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84화 (284/458)

299화 Unearth (19)

몬티는 끄로프 가슴 가죽을 천천히 벗겨 냈다.

몸길이 80cm - 120cm 둘레는 30cm 정도.

주둥이는 앞쪽으로 돌출.

길고 가는 체형의 끄로프 종족은 앞다리를 통해 땅속 깊이 구멍을 파고 사는 걸로 유명하다.

호사가들에게만 유명한 또 하나의 가치가 있었다.

살짝 보풀이 이는 부드러운 감촉과 몹시 뛰어난 방한력,사라지지 않고 은은히 도는 그 윤기.

가장 비싸게 쳐주는 끄로프 가슴 가죽을 손상 없이 편하게 벗기려면 배부터 잘라 여유를 줘야 했다.

팔꿈치,정수리,발목 부근에 이미 칼집이 나 있던 끄로프 가죽은 마치 원래 분리돼 있던 옷처럼 벗겨졌다,

살점 위가 없는 참혹이 한 덩어리 곁에 더 쌓였다.

시체에 익숙한 자라도 고개를 혼들 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몬티는 집중해서 뼈와 살이

물린 곳에 칼날을 집어넣었고,과일 껍질을 깎듯 섬세하게 손을 조금씩 흔들어 가며 가죽을 벗겨 냈다. 칼날이 시체의 손을 향했다.

땅을 너무 파서 뭉툭해진 앞발의 발톱에 저항의 흔적 따위는 없었다.

- 툭.

몬티는 마지막 한 구를 곁에 내려 놓았다.

이제 끝이다.

가죽을 벗기는 건 즐겁지만 과로로 죽은 크로뜨에 한정해야 했다. 그는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을 부하들을 향해 말했다.

“다 됐군. 이제 그만..

돌아가자,라고 말하려는 때였다.

몬티는 말을 끝내기 전 오싹함을 느꼈다.

주위의 온도가 내려가 있었다. 변화는 눈으로도,귀로도 아닌 방금 몬티가 여럿 벗겨낸 살갗으로 왔다.

춥다.

태양은 아직 환했기에 시간 때문은 아니다.

네크론 신사회 정식 단원 몬티는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시린 한기를 느끼며 천천히 주위를 돌아봤다.

그리고 곧 이유를 깨달았다.

모두 사라져 있었다.

몬티는 입을 꾹 다문 채 그 정적에 동참하는 걸로 공포를 극복해 보려고 했다.

아무리 자신이 가죽 벗기는 일에 집중했다고 해도,곁에 분명히 있던 부하들이 지금처럼 아무런 기척도 없이 사라져 버린 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몬티는 소리를 죽여 침을 삼키고

조심스레 칼을 빼 들었다.

부하들이 있던 곳을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걸어갔다.

당장이라도 크게 소리쳐 부하들을 부르고 싶었지만,소리를 내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은 점점 더 고요해졌고,온도는 조금씩 더 내려갔다.

지금이 낮이라는 사실이 가짜 같아 섬뜩했다.

칼을 든 손이 떨리지 않게 하려고 억지로 힘을 줘야 했다.

숨소리도 죽인 채 바닥을 살폈다.

아무 흔적도 없다.

부하들이 앉아 있던 일인용 의자는 넘어지지도 않은 채 그대로다.

어떻게 그 많은 인간이 한 번에 증발할 수가 있단 말인가?

직감 한구석에서 당장 도망쳐야 한다고 속삭였지만 그는 이 모든 게 가짜 같았다.

- 휘이잉...

작게 부는 바람이 몬티의 머리를 흩날렸다.

빼곡한 숲 사이로 와서 약할 대로

약해진 바람이었지만 그 정도로도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몸에 소름이 돋았다.

- 툭.

그 순간 허공에서 무언가 떨어졌고, 이미 땅에 닿아 소리를 낸 순간과 거의 동시에 몬티는 뒤로 돌아 손에 쥔 칼을 휘둘렀다.

동물적 감각이라고 칭찬해 줄 수도 있는 꽤 빠른 반응 속도였지만 땅에 떨어진 건 별게 아니었다.

