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Unearth (12)
“두 번째 이야기라고? 너는.. 당황스러웠다.
당시에는 뭐라도 해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원하는 건 뭐든 해 준다고 했다.
할 수 있는 것도,없는 것도.
고블린 마법사 머드캐시의 일화는 그렇게 해서 들은 이야기다.
종족의 절체절명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말했다.
그래 놓고 사실 두 번째 이야기를 숨기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의 붐텅도 충분히 절실하고, 진정성 있어 보였으니까.
속았던 걸까.
“그럼 처음부터..!”
화를 내며 따지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이 녀석,지금 뭔가에 씌어 있는 상태다.〉
차갑게 가라앉은 어조로 아이작이 나를 제지했다.
‘씌어 있다고?’
〈아니면. 조건인가. 일단 대화를 흐트러트리지 마. 괜히 자극했다가 정보가 손실될지도 몰라. 그대로 두 번째 이야기를 들어라.〉
그러고 보니 직스키세스 붐텅의 모습이 조금 낯설어 보였다.
저런 눈빛을 한 적이 있던가?
일단 아이작의 말에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마법사 머드캐시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라는 건 뭐지?”
붐텅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사실 동부 산맥이 아니라 서부 사막으로 가셔야 합니다.”
햇갈리려고 노력해도 그럴 수가 없는 완전한 반대 방향. 황당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다.
일단 들어 보라는 아이작의 말을 떠올리며 참았다.
“그래서?”
붐텅이 대답했다.
“사실 그곳에 가서 취익,취이익, 취이이이익! 이라고 해야 합니다.”
“.좋아. 그건 무슨 뜻이지?”
내가 구해 준 흡고블린은 커다란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아무 뜻도 없습니다만.”
- 꽈•드득.
칼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블린 부락을 구한 데 대한 깊은 회의가 느껴졌다.
- 파드득!
아이작이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알았다고 해라.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마.〉
녀석을 믿고 고개를 끄덕였다. 빙그레 웃는 홉고블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 이상 할 이야기는 없나?”
“예. 그게 끝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지만 할 이야기가 없다는데 어쩔 방법은 없었다.
서부 사막으로 갔다가 이번에도 아무것도 없으면?
다시 똑같은 걸 반복해야 되나?
그 순간이었다.
〈삶이 길어질수록. 너의 망각은 깊어진다.〉
아이작이 주문을 외우며 부리를 놀렸다. 제멋대로 운율이 부여된
긴 주문이 이어졌다.
“으음. 머리가 좀 어지럽군요.. 멍하니 까마귀를 바라보던 붐텅이 머리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뭘 한 거지?”
〈방금 전의. 기억을. 지웠다. 섬세하고. 힘든. 작업이었다.〉
기억을 꼭 집어서 삭제하다니.
그런 게 가능한 건가?
아무리 녀석이라지만 경악할 만한 능력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힘도 전혀 회복하지 못한 상태인데.
놀라서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자 아이작이 힘없이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무척 힘든 일을. 했다. 당장 숲 쪽으로 갔다가. 저놈 경련이 멈추면. 바로...〉
- 풀썩.
까마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곧장 쓰러졌다.
“아이작..!”
두 번째 겪는 일.
마력을 주입해야 하나 싶었지만, 당장 몸을 숨기라고 했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처진 녀석을 안아 든 채 잠시 숲 쪽에 몸을 숨겼다.
아이작이 나에게 뭘 주문한 건지 짚이는 바가 있었다.
기억 삭제...
머리를 감싸 안고 부들부들 몸을 떨던 붐텅의 경련이 서서히 멈춰 가고 있었다.
아이작은 저 홉고블린의 기억을 삭제해 이번을 ‘세 번째 만남’으로 만들어 주려고 한 것이다.
기절한 까마귀를 품에 안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직스키세스 붐텅은 어딘가 멍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이런 거라도 도움이 된다면 들어 주십시오!”
완전히 똑같은 반응이다.
방금 전,나에게 서부 사막으로 가라고 했던 기억만 삭제된 바로 그 상태였다.
조금 전과 바뀐 건 어딘가 멍해 보이는 눈빛밖에 없다.
기억 편집의 부작용인가.
아이작 녀석,그런 것까지 할 수 있다니...
품 안의 까마귀 인형을 의식하며 붐텅에게 담담히 말했다.
“고블린 마법사 머드캐시에 관한 이야기인가? 서부 사막에 가서. 취익,취이익,취이이이익! 이라고 했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더군.”
원래대로라면 한 번의 회귀를 더 거친 뒤에야 겪을 상황을 아이작이 억지로 만들어 준 것이다.
쓰러지면서까지 만들어 준 상황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붐텅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소리에 아무런 뜻도 없긴 하지만. 나야 머드캐시를 만날 줄 알았거든.”
또 황당한 소리를 할까?
이번에는 직스키세스 붐텅이 크게 놀라지 않았다. 어린 홉고블린은 완전히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마치 무언가에 조종되는 것 같은 모습으로,그가 천천히 눈동자를 올렸다. 오싹한 한기가 꼼꼼하게 등뼈를 훑고 올라왔다.
“그럼 세 번째 이야기를 들으셔야 겠군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주먹을 살짝 풀었지만 긴장감이 차올랐다.
세 번의 만남 뒤에야 나오게 되는 이야기.
정상적인 경우라면 절대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좋다. 무슨 이야기지?”
“일단 드릴 게 있습니다. 이리로 저를 따라오시죠.”
뭔가에 조종되는 것처럼 움직이는 흡고블린을 따라갔다. 붐텅은 부락 외곽으로 벗어나,나무 아래 있는 자그만 바위 앞에 섰다.
‘평범한데.’
나무도,바위도 그러했다.
눈길 한 번 안 주고 지나갈 만한 볼품없는 녀석들이었다.
그 앞에서 붐텅은 느닷없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바위 뒤에 놓인 곡평이로 바닥을 파는 모습이 몹시 기괴해 보였다.
“뭐 하는 거지?”
“금방 나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죠.”
잠시 후 붐텅은 뒤를 돌았다.
손에는 흙을 턴 작은 동전 하나가 들려 있었다.
세이론도,로티도 아닌 위젯.
고블린 직스키세스 붐텅은 나에게 그 작은 동화를 내밀며 말했다.
“1위젯입니다. 이걸 드리죠.”
오랜만에 접하는 동화였다.
“이 동전을 허공에 넣으면 분명 마법사 머드캐시의 깨달음을 얻게 될 겁니다.”
작은 동전이 억지로 손에 쥐어진 순간이었다.
붐텅의 눈이 좁혀졌다.
이마가 찌푸려지더니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아니,예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선한 인상의 홉고블린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갑자기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습니다. 구원자님께서 제 부락을 구해 주신 것까지는 알겠습니다만, 그 이후로는 갑자기. 여기는 무슨 일로 오게 된 건지..
“여긴 원래 모르던 장소인가?”
붐텅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나는 손을 내저었다.
저게 연기라면 이 녀석은 이면의 마왕 단탈리안이겠지.
분노를 엉뚱한 대상에게 표출하면 곤란하다.
나는 직스키세스 붐텅에게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질 것이며,거기에 휘말 리지 말고 인간과 관계된 모든 것 으로부터 도망치라고 예전처럼 전달 했다.
내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섣불리 희망을 뜯어 마시고 나면 그 빈자리는 제 피와 살로 채워야 한다.
고통이라면 붐텅은 이미 충분히 겪은 상태.
[.평판도가 70 상승합니다.]
[평판은 해당 단체/부족/종족의 당신에 대한 태도를...]
