,상인 연합이지. 크흐흐. 정회원 가입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아직 넋 놓고 있던 게 아쉬워.〉

- 파드득!

아이작이 날아올라 반대편 케이지 위에 앉았다.

〈에라스트 영주 판결이 7일 남았어. 그것만 기다려 보고 진행하자고.〉

남은 일주일.

그동안 할 일을 정해져 있다.

〈그동안 이 안을 연구해 보자고.〉

광막한 통로를 바라봤다. 저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여섯 도시를 이었다고 기록된 통로.

지금까지 둘러본 것들만 떠올려도 무척 관심이 간다.

〈나는 저 통로 쪽에 들어갈 건데. 넌 어쩔 거냐?〉

“따로 움직이자는 건가?”

〈응. 굳이 같이 움직일 거 없잖아? 장소는 넓고,시간은 일주일 남았어. 효율적으로 쓰자고.〉

“.그럼 나는 여기 남지.”

보안 구역이라는 곳.

케이지에 버려진 뼈들에 관심이

아이작에게 마력을 채워 준 뒤, 녀석을 날려 보냈다.

정육면체 케이지에 갇힌 거대한 뼈들을 바라봤다.

무모한 짓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작은 녀석도 트롤보다 크다. 뼈의 군주라는 스킬을 가졌지만, 고작해야 새끼 늑대 하나를 일으켜 본 게 전부.

하지만 어차피 여기서 일주일을 보내는 거라면,편하게 생각하고 관찰해도 좋겠지.

차분하게 하나하나를 뜯어봤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알 수 없는 부스러기들이 빼곡한 이빨 사이에 끼어 있다든가,거대한 손에 잡혀 으깨져 있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 과드득!

손으로 철창을 구부려 열었다.

거대한 짐승의 입을 벌리고 안에 있는 부스러기를 맞췄다.

거주자들은 이 장소를 처형장이자 고문실로 사용한 듯했다.

실험과 유희는 마물들로 그치지 않은 것이다.

지금껏 충분히 본 인간의 뼈에는 더 이상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 달그락.

맞추던 뼈들을 그냥 흩어 버린 채 마물들의 뼈에 집중했다.

정강이,발톱,이,뒤틀린 뼈들...

뼈와 뼈 사이를 거닐었다.

우리에 갇힌 뼈들은 왠지 낯설지 않았다.

대부분 처음 보는 형태의 뼈들이 많았지만 크게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쓰러져 있음에도 바로 선 키보다 큰 짐승을 바라봤다.

어떤 것들은 다리뼈 두께가 작은 기둥 같은 것들도 있었다.

천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삭지 않은 날카로운 이빨은 음산함보다 친숙함을 안겨 줬다.

칼자루에 익숙한 손으로 뼈들을

하나씩 쥐어 본다.

인간에 익숙한 눈으로 옛것들의 구조를 차분히 훑었다.

천 년 전의 땅을 달리던 마물들.

뼈 위에 쌓여 있는 먼지가 무언가 오랜 감정을 기억의 기슭으로 밀고 있었다.

- 달 그

락.

내가 잡고 내린 건 아니다.

거대한 마물의 아래턱은,혼자서 음직였다.

삐거덕거리며 내려온 턱뼈를 흠칫 놀라며 잡았다.

다시 올라오려는 힘이 느껴졌다.

“이건..

천 년 전에 멈춘 뼈가 음직이고 있었다.

[뼈의 군주 Lv.? 발동...]

[고대 마물의 뼈를 움직였습니다.] [스킬 경험치가 크게 올랐습니다.]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새끼 트롤 하나도 움직일 수 없던 과거가 떠올랐다.

아예 움직여 보려고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 끼이이익.

3미터가 넘는,꺾어진 날개 뼈가 위로 올라온다.

마물들의 근처에서 무언가 기억을 떠올리려 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스킬 경험치가...]

기억은 이제 떠오르지 않는다.

묘한 감정마저 군데군데 잘려 나 가 더듬거리며 겨우 올라왔다.