그건 그냥 작은 부츠 한 짝이었다.

작은 부츠...

몬티는 부츠가 떨어진 자리를 위로 죽 올려다봤다.

그 자리에는 굵은 나뭇가지에 목이 매달린 부하가 있었다.

하나,둘,셋...

찾아 헤매던 부하들.

자리에서 갑자기 사라진 부하들이 말라 죽은 높다란 나뭇가지에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었다.

- 툭. 툭. 툭.

두어 개의 느슨한 부츠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건 잎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들렸다. 바람이 멈췄고, 몬티의 숨도 멈췄다.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했지만 말이 되는 게 없었다.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이런 짓이라는 게 가능한가?

갑자기 위로 떠올라서 집단 자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질러야 한다.

그제야 몬티는 위에 매달린 것과 같은 올가미가 목에 조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언제,라는 말이 막 입 밖으로 뱉어지려는 순간이었다.

- 꾸욱!

목을 아예 끊어 버릴 것 같은 강한 압박이 전해졌다. 숨은커녕 이대로 목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버둥거리지도 못한 채 곧장 눈이 뒤집혀 가자 줄이 약간 느슨해졌다. 가느다란 숨 한 가닥만 쉴 수 있을

정도였다.

눈이 다시 돌아오자 줄은 또다시 짧게 조여졌고,입에서 거품이 흐르고 의식이 희미해졌다.

올가미가 길어지고,다시 짧아지길 몇 번씩 반복한 뒤였다.

“지하에서 굴 뚫는 녀석들.”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몬티는 그제야 등 뒤의 누군가를 인식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목에 걸린 올가미가 모든 것이었다.

“지하에서 굴을 뚫고 있는 마흔 넷, 아니 방금 한 마리가 과로로 죽었군. 마흔세 마리 끄로프들. 그들이 그냥

도망치지 않는 이유가 뭐지? 너희 따위가 하나씩 다 따라가서 잡을 수 있을 리 없을 텐데.”

정확한 숫자에 몬티는 홈칫했다. 이자는 대체 누군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다는 말인가?

“고문도 지겹고. 순순히 아는 걸 모두 털어놔라. 그러면. 그래도 뭐 해 줄 건 없지만. 그래도 털어놔라.”

그 순간 상대가 뿜어내는 기운에 몬티는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아니지,이렇게 해 볼까..

온몸의 신경을 신음하게 만들던

- 딱.

상대는 건틀렛을 낀 두 손가락을 몬티의 눈앞에서 튕겼다.

그리고,살짝 벌린 손가락을 그의 눈앞 10cm 정도에서 좌우로 천천히 흔들기 시작했다.

설마 최면이라도 걸려는 걸까?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은신 능력과 힘을 가진 자의 최면이라기에는...

너무 조악하다.

“끄. 끄흡..

천천히 흔들리는 두 손가락 앞에서, 그는 머리를 흔들어 가며 저항했다.

하지만 호흡 부족으로 아예 의식을 잃을 것 같으면 느슨해지고,정신을 똑바로 차릴 만큼 숨을 쉴 수 있게 되면 눈치를 채고 조이는 올가미의 움직임.

호홉이 통제되는 상태에서 인간은 극단적으로 나약해지고 순종적으로 변한다.

몬티의 눈빛이,느리지만 확실하게 풀려가기 시작했다.

질식당해 죽은 인간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후. 잘 안 되는군.”

기습은 지나칠 정도로 완벽했지만, 정식 스킬로 등록되지 않은 최면의 활용은 어려웠다.

아이작의 옛 모습을 떠올려 가면서 최대한 따라 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말한테는 잘 통했는데.

그래도 숨이 끊어지기 전 암시가 성공해서 다행이었다.

“끄로프 족장이라..

유일하게 대화가 가능하다는 녀석.

족장을 인질로 잡아서 옆 마을에 가둔 뒤, 끄로프들이 땅을 파게 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냈다.

목표는 이 아래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금광.

땅을 파는 데 최적화된 종족이지만, 이미 파여 있는 굴을 다니거나 풀밭 정도를 파는 게 훨씬 쉬운 일.