[.아주 우호적인 평판도입니다. 하지만 핏빛 사슴 고블린 부족은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이들이 오래 살아남을수록〈종족: 고블린〉의 당신에 대한 평판도가 지속적으로 증가합니다.]
평판도 상승 메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녀석을 놓고 떠난 뒤,기절해 버린
아이작을 바닥에 놓았다.
손끝으로 살짝 눈꺼풀을 열었다. 반만 열린 눈은 빛 한 점 없다.
예전에 창고에 갇혀 있을 때처럼 새까닿기만 했다.
다시 충전해야 하나.
충전한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혹시. 인형에 문제가 생긴 걸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아이작에게 마력을 불어넣었다.
간단히 끝나는 일은 아니다.
몇 번이고 전격을 불어넣었지만 까마귀 인형은 간간히 몸만 떨 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불,바람,얼음의 마력까지 모두 쓸어 담은 후에야 까마귀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
‘괜찮나? 이번에도 무리한 거지?”
〈.그래. 기억 편집이란 건 원래 힘들어. 지금 당길 수 있는 것보다 더 복잡한 거미줄을 쓰는 일이지.〉
“너,지금 이대로 괜찮은 건가? 저번보다 훨씬 많은 힘을 넣었는데 한참을 일어나지 않았어.”
두 배.
아니,세 배 이상이었다.
〈흥. 어쩌라고? 잔뜩 부려 먹기만 하고 그깟 마력도 아깝다는 거냐?〉
“아니,그게 아니라_
나는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이작이 자꾸 쓰러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묻는 질문이었다.
“너한테 루-름을 넣으면 상황이 좀 나아질까 싶어서.”
녀석이 피식 웃었다. 방금도 날을 세웠지만 진심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걱정하는 걸 느낀 것이다.
〈프흐. 그렇기야 하지.〉
“그럼 황실 비역이라도‘
〈당장은 그럴 힘이 없잖아. 나를 신경 쓰는 건 나중에 해도 돼.〉
그래도 걱정스러워 바라봤지만, 아이작은 터무니없다는 둣이 즉즉 웃었다.
〈이 몸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알아서 챙길 거라고. 아까 그 귀여운 고블린은 어디다 버렸어?〉
“세 번째 이야기를 듣고 헤어졌지. 그 녀석에게 누군가 최면을 걸어
〈엄청났지. 무려 3단계나 조건을 나눠 심어 놓다니. 뭐가 더 있을지 궁금해졌어. 정신을 좀 거칠게라도 뜯어보고 싶어졌다니까.〉
고문을 말하는 건가?
“그건. 곤란한데.”
어쨌거나 이번 일은 슬라임에게 호감을 사기 위한 거다. 그런 짓이 발각됐다간 제대로 역효과겠지.
아이작은 내가 하는 생각을 모두 들여다보는 것처럼 웃었다.
〈흐흐. 좋아. 그래서 세 번째 들은 이야기는 뭐지?〉
“이 동전을 주더군. 허공에..
붐텅이 한 말을 그대로 전해 주며 1위젯을 조심스레 밀어 놓았다.
〈으음.〉
아이작은 부리를 돌려 구리 동전을 한참 주시했다.
긴 관찰과 어울리지 않는 외마디 낮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이작은 긴 부리로 동전을 집고, 그대로 허공에 획 던졌다.
행운을 기원하며 연못 안 그릇에 던지는 것보다 불성실한 태도였지만, 동전은 꽤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아갔다.
그리고 아무것도 찌르지 못하고, 어디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 탱그랑.
허무하게 바닥에 떨어졌다.
동전의 크기만큼이나 아주 작은 흙먼지가 일었다.
〈이거,그냥 평범한 동전인데?〉
맥없이 바닥에 떨어진 1위젯.
머리 위의 까마귀는 동전을 다시 천천히 뜯어보며 말했다.
〈정말 아무런 힘도 없어. 그 어떤 종류의 마력도,기원도 담고 있지 않은 녀석이다.〉
“•••농락당했을 뿐이라는 건가?”
“그 녀석,다시 잡아 올까?”
아무 죄가 없다는 건 알지만.
〈고문은 싫다면서? 물컹물컹한 녀석과 잘해 보고 싶다고 했잖아?〉
“다시 기억을 삭제하고,네 번째 이야기를..
〈크크크...〉
아이작이 씁쓸히 가라앉은 웃음을 흘렸다. 메마른 웃음에 잠시 잊은 사실을 떠올랐다.
“아,미안하다.”
아이작이 괜히 홉고블린의 정신을 거칠게 뜯어보자고 한 게 아니다.
녀석의 기억을 일부 삭제하고, 이번 생에 나와 그가 처음 만나서 비밀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조작한 방법은 더 이상 쓸 수 없다.
〈해 주고야 싶지만,솔직히 나도 한계가 있어서 말이야. 또 쓰러지면 다시 못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뻔뻔해지는 건 좋은 현상이야. 난 싫으면 싫다,못 하면 못 하겠다 분명히 말하는 성격이니까. 서로 편하려면 원하는 건 뭐든 말하면서 살아가자고.〉
뭔가 민망해 말을 돌렸다.
“모르겠어. 평범한 고블린에게, 이 정도로 까다롭고 강한 세뇌를 걸어 놓을 이유가 있을까?”
〈좋은 방향으로 고민하고 있어. 하지만 정말 그 녀석에게만 세뇌가 걸려 있던 걸까?〉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중요한 사실은,이게 오직 너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거야. 조건을 건 녀석이 누군지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
一 피링!
그게 누군지 묻기도 전,아이작이
동전을 다시 주워 나에게 던졌다.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손으로 동전을 받아 들었다.
〈그 녀석은 네 회귀를 알고 있어. 그럼. 생각해 봐. 동전으로 허공을 열 방법을. 이건 너를 위한 안배야. 네가 알 거야. 느껴지는 게 없나?〉
아무런 마법도 걸려 있지 않다는 동전을 손에 쥔 채,가만히 허공을 관조했다.
물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느껴지지 않는다.
뭘 어쩌라는 거지?
동전을 넣으라고?
눈앞에 펼쳐진 허공을 넓고 깊게 느끼도록 애써 보았다.
동전을 쥔 손을 뻗었다.
허공뿐이다.
하지만 비슷한 일을 해 본 기억이 있었다.
잿빛 기사가 공격해 올 때 생긴 투명한 창이 생각났다.
상태창과 다르게 어떤 메시지도 없던 투명한 창은,손을 뻗어 만져 보는 순간 손이 쪽 들어갔다.
손뿐만이 아니다.
1/10 정도의 크기로 창 안에서 아주 작게 표시되며,많은 것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무게는 없지만 부피를 가진 공간. 안과 밖이 다른 것.
그 감각을 떠올리며,다시 한 번 허공으로 동전을 밀었을 때.
- 띠링!
지금까지의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씻어 내는 것처럼,허공에 반투명한 푸른 상태창이 떠올랐다.
지겨운 효과음이 심지어 상쾌하게 느껴지는 내용의 상태창이었다.
[인벤토리 경험을 충족했습니다.] [선행 히든 퀘스트 클리어.]
K퀘스트: 인벤토리〉가 개방됩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푸른 글자들이 계속 이어 허공에 떠올랐다.
〈퀘스트 발생!〉
[아공간을 100만 번 인식하세요.]
[0/1,000,000]
[보상: 인벤토리 Lv.o]
뜬 건 반가운데.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상황을 말하자,아이작은 조금도 싫은 기색 없이 즐거워했다.
〈정말 된 거야? 좋아! 될 때까지
해 보자고!〉
“일단은. 상인 연합에 가야 하지 않을까?”