슬픔. 저주. 탄생. 대답. 썩은 피. 타협. 갈증. 선택...

- 달그락.

수 미터가 넘게 펼쳐진 긴 꼬리가 바닥을 쓸며 말렸다.

그것마저도 잘려 있는 거라는 건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스킬 경험치가 올라간다는 창이 빼곡하게 앞을 메웠다.

경박한 효과음이 연달아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뼈의 군주 Lv.l -> Lv.幻

- 뼈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력이 높아집니다.

- 전투 중 상대의 뼈를 강탈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강탈 가능한 범위가 증가합니다.

- 한층 더 복잡한 구조의 뼈를

조립할 수 있게 됩니다.

- 〈종족: 해골〉의 당신에 대한 기본 호감도가 5 상승합니다.

- 통제력이 50으로 상승합니다.

- 당신의 통제 아래 있는 개체에 대해 훈련이 가능해집니다. 훈련을 실시할 경우 친밀도와 해당 개체의 능력이 상승합니다.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68.49% -> 66.31%...]

두 차례의 현기증이 일었다.

세계가 오므라드는 듯한 지독한

현기증은 동화율이 내려갈 때 바로 일어났다.

그 후에는 2%가 넘는 수치가 떨어진 것에 대한 당황과 의문으로 인한 현기증이었다.

-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여기저기서 움직이는 뼈들을 내가 조종하는 것인지,현기증으로 인한 착각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뼈들은 움직이며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옴직이고...

우리에 갇혀 지워진 그들의 삶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시간 속에 멍하니 공백이 생긴 것 같았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뼈의 군주 Lv.l -> Lv.3]

- 뼈에 대한...

- 전투 중...

- 〈종족: 해골〉의 당신에 대한 기본 호감도가 10 상승합니다.

- 통제력이 250으로 상승합니다.

계속 경험치가 올라가면서,스킬

레벨이 다시 오른 순간.

- 털썩.

뼈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왜 스킬 경험치가 그렇게 오르지 않았는지,통제력이 극히 낮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뼈의 군주란 쓰러진 것들에 실을 매어 움직이는 게 아니다.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는 그들이 이미 알고 있다.

수십만 번 움직여 온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 주면 되는 일이다.

- 끼기긱.

목 길이만 2미터가 넘는 녀석이 아래로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커다란 머리에 툭,하고 손가락을 갖다 댔다.

언젠가...

이들에게 지독한 죄를 지은 듯한 느낌이 든다.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들을 일으켜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특전,접속교류(A)를 획득합니다.]

[통제 개체의 ‘세계인식’을 그대로 공유할 수 있습니다.]

- 통제력이 350으로 상승합니다.

- 접속교류 중인 개체가 사망할 경우,일정 기간 인식장애를 겪게 됩니다.

분노,슬픔,절망,공포,분노...

특전이 발휘되는 순간,머릿속에 몰려드는 뼈들의 비명을 견뎌낼 수 없었다.

기스-제-라이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을 계속하는 거지?

- 딱딱! 딱딱!

〈어이! 정신 차려! 안 일어나냐? 여기 자빠져서 뭐 하는 거야?〉

〈뼈들을 연구한다더니 대체 무슨

난리를 쳐 놨냐?〉

손으로 전부 잡아 찢은 우리들을 바라봤다.

- 뚜두둑.

〈괜히 손목 풀지 말고? 정신이나 좀 풀어야 될 거 같은데?〉

“괜찮다.”

〈하나도 안 괜찮다고. 뭘 서로 다

뒤엉키게 난장을 쳐 놨어?〉

처음 사용해 본 특전,접속교류의 부작용이다.

아이작에게 사정을 말하면,여기 있는 뼈들을 일으켜 군세로 쓰라고 할 게 분명했다.

“넌 원하는 대로 찾았나?”

다행히 아이작은 캐묻지 않았다.

〈그럼. 에라스트로 향하는 길을 벌써 답사하고 왔지.〉

“에라스트..? 루비아 때문인가?”