단단한 지층을 새롭게 개척하는 건 여지없이 중노동이다.

그럼에도 금광을 향해 점점 아래로 몰아붙이고 있는 까닭에,끄로프들은 종종 죽어 나가고 있었다.

시체가 될 때까지 혹사시키고 죽은

뒤엔 껍질을 벗겨 모피로 활용한다.

슬라임이 직접 말할 만큼 안타까운 상황에 처한 종족임에 틀림없다.

- 스윽!

허공에 다시 몸을 숨기고,인간이 말해 준 옆 마을을 향해서 빠르게 이동했다.

크로뜨 족장을 감시하던 자들까지 모두 살해한 뒤,탁자 아래 머리를

박고 있는 족장을 바라봤다.

보통 크로뜨보다 몸통은 작았지만 머리는 훨씬 더 컸고,다른 녀석들의 퇴화한 눈과 달리 커다란 눈동자는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일어나 봐라.”

“저,저요..?”

족장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두 발로 일어서 설 수 있을 정도로 팔과 다리가 발달해 있었는데,땅을 파는 것보다 그 위를 걷는 데 더욱 적합한 형태 같았다.

- 딩딩. 딩딩.

팔다리에는 두꺼운 족쇄와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주위로 음산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움직이지 마.”

“네?”

- 스숙!

크로뜨 족장의 대답도 듣기 전에 칼날이 네 개의 수갑과 족갑을 모두 잘라냈다.

여덟 개의 쇳덩이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손가락 두께의 족쇄가 매여 있던 크로뜨 족장의 붉은 팔다리를 보며 말했다.

“인간은 다 처리했다. 부락에 있던 녀석들까지 전부 다.”

“어이쿠머나!”

족장이 깜짝 놀라며 짧은 팔을 뻗어 제 머리를 감쌌다.

“그럼. 저희 부락을 구해 주신.

겁니까? 어이구,어이구.”

갇힌 채 어지간히 학대당한 건지, 여기저기 털이 빠진 족장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했다.

“아니지,아니지,당연히 엄청나게 구해 주신 거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안 되지.”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족장은 뭉툭한 꼬리를 위로 세우고 양 손바닥을 모아 치켜들며 몇 번씩 인사했다.

“딱히 고마울 건 없는데..

어차피 슬라임의 도움을 받기 위한

작업이다.

“부락에 가서 이제 그만 일하라고 해도 될 거다.”

그때 였다.

“어이쿠..

짧은 팔을 뻗어 한껏 예를 표하던 족장이 문득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긴 수염을 움찔거렸다.

“그게. 재촉하던 인간들이 사라진 이상 무리하지는 않을 겁니다만..

“뭐지?”

“그래도 계속해서 땅을 파겠지요. 그러기 위해 태어났으니까요. 땅을 파라고, 땅속을 다니라고 만들어진

“그럼 이곳에서 계속 지낼 건가? 혹시 그 금광이라는 걸 찾으려고?”

족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지반을 너무 깊이 파헤쳐 놓은 데다,안 좋은 기억으로 가득하니까요.”

“으홈,으흐흠..

끙끙대는 소리를 내며 앓던 족장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뭐라고?”

“이 정도 팠는데 금광이 안 나오면

헛다리 짚은 겁니다. 저희들이 어디 다른 곳이라도 파 드릴까요?”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어딜 파 달라고 한단 말인가.

황실 비역으로 가는 지하 통로가 떠올랐다.

물론 터무니없는 위험을 이들에게 뒤집어씌울 순 없다.

게다가 루-륨을 보관하는 비역은 하늘,땅,지하가 전부 막혀 있다고 아이작이 공언했다.

뚫지도 못할 테고,뚫는다고 해도 잿빛 기사 같은 존재 때문에 끔찍한 꼴을 보게 되겠지.

“글쎄. 나와는. 아마 이 정도로만 엮이는 편이 좋을 거다.”

언제 어디서 황실의 유령,마왕의 추종자들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들을 뛰어넘는 잿빛 기사 같은 불가해의 위협까지도.

