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Unearth (9)
〈여기다. 한 번 뜯었다 끼워 넣은 흔적이 있어.〉
아이작의 말을 듣고 주의 깊게 종이를 들여다봤다.
하지만 관찰은 대상보다는 주체의 문제다.
까마귀 인형이 붉은 눈으로 대체 뭘 본 건지 알 수 없었다.
녀석은 그런 반응에 익숙하다는 둣 설명을 이어 갔다.
〈일부러 적셔지고,일부러 건조된 종이다. 시간에 삭은 거랑 주름이 달라. 다시 보니 더 확실하군.〉
나를 흘끗 본 루비아가 옆에 선 크리스티나에게 말했다.
“문밖에서 혹시 누가 오나 지켜봐 주실래요?”
“지금. 말입니까?”
“그래요.”
“하지만..
“저분이 바로 크리스티나가 여기 오게 해 줬던 분이었죠? 누구보다
호위기사의 얼굴빛에 짧게 갈등이 스쳐갔지만,곧 납득한 둣 고개를 끄덕이고 문밖으로 향했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루비아를 바라보자 그녀가 씩 웃으며 속으로 말을 걸었다.
= 이렇. 게. 하는 거 맞죠?
“어떻게 아는 거지?”
= 기억. 났으니까요.
아이작과 루비아.
둘의 정신을 연결했다.
나를 소통의 매개체로 사용하는 법은 이미 알고 있다.
= 까마귀님도 반가워요 오랜만, 이라고. 해야 하나요?
<...〉
아이작은 고개를 돌리고 루비아를 외면했다.
나름대로 벽을 친다거나,도도한
분위기를 내려는 듯했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기만 했다.
어쩌면 그녀를 죽였던 죄책감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아이작의 품성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무리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루비아는 까마귀의 외면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두 분,이 페이지에 대해 말씀 나누는 중이셨죠?”
“그렇지.”
“이 페이지를 다시 본 건,여기가 교체되었기 때문일 거고요.”
〈원래 이렇게 눈치가 빨랐느냐?〉
“어렵지 않은 추론이죠. 책등이 녹았다가 붙은 자국이 있고요.”
까마귀가 한순간 루비아를 꽤나 호의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너보다 낫군.〉
“반한 거냐?”
농담을 섞었지만,아이작은 한 번
보면 다 안다면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런 타입 좋아해. 잔뜩 고생시켜도 인간성 안 무너지고 오래오래 마지막까지 잘 버틸 거 같고,강해 보여서 좋잖아.〉
= 뭔가 안 좋은 의미 같은데요, 그거...
절대로 안 좋은 의미겠지.
상태창에 뜬 그녀의 사서 레벨을 흘끗 바라봤다.
예전보다 강화된 4레벨.
루비아와 아이작이 같은 의견이면 종이가 바뀐 건 확실하다.
하지만 의문이 떠오른다.
“고작 머리카락 색을 속일 필요가 있을까? 그게 뭐 별거라고..
루비아가 직접 입을 열었다.
“혈통이요. 그것도 다른 황제가 아닌 건국제만 바꿔 끼워졌다면, 황실이 내세우는 정통성은 완전히 무너지니까요.”
루비아가 설명을 이었다.
“제국은 사도로부터 인간을 구한 세이론 1세라는 존재의 카리스마에 의해 시작됐어요.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혈통이 이어지지 않았 다면..
누가 뭘 숨긴 걸까.
“세이론 1세가,은발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은 건가?”
〈그래. 황제들은 부인과 관계없이 일정하게 은발이 유지되고 있잖아. 혈통의 특별함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수상하지. 계속 읽어 봐.〉
일단 한 장,두 장. 차분히 페이지를 넘겼다.
- 탁.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
혹시나 하는 약간의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마지막 장을 넘겨 봐도 지혜 수치는 올라가지 않았다.
캐빈 애슈턴이 다른 이름으로 쓴 저작물은 아니다.
조금은 아쉬운 마음으로 루비아를 보며 물었다.
“혹시. 이 안에 끼워졌던 사령술 원고를 가지고 있나?”
나를 일으켰다는 사령술 원고. 원본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혹시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내가 모르더라도, 아이작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해야. 되는. 거죠?”
루비아는 살짝 멈칫거렸다.
〈뭐야? 뭔데 부끄러워해?〉
숨기려는 게 있는 걸까?
저런 태도를 보니 오히려 한층 더 궁금해진다.
- 투둑.
루비아는 치마 안쪽에 칼을 넣어, 한 부분을 살짝 뜯어냈다.
옷감을 덧대고 있었던 걸까.
그 안에서 잘 정리된 얇은 원고를 꺼내 내게 건넸다.