까마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대단한 관심을 가진 인간인데? 거기부터 확인해야지. 근데 오늘이 일주일째인 걸 아냐?〉

벌써 7일인가.

〈T&T에서 연락이 왔을 거라고. 어서 올라가서 확인해 봐.〉

검은 후드를 입은 누군가가 앞에 서 있었다.

영주는 상대를 T&T 전령이라고 소개해 주고 밖으로 나갔다.

“인사드립니다.”

검은 후드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인간은 아니다.

〈설마 멸망한 호족虎族? 아니야, 작은 표범이군.〉

처음 듣는 종족이었다.

아이작에게 더 묻기 전에 상대가 후드를 벗었다.

한순간 샤루니안 같은 묘족인가 싶었지만,팔과 다리가 그녀보다 한층 길고 가늘었다.

갈색 바탕의 피부 위에,까닿고 동그란 점이 여기저기 찍힌 상대는 유독 우아해 보였다.

〈아까운 몸매를 후드로 가리다니 참 안타까워. 짧고 뭉툭한 것들이 아름다운 걸 못 참고 워낙 사냥을 해 대니 말이야...〉

상대가 붉은 눈을 낌떡이며 나를 바라봤다.

충동적으로 물었다.

“그렇게 다녀도 괜찮은가?”

이곳은 번성한 도시 한복판이다.

아이작의 말대로,인간들의 눈에 띄면 좋은 꼴을 볼 리 없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보다 빠른 인간은 없습니다.”

“으음.”

굳이 따지는 것도 우스웠다.

“레나는 뭐라고 하던가?”

상대가 후드 속에서 뭔가를 찾아 앞으로 내밀었다.

굳게 봉해진 편지였다.

“저는 전령일 뿐,편지 안에 쓰인 내용은 모릅니다. 다른 지부와의 연락이 필요하면,엣 숲 엘프 여관 뒤쪽의 작은 사거리로 오십시오. 거기서 오른쪽 네 번째 집입니다. 납작한 회색 지붕이죠.”

- 획!

말을 마친 상대는 날렵하게 뒤로 사라졌다.

〈눈빛이 아주 새침하네.〉

“.취향이냐?”

〈왜,신경 쓰여?〉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녀석을 흘끗 바라보고 편지 봉투를 뜯었다.

“먼 곳의 동맹에게.”

편지의 첫머리를 보고 멈칫했다.

아이작이 시야를 넓게 가지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다.

레나와 아이작이 같이 보려 했던 그림을 나만 놓치고 있었던 걸까?

〈뭐해,다 안 꺼내고.〉

세련된 필체의 편지를 한 글자도 빼먹지 않고 읽어 나갔다.

T&T에서 후작에게 접촉해 모든 정보를 줬고,후작은 다이아몬드 획득에 즉시 성공했으며,후작이 비브리오를 제대로 귀찮게 한다는

〈성공적인데? 길드 내부에 있던 쥐새끼들도 처리한 모양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장을 넘겼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비브리오가 영주 재판관 역할을 맡을 수 없게 되자,황제의 남부지방 순시까지 에라스트 영주 재판을 미룬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정확한 시기를 안다.

기스-제-라이가 남부에 내려온

황제를 암살하는 시기는 지금부터 세 달 뒤.

당황스러운 심정이다.

“그렇게까지 미뤄진다니. 후작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아이작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리던 말이라도 들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봐봐,확실하잖아?〉

“.무슨 소리지?”

〈네 이야기대로야. 솔직히 후작을

보내는 게 자연스럽잖아? 수사를 중지시킬 수 있는 딱 좋은 핑계도 되고 말이야.〉

그렇다.

게다가 후작이 루비아에게 유리한 판결을 한다는 보장 따위는 없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용납할 수 없다는 건가?”