〈무슨 소리. 지금은 이게 훨씬 더 중요해! 100만 번 금방이야. 내가 옆에서 도와주마. 싫어?〉
“아니. 해 보지.”
검술 퀘스트와 비교도 되지 않는 숫자였지만,효용도 엄청나겠지.
나는 자그마한 동전을 잡고 계속 허공에 넣는 연습을 시작했다.
검술 퀘스트를 할 때처럼 한 동작 한 동작이 정확해야 했다.
시야 한쪽에 작은 창이 떴다.
[1/1,000,000]
아이작은 근처 나뭇가지 위에서 나를 지켜봤다.
일만 번.
[명상 Lv.2를...]
[집중 Lv.2를...]
두 스킬을 발동해서 더 정확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이만 번.
정신이 점점 흐트러졌다.
나뭇가지 위에서 내 상태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아이작이 흐트러진 집중 사이를 메꿔 주듯 말했다.
〈시체가 허공에 들어간 뒤 훨씬 작아 보였다면 공간의 ‘앞’과 ‘뒤’를 이어 붙인 거다. 일단 그 양면부터 느껴 보도록 해라.〉
오만 번.
고작 동전 하나.
무겁지는 않지만.
같은 동작을 끝도 없이 반복하니 지루해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아무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면, 무게라는 개념은 거미줄에서 잘라 놓은 거고.〉
나는 허공에 동전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거미줄도 결국 세계를 쉽게 이해 하기 위한 변환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은’을 누르고 ‘금’을 당겼을 때의 결과는 정해져 있지.〉
- 스록.
녀석은 내가 수만 번 같은 행동을 할 때마다 설명을 조금씩 풀었다.
〈이미 짜인 걸 해석하고 적용하는 영역일 뿐이다.〉
“.한 번에 다 말해 주면 안 되냐?”
〈내가 말한 부분이라도 정확하게 되새기면서 해 봐. 한 번에 너무 많이 들으면 집중이 흐트러질걸.〉
하루가 지났다.
숲속 깊은 곳에서 해가 떠오르고
다시 지길 반복했다.
몇 번인지 모를 동작을 반복하면 아이작은 간간이 한 마디를 던져 주고는 했다.
〈허공에 물건을 넣으면서 무게를 없애고 부피를 축소하는 건 줄이 ‘짜이기’ 전의 상태... 세계를 점의 크기까지 파악해야 수월한 영역. 읽기는 훨씬 어렵고,변경은 훨씬 정밀해야 한다.〉
사흘이 지났다.
아이작의 말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해가 될 것 같다가, 사실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느껴졌다.
그건 결국 수억 가지 중에 하나의 시각일 뿐이다.
나는...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66.17% - 64.97%”"
느껴진다.
무언가를 집어넣을 수 있는 작은 창이 허공에 떠오른 것 같았다.
천천히 테두리를 쓰다듬었다.
잿빛 기사와 마주친 후에 생겨난 것에 비하면 작았다.
손에 든 동전을 넣자 예의 굴절이 일어나며 안으로 들어갔다.
[퀘스트 클리어!]
[수련이 완료되었습니다.] [360,000/360,000]
- 흐트러진 집중으로 횟수가 20%
가산되 었습니다.
- 최적의 조언으로 횟수가 70% 감소했습니다.
〈된 건가...〉
1/10 크기가 되어 허공에 담긴 동전을 보고 아이작이 쓰러지듯 나무 밑동에 기대며 말했다.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던 두 눈은 깊이 감긴 채였다.
“어떻게. 나를. 도와준 거지?”
집중이 흐트러질 때마다 메꿔 준 아이작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시간이
많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네 손에 쥐어진 거나 마찬가지인 권능인데 못 얻는 게 터무니없지. 움직여지냐? 그게 중요하다.〉
“그건..
움직여지나.
잿빛 기사를 처음 만났을 때는, 뭘 해도 윤곽이 만져지는 공간을 움직이는 일은 어려웠다.
작은 아공간을 갖고 끙끙거리다 포기했었다.
하지만,지금은.
[동화율이 65% 이하입니다.]
[사용 권한 일부 각성.]
[인밴토리 Lv.? 발동...]
- 주욱!
동전이 담긴 공간을 그대로 길게 잡아 늘였다.
힘을 쓸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공간이 손에 붙어 당겨졌다.
[스킬 경험치가 상승했습니다.]
[스킬 경험치가...]
[인벤토리 Lv.O — Lv.l]
- 스윽.
길게 늘인 인벤토리를 허공에 잡아 묶고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대신 꽂아 넣었다.
[.경험치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한 자루,두 자루.
반투명한 인벤토리가 살아 있는
뱀처럼 몸 주위를 휘감았다.
거추장스럽게 들고 있던.
품에 넣고 있던 물건들이 차례로 인밴토리 안에 작게 수납되기 시작 했다.
[스킬. 크게...]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인밴토리 Lv.l — Lv.幻 [인벤토리 Lv.2 — Lv.3]
[수납공간이 확장됩니다.]
[변형이 가능해집니다.]
몸을 감싼 반투명한 인벤토리를 손으로 잡아 한 번에 펼쳤다.
이만하면.
황제 암살 현장에서 생긴 녀석의 반 정도는 되는 크기였다.
허공에서 다시 칼을 꺼내는 순간 자연스럽게 인벤토리의 활용도가 머릿속에 새겨지며,다시 인벤토리 레벨이 올라갔다.
[인벤토리 Lv.3 — Lv.4]
[인벤토리에 검집만 고정시킬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지점에서의 발도拔刀 공격이 가능해집니다.]
[특전,일파검화재一祀劍固在를 획득 했습니다.]
[인벤토리에서 바로 발도할 경우 명중률이 크게 상승합니다.]
[속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 피잇!
인벤토리에 검집만 남긴 채 뽑힌 빛줄기가 허공을 잘랐다.
〈.역시,내가 옳았어.〉
아이작이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한차례 비가 그친 하늘은 꿈을 꾸는 것처럼 맑았다. 땅에는 늙고
넘어지고 추한 것들이 가득하지만 하늘은 태양빛과 축복으로 물들어 있다는 일리엔의 교리가 생각나는 날씨 였다.
- 까악!
마력을 넣은 까마귀는 그 하늘을 유쾌하게 활강했다.
주술로 작동하는 인형임에도 새의 형태를 충실하게 본땄는지,발달한 가슴을 펴고 온몸을 까만 날개로 바꾸어 펄럭였다.
녀석은 기분이 좋고 일이 잘 풀릴 때마다 까마귀 소리를 내곤 한다.
이게 아이작의 버릇 중 하나라는 점은 얼마 전에야 알아챘다.
제국과 연합의 군대를 공멸시킨 전장에서 순금과 보석을 싹 쓸어 갈 때 저런 소리를 냈었다.
이번 생은 처음 듣는군.
뭐가 그렇게 기쁜지...
[남은 시간 00:01...]
[스킬:〈질주 Lv.7> 의 재사용이 가능해집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강하게 몸을 솟구쳤다.
몸이 순식간에 수십 미터를 쪽쓱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 쉬이익!
오랜만에 자유롭게 들판을 달리는 쾌감이 느껴졌다.
그라스미어를 지나자 그 이후는 도시 하나 없는 들판.
높게 솟은 초소들을 지나...
남쪽으로 가야 한다.
제국과 연합을 연결한 길고 좁은 카브롤타 지협地缺.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이번에는 두 대륙을 연결하는 좁고 긴 땅을 건너지 않는다.
지협의 서쪽 입구.
제국 전체에서 물고기가 가장 잘 잡힌다는 키른 만薄이 목적지.
고깃배를 위장해 선박 교환으로 밀무역을 행하는,대담한 녀석들을 만나 보기 위해서다.
