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82화 (282/458)

297화 Unearth (17)

깜짝 놀라 선장을 바라봤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선장은 꽤나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로만 들어 온 동방.

동방은커녕,아직 자유 연합에도 가 보지 못한 처지다.

동방에서까지 물건을 구해 올 수 있다는 녀석들의 고리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때 였다.

〈위신 좀 지키지 그러냐? 여기서 너무 감탄하면 좀 없어 보인다고. 어차피 복제품(레플리카)일 텐데.〉

아이작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복제품.

예전에 녀석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본토에는 갈 수 없다. 경험할 수 있는 건 작은 섬 하나뿐. 동방의 작은 놀이공원 같은 거다.]

잠시 뜸을 들인 후 나는 선장에게 물었다.

“그건 혹시 본토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섬?”

내 말을 들은 선장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까지. 거기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본토는 저희도 최근에서야 알아낸 곳인데..

나를 향한 녀석의 평가가 그 즉시 올라갔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넥스몬드가 눈을 두어 번 천천히 깜빡인 뒤 말을 이었다.

“본토로 가는 길은 아직 개척하지 못했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말한 동방은 섬입니다.”

하지만 아이작은 의외로 홉족한 기색이었다.

〈흐음. 이 녀석,본토가 있다는 건 알고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제법 기특한걸? 가짜밖에 보지 못하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녀석의 말을 듣던 나는 불현듯 궁금증이 생겼다.

= 왜 자꾸 가짜라고 부르는 거지? 좀 더 가까운 작은 섬이라고 하면 충분하지 않나?

가짜일 것까지야.

하지만 까마귀는 작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고 싶으면 흠집을 내면 돼. 밖으로 흐르는 걸 관찰하면 진위를 파악할 수 있지.〉

〈아파하는 것도,쾌락에 젖는 것도, 그리워하거나 의심하는 것도 모두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신경도 체액도 모두 그대로지만. "한 번 더 복제’되었을 때의 위화감이 내게는 분명 잡혔어.〉

= 너는 진짜 동방에 가 본 적이 있다는 거냐?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위험하고 아무것도 없다. 수백 년

‘죽어 버린 세계라고?’

〈그래. 네크로멘서들이나 좋아할 만한 곳이지. 어지간한 녀석들은 그곳에 널린 죽음에 곧바로 먹혀 버리겠지만. 당시에는 너무 바빠서 깊숙이 살펴 보지는 않았어. 여기서 할 일이 너무 많았거든.〉

“저..

아이작과의 대화가 너무 길었다. 선장이 나를 갸웃거리며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섬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은데. 구하고 싶은 걸 말씀해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분위기를 잘 읽는 녀석이다.

뭐든 구해 주겠다면...

고민할 필요는 없다.

곧바로 원하는 걸 이야기했다.

“루-룸도 구할 수 있나?”

44.!"

선장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폐 안에 숨을 가득 담은 채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살짝 눈썹을 꿈틀거린 그는 참았던 숨을 천천히 골랐다.

“마도공학의 액체 말씀입니까?”

- 달그락.

투구 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당장 원하는 건 없다. 전폭적으로 힘을 강화하는 전직. 거기엔 대량의 루-륨이 필요하다.

영구적 힘의 변화에 루-름만큼 직결되는 건 없다.

나만큼 제대로 쓸 수 있는 녀석도

없을 거고.

세계를 나눠서 생각해 보자.

제국 황실은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루-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고, 나냐우를 비롯한 T&T가 루-륨을 탈취하려고 했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는 처절하게 경험했다.

두 번째로 자유 연합.

그들이 보유한 루-룸은 절대량이 무척 적다.

자유 연합 의원,카린 크렉소르의 협조를 받아 철인들에게 잔뜩 긁어

모았지만 채 한 병도 되지 않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가까운 엠버에 있는 루-륨 또한 구하기 쉽지 않을 건 명백하다.

루-룸은 엠버메어에서 동력액으로 사용하는 물건.

엠버의 실력자들이 제국의 비역 이상으로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비교적 멀리 떨어진 복제된 ‘섬’이 개척지가 되어야 할지도.

동쪽으로 희망이 길게 늘어졌다.

선장이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의뢰부터 역시 범상치 않으시군요. 구해 드리겠습니다.”

표정에서 알 수 있다.

루-름의 가치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상대.

그럼에도 구해 주겠다는 선언에 믿음이 간다.

이들과 만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가는 이걸로 치르지.”