족장의 눈빛이 어딘가 애처로웠기 때문일까.

나는 하지 않아도 되는 변명까지 뱉어내고 말았다.

“시간도 없는데,이미 잘못 들쑤셔 놓은 게 하나둘이 아니라서.”

“어이쿠. 들쑤신다라... 너무 낙담 마십시오.”

족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내 말을 받았다.

“저희가 또. 말 그대로 땅을 파는 종족이잖습니까? 아무렇게나 헤집고 다니는 것 같고,아무것도 얻는 게 없는 거 같지만. 으흠! 아래쪽에서 마음껏 놀다 보면 영양을 갖춘 토지 들이 저 깊은 곳에서 위로 올라오게 됩니다.”

“고갈된 땅을 다시 회복시킨달까, 생각하지도 못한 영양분들이 골고루 섞이며 올라오곤 하지요. 올라오는 것들 중에는 이미 위에 있던 토질과 결합해서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도

족쇄에 묶여 있던 크로뜨 족장이 갑자기 새롭게 보였다.

그의 말대로다.

이런 일이 슬라임과 친목을 맺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

서둘러서 좋다는 보장 따위는 없고, 느긋하게 간다고 해도 나쁠 건 없다.

그리고...

땅이 비옥해진다라.

“그러면 여긴 어떠냐?”

지도를 펴고 남쪽에 있는 도시를 가리켰다.

“어이구. 인간들의 도시군요.”

하지만 말과 달리 그리 놀라지는 않는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네크론에게 박해받았던 녀석답지 않게 평온한 반응이었다.

“까마귀와 함께하는 자가 너희를 보냈다고 해라. 영주에게 전해지면 박대는 안 받을 거야.”

안 그래도 훨씬 우월하던 상황.

유블람의 같은 무리를 괴멸시키고, 상인들의 협조까지 구해 놓았다.

그녀가 이미 영주 권한을 행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름은. 루비아다. 농사짓는 걸 도와줄 수 있으면 고맙겠군.”

“물론입니다. 땅을 비옥하게 만드 는 것이야말로 저희가 잘하는 분야죠. 어떤 씨를 뿌려도 감당 안 될 만큼 잘 자라게 해드리겠습니다.”

시나리오 클리어.

그건 루비아를 영주로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영지의 발전과 주위의 신망에 따라 결정되는 통치 레벨을 올려야 한다.

무기의 도시 그라스미어 같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한다면,영지의 근간은

어쨌거나 농업.

곡식 한 알을 뿌려 두 알을 거두던 땅에서, 서너 알을 거두면 어떨까?

사전에 영주가 뭔가 했다는 암시만 주어진다면.

영주에 대한 농민들의 신뢰는 무척 높이 올라갈 거다.

자연스레 통치 레벨도 그렇겠지.

이들이야말로 루비아가 에라스트 영주가 된 다음,시나리오 클리어를 하기 위해 중요한 원동력이 될 거다.

슬라임 덕에 정말 적절한 녀석들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그 도시에서 될 수 있는 겁니까?”

끄로프 족장이 따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네크론 무리에게 납치당해 고생했을 텐데,회복력이 무척이나 강한 녀석인 듯하다.

“글쎄. 나는 다른 곳을 좀 다녀 볼 생각이야. 너희가 계속 에라스트에 있다면 만날 수 있겠지.”

영주가 되는 모습,훌륭하게 통치 하는 모습은 꼭 보고 싶으니까.

언젠가는 그곳에 가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족장 녀석의 말처럼,영양을 갖춘 토양이 하나둘씩 위로 올라오게 하려면.

내가 해야 될 일이 하나둘 계속 떠오른다.

슬라임이 말한 부락의 구출이 그런 토양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상태창.’

[끄로프 부족에게서 당신의 평판이 50 상승합니다!]

[끄로프 부족은 지하 종족입니다. 끄로프 부족과 접촉하는 다른 지하

종족에게도 당신의 평판이 상승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거리는 좀 있지만,남은 녀석들을 구해서 나쁠 건 없다.