“•••뭐냐?”
소리를 내지 않고 머릿속에 직접 전달할 때는 할 말이 있다는 거다.
付 왔다.〉
도로 따위는 무시하고 직선으로 달린 탓일까.
땅에서 보기엔 울창한 숲만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하늘이 한층 푸르러진 걸 보니 아이작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항구에서 부는 바람이 활강하는 까마귀의 날개를 슬쩍 밀어 올렸다.
숲은 곧 사라졌다.
활짝 열린 항구 저 너머.
열,서른,백...
거대한 키른 만에는 헤아리기조차 힘든 수의 돛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가장 안쪽에서 정박의 티를 내는 빈 돛대도 있고,아직 파도를 담은 하얀 돛대를 매단 녀석도 있었다.
〈뭐냐? 배들 처음 봐?〉
“아니,그런 건 아닌데..
언덕에서 만을 내려다봤다.
쫓기며 타 본 적도 있지만.
이렇게 많은 배를 한 번에 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무척 평화롭다.
폭풍우 속에 후작으로부터 도망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저 너머의 바다는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바라보게 될 만큼 한적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는 바다색 따위를 보러 온 게 아니다.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순간.
단편적으로만 접했던 상인 연합을 이번에 제대로 끌어들여야 한다.
이 작업이 성공한다면.
루비아의 활동에 몹시 실질적이고 커다란 도움이 되는 건 물론.
정회원으로,상인 연합의 숨겨진 목적을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돈이 될지,힘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회원권이 꼭 가져야 하는 중요한 거라는 사실은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항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빼곡한 인파에 점점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인간의 숫자에 압도당해,뭘 하는 건지 한참을 바라봤다.
커다란 배에서 교역품을 내리는 하역 작업이 바쁘게 이루어졌고, 안으로 움푹 들어간 곳에는 돛도 달지 않은 수많은 어선이 있다.
- 좌악! 좌악!
드넓은 만의 양 끝에서는 파도가
계속 부서지며,파도의 높낮이처럼 항구에서 잡아 온 물고기의 경매가 이루어졌다.
〈경매가 한창이네?〉
산더미처럼 쌓인 갖가지 물고기의 시체 위로 인간들은 몹시 분주하게 움직였다.
작은 생선들은 커다란 항아리에 담겨서 팔렸고,큰 것들은 한 마리 단위나 부위별로 팔린다.
경합이 한 번 끝날 때마다 커다란 생선들이 여기저기로 날아다녔다.
여기서 팔린 생선을 대체 누가 다 먹을까 싶을 정도로,걷다가 길을 잃을 정도로 생선 경매장 규모는 압도적 이었다.
물론 경매장도 키른 항의 일부에 불과하다.
나는 만 끝에서 끝까지 가득 찬 배들을 다시 한 번 보며 말했다.
“이렇게. 커다란 곳에서 대놓고 밀무역을 한단 말인가?”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해야지. 작은 항구에 큰 선박을 숨길 수는 없잖아? 검증도 되지 않은 한적한
곳이면 암초 따위에 당할 위험도
크고.〉
“하지만 나무 찾기 힘든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이 많은 배들 중에, 밀무역하는 상인 연합 녀석들을 어떻게 찾는다는 거야?”
자기를 찾으라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역에 경매에.
입출항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간들 중에 누굴 찾으라는 건가?
〈별걱정을 다 하네. 너 자신을
“무슨 말이지?”
〈너 정도의 탐지 능력이면 여기서 그놈들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내가 말해 주는 단어들을 기억해라...〉
아이작의 상인 연합에서 사용하는 몇 개의 은어를 알려 주었다.
“왜 이런 걸 쓰지?”
〈상인들은 상대 앞에서 즉석으로 협상하게 될 때도 많으니까. 고객이
너무다 알아들으면 무슨 말을 못 하잖아?〉
전혀 원래의 뜻을 상상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지만,원래의 의미에서 그다지 변형되지 않은 것들이 조금 더 많았다.
일단 이런 은어를 쓰는 자들로만 한정하면 일은 훨씬 더 쉬워진다.
녀석이 은어를 가르치며 알려 준 이야기에 궁금한 게 있었다.
“근해는 순찰하는 경비들 때문에 곤란하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면 원해를 뚫고 간다는 건가?”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촉수 하나로 배를 쪼개던 크라켄. 그런 녀석의 영역에서 항해 따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레안드로 후작 같은 놈이 호위로 어디에나 붙을 리도 없고,수없이 몰려들던 인어와 하피들의 합공만 해도 웬만한 선단에겐 생애 마지막 악몽이 될 거다. 하지만 아이작은 기다렸다는 질문인 것처럼 태연히
〈다들 알아서 살길을 찾는 거지. 예전에 개척된 바닷길이 있거든.>
“바닷길..?”
〈그래. 거기로 가면 크고 포악한 놈들은 안 나와. 그 길을 모르는 경비대야 당연히 원해로 갈 생각을 못 하지.〉
주술사로 살아온 아이작이 그런 항로까지 알고 있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비밀 항로의 가치는 직관적으로 생각해도 대단하다.
별빛청여우.
그녀처럼 어마어마한 항해 능력을 가졌다는 ‘유산’ 페르세우스가 없는 인간들은 그런 항로의 존재가 몹시 결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라스미어 영주는 무척 능숙한 수완가였어. 양쪽에서 줄을 굉장히 잘 탔지.〉
〈게다가 그게 비밀인 대상은 상인 연합 정회원인 그라스미어 영주가 아니라 제국 황실이니까.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여 봐. 보다 보면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들리는 모든 대화에 주의를 집중할 필요는 없다.
은어와 맥락을 알고 있다면.
[탐지 Lv.7]
[활성 상태로 전환합니다.]
[스킬 효율 400% 증가.]
[현재 체력 기준,초당 0.0014%의 체력이 소모됩니다.]
[훈련된 감각을 발휘합니다...]
찾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셋,아홉,열,서른...
인간들의 무수한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
드넓은 항구의 무려 1/5 정도를
항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대체로 비릿한 냄새가 났고,기름 냄새나 낡은 금속 냄새가 나기도 했다.
가끔은 달달한 설탕 냄새도 묻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분명히 끝이 보인다고 생각했을 때.
〈어一이. 잠깐.〉
“뭐냐?”
〈흐흐. 너보다 내가 먼저 찾은 거
“상이라니
〈뭐야,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저렇게 치열한 경매장 앞에서 지금 날로 먹겠다는 거야?〉
“그럼 뭐든 말해. 나중에 해 주지. 뭘 찾았다는 거야?”
〈좋아. 경매장에서 서른다섯 번째. 돛 네 개 달린 배를 봐. 갑판.〉
집중해서 아이작이 말한 선박을 살폈다.
〈모르겠어? 말도 안 되게 어벙한 자세 취하고 있는 놈 하나 있잖아. 옷차림은 일부러 십 년 굴러먹은 선원처럼 해 놨는데,지금 저기서 멀미를 하네? 저 배일 거야.〉
갑판 위에 감각을 집중했다.
항해 중도 아닌 갑판 위에서,한쪽 구석에 숨어 어지러워하는 선원을
주위에서 걱정스러운 듯 부축하고 있었다.
〈저런 다정한 태도를 취할 뱃놈은 이 세상에 없다고. 놈은 외부자. 그것도 아주 중요 인력이지. 슬슬 저기로 가 볼까?〉
그때 였다.
- 짝악!
갑자기 음성 증폭 마법 스크롤이 찢기더니,탐지가 아니라도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거대한 외침이 키릴 만을 가득 메웠다.
