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Unearth (8)
“.황제가 와서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고요?”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이 내려올 거라고 루비아의 측근들이 예측한 회의가 떠오른다.
황제는 훨씬 더 어려운 상대다. 허수아비거나,가짜라도 마찬가지. 녀석에 대해 아는 게 없다.
확실한 것은 하나.
내려오는 시점에 기스一제_라이가
황제를 암살하려고 시도하겠지.
이 사실을 사방으로 퍼트린다면 어떨까?
기스一제一라이를 직접 만나지 않고 그녀의 암살을 저지할 수 있으며, 황제 본인도 에라스트에 오지 않 을 가능성이 높다.
T&T를 사용한다면 소문내는 것 정도는 몹시 간단.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다.
결국 루비아가 영주로 인정받아야 한다.
고민에 빠져 있는 내게, 루비아가 문득 말을 걸었다.
- 달그락.
루비아의 말에 흠칫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레이 커크, 죽일까요?”
나직한 목소리가 울린다.
“뭐라고?”
당황스럽다.
발이 꼬여 넘어질 뻔했다.
레이 커크를 지금까지 나 스스로 몇 번이나 죽여 왔지만,루비아의
입에서 태연하게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적을 암살하는 게 이상한가요? 삼촌은 포악하고 무능해요. 그가 영주가 되면,영지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더 고통스러워지겠죠.”
가라앉은 눈빛이 차갑다.
“제가 아니더라도, 그런 녀석은 절대 영주가 되게 할 수 없어요.”
원래 루비아가 이런 성격이었나? 물론 맞는 말이다.
놈이 영주가 되면 많은 시민들을 노예화시키 겠지.
영주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최한 토너먼트에 참가했을 때, 도시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생생히 기억난다.
당연히 루비아도 살육을 즐기는 쪽은 아닐 테니,한 명의 악당은 절대 다수의 행복을 위해 살해해도 된다고 판단하는 거겠지.
생각해 보면,루비아가 누군가를 살해하면 안 된다고 말했던 적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멋대로 그녀의 가치관을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꿈의 형태로 남은 기억이 그녀의 성격을 조금. 변하게 만들었거나.
어쨌건 꺼릴 이유가 없다.
T&T나 아이작의 도움을 얻으면,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레이 커크를 살해할 수 있겠지.
“.그렇게 시간을 버는 거죠.”
토너먼트처럼 모두가 보는 곳에 서 그럴듯하게 죽으면,루비아의 결백 증명은 확실할 터.
“물론,말씀하신 것처럼 유령과 황실은 저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겠죠. 어딘가 한 발자국만 잘못 디디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애벌레로 대체할 수도 있죠.”
내 설명을 들은 뒤.
자신이 직접 겪은 일처럼 생생히 말하는 그녀가 놀랍게 느껴진다.
‘꿈’ 없이 이야기로만 미래를 접한 아이작보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선명하게 느끼는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살아온 이 도시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려면 말씀대로 유령을 몰아내고,세력을 구축해야겠죠.”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가 얼마나 마음을 굳게 먹었는지 느껴진다.
“에 라스트는..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별거 없어 보이지만,전략적으로 꽤나 중요한 곳이었다.
“여길 보세요.”
하얗고 가녀려만 보이던 그녀의 손이 거침없이 지도를 가리킨다.
동쪽,서쪽,남쪽,북쪽으로 모두 가도가 뚫려 있는 도시.
그리고.
제국에서 토지 면적당 밀 생산이 가장 많은 도시라고 했다.
“작긴 하지만,그 정도로 비옥한 땅이라는 거예요. 선대 영주님이 무척 신경 쓴 덕분이죠.”
부친을 말하며 루비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정도로 유령들이 이렇게 감시하고 있을 리는 없다.
다른 뭔가 때문이겠지.
어쨌건,대단하지 않은 도시라도 대단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거칠게 말한다면,루_륨을 잔뜩 구해 루비아에게 몰아줘도 어쨌건 효과야 있을 거고.