〈이제 말이 좀 통하네? 에라스트 영주는 무조건 그쪽 줄의 노예로 세우겠다는 거야. 네 말대로 괜히 유령들이 설치고 있었겠어?〉

〈안 그래도 가려고 했는데,역시 살살이 뜯어봐야겠어. 상인 연합 회원 가입은 잠시 미뤄 주시고.〉

거기 무슨 꿀을 숨겨 놨는지 무척 궁금해진단 말이야,라며 아이작이 날개를 파드득거렸다.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황실 비역에 적혀 있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니 황당한데요.]

[진짜 뭐가 나오긴 나왔네요.]

[사르디아 주간에는 특히 더 잘 살 펴보라더니 . 어제부터잖아요.]

에라스트.

작은 남부의 도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 근위대장급의 실력을 가진 유령들이 ‘상황’에 대비하는 곳.

아이작과 함께라면 비밀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아내지 못하면, 루비아가 계속 고통 속에 죽어 가는 과거에 고정되겠지.

“잠시만.”

시야를 넓혀라.

아이작의 말을 되새기면서 영주를 찾아갔다.

“챈들러 남작은 언제 돌아오지?”

10년은 젊어진 그라스미어 영주가 흠칫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제 아들 녀석까지 아시는군요. 그게. 주술사의 저주도 풀렸으니 일찍 돌아오게 할 생각입니다.” 저주는 이제 계승되지 않는다.

“그럼 작위를 물려줄 생각인가?” 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하루빨리 이 자리에 적응시켜야죠. 이제 저야 놀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기대와 뿌듯함이 표정과 말투에 섞여 있다.

자식이 애벌레에게 먹힌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겠지.

벌레에게 먹히기 전에,그 손을 내가 잡을 수 있을 거다.

물론 내 쓸모를 위해서다.

에라스트까지는 직선이었다 .

어떤 지름길도 쭉 뻗은 지하보다 빠를 수 없었다.

아이작과 함께 가며 회상했다.

예전에 이 녀석이 루비아를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는 게 떠오른다.

사실 이모저모로 루비아의 마음을 나보다 잘 알았던 것 같다.

의외로 그녀가 즐거워했던 수도의 티 파티도,아이작이 아니었다면 참 석하게 해 줄 생각도 못했겠지.

〈무슨 생각 하냐?〉

- 깡! 깡! 깡! 깡!

〈크하하! 하하! 하하하하!〉

아이작이 머리 위에 앉아 거세게 부리로 투구를 두드렸다.

한동안 발작하듯 웃던 아이작이 이제 힘이 빠졌다는 듯 내뱉었다. 대답은 허탈했다.

엉뚱한 질문이라는 건 뱉은 순간 알고 있었다.

어쩐지 그의 입가가 히죽 올라가 있는 것 같았다.

아이작이 말을 돌렸다.

〈도시의 내성과 연결되어 있는 건 신기하지 않냐? 하나같이 중심부와 닿아 있다니.〉

통로는 천 년 전의 것.

하지만 여섯 도시의 성들이 모두 그렇게 오래되었을 리가 없다.

〈성들이 하필 그런 자리에 있던 이유는 뭘까?〉

나에게 정말 묻고 싶어서라기보다 제 생각을 정리하는 용도 같다.

“글쎄. 고대인들의 성이 무너진 자리에 다시 성을 지었나?”

사도가 두려워 성에서 굴을 파고, 성은 이후에 부서졌다. 사도들이 사라지고 난 뒤,그 잔해에 이후의 인간들이 성을 올렸다...

녀석은 의외로 순순히 긍정했다.

〈그럴지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부리로 앞을 가리켰다.

〈에라스트야. 하루도 안 걸리고 다

거미줄처럼 쳐진 사다리를 타고 한 걸음 한 걸음 위로 올라갔다. 단숨에 솟구쳐 오를 수도 있지만 에라스트로 향하는 천장이 어쩐지 밤하늘 같아 머뭇거리게 되었다. ”결계 같은 건 없지?”

〈저번에 올 때 다 풀어 놨다고. 그냥 힘으로 쭉 들어 올려.〉

- 쿠구구궁 •

그대로 손을 대고 뚜껑을 열었다.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자 사방은 책으로 가득했다.