“국경 수색대다! 출항하는 모든 선박은 이 순간부터 정지하라! 하역 작업을 정지하라! 움직인다면 적국과 내통한 죄로 처벌하겠다!”
도청하고 있지 않던 반대편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그쪽에서부터, 평범한 선원으로 위장했던 병사들이 완장을 차고 곳곳에 정박한 큰 배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호오. 이게 이렇게 되네. 좋아. 아주 좋아.〉
“좋다고? 밀무역 상인들을 찾아야 한다면 곤란해진 거 아닌가?”
〈곤란은 그놈들이 곤란해진 거지. 우리는 곤란한 그놈들을 구해 줄 수 있게 된 거고. 훨씬 쉬워졌어.〉
아이작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게 바로 지배자의 운이다. 일이 한 번 제대로 트이면 연이어
잘 흘러가게 되지. 운도 흐름이고 관성이니까. 운이 좋아.〉
“•••그런가.”
〈한번 구경해 보자고. 작정하고 털러 온 것 같은데?>
그때 였다.
- 스롱!
뱃전에 올라선 제국군 지휘관이
허리에서 칼을 빼들고 황실 깃발을 돛대에 높이 매달았다.
“전원,신속히 행동을 개시하라!”
법은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라는 의견과,걸릴 수밖에 없이 억지로 만든 그물이라는 두 의견은 언제나 함께 존재했다.
어느 시대에나 선원들은 후자에 가까웠다. 바다에는 바다의 규칙이 있고 그건 많은 경우 육지의 것과
충돌한다.
작위를 상속받지 못한 차남,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 없는 탕아, 육지의 지루함을 거부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는 자들이 선박에 몸을 싣기 때문이기도 했다.
“안전 교육 일지 부재,항해검사 일지 부재,게다가 법으로 규제된 소독약품도 부실하군. 5세이론을 벌금으로 부과하오. 항구 관리소에 내도록.”
“필요하면 그때그때 교육하면 되죠. 알고 하는 게 중요하지 일지 쓰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그리고 소독약은 저거면 충분한데요.”
“부선장,그만! 저. 관리소에 안 내고 여기서 직접 내면 2세이론에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이 정도면 약과였다.
여기서 당장 체포해야 할 인간이 하나둘이 아니다.
털면 먼지가 나오지 않을 인간이 없다지만,이 뱃사람들은 경우가 훨씬 심했다.
항구의 한 부분.
아직 털리지 않은 커다란 선박.
약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마른 인간이 선장실을 서성였다.
“선장님,어떻게 하죠?”
그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 다.
“상황은 어떤가?”
“작정하고 털러 온 것 같습니다. 작업이 끝난 라인이랑 아예 다른 쪽에서 내려왔고요.”
“흥정도 안 먹혀?”
“즉석에서 먼지 좀 묻히려고 해도 안 통하는 모양입니다. 가벼운 건 넘어가도..
“우리는 안 되겠지.”
“그러니까요.”
노련한 선장 넥스몬드의 얼굴을 태연했지만,마음속으로 일어나는
동요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평소에는 국경 수비대에게도 함께 먼지를 묻히는 식으로 대응했지만 지금은 뭔가 작정하고 탈탈 털기 위해 대대적으로 내려온 듯했다.
라인이 달라도 이미 매수한 쪽과 협력이 안 되지는 않을 텐데.
입수한 정보가 있고.
목표가 우리일 수도 있다.
불길한 심증이 점점 굳어졌다.
그들은 세금 좀 안 내는 수준으로 밀무역을 하는 게 아니다.
선반 안전법은 철저히 지키지만, 국법에서 무엇보다 엄격히 금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그들의 화물칸에 실려 있는 건...
다름 아닌 강화신체.
차가운 금속과 섬세한 기술력의 접합으로,신체 일부를 대체할 뿐 아니라 웬만한 수련을 쌓은 기사도 상인이 때려눕힐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의 최첨단.
자유 연합 특수부대에서조차 아직 널리 퍼지지 않은 기술의 절정이, 지금 배의 화물칸에 잠들어 있다.
“.차라리 배를 가라앉힐까요?”
밑바닥에 구멍을 내자는 부관의 말에 선장은 고개를 저었다.
넥스몬드가 보기에 그것도 절대 답은 아니었다.
“차라리 바다라면 모를까. 여긴 얕은 항구라서 그런 건 무리다. 분명히 인양한다. 안 할 조사까지 철저히 하겠지.”
“젠장..! 일단 그놈들을 짜증 나게 하면 그때 가서 생각하죠! 칼부림 날 각오 정도는 진작 했습니다.”
부관 밋시가 품에 든 폭탄을 꺼내 뇌관을 만지작거렸다.
칼부림이 아니라 불꽃놀이겠지만, 선장 넥스몬드는 그런 걸 지적할 마음의 여유 따위는 없었다.
화물칸 깊이 있는 건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최첨단 의체.
아직 주인에게 ‘부착되기’ 전에는 뚜렷한 형태를 갖추지 않는 특수 버전이다.
진입한 제국군들이 그곳에 든 걸 보고도 뭔지 못 알아보길 바랄 뿐이었다.
번뇌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 쿵!
모든 선박을 감시하던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수색대가 이곳까지
쇄도해 들어왔다.
“선장. 넥스몬드?”
본신의 무력은 이미 상인보다는 검객에 가깝다.
교역 선박을 표방하지만 무장은 과할 정도로 충실히 갖춰져 있다.
하지만 항구에 깔린 국경 경비대 전체를 상대로 싸울 수준은 당연히 아니다.
“예,저 맞습니다. 여기 선박 운행 일지입니다. 이건 선박 검사 일지, 이건 도면 승인,이건 무역 지정 허가..
혹시라도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깔끔히 처리해 놓았다.
이런 게 훌륭하면 안쪽까지 굳이 보지 않으려는 자들도 많으니까.
쪽 훑어보던 수색대장의 눈꼬리가 갑판 위의 선원을 향해 찢어졌다.
“정박한 배 위에서 어지러워하는 선원은 참 오랜만에 보네. 거참.”
그가 긴 눈꼬리를 슬쩍 올리며 히죽거렸다.
“그게. 지금 저 선원이 몸이 안 좋아서..
수색대장이 슬며시 볼을 긁었다.
“안 따져요. 저걸로 잡을 자신도 없고. 서류야 완벽하게 해 놨겠죠.
바로 화물칸 봅시다.”
한 번도 냉정을 잃지 않던 선장이 그 반응에 멈칫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일부러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면 알아첼 수도 있을 정도의 멈칫거림이었다.
“아,예. 이쪽입니다. 화물 일지도 같이 가져가겠습니다.”
“알잖아요? 일지 안 가져오셔도 되는 거.”
一 ■스르•■릉'
선내에 진입한 병사들이 동시에
칼을 빼들었다.
선장은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바다 위의 거상토商.
자유의 영사(컨슬라베) 넥스몬드는 굽은 허리를 쭉 폈다.
상인 연합은 대부분 점조직으로 활동하며, 모두가 모두에게 평등한 관계를 지향한다.
하지만 핵심 가치에 관한 활동을 수행하는 몇몇 조직은 필요에 의해 약간의 직급을 가진다.
그건 권력의 상징이 아니다.
옳다고 믿는 바에 따라서 언제든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는 하나의 기호에 불과했다.
허리를 쭉 편 넥스몬드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표적이 정해진 상태에서 단단히 계획된 일.
정보 유출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설령 죽더라도...
서서 죽자.
“어서 화물칸으로 안내하라니까? 이것 봐,선장. 지금 수색을 대놓고 거부하겠다는 건가?”