끄로프 부족만큼은 아니라도 분명 어딘가 쓸모가 있겠지.

- 투캉!

우리를 묶은 자물쇠가 수수깡처럼 가볍게 잘렸다.

“끼이잉! 끼이잉!”

창살 안에 갇혀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녀석들이 하나둘씩 바깥으로 천천히 기어 나왔다.

슬라임의 구출 리스트.

고블린,끄로프 부락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는 녀석들은... 바로 고산 판다족이다.

희귀 아인종.

숲에 사는 마물들 중 누구보다도 약한 탓에,마왕의 축복을 가장 적게 받았다고 알려진 녀석들.

“끼 잉?”

서로 간에 대화가 통하는 체계적인 언어를 가진 건 분명해도,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전혀 없다.

큰 녀석들은 몸을 굴러서 밖으로 빠져나오거나 아예 우리에 갇힌 채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는다.

활발하게 네발을 움직여서 뛰어 나오는 건 모두 작고 어린 녀석들.

우리 안을 살펴봤다.

들은 이야기대로.

철창 안에는 따로 한 겹 더 사슬에 묶인 인간이 있었다.

“설마. 설마. 누가 온 걸까? 우리 판다들을 해치려는 건 안 돼..

긴 초록색 머리칼로 눈가가 모두 가려진 더벅머리 인간.

우리가 열려도 밖으로 나오지 않은 어린 판다족은 그의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손목과 발에 감겨 있던 쇠사슬을 한 번에 잘라 냈다.

더벅머리 남자는 잘린 사슬과 함께 바닥에 털퍽 주저앉았다.

“우리 아이들..

중얼거리는 입가에서 피가 홀렸고, 몸 곳곳에 붕대가 감겼지만 그마저 새어 나온 피로 붉게 얼룩져 있었다.

손을 계속 떠는 모습을 보니 고문

때문에 잘 쓰지 못하는 모양이다.

치유 따위를 쓸 수 없다는 게 약간 안타깝게 느껴졌다.

“당신이 연구가인가?”

바깥에서 죽인 네크론 회원들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학대하면 스트레스로 죽어 버리고. 입맛은 까다로워서. 아무거나 주면 안 먹고 굶어 죽어 버립니다. 아무, 아무런 쓸모가 없어요. 살코기도 정말 맛이 없고...]

[그럼 왜 기르지?]

[수도 부자들에게 애완용으로 팔려

했었는데. 산을 벗어나면 곧 죽어 버려서. 판다 연구가를 납치해서. 고문하던. 중이었습니다.]

최면은 한 명 한 명 실험 대상으로 연습할 때마다 한층 더 능숙해져서,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들을 정도까지 되었다.

정수 흡수 없이 생겨난 최면 Lv.l 스킬을 조금 뿌듯하게 바라봤다.

협박이나 고문도 정보를 획득하는 방법이지만 부정확하고 거칠다.

그건 곁가지로만 활용하고,제대로 이야기를 들으려면 역시 최면암시가 적절하다.

“당신이. 판다들을..

남자가 더듬거렸다.

“해치러 온 건 아니다. 인간들은 다 죽였다.”

시선이 바닥을 헤맨다.

아무래도 끄로프 족장에 비해 훨씬 큰 충격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알지도 못하는 인간 따위의 심리 치유는 내 관심이 아니다.

“끼이 잉!”

손짓 발짓을 해가며 고산 판다족과 녀석이 대화하기를 한참一

[판다 부족에게 당신의 평판이 60 상승합니다!]

[판다는 몇몇 강력한 부족으로부터 일방적인 호의를 받고 있습니다. 판다를 도운 사실이 알려질 경우 해당 부족에게 기본 평판을 추가로 얻게 됩니다.]

하지만...

정말 별 쓸모는 없는 녀석들인가. 최소한 슬라임에게 생색내기로는 괜찮겠지.

달라붙은 어린 판다들을 다리에서

하나둘 떼어냈다.

한참 굶어서 그런지 모두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하고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럼. 웬만하면 바깥으로 나오지 마라. 산속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 어디에도 끼어들지 마.”