“에라스트. 도서관?”

- 쿠구구. 쿵!

빠져 나온 출구는 마치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오므라들어 닫혀 버렸다.

손잡이도, 레버도 찾을 수 없는 낮고 평평한 바닥이었다.

사소한 의문이 든다.

왜 도서관이 나오는 걸까?

물론 도서관도 내성의 일부.

영주의 집무실이 나오건,군대의 연병장이 나오건,무기고가 나오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성의 설계는 모두 다르고.

그중 어디로 연결되든지 내성에 들어갔다는 것만으로 비밀 통로의 의미는 충분하니까.

그렇지만.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

〈응. 도서관이지. 뭐 이상한가?〉

“•••이상해야 되나?”

〈네가 이상하다면 이상한 거겠지. 열 번도 넘게 죽고 산 네 판단력을 믿어 보라고.〉

하지만 그걸 왜 나에게 묻느냐는

퉁명스러운 태도는 아니다.

오히려,정말 이상한 건지 아닌지 판정해 달라는 어조.

주위를 둘러보았다.

루비아가 대부분의 시간을 파묻혀 지냈다고 한 에라스트 도서관.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도 안으로 들어오는 건 처음이다.

서가와 서가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해도 될 만큼 넓다.

하루 전체를 측정할 만큼 커다란 모래시계가 돌아가고 있다.

적어도 하루 전에 누군가 왔다. 느껴지는 가벼운 온기.

천장부터 1층까지, 떠도는 공기에 먼지는 드물다.

잘 관리된 도서관.

얼핏 봐도 장서는 수천 권을 쉽게 헤아린다.

그 외에 특별한 점이라면...

기억을 떠올렸다.

루비아는 이 도서관에서 사령술에 관한 원고를 발견했다고 했다.

〈세이론 1세부터 현 황제까지의 머리칼 색에 관하여〉라는,두꺼운 책에서.

변화가 조금씩 누적되고 있지만, 거기까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

그뿐이 아니다.

이 도서관은 더 중요한 책이 있던 장소다.

책 제목을 떠올렸다.

“.시간의 틈바구니에 갇힌 천재 대마법사.”

〈응?〉

“그 책을 알고 있나?”

까마귀가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이 만든 시간 함정에 갇힌 마법사의 이야기다.”

루비아에게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를 떠올리며,아이작에게 책의 내용을 설명했다.

드래곤 따위는 결코 없으니 그냥 환상 소설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지금은 린트부름을 안다.

기스-제-라이가 암호로 말해 줬던 문장에 나온,고대의 가장 강대한 용종龍種.

그래서인지,내용의 무게가 한층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

〈수필 형식이라고?〉

“응. 처음부터 끝까지,겪은 일을 그대로 쓴 형식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은 400년 전에도 없었어.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그렇다면..

결론은 단순하다.

〈캐빈 애슈턴이 천 년 전에 책을 썼을지 모르지. 흥미로운 일이야.〉

〈생긴 지 백 년도 안 된 관습을 애슈턴이 비판하는 책도 봤거든.〉

백 년 전으로 갈 것도 없다.

사실 일 년 뒤에도.

캐빈 애슈턴은 수도에서 황색지를 발행한다.

후작의 숨겨진 사생아를 운운하는 잡지에 버젓이 그 이름이 적힌 걸 확인했다.

이름만 같은 건 아니다.

둘 모두 읽었을 때 지혜 수치가 올라갔다.

모두 ‘진짜’ 캐빈 애슈턴이다.

두 서적의 존재가 양 끝에서 나를 잡고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천 년의 시간이 주름 한 줄 없이 주욱 늘어났다.

〈내가 상상하는 수준의 마법사면 천 년 정도야 버틸 수 있을 거야. 그것보다 녀석이 어떤 존재인지가 궁금하군.〉

“천 년 정도를. 버틴다고?”