“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넥스몬드는 갑판과 선실을 지나, 배 가장 아래에 있는 화물칸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여기가 식량과 짐을 쌓아 두는 곳입니다만..
화물칸에 도착한 수색대는 열쇠를 요청하지도 않았다.
“다 뜯어 봐.”
“알겠습니다!”
- 끼긱!
- 끼긱직!
가지고 온 절단기로 큰 자물쇠를 아예 잘라 버리곤 화물 통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건 아닙니다.”
“.이것도 아닌데요.”
“아래쪽까지 다 확인해 봐!”
수색대장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 뚜둑!
하지만.
나무 조각까지 뜯어 안을 봤지만
수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대두입니다.”
“여기는 커피나무고요.”
“호박. 씨앗인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 가 뭐야! 똑바로 보고 안 할 거야?”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냥 호박씨 맞습니다.”
“.식량 창고도 뒤져 봐!”
하지만 결과는 “어육입니다.”
“쇠고기입니다.”
배를 살살이 다 뜯어서 뒤졌지만
수상한 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배 안의 모든 물품이 일지에 적힌 적재량 그대로였다.
관행처럼 행하는 초과 적재조차도 없이 깔끔한 결과였다.
분명히. 맞는데.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볼수록 점점 더 수색대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하,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죠. 저희는 국경 수비대를 항상 믿고 있습니다. 경쟁 상단에서 헛소문을 퍼트린 게 아니겠습니까? 다음에는 저희를 조금만 더 믿어 주시..
날카로운 인상의 수색대장은 이를 꽉 물며 주위를 돌아봤다.
“야! 선장실 제대로 뒤졌어? 어디 빠트린 데 없어?”
“없. 습니다. 깨끗합니다.”
선장은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수색대가 커피나무 씨앗이 실린 화물칸을 뒤졌을 때,그는 마지막 거래를 준비했다.
주머니에 돈을 쥐어지는 정도로는 안 될 거다. 엄청난 출혈은 물론 죽음까지 각오했다.
하지만...
당연히 있어야 할 물건이 갑자기
사라지다니.
혹시 선원들 가운데 누군가 미리 손을 써 둔 걸까?
갑판 위의 군상들을 전부 차분히 훑어봤다.
하지만 표정이나 분위기로 봐서 그런 짓을 할 만한 녀석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여차하면 수색대와 폭사하겠다는 각오를 보였던 부관 밋시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평소였다면 곤란했을 거다.
최첨단의 강화신체.
새로 나온 모델로,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것 따위가 아니다.
여기의 위장용 화물 전체는 물론, 단단히 무장을 갖춘 배 전체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
그러나.
지금은 그냥 이대로 강화신체가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아도 고마울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넥스몬드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뭘 보러 오셨다는 건지 솔직히 전혀 모르겠습니다. 말씀해 주시면 오히려 제가 찾아 드리고 싶군요.”
하지만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도,
수색대장은 좀처럼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전원! 처음부터 다시 한 번 수색한다.”
병사들의 얼굴에서 슬슬 자신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는 항의를 해도 되겠다 싶은 순간.
- 화르르! 퍼벙!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근처 배에서 불길이 솟았다.
방향을 확인한 수색대원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대,대장님! 임시 본부가 불타고 있습니다!”
- 화르르록!
방염 처리를 한 돛대까지 사르고 있는 불길은 한눈에 봐도 간단히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완벽히 기획된 수사.
모든 상황이 통제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던 수색대장의 턱이 아래로 쩍 벌어졌다.
“이. 이게 무슨..
선장 넥스몬드 역시 지금 상황이 실감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하늘이 돕고 있다.
나를 돕는 게 하늘이 아니라면, 이제부터 그걸 하늘로 섬긴다.
“닻줄을 올려! 출항한다!”
- 픽!
마지막으로 늦게 나가는 수색대의 엉덩이를 부관이 슬쩍 걷어찼지만, 임시 본부로 쓰는 선박에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걸 신경 쓸 수 있는 제국군은 없었다.
- 파르륵!
네 개의 돛대에 달린 열두 돛이 일제히 펼쳐졌다.
그들을 축복하듯 때마침 불어오는 상쾌한 순풍을 받아,배는 빠르게 항구를 떠났다.
당장 문제되는 물건은 사라졌지만, 언제 또 수색대가 들이칠지 알 수 없는 일.
가득 싣고 있는 위장용 화물이야 다른 조용하고 말썽 없는 항구에서 나눠서 하역해도 된다.
- 쏴•아아! 철썩!
- 끼룩! 끼룩!
곧 갈매기들은 떠나가고 뱃전에 부딪치는 파도만 경쾌했다.
바람도,해류도 모두 순조로웠다.
근해를 따라 누구도 탓하지 않을 바닷길로 한참을 지나간 뒤였다.
한동안 조용히 명령을 수행하던 부관이 이제 안전하다 생각했는지 넥스몬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서,선장님..! 숨기신 거면 미리 말씀을 해 주셨어야죠. 중간에 제가 사고 칠 뻔했잖아요. 그놈들 다 쾅! 날려 버리고 싶었다고요.”
“그런 짓은 최후의 교섭이 결렬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그 정도 분별력은 있었겠지?”
“그래서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언제 숨기신 거예요?”
선장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부관을 향해 전부 자신의 계획이었노라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간신히 그것을 억제한 다음 사실을 고백했다.
“안 숨겼어.”
부관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네? 그러면요?”
“사라졌어. 그냥. 나도 몰라. 분명 저기에 있었어. 항구에 들어오고 난 후에도 옆에서 계속 체크하고 있었다.” 그런데 없어졌다.
합리적 사고의 구사자 넥스몬드는 방금 솟아오른 불길도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위치도,시기도 완벽했다.
“가져간 거지.”
불길이 깜빡일 때마다 잿더미가 아래로 화르르 흩어져 내렸다.
붉은 꽃이 피어난 자리는 무엇도 남기지 않았다.
물 위의 불.
옮겨붙을 배가 사라지면 자신도 주저앉아 스러져 버리게 된다.
그러나 화염은 그런 논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그저 모든 걸 휩쓸고 무너뜨리고 싶다는 둣 검은 연기를 풀풀 피워냈다.
- 쿠구궁!
밑동부터 타들어 간 돛대가 갑판 위로 쓰러졌다.
〈불장난. 좋아하냐?〉
아이작이 나를 보고 물었다.
- 달그락.
고개를 저었다.
물 위에서도 꺼지지 않는 지독한 녀석에 타 죽은 경험이 있으니까.
불꽃을 피운 손끝에서 느껴지던 열기가 서서히 식어 갔다.
까마귀가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넌 많은 것을 부리게 될 거다. 어떤 녀석들은 불과 같지. 모든 걸 태우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제대로 가두고 통제하면 무엇보다 유용하고 아름답다...〉
어울리지 않게 아련한 어조였다.
배 위를 흐르는 불길이 아이작을 회상으로 빠트린 것 같았다.
그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불타는 배를 빠져나와,수색대가 모두 사라진 상인 연합의 배 위로 올라갔다.
“가져갔다고요? 도대체 누가..! 그걸 어떻게..!”
“우리 배에 실렸다는 걸 알고 온 수색대도 있다. 정보가 어디서부터 샜는지 파악해야겠어.”
배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이제 슬슬 나타나도 되겠지.
갑자기 너무 북쪽으로 가 버리면 곤란하다.
가볍게 발소리를 내어 갑판 위에 나타났다.
갑판 위의 모두가 얼어붙었다.
“너,너는 대체 누구냐?”
선원들이 나를 둘러쌌다.
“여기는 대체 어떻게..!”
한 명이라는 사실에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은 것인지 순식간에 나를 포위했다.
‘공포.’