“여기에요. 그날 발견한 이후. 누가 볼까 봐 숨겨 놨었어요.”
“이걸로 사령술을 배운 거지?”
“글쎄요. 배웠다기보다는. 그냥 따라 했다고 해야겠네요.”
받아 든 원고는 사실 몇 장 되지도 않았다.
원고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주문을 외우면 자신을 도와주는 해골이 일어난다는 이야기가 자못 장황하게 쓰여 있다.
- 스록.
세 장을 넘겼다.
“이게. 주문이야?”
“맞아요.”
루비아는 조금 부끄러운 둣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을 적당히 섞어 외쳐라.]
- 망자여!
- 내가 그대를 깨웠습니다!
- 내 말 들리시나요?
- 만나서 반갑습니다!
- 여길 좀 봐주시겠어요?
- 그때 기분에 맞춰 한 마디 더.
[이걸로 끝이다. 그리하면 망자는 무덤에서 일어나,누구보다 충실한 당신의 편이 될 것이다.]
[혹시 이 적절한 주문의 효력이 의심스럽다면,원고에 대고 다음 주문을 외쳐서 나에 대한 신뢰를 쌓기 바란다.]
- 춤춰라!
[그러면 원고가 춤을 출 것이다. 부끄러우니까 딱 한 번만.]
아이작이 날카롭게 루비아의 말을 끊었다.
이견이 있을 수 없다는 단언이다. 굳이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 이런 걸로 나를 일으켰다는 말인가?
“•••뭔가 잘못된 건가요?”
〈누가 이딴 걸 여기 써 놨어?〉
아이작은 심각해 보였다.
나도 궁금해져 물었다.
“혹시. 춤을..
루비아는 볼이 빨갛게 물들었지만 똑똑히 대답했다.
“네. 원고가 춤을 췄어요. 그래서 믿었던 거예요.”
루비아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 까마귀를 보며 질문했다.
“이 주문이 실제로 효력이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까마귀가 인상을 팍 썼다.
〈사령은 전문 분야가 아니지만, 기본적인 건 비슷해. 이 세계는. ‘겉’과 ‘속’이 수억 겹의 거미줄로 촘촘하게 짜여 있다.〉
“겉과 속?”
아이작은 어느새 녀석답지 않게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겉으로 드러난 규칙과 그 규칙을 만드는 부분 말이다. ‘속’에서 뭘 건드려야 ‘겉’에서 어떠한 결과가 나오느냐. 결국 그걸 알아 가는 게 모든 신비神秘의 근원이지. 얼마나 많은 거미줄을 빠르고 정확하게 다룰 수 있느냐가 수준의 차이다.〉
공방의 마법사를 거미에 비유한 아이작의 옛말이 떠올랐다.
그는 이번에는 아예 세계 전체를 거미줄에 비유하고 있다.
어쩐지 녀석에게 휩쓸려 얌전히 말을 들었다.
- 사가각!
아무것도 없던 칼에 사방을 얼려 버릴 듯한 냉기가 서렸다.
루비아가 숨을 작게 들이쉬었다.
나직했지만 놀란 기색이 역력한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거야말로 신비가 아닌가?
하지만 아이작은 곧 다음 주문을 했다.
〈얼음을 불로 바꿔 봐.〉
“.불을 일으키란 말인가?”
〈아니,얼음을 불로 바꿔 보라고. 물 한 방울 땅에 흘리지 말고.〉
불가능하다.
그런 짓을 하는 마법사는 본 적도 없다. 어렵겠다는 듯 고개를 젓자, 아이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너 가닥만 정확하게 다룬다면 가능한 일. 네 안에 담긴 루-륨의 총량으로만 보면 열 가닥 정도는 충분히 당길 힘이 된다. 어쨌거나 너는 워낙 당길 힘이 넘치고 있어, 섬세함이 엉망이라도 지금껏 버텨 온 거지.〉
내 마법이 여기서 훌쩍 발전할 수 있다는 소리인 걸까.
하지만 일단 중요한 건 루비아다.
“그래서 원고가 어쨌다는 거지?”
〈사령이 주문을 옮으면 끝이라고? 거미줄을 감각하는 노력과 인식에 대한 교육도 없이? 주문이라는 건 기분 전환일 뿐이야. ‘겉’에서 일어 나는 치장에 불과하지.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변화를 당길 수 없어.〉
아이작이 아무렇게나 주문을 지어 옮었던 게 떠오른다.
“하지만 루비아는 처음에 분명히 나를 일으켰는데.”
몇 번의 회귀를 거치고 난 뒤에는 시차가 조금 생겼지만,처음으로 무덤에서 일어나던 때와 루비아가 온 시점은 완벽하게 겹쳐진다.