- 스윽!

차가운 건틀렛을 허공에 넣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으로 손이 들어가며 밀수품을 꺼냈다.

말캉한 반죽 덩어리 같은 의체는 긁힌 곳 하나 없이 안에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멀뚱한 허공을 열고 물건이 튀어 나오는 건 몇 번을 봐도 적응되지 않는 광경인 듯했다.

선장은 체신 따위를 챙길 여유는 없다는 둣,눈썹을 꿈틀대며 입을 살짝 벌린 채 감탄을 거듭했다.

“아. 대가는 이번에 저희를 구해 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냥

저희 회원으로 오시기만 해도..!” “아니,의체는 그냥 가져가라.”

〈흐흐흐...)

의체를 포기한다.

여기는 모종의 확신이 있었다. 절실히 필요한 물건이라면 분명 아이작이 말렸을 테니까.

나에게서 루-륨을 빼내 자기에게 넣는 것도 못 하게 했던 녀석이다.

나에게는 별 필요 없고,상대에겐 위험을 감수해가며 밀수해야 했던 물건이라면 그냥 주는 게 낫다.

몇 번 거절하던 선장이 못 이기듯 의체를 받아들였다.

감탄과 경악에 가득하던 눈빛이 한층 더 호의적으로 변했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가에 뿌듯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뭐든 해 줄 것 같은 표정의 그를 보고 물었다.

“의체 같은 건 누가 장착하지?”

“.수요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유실된 신체를 대체하려는 자들은 물론이고,물렁한 살과 근육보다는 제어장치가 부착된 튼튼한 금속을 몸에 달고 싶은 자들,굳이 수련을 쌓지 않아도 주먹으로 바위를 부술 만큼 강해지고 싶은 자들.”

거기서 잠시 멈칫한 선장은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아니,수련을 쌓더라도 신체를 강화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지요. 서서히 노화되는 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도 물론 포함됩니다.” 선장은 코트를 한 손으로 잡았다.

미묘한 손동작이,그가 잡은 게 옷자락만이 아님을 알게 했다.

“어쩌면 대부분의 인간이..

“이것을 원한다고 봐도 되겠죠.”

진청색 코트와 함께 선장의 몸이 길게 펼쳐졌다.

활짝 열린 어깨와 가슴 쪽은 하얀 뼈 대신 차가운 은색 금속이 들어 있었다. 그 주위를 감싸며 촘촘하게 부푼 가슴 근육은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물질이 아닌 특수한 섬유로 제작한 것처럼 보였다.

- 철컥. 철컥. 철컥

동시에 팔부터 다리까지 여기저기 열리는 몸 곳곳에는,제어에 따라

발사되거나 휘둘러질 수 있는 장비 들이 가득 차 있다.

하나하나 비할 데 없이 날카롭고, 사용될 각도와 시점조차 예측하게 어렵게 설계된 무기.

그중에서도 유난히 시선을 끄는 장비는,

- 쿵. 쿵. 쿵..

선장의 가슴 깊숙이 달려,혈액을 사방에 펌프질하는 작은 기계였다.

〈호오.〉

〈인공 심장이다. 기본적으로 맥박 없는 게 개량된 형태이긴 하지만, 취향에 따라 박동을 넣어서 썼던 녀석들도 있지...〉

아이작의 시대에도 이런 것들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이야기.

“사실 저는 4년 전에 사망했어야 했습니다만,이 녀석 덕분에 아직 살아 있습니다.”

선장이 손가락으로 뛰는 심장을

가리켰다.

“그 이후로 여기저기를 바꿔가고 있지요..

의체 밀무역을 수행하는 까닭에 본래의 몸을 버린 것일까.

아니면 몸을 버렸기에 이런 일을 맡고 있는 것일까.

선후나 맥락은 지금에야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이 정도로 자신을 내보일 정도로, 상인 연합의 영사一

선장 넥스몬드가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몸을 이 정도까지 변형시켰다면,

수색대와 싸워도 승부를 가르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물론 공멸을 바라는 상인 따위는 없겠지만.

“그럼 왜 모두 몸을 바꿔 끼우려 하지 않는 거지?”

그렇다고 보기에는 지금껏 꺾은 적들 가운데 기계화된 몸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숫자는 적었다.

공급의 문제가 있다고 해도.