내가 그곳까지 가지 못하고 ‘다시’ 시작하더라도,이들이 살아갈 미래에 일어날 일은 ‘정해져’ 있다.

전쟁,마왕,용사.

깊은 곳에 숨어 현실을 망각하는 게 이들의 최선이다.

한 번씩 뒤를 돌아보는 판다족들과,

연구가라는 남자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뒤 생각에 잠겼다.

다음 목적지는...

내가 정해야 한다.

아이작에게 의견을 묻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녀석은 아직 인벤토리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지금 그 안에서 회복에 전념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함부로 꺼내기도 꺼려진다. 무엇보다도.

[정체불명의 주술인형] [몰입 연산...]

[현재 영자靈구 변환 중...] [인격분리에 의해 변환 효율이 크게 증가합니다.]

아이작이 들어 있는 인밴토리 위에 표시된 단어들.

무슨 짓을 하는 걸까?

잘되고 있을까?

혹시 이 안에서 자신의 의사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변환중〉에 꺼내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은 없다.

끝난 뒤 다시 생각해 보자. 머릿속에 지도를 펼쳤다.

슬라임이 말한 이종족 부락 가운데 마지막 한 곳은 너무 멀다.

여기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몰라도, 대륙 서북쪽 끝.

서리 바실리스크가 있는 장소니까.

나중에 생각하고,일단 이 근처에서 레나와 공략했던 던전부터 하나둘 도는 게 효율적인 동선이다.

〈섬뜩한 전갈 소굴〉,〈개미 토굴〉, 〈시들어 버린 미로〉,〈시체 출금소〉, 〈맹독 하이에나의 구덩이〉를 모두

클리어하고〈고문 미궁〉앞에 섰다.

지금보다도 훨씬 약할 때 클리어한 던전이다.

슬라임의 부탁을 받아 구했던 핏빛 사슴 고블린 부락과 끄로프 부락, 고산 판다 부족과 이들의 차이점은 크지 않다.

어차피 인간에게 마물이라 불리고, 착취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내가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결국 기준은 하나,슬라임의 부탁일 뿐이다.

그의 호의가 자잘한 부락들을 쓸어 버렸을 때 얻을 약간의 경험치보다 중요하기에 다르게 움직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클리 어!]

[고문 미궁의 보스,부두 골렘을 처치했습니다.]

[랭크 판정...]

[난이도 판정...]

위치를 알고 있던 던전은 이것으로 끝났다.

아이작은 아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제 필드에서 만난 녀석들을 찾을 차례.

- 파삭!

부서진 늪의 악령이 사방에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다.

[용사 포인트를 산정합니다!] [C트리플 플러스 랭크 인카운터 클리어:

205포인트]

[난이도 가산: 820포인트]

[1,025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현재 구매력: 11.4% (일반)]

[세계부정 Anti-World 을 선택한

상태입니다.]

[구매력 최대치에 도달할 때까지 상점 이용이 불가합니다.]

알고 있는 던전을 다 쓸어버리고, 늪의 악령까지 쓰러트렸지만 아직 용사 상점은 사용할 수 없다.

구매 가능한 품목은 하나로 한정.

포인트가 100%에 도달해야 살 수 있는 하나뿐.

B더블 플러스 랭크인 ‘사막의 신’을 다시 잡는다면 용사 포인트가 다시 한 번 오르겠지만,3%를 넘지 않을 거다.

이제 늪의 악령 같은 녀석을 잡아 봤자 흡수할 정수도 나오지 않는다.

A급이나 S급 던전을 공략하거나.

인카운터 보스를 잡아야 한다.

지금 알고 있는 S급 보스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퀴즈를 내는 거북이 와들루스.

하지만 녀석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S급은 무리다.

아무리 내가 강해졌다고 해도 그런 거북이가 흉포하게 날뛰기 시작하면 감당할 자신이 없다.

높은 스탯과 심안 특성,명경지수의 도움으로 고작 가능했던 게...

도주.

아이작도 놈을 재우는 걸 선택하지 않았던가?

녀석이 무작정 나를 공격하지 않고 일단 퀴즈부터 풀게 한 걸 떠올렸다.