아이작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해도 그 정도 버틸 방법은 있어. 여분의 의체를 잔뜩 만들어 놓으면 되거든. 심장이 정지하거나 뇌가 맛이 가 버릴 경우,자동으로 다른 몸에서 부활하는 술식을 미리 의체마다 짜 넣으면 돼.〉

캐빈 애슈턴이 쓴 다른 책이 문득 떠오른다.

〈.나는 생각했다. 굳이 목 잘린 인형을 찾아서 제 목을 끼워 넣을 필요는 없다.〉

〈완벽한 인형에 제 영혼만 뽑아서 집어넣으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순수한 육체를 가지리라.>

사람을 흉내 내는 인형.

어쩌면 같은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런 게. 가능한가?”

〈영자 구조를 제대로 파악해 내야 해서 나한테만 가능한 이야기야. 힘이 봉인된 탓에 지금은 그것도

무리지만 말이야.〉

열 체 정도는 이미 소진했었어, 라고 아이작이 말을 맺었다.

〈왜,나에게 감탄했느냐? 연구의 깊이에 새삼 존경심이 솟나?〉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궁금한 게 먼저 떠올랐다.

“몸을 열 번이나 갈아 치웠다고? 당시의 격전 때문인가?”

〈아니,그런 건 전혀 없어. 본체는 항상 멀쩡히 유지했다고.〉

“그럼 대체 왜..

아이작이 고개를 저었다.

〈멍청아,몸이 잔뜩 망가지면서 얻는 쾌락이 있잖아?〉

이런 녀석에게 뭘 기대한 건지. 말을 꺼낸 내 잘못이다.

더 자세히 듣고 싶지 않아 화제를

빠르게 돌렸다.

“나는 루비아를 보고 오겠다.”

책이 아무리 많아도 시골 영주의 개인 서가.

계속 반복되는 시간을 다룬 캐빈 애슈턴의 책.

그리고...

루비아가 내 무덤가로 오게 만든 사령술 원고.

그 둘이 여기 있다는 게.

몸이 아픈 탓에 책만 끼고 살던 영주의 딸이 있다는 게.

모두 우연인 걸까?

“아무 말도. 그냥 확인이다.”

〈기껏 왔는데 말도 한마디 섞지 않고 가겠다고? 안부 인사 정도는 해 주란 말이야.〉

“하지만,유령들이 성 안 어디서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데..

〈쓸데없는 걱정. 여기서 기다려.〉

까마귀가 주위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모래시계 돌아가는 거 보라고. 먼지가 쌓인 코너도 없어. 하루에 적어도 한 번은 여기 온다는 거지. 그 아이,책을 좋아한다고 했나?〉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작이 피식 웃었다.

〈독서가는 신경 다발이 도서관과 이어져 있거든. 도서관을 그렇게 오래 방치할 수 없다고. 유령들은

까마귀가 활짝 날개를 펼쳐 이곳저곳을 맴돌았다.

십여 분 뒤 날개를 접은 까마귀의 비행은 하나의 긴 선율 같았다.

“뭘 한 거지?”

〈뱀의 힘이 묻은 녀석들은, 무의식에서부터 여기가 싫어지게 하는 결계를 펼쳤다.〉

“그런 것도 있나?”

〈임시방편이지. 시선을 각성하면 슬쩍 보는 것만으로 그놈들을 돌로 만들고,건조시켜 가루로 만들 수 있겠지만 지금은 어려워.〉

아이작의 봉인이 풀려야 한다는 이야기겠지.

정말 여기서 기다리면 루비아가 올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탁.

기적처럼.

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운이 좋은데? 금방이네? 시간을 기가 막히게 맞춰서 왔어. 그런데 한 명이 아니네?〉

- 저벅.

문을 열고 들어온 상대의 모습은 왜 이제 여기 왔을까 싶을 정도로 반가웠다. 그녀를 제외한 세상의 다른 부분이 어둑해질 정도였다.

먼저 들어온 루비아 뒤에 익숙한 얼굴이 하나 더 버티고 서 있었다. 루비아보다 머리 두 개는 더 높은

곳이었다.