충분히 영향을 발휘할 만한 자들, 이를테면 상위 기사나 후작에게서 동력/제어장치와 차가운 무기질의 금속으로 갈아 끼운 신체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사벨,레안드로,근위 기사단, 푸른 사자 기사단,지금까지 만난 소녀 공작 휘하의 모든 유령들.

그중 누구의 시체에서도 그러한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정수를 홉수해야 하는 시체들은 대부분 충분히 관찰했다.

냉담하고 납작한 시선으로 보았다 해도 이런 개조를 놓칠 리 없었다.

넥스몬드는 즉답 대신 갑판 위를 바라봤다.

그 시선 끝에는 아직 어지러움을 털어내지 못한 가짜 선원이 힘겹게 난간을 짚고 서 있었다.

멀미는 여전하지만,비린 냄새로 코끝을 간질이는 바닷바람에서 싱그 러움이라도 느끼는지 수평선을 바라 보며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저분은 최고 수준의 의체 전문 의사입니다만,본인의 육체만큼은 어느 한 곳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부작용이나 외부의 시선을 떠나, 기계를 몸에 이식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진 분은 꽤 많습니다.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지요. 구태여 논리가 필요한 영역은 아닙니다. 그리고..

심장을 기계로 대체한 넥스몬드는 방금 전의 감상적인 말투와 달리, 사뭇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인체의 핵심 부위를 갈아 끼우기 시작하면 검기에 도달할 수 없게 됩니다.”

“검기..?”

“고대로부터 내려온 ‘깨달음’은 순수한 인간의 몸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장부臟 M, 골수,혈맥,신수腎水,상중하초. 이를 통해 영營을 일으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힘을 얻지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 핵심 부위가 기계로 바꿔 끼워지면 삼초기화드焦氣化가 일어 나지 않고,표리의 운기가 완전히 어그러집니다.”

넥스몬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합니다. 제가 완전히 이해하는 단어들은 아닙니다만.” 이쪽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렵지는 않다.

그때 였다.

〈아니다.〉

= 응?

〈고작해야 인간의 몸 따위가 뭐 그리 소중하고. 대체할 수 없는 것이겠느냐? 인간도 아닌 주제에 그따위 고정관념에 갇힐 이유는 조금도 없지.〉

〈마법으로 개조를 하든,공학으로 개조를 하든,길만 뚫렸다면 힘의

운용은 상관없다. 어차피 둘 모두 일정 수준에 이르면 비슷해지지. 아니,몸 안에 길이 뚫려 있지 않아도. 운용하는 방법만 기억하면 얼마든지 새롭게 뚫을 수도 있다. ‘뒤’의 거미줄을 건드리는 단계에 한 번이라도 이르렸다면.〉

아이작의 말이 옳을 것이다.

장부臟勝 따위는 없는 나도 쉽게 검기를 쓴다.

〈인간이 눈으로 보는 건 거미줄이 그렇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듣는 것도 맡는 것도 말하는 것도 닿고

느끼는 것도 그렇다. 운기를 통해 영營을 일으키는 건 그냥 한 가지 규칙에 불과하다.....〉

홀린 둣 아이작의 말에 빠졌다.

= 그럼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미 그런 단계는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데.

아이작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나는 혼 자체가 제약에 묶여서 어렵다. 그렇지 않았다면

스스로 힘을 복구하고 있었겠지.〉

그런가.

까마귀의 설명을 듣자,선장에게 다시 돌려준 강화 신체가 한층 덜 아깝게 느껴졌다.

아이작이 말한 수준까지 단기간에 도달할 수는 없겠지만.

넥스몬드는 침묵에 빠진 나를 보며 자신의 말을 곱씹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콩! 콩! 콩!

누가 묶어 놓은 것일까.

순풍을 받은 채,파도를 가르는 뱃전에 매달린 낚싯대가 흔들리며 작은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보자 별안간 떠오르는 인간이 있었다.

“혹시 알까 해서 말인데..

“물어만 주십시오.”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별빛청여우를 해안에서 기다렸던 인간에 대해 물었다.

“40대 초반. 짙은 금발이고..

혼자 다 자란 소나무 굵기의 원뿔 막대를 빙빙 돌리고,간단히 닻을

올린 뒤 돛도 혼자 펴던 인간.

결국 후작에게 살해당해 닻줄에 묶여 키 아래에서 덜렁거리는 최후를 맞았다.

하나씩 설명을 듣던 넥스몬드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모르는 인간은 아니겠군.

“그 녀석도 상인 연합인가?”

“후우..

넥스몬드가 긴 한숨 끝에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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