와들루스가 본격적인 전투태세에 돌입하면 난이도가 S랭크 이상으로 폭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A랭크라면 어떨까.

지금까지 던전은 스킬도 거의 쓰지 않고 순수한 스탯만으로 끝냈다.

‘상태창.’

[해골병사 Lv.31(301)]

[체력: 142]

[힘: 142]

[민첩: 14幻 [지혜: 144]

150에 가까워진 스탯과 항마抗魔 (A마이너), 지각방어(B플러스),해골기사로의 전직을 거치며 얻은 모든 특전까지

이거라면 A랭크 던전들도 충분히 해 볼 만하지 않을까.

물론 지금 하는 생각을 슬라임이 안다면 좋아하지는 않을 거다.

인벤토리에 계속 아이작을 넣은 채 이동을 계속했다.

변환 중이라는 메시지는 그대로다. 다음 행보 하나하나를 어디 물어볼 상대도 없이 내가 정할 수밖에 없다.

슬라임이 희망하던 대로 학대받던

이족 부락 몇 군데를 구해 줬으니, 반응을 살피러 가 볼까.

목적지는 일단 유블람 쪽.

던전 탐색도 빼놓을 수 없었기에, 동부 산맥을 천천히 훌으며 일단은 그라스미어 방향으로 향했다.

푸릇함이 돋아나는 산길 위로 나비 한 마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갔다.

슬슬 봄이 오는 모양이었다.

나비 아래로 이름 모를 꽃씨들이 날아올랐다 가라앉고,또 떠오르길 반복했다.

산속을 샅샅이 탐지하며 다녔지만 던전으로 보이는 건 없다.

이미 털릴 대로 털려,우연히 얻어 걸리길 기대하는 건 무리인 모양.

그라스미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깊은 산속에 진을 치고 있는 인간 무리가 느껴진다.

먹이를 노리는 산적.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산적 무리를 쓸어 본 적이 있지만,역시 그들은 던전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용사 포인트도 없다.

주는 것은 오직 극미량의 경험치.

애초에 강한 녀석이라면 성안에서 강도짓을 하지,생활도 불편한 깊은

산속에서 이럴 이유는 없으니까.

가끔 실력 있는 자들이 한둘 섞여 두목 노릇이라도 한다면 그 무리는 그럴싸해지고,상인들과 정기적으로 통행세 계약을 맺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느껴지는 기척은 그런 무리는 아니다.

- 끼이익.

혼자 길을 걸어가는 행인을 향해 시위가 당겨진다.

묻지도 않고 화살부터 메기는 자들. ‘이놈들인가...,

던전에서 만난 모험가에게 들었던 악명 높은 유랑 산적단.

지금은 그라스미어에 가까운 곳에서 활동하지만 언제 루비아가 통치하는 에라스트 주변으로 사냥터를 옮길지 모른다.

치안의 불안이 통치 레벨 상승에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처리해 두려는 건 약간의 의무감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이번 행인은..■

굳이 도움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 피잉.

一 피이잉.

나무 뒤에 숨은 두 산적이 동시에 활시위를 놓았다.

작은 소음이었지만 그마저 바람이 부는 소리에 맞춰 당긴 덕에 한층 묻혀 있었다.

가지고 놀다 죽이기라도 하려는 듯 화살은 다리를 노렸다.

- 툭.

정확한 조준이었지만,땅에 부딪힌 화살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허공에 튀어 올랐다.

“어어?”

바위 뒤에 숨은 산적들이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 피잉.

다시 한 번 시위가 튕겨졌다.

하지만 급한 마음을 반영한 탓인지 화살은 한 발도 명중되지 않았다.

거기서 산적들이 바로 도망쳤다면 판단력에 칭찬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칼을 꺼내 길 앞에 나섰다.

좌우,앞뒤에서 가죽으로 잘 제련된 옷을 입은 열 세 명이 나타났다.

커다란 칼과 창,어디서 주웠는지 금속 테두리를 두른 방패까지 가진 산적들은 행인을 완전히 포위했다.