“크리스티나-

〈아,네가 말한 그 녀석이군.〉

재능을 각성시키고 은괴까지 모두 맡겼던 기사였다. 루비아의 호위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무척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크리스티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도서관 이곳저곳을 지나며 훑었다.

〈흐흐. 직업의식이 투철한데?〉

물론 나와 아이작의 은신을 알아차리라면 너무 가혹한 요구겠지. “오늘 호위는 이것으로 끝!”

“아가씨,안 됩니다.”

“에이,언니도 좀 쉬세요. 낮잠도 자고,제가 언니 몫으로 남겨 놓은 딸기도 좀 드시고요.”

크리스티나가 괜히 엄격한 표정을 지으려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곤란합니다.”

“곤. 란. 합. 니. 다.”

루비아가 크리스티나를 흉내 내며 키득거렸다.

살짝 붉어졌다.

“바깥에 서 있겠습니다. 천천히 보고 오십시오.”

기사가 근엄한 표정으로 문 밖에 입구를 막고 섰다.

루비아는 문을 닫고 도서관 안에 들어왔다.

목소리만 들어도,웃는 모습 하나하나가 반가웠다. 크리스티나와 잘 지내는 것도 무척 기뻤다.

제대로 도움을 준 것 같은 뿌듯한 기분이었다.

- 달칵.

루비아는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한 시간 반만 있어야지.”

책에 너무 빠질까 봐 시계를 옆에 두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웠다.

〈.흥. 그렇게 좋으면 빨리 나가 말이라도 걸든지.〉

하지만.

바로 이 성에서 고통스러워하던 루비아의 모습을 떠올리자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직이다.”

〈아직은 무슨. 멍청한 놈.〉

아이작이 서가 반대편을 부리로 쿡쿡 밀었다.

“뭐 하는 짓..r

와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책 서너 권이 바닥에 쏟아졌다.

다행히 루비아와 쏟아지는 책들은 거리가 있었지만,그녀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책만 보고 있던 루비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야,너 부르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

책이 떨어졌을 뿐이다.

바람이 불었다거나.

침입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서가 너머의 그녀는 책이 쏟아진 쪽을 빤히 바라봤다.

“호. 혹시?”

읽던 책을 내려놓고 내 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은신은 그대로였지만.

마치 내가 보이는 듯한 태도.

쏟아진 책 앞에 똑바로 선 그녀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허공에 말을 건넸다.

“맞죠? 크리스티나를 제게 보내 주시고. 은괴도 잔뜩 전해 주신. 선대의 인연이라는 분이죠?”

흑 들어오는 말에 정신이 없었다.

〈맞잖아. 육감이 대단한데? 아니, 기억이라고 해야 되나? 어서 빨리 나가 주라고. 저런 가슴 큰 여자를

아이작의 망언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기 계신. 거죠?”

루비아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몸을 움직여 피했지만.

자칫했다간 따듯한 손끝에 닿을 뻔했다.

루비아는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했다.

“분명히,어딘가에 계신다는 걸 알아요. 유블람에서 벌어진 일도

모두 해골님이 하신 거죠? 언제나 저를 구해 주시고. 또..

계속해서 혼잣말을 하게 둘 수는 없다.

근처에서 기척만 느껴져도 저런 식으로 반응하면 유령들의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놈들의 관심사는 루비아가 아니라 에라스트 지역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건 여기서 끊어야 했다.

“루비아.”

나는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

저런 말을 뱉어 내고 있었어도,

결국 놀라긴 한 거겠지.

서늘하게 얼어붙어 있던 루비아의 표정이 녹아내렸다. 봄에 새싹이 올라오는 것처럼 그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피었다.

“맞잖아요! 해골님이죠! 이거 꿈 아니죠!”

루비아가 막무가내로 다가왔다.

아무 망설임도 없이 발뒤꿈치를 들고 손을 뻗어 투구를 벗겼다.