그걸 떼어 놓고 말할 수는 없다.
〈결국 나도 해내기 어려운 마력을 이 주문에 심어 놨다는 이야기야.〉
아이작도 해내기 어렵다라.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너는 그. 거미줄을 몇 가닥이나
당겼지?”
가소롭게 여길 거라고 생각하고 던진 질문이다.
현신한 아이작의 힘을 이미 목격 했으니까.
하지만 까마귀는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그 아래로 들어갔다.〉
“아래라고?”
〈거미줄끼리는 서로 엮여 있다... 그 규칙 자체가 보존된 영역으로
파고들어 가려 했지.〉
몇 가닥을 당겼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되지 않았지만,이미 그런 수준을 넘어섰다는 건 알 수 있다.
“그래서?”
〈제대로 뚫어 보려는 순간 튕겨져 모든 힘을 잃었다.〉
“.신전을 매음굴로 만든 탓에, 세 여신이 내린 저주라며?”
〈그딴 걸로 신들이 직접 나서서
힘을 봉인할 리가 없지. ‘안’에서야 뭘 하든 관찰할 뿐이다. 대사제가 일곱 살 소년을 옆에 끼고 지내도 멀쩡히 신탁을 내려 주지 않던가?〉
〈하지만 애슈턴이란 녀석은 나와 비교할 수 없이 ‘아래’에 대해 깊이 알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찾는 것이기도 한데...〉
- 파드득!
왼쪽 어깨에 날아오른 까마귀가 내 손의 원고를 가만히 바라보며 부리를 까딱였다.
〈여기서도 녀석의 냄새가 난다. 대충 쓴 글자 자체에 힘을 넣는 건 ‘아래’의 영역에 가깝다.〉
녀석을 흘끗 쳐다보곤 루비아에게 물었다.
“이 도서관에 캐빈 애슈턴의 다른 책은 없나?”
“네. 제가 가지고 있는 건 이거
하나예요. 드물어서..
그녀도 애슈턴의 책을 한 권밖에 읽지 않았다고 했지.
하지만 그 작가의 책이 내 앞에는 유독 자주 나타난다.
지금껏 접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레나를 매달아 놓았던 납골당 앞 수레에서 두 권.
〈세계의 비공식적인 무력 집단에 대하여 - 1〉
〈추악한 마법사〉
레드 플레이크와 마법사에 관한
책이었다.
슬라임이 가지고 있던 책 세 권.
〈캐빈 애슈턴의 업적 - 4권〉
〈캐빈 애슈턴의 업적 - 17권〉
〈캐빈 애슈턴과 음란한 슬라임 메이드〉
별 내용 없는 음란 서적 한 권과, 자기 자랑으로 점철된 책 두 권.
슬라임은 마지막 책을 왜 가지고 있었던 걸까,하는 생각이 가볍게 스쳤지만,얼른 털어 버렸다.
다음은.
〈시간의 틈바구니에 갇힌 천재 대마법사〉
저자 혼자서만 마음이라는 것을 갖고 있는지 고민하는 책이다.
유일하게 특전이 주어지고,크게 지혜가 올라갔다.
그리고 또 하나.
〈당신이 트롤을 죽이고 싶다면〉
산장에서 챙겨,마침 가지고 있다.
품에 넣고 잊고 있던 책을 꺼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지막 페이지의 깨진 조각들을 찾으라는 글씨.
지금은 3/7.
책을 처음 발견했을 때 창문으로 들어오던 가을 햇살마저 생생하게 기억난다.
읽은 뒤 이어진 후작과의 지독한 만남 때문이겠지.
그리고 수도에서 본 황색지와... 이 사령술 원고까지.
캐빈 애슈턴의 책.
도구가 아닐까?
손에 잡힌 사령술 원고에 다시 시선이 간다.
낡은 양피지 끄트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다가,다음 장을 넘겼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 스록! 스르록!
넘겼다. 허탈한 마음으로 원고를 덮은 순간.
- 띠링!
[지혜가 1 올랐습니다!]
“이거..
말을 전부 잇기도 전에 아이작이 끼어들었다.
〈진짜냐? 캐빈 애슈턴이라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뒷장의 텅 빈 공백들이 앞장까지 하얗게 번져 나갔다. 마치 잉크가 종이를 타고 번지듯,텅 빈 사막에 적막이 번지듯 공백은 역설적으로 틈 하나 주지 않고 앞 장의 우스운 주문들을 갉아먹었다.
- 바사삭.
마르고 텅 빈 종이들은 어떤 것도 쓰인 흔적이 없었다.
하얗게 어두워진 종이들을 나는 멍하니 바라봤다.
긴 적막이 지난 후에야 아이작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적을. 달성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