“흐윽..!”
“어. 어어어...
하지만 가볍게 공포를 흘린 덕에
허튼짓을 하려는 녀석은 한 명도 없었다.
저 깊이 크라켄이 잠들어 있을 바다 위에서 녀석의 스킬을 쓰니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 털썩.
멀미를 하던 ‘가짜 선원’은 포위에 동참하지도 않았는데,멀리서 그냥 알아서 주저앉아 버렸다.
“내가 누군지는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고. 네가 선장이지?”
세로로 여러 색을 배합한 복장의
남자를 바라봤다.
한 걸음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녀석이 혼자 앞으로 걸어왔다.
그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예,접니다.”
〈기개가 있는 녀석이군. 유치한 협박 따위에 겁먹지 않고 있다.〉
기개뿐만 아니라 순수한 실력도 깊어 보였다. 어떤 식으로 싸울지 기대되는 녀석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일방적으로
관찰하는 입장이었는데,이제 그가 나를 꼼꼼하게 뜯어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크흐흐흐. 저 인간,이 와중에 네 가격을 매기고 있다. 깜짝 놀라게 해 줘라.〉
하나밖에 없지.
손을 들자,
허공이 찢어지며 작게 울었다.
‘인밴토리’에 넣어 놓았던 물건이 천천히 뽑혀 나오고 있었다.
선장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입가가 떨리고 동공이 확장됐다. 작은 표정들은 아주 짧게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짧은 한순간. 저게 진짜 놀란 표정이다. 길게 지속되는 건 전부 꾸며 낸 거거든.〉
- 스으으윽*
잡아 꺼낸 물건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닫힌 텅 빈 허공으로 수십 명의 시선이 집중됐다.
가장 강한 시선은 말할 것도 없이 넥스몬드의 것이다.
나는 선장을 향해 돌아섰다.
“다시 돌려받고 싶나?”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다.
한차례의 마술.
유베나 블랙베리라면...
여기서 나쁜 반응은 아니겠지. 하지만 처음 보는 상대다.
이 녀석은 어떻게 나올까?
“아닙니다.”
선장이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거두신 물건은. 쉽게 측정할 수 없이 가치 있는 녀석이긴 합니다. 하지만 귀하께서 보여 주신 능력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겠지요.”
“이걸. 포기한다고?”
진네이 유베.
블랙베리.
그때와 같은 패턴이다.
보여 준 유능함에 대한 압도적이고, 얼핏 기괴하게까지 느껴지는 호의. 하지만 이건 정도가 한층 심하다.
“입바른 소리로 거절하기엔 꽤나 중요한 물건 같은데?”
〈아니. 저 녀석,진심이다.〉
진심이라고?
〈그 이상...〉
아이작이 말을 멈췄다.
자유의 영사 넥스몬드는 품에서 카드를 꺼냈다.
[이건 드-루즈의 별이잖아요. 거꾸로 뒤집고 원을 그리면 타락한 세레르 (Serer) 의 상징. 좌우로 조금 좁히면 정체불명의 알 (Baha’s Faith) 이고 안을 채우면...]
루비아의 말을 회상했다.
오각별이 그려진 카드.
상인 연합의 심볼.
넥스몬드는 망설임 없이 계속해서
카드를 꺼냈다. 두 장,
세 장...
- 스록.
네 장...
그리고 다섯 장.
나는 녀석을 멍하니 바라봤다.
자유 연합의 최첨단 기술,강화 신체를 싣고 있던 선장 넥스몬드는 내게 오각별이 그려진 검은 카드 다섯 장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물음.
손에 쥐고 있는 카드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말해 주지 않는다.
여기까지 찾아왔다면 그 정도는 당연히 알 거라는 생각일까.
선장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모르는 분인 걸 보니 아직 저희 회원은 아니시겠지요. 부디 함께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간단히 끌려올 줄 알았던 선장은 당황하지 않고,나에게 곧장 회원 가입을 제시했다.
진네이 유베와 보석상 블랙베리도 한 장씩 주던 카드를 다섯 장 꺼내 보여 준다.
정회원 가입이 목표이긴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품에서 다섯 장을 꺼내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놀랍다.
“한 장씩 모으는 거 아니었나.”
- 스윽.
오각별이 그려진 카드 두 장을
인밴토리에서 꺼내어 보여 줬다.
“역시.”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합의 카드를 확인하자 한층 더 경계심이 풀린 듯했다.
“가치 있는 상대라고 판단했지요. 나름대로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원하는 분 하나 정도는 바로 정회원으로 가입시켜 드릴 수 있지요.”
진네이 유베도,바네시 블랙베리도 검은 카드는 모두 한 장이었다.
그에 비하면 엄청난 녀석이다.
〈다섯 장을 한 번에 받아서 좋냐? 유베라는 놈도 카드 한 장만 갖고 있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 에이,상인 연합 내에서 직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음. 유베에게 네가 보여 줬다는 능력은 평범한 검기나 마법이다.〉
검기나 마법을 평범하다고 하는 소리에는 어폐가 있지만,그 말을
하는 녀석이 아이작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모두 어딜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지. 하지만 지금 네가 보인 능력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고.〉
까마귀가 말을 이었다.
〈밀무역에 종사하는 녀석에게는 네가 아니면 안 될 정도로 절실한 힘이다. 다른 녀석에게도 그 힘을 보여 줬으면 밑천을 다 털어 줬겠지. 본인이 카드가 없어도 이쪽에 연결
= 으음... 바로 받아들일까?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주도권은 어차피 너한테 있으니까.〉
주도권이라.
다시 죽어도 여기로 와서 한 번에 가입할 수 있다. 얼마든지 손쉽게 가질 수 있는 다섯 장의 카드.
복잡하게 여기저기를 다니거나, 여럿을 돌아가며 만나야 할 필요 따위는 없다.
상인 연합의 회원권은 이곳에서 단 한 번에 뚫렸다.
하지만.
선장이 내미는 카드를 받아들지 않았다.
한 걸음 슬쩍 뒤로 빠졌다.
“글쎄. 당신들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고 덥석 미끼를 받아 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상대가 간절한 입장이다.
천천히 듣고 결정해도 좋겠지.
돌려 말하는 법은 모른다.
“너희가 추구하는 목적이 뭐냐?”
가까이 다가온 선장이 슬쩍 말을 홀렸다.
“송구스럽습니다만,잠시 자리를 옮겨 주셨으면 합니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그가 크게 외쳤다.
“전원! 키니스 항구로 들어간다! 뱃머리를 돌려라!”
“알겠습니다!”
부푼 돛이 부드럽게 돌아갔다.
“으펙!”
다시 한차례 빈속을 게워 내고, 갑판에 주저앉은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저 남자는?”
아이작이 이 배를 발견한 원인이 된 녀석이다.
선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슬쩍 바라봤다.
“가지고 계신 의체 개발에 참여한 연구원입니다. 원래 키니스 항구가 아니라 키른만에서 저분이 의체를 장착해 주기로 했는데,이런 문제가 생겨 버렸지요.”
선장실로 따라 들어섰다.
“혼자 들어가지.”
단호한 말에 부관 밋시는 한숨을 푹 쉬며 걸음을 멈췄다.
“그래도..
“나 대신 바깥 좀 잘 봐달라고.”
“알겠습니다.”
부관도 못 들어오게 한 넥스몬드는 문을 닫고 입을 열었다.
“뭐든 전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와 함께만 해 주십시오.”
간절한 눈빛.
처음부터 지나친 저자세다.
가입을 거절할 생각도 없지만.
아직 선장의 손에 들린 다섯 장의 카드를 바라봤다.