투구 속의 두개골이 속수무책으로 드러났다.

당황해서 정리하려던 책을 바닥에 다시 떨어트렸다.

“기억하고 있어요. 같이 눈길을 걸었던 것도. 사막을 탐험한 것도. 티 파티에 참석할 드레스를 몰래 준비해 주셨던 것도.”

전부 기억하는 건가.

방금 쏟아 낸 말만 들으면 즐겁고 따스한 모험을 같이했던 것 같다.

그러나 끝에는 항상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이별이 찾아왔다.

루비아는. 그것까지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거다.

〈흐응. 부러운걸. 기억이 저렇게

계승되는 거라니. 저거야말로 너를 통한 ‘영생’이잖아? 의체 연성이나 영자 부활은 이런 영생에 비하면 애들 장난도 안 되겠군. 쯧...〉

말꼬리 끝에 작게 한숨을 섞으며 아이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마귀다! 저 까마귀도 모두 기억나요!”

〈부럽구나. 이쪽은 저년을 처음 본다고 전해라. 난. 에라스트에 뭐가 있나 구경이나 하고 오겠다.〉

아이작은 어딘가 심사가 뒤틀린 채로 도서관 창문을 부리로 열고 창밖으로 날았다.

“나는..

루비아의 반짝이는 눈빛을 계속 받고 있기 어려웠다.

레나와 아이작에게 했던 것처럼, 벌어진 일을 가감 없이 설명했다.

루비아는 가끔 고개를 갸웃하고, 눈을 빛내며 깜빡거리다 크게 뜨며 놀라고,가끔은 기쁜 듯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종 아슬아슬하게 눈물이 맺힐 때마다,루비아는 뒤로 돌았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충격을 덜 주기 위해 조금씩 풀어 말한 탓일까.

꽤 긴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된 거다.”

루비아는 멍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너를 구한 적은. 없다.”

힘겹게 마지막 한마디를 뱉었다.

루비아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천히 나를 인식했다.

마치 시야에 나를 새겨 넣으려고 하는 것처럼.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위로 올려다보는 루비아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야..

그녀가 내 말을 잘랐다.

“전 무덤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될 운명이었어요. 어떻게 죽었더라도, 몇 번이나 절 구해 주신 사실만은 변하지 않아요. 게다가 이런 작은 도시에서 책이나 읽으면서 평생을 보내다 죽었을 제가,말 그대로. 죽어도 못할 경험을 했는걸요.”

뭔가 더듬거리며 말하려는 나를 루비아가 똑바로 보며 말했다.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어떻게든 절 구하려고 하셨잖아요. 정말 감사해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루비아가 잔뜩 목이 멘 듯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물기 어린 음성이었지만 지치거나 쓸쓸하지 않았다.

거기서 묘한 죄책감이 느껴진다. 결국 실패했다.

구해 주려고 한 것도 아니다. 시나리오라는 틀에 엮인 루비아.

그녀의 과거를 변경시켜,세계를 유리하게 조작하고 싶었을 뿐.

하지만 그녀는...

“저를 어떻게든 구해 주려고 하는 분이 있었다. 그 기억들 덕분에 저는 이겨 냈어요. 아버지의 죽음도, 권력 다툼도... 노력했어요. 병도 더 빨리 나았어요.”

말문이 막혔다.

시나리오는 클리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지 에라스트의 상황은 바뀌었다.

어쩌면 그건 루비아의 기억.

꿈의 형태로 남아 있는 그 희미한 기억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온전한 루비아의 업적.

내가 뭘 해서가 아니다.

감사 받는 일은 공정하지 않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돕는다. 성공한다.

이런 바보 같은 반복은,적어도 루비아의 과거는 확정해 놓은 뒤 끝내겠다.

비브리오,레안드로^ 빛의 유물,상인 연합,남부의 도시들,황실과 연합*♦•..

T&T와 아이작의 힘까지 빌린다.

달라지게 하겠다.

나는 머리를 흔들고,본격적으로 루비아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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