비인간들을 이 광활한 지하 통로에 끌어들이거나.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의 군사 통로로 사용해도 되겠지.
대화를 계속 나눴다.
루비아가 세부 사항을 더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을 때.
-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호위 기사다.
“아..
우리는 탁자에 놓인 모래시계를 흘끗 바라봤다.
시간을 확인하는 건 처음이다.
네 시간 분량의 모래가 아래쪽에 흘러 내려가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루비아가 곤란한 듯 웃었다.
그녀가 올 때는 분명 낮이었는데, 작게 난 창문 밖을 보니 벌써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가씨?”
크리스티나는 문을 열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왔다.
투구를 쓴 채 그녀를 바라봤다.
네 시간 동안 지키고 있었을 텐데 한 점도 흐트러짐 없는 태도.
처음 만났을 때 비해 분명 한층 세련된 움직임이 느껴진다.
내 도움만은 아니다.
다듬어졌다.
‘지킬 게 있어서인가.’
“당신은..!”
크리스티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기억하고 있나?”
“당연히. 저의 은인이시니까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인 크리스티나가 문득 곤란한 눈으로 나를 보고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칼을 차신 채 영주님과 그렇게 가까이 계시면 곤란합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성실하려는 태도는 싫지 않다.
“흠. 그러지.”
옆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
크리스티나가 나와 루비아 사이에 서게 만들었다.
실제 무력이 어떻건,저런 듬직한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루비아에게 보낸 것이다.
재능이 뛰어나기도 하고.
만약 이 커다란 기사에게 루-륨을 몰아준다면,내가 루비아를 지키는 것보다 더 안전하지 않을까 싶은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그때였다.
- 파드득!
<뭐야? 뭐 좋은 일이라도 생겼냐? 뭘 흠흠거리고 있어? 이딴 분위기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거라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허공에서 나타난 까마귀를 보고 호위 기사가 흠칫하며 경계 자세를 취했다.
<경계를 하려면 처음부터 제대로 하던가. 이런 애들이랑 실실거리고 노니까 너까지 긴장이 풀어지지!〉
- 깡! 깡!
아이작이 투구를 쪼아 댔다.
말이 전해지지 않는 게 다행이다. “애완. 동물이었죠?”
루비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비슷하다.”
< 흥.〉
정찰이 벌써 끝난 건가.
의외였다.
작은 도시이긴 하지만,아이작은 내 생각보다 훨씬 일찍 돌아왔다.
“수상한 점은?”
<없어. 전부 다 수상해.〉
어이없는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대충 말해도 잘 알아들어야지.〉
투덜거리던 녀석이 말을 이었다.
<유령들이 잔뜩 몰린 곳이라면서 어떤 마력의 흔적도 없어. 자세히 들여다볼 만한 기운이 아예 없다고. 그게 진짜 수상한 거야.〉
그는 인정하기 싫다는 듯 불쾌한 심기를 내비치며 말을 이었다.
<정말 없거나,아니면. 지금의 내가 발견하지 못할 만큼 철저히 숨겨져 있다거나.〉
에라스트에서 지금껏 벌어진 일로 봤을 때 후자에 더 무게가 간다.
- 끼긱!
아이작이 투구를 긁었다.
<긴장 풀려서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 재한테 물어 봐. 숨겨진 역사 같은 게 있나 말이야. 뭘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말을 받아 대신 질문했지만, 루비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야 물론 이 도시에 큰 애정이 있지만, 사실 특별한 역사 같은 건
못 들어 봤어요.”
“흠..
에라스트의 특별한 것.
잠시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혹시 그 책 지금 볼 수 있을까? 시간의 툼바구니에 갇힌..
대화에 빠져 중요한 책의 존재를 깜빡했던 것이다.
“천재 대마법사요? 잠시만요!”
머릿속에 서재 전체의 구조가 담겨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비슷비슷한 디자인의 책이 빼곡히 꽂혀 있는 서재에서 그녀는 가볍게 한 권의 책을 뽑아냈다.