“왜 다섯 장이나 내밀었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선장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물론 보여 주신 능력입니다. 물건을 숨겨야 하는 저희에게는 완전히 규칙을 뒤엎는 능력입니다.”
“그런가? 뭐가 얼마나 들어갈지도 모르고 너무 기대하는 거 같은데.”
선장은 씩 웃었다.
“아닙니다. 무게와 공간의 제약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고?”
“어차피 저희가 다루는 건 작고 섬세한 게 대부분입니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정확히 전달하는 게 중요하죠.”
어차피 가입할 생각이었지만.
점점 호기심이 강해졌다.
강화 신체와 같은 물건들을 제국 어디로 전달하려는 걸까.
다른 어떤 물건들이 있을까.
“그리고?”
“정보력 입니다.”
“웬만한 정보력 없이는 이 사건에 절대 끼어드실 수 없었을 겁니다.
방금 전의 습격을 철저히 기획한. 국경 수비대보다 훨씬 강하시겠죠. 솔직히 어디서 이걸 알아내셨는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이건,그냥 우연이지만.
굳이 털어놓을 필요는 없겠지.
“좋아. 세 번째는?”
잠시 망설이던 선장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적어도 황실의 편은 아니실 게 확실합니다. 황실을 지지하면 불을 질러 제국군을 따돌리셨을 이유가 없습니다.”
〈전격적인데.〉
황실의 편이 아니라서 회원으로 초대한다니.
방금 제국 국경 수비대로부터 벗어 나서일까?
위험한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다.
“.너희는 황실을 적대하나?”
그는 왼쪽 눈썹을 미묘하게 까딱 움직이곤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어째서지?”
선장은 이상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그러나 한 글자 한 글자 분명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딴 걸. 싫어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선장이 말을 이었다.
“저희는 문명이,규칙과 체계가 지배하길 원합니다. 침해받을 수 없는 신성한 지위가,그에 부합한 소수가 모두의 위에 서서 살아 있는 시대를 짓누르길 원하지 않습니다. 망령들에게 봉사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럼 어쩔 셈이지?”
“저희가 주도하는 상업 연결망을 점점 더 망령들의 사회를 파괴할 정도로 발전시킬 겁니다.”
그의 말에는 숱한 의심의 순간을 극복한 확신이 있었다.
세계가 바뀌어야 한다는 믿음.
가라앉아야 할 것,부정될 것과, 떠오르고 긍정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단단한 생각.
“너희가 인재를 탐하는 이유도..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망령들은 결코 순순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사회적 혁명. 청산을 수행할 힘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굳이 저희 상인들에 국한될 필요는 없겠지요. 가능성만 있다면,일단 섭외를 시작합니다.”
“•••흐음.”
유베나 블랙베리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강자.
분명 이 세계에 그리 친화적으로 보이지는 않았겠지.
‘검은 카드’가 나에게 내밀어진 건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목적한 회원권이고, 굳이 여기서 안 받는 게 웃기는 짓이다.
하지만 그 전에 지적해 주고 싶은
일이 있었다. 녀석들의 계획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곧 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은 대륙 전역을 휩쓴다.
어떻게 재미를 보려고 해도...
한발 떨어져서 볼 수 있는 지역 따위는 없는 커다란 전쟁.
전 대륙이 모두 휘말리니까.
“그리고 마왕이 강림한다. 너희가 만든 연결망이나 기반 따위는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참혹하게 무너질 거야.”
폐허 속에서 용사들이 나타난다. 그들이 반신처럼 모든 걸 향유하는
세계를,상인 연합이 좋아하리라고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그들의 이상은 실패한다.
“어..
〈흐흐.〉
아이작이 옆에서 히죽거렸다.
마지막까지 여유를 잃지 않으려던 선장은 나를 멍하니 바라보며 눈을 낌쁴 였다.
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지다 퍼뜩 정신을 차린 둣 다시 똑바로 올라왔다.
“마. 왕 말입니까?”
〈어이,한 번에 너무 흑 갔잖아? 진도 조절 좀 해 주라고.〉
이런.
상인 연합의 주요 인물이라지만 마왕과 관련된 대화까지 자연스레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너무 아이작과의 대화에 익숙해져 있던 탓이다.
당황해하는 선장의 표정을 보며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다.
“전쟁이 일어날 건 알고 있겠지?”
넥스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엠버메어가 완벽한 대응을 준비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
‘완벽한 대응’인가.
여기고 저기고 다들 기스-제-라이만 철석같이 믿고 있다.
순방하는 황제는 어차피 가짜고.
네크로멘서는 살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까?
“그건 실패한다.”
..r
나는 미래를 증언했다.
단호한 말투에 선장이 당황했다. 눈빛에 여러 감정이 꺾여 비쳤다.
그것들은 페이지가 뒤섞인 책처럼 복잡하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지만 당장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의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지금까지 보여 주신 걸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저보다는 훨씬 넓은 경치를 보고 계신 분일 테니까요.”
선장이 말을 이었다.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전쟁을 막고 싶다.”
일단 여기까지.
진행 중인 시나리오의 클리어를 위해서는 이것부터 해야 한다.
이후로는 마왕 강림까지도. 막고 싶은 걸까.
하지만,그럴 경우 서큐버스님은 사라진다.
물론 지금 그녀를 돌이켜 본다면 어딘가. 기이한 존재.
감정은 변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불투명한 의구심은 조금씩 일어난다.
- 달그락.
고개를 흔들었다.
거기에 대한 생각은 최대한 미뤄 두고 싶었다. 떨쳐내듯 선장과의 대화를 이었다.
“나 역시 제국 남부를 기반으로 황실을 적대하려고 한다. 오늘은 너희의 의중을 확인하러 왔지만..
- 스숙!
선장이 느슨하게 내민 검은 카드 다섯 장을 손에 몰아 쥐었다.
“내 생각보다도 협력적인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복잡한 감정이 스쳐 갔던 선장의 얼굴에 기쁨의 감정이 떠올랐다.
“대사관에 곧바로 회원으로 등록, 회합 때 전파하도록 하겠습니다.”
회합 같은 것도 여는 건가.
이번 생에 만나지 않은,블랙베리 같은 녀석을 안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아 다행이다.
선장이 말을 이었다.
“저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까지
알고 계시지요?”
“물건을 구해 주는 거 아닌가?”
유베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비싸고 좋은 것부터 해서,돈으로 못 사는 물건을 구하려 하거나, 운송 서비스를 원할 때.
이야기를 들은 넥스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건 대부분 구할 수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세계?”
창밖을 바라봤다. 하얀 포말들이 선체에 부딪쳐 일어났다.
바다는 아무것도 팔지 않지만, 파도는 인간의 수많은 탐욕과 열망을 짊어지고 실어 나른다.
바다에서 얽어낸 것,하늘에 쏘아 멸어진 것,땅 위에서 거둔 것과 그 아래에서 파낸 것까지.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자유 연합,엠버의 상인까지 모두 포함하는 집단이니까요.”
최첨단 강화 신체를 밀수해 내는 것에서 짐작했지만,단순히 제국에 국한된 집단이 아니었다.
게다가 엠버메어라니.
기스-제-라이의 황제 암살을 아는
것도 거기까지 영향력이 뻗어 있는 덕분일지도.
그곳에서는 뭘 가져올 수 있을까?
“그리고..
상상에 잠겨 있는 내게,선장은 동쪽을 조금 더 바라보며 말했다.
녀석의 목소리에 묘한 뿌듯함이 섞여 있었다.
“꽤나 시간이 드는 일입니다만. 아주 먼 동쪽. 새로운 세계에 있는 물건까지 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위험을 부담하신다면 비싼 값으로 육도 가^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