시간의 틈바구니에 갇힌 - 캐빈 애슈턴.
표지에는 적색 비늘이 덮인 용과 깨진 모래시계가 수놓여 있다.
두 번째로 보는 표지.
하지만 도서관에서는 처음이다.
— 스르르.
표지의 모래시계를 무심코 손으로 쓰다듬으며 탁상으로 눈을 돌렸다.
“.저건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우연일까?
깨지지 않은 시계.
높이 30센티쯤 되는 커다란 모래 시계가 날카로운 파편처럼 시야에 들어왔다.
책 표지와 탁자 위.
둘을 한 시야에 넣었다.
- 투둑.
탁자 위의 시계를 더듬었다. 모양도 묘하게 닮았다.
도서관 탁자 위에 놓인 시계에는 염색된 푸른 모래가 들었다.
루비아가 안으로 들어온 지 무려 네 시간이나 지났지만 위쪽 모래가 남김없이 아래로 떨어지려면 아직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하지만 책 표지의 시계는 깨져서 원래 어떤 색의 모래가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모르겠어요. 조상님 중에 책을 좋아하는 분이 있었다고 하는 데..
<흐흐. 저 두 시계를 같은 거라고
“그럴지도. 혹시 이 모래시계에서 뭔가 느껴지나?”
<전혀. 궁금하면 깨뜨려 보던가. 하는 김에 붉은 용도 다시 일으켜 보지 그래?〉
용이라...
붉은 비늘에 덮인 모습이 어딘지 낯설지 않았다.
가만히 표지를 보다가,책을 펼쳐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계속 올라가면,갇혀 있는 단일 영역을 벗어나. 미명의 세계로..
창천의 구멍을 운운하는 아이작의 말을 듣고 난 뒤라서일까.
예전과는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달랐다.
_ 탁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우스꽝스러운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지혜가 5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이 상태창이. 창천의 구멍.
[특전 : 통찰(D플러스)를 획득합니다!]
- 특출하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의 그럭저럭 평범한 통찰력. 어쩌다 진실의 근처에 닿기도 한다.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66.31% -> 66.17%...]
미세한 변화.
하지만 이제 에라스트 도서관부터 들러야겠다는 결심을 하긴 충분한 수치다.
“괜찮. 으세요?”
“다른 책도 볼 수 있을까?”
직접 찾는 것보다, 부탁하는 게 훨씬 빠르겠지.
루비아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책보다 훨씬 큰 변화를 주는 애슈턴의 책.
아이작의 힘으로도 찾을 수 없는 수상한 흔적.
에라스트는 비밀로 팽팽히 채워진 장소 같았다.
햇빛이 아무리 훤히 비추더라도 드러나지 않는 비밀의 숲.
조금이라도 엿보기 위해서는... 도서관에 좀 더 머물러야 한다.
루비아가 처음 가지고 내 무덤에 올라왔던 사령술 원고.
그게 끼워져 있던 책을 펼쳤다.
..세이론 1세부터 현 황제까지 의 머리칼 색에 관하여.
- 이사야 레이그란트.
처음 보는 이름이다.
<자잘한 사실들을 충실히 기록해 놓은 역사가지. 이 책은 나도 처음 보는 건데. 머리칼 색이라..•>
아이 작이 근처에 앉아 첨언했다• 캐빈 애슈턴이 아니라면 어차피 누구든 의미는 없지만.
책에 어떤 비밀이 있을지 몰라, 한 줄도 빠지지 않고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세이론 1세. 은발.”
“세이론 2세. 은발.”
“.세이론 3세. 은발. 이렇게까지 이름을 같게 할 필요가 있나? 3대 황제까지는 성도 이름도 똑같..
<쉿! 잠시만.〉
아이작이 마구 페이지를 넘기는 내 손을 부리로 막았다.
“뭐지?”
<앞으로 돌아가 봐! 처음부터!〉
녀석의 말대로 지루한 서문부터 첫 장을 천천히 넘겼다.
본문으로 가서 세이론 1세 부분을 펼쳤을 때였다.
<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