도복을 입은 행인은 허리의 칼도

빼들지 않고 두 팔을 아래로 태연히 늘어뜨렸다.

‘여기서 만난 줄이야.’

나무 위에 걸터앉아 오랜만에 만난 챈들러를 바라봤다.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서둘러 작위를 넘기려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그라스미어로 왔겠지.

챈들러를 포위한 산적들은 손에 든 칼과 창을 붕붕 휘둘러 대며 거리를 좁혔다.

“돈도 요구하지 않는 거요?”

챈들러는 아예 어깨를 으쪽하면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여섯 걸음 앞까지 다가온 산적들이 방패 뒤에서 창을 찌를 준비를 했다.

두목으로 보이는 절뚝거리던 마른 인간이 입을 열었다.

“우린 수컷은 별로 시간 안 끌어. 그냥 빨리 죽이지.”

아까 화살이 다리를 겨냥했던 건 단순히 실력 문제였던 것 같다.

“제대로 찾았군. 당신들이. 핏빛 트롤단이오?”

그러자 산적들이 흠칫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뭐야? 현상금 사냥꾼이야?”

하지만 나무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 외에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

잠시 머뭇거리던 산적들이 손에 든 무기를 고쳐 잡았다.

”근데,혼자 왔어?”

“무슨 배짱으로. 혼자 와?”

왼쪽에 서 있던 남자가 긴 창으로 챈들러의 옆구리를 찔렀다.

방패도 갑옷도 없는 행인의 심장을 그대로 꿰뚫어 버릴 만한 속도였다.

챈들러는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몸을 틀어 옆에서 찔러 오는 자루를 잡고 오른쪽으로 쭉 밀었다.

별로 힘도 쓰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는데,찔러 오는 관성을 이용해 멍하니 서 있던 다른 산적의 목을 그대로 창이 꿰뚫었다.

고작 반걸음과 가벼운 손목 스냅 움직임만으로 한 명이 즉사했다.

칼은 뽑히지도 않은 채였다.

“죽어라!”

창 세 자루가 다시 챈들러를 향해 찔러 왔다.

다수가 하나를 상대할 때는 여러 방향에서 찌르는 창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어설픈 자세지만 인간을 죽여 본 경험만은 확실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챈들러는 아직도 칼을 뽑지 않고 칼집을 휘둘러 세 자루 창을 한꺼번에 쳐냈다.

그리고 그 반동을 이용해 바깥으로 움직이며,외곽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산적의 등 뒤로 돌았다.

- 퍼억!

접근전은 안 되겠다고 순간적으로 판단한 두목이 날린 화살이 산적의 팔에 박혔다.

“뭐야! 빨리 빠졌어야지!”

그 사이에 챈들러는 칼을 휘둘러

둘을 더 죽였다.

“두목! 우리 다 죽습니다!”

칼이 등 뒤에서 꽂히고,배에 꽂힌 산적들의 단말마가 산길에 구슬프게 메아리 쳤다.

포위망은 이미 무너졌다.

거꾸로 첸들러 한 명이 빙빙 돌며 기습적으로 강도들 한 명 한 명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바르게 움직이는 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순간적인 속도와 움직임의 효율은 산적들과 완전히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마치 나무토막들과 그 나무를 타는

원숭이의 움직임 같았다.

“하아,하아,하아..!”

고작 몇 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남은 산적들은 호흡이 흐트러져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이 같은 자리에서 위치를 별로 움직이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몹시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푸하아..!”

바로 옆에서 한 명 한 명이 죽어 자빠지는 극도의 긴장과 공포 속에서 무의식이 호흡을 빠르게 했다.

하지만 과한 호홉은 공포와 발작을 한층 심하게 만들 뿐이었다.

강하게 휘두른 칼집으로 목 뒤를 맞고 숨이 끊긴 산적이 마지막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후우..

챈들러는 그제야 숨을 천천히 크게 내쉬었다.

몇 분도 안 되는 사이 열이 넘는 인간을 쓰러트리면서 카타나는 아예 뽑지도 않았다.

‘제법이군.’

[검술 교육 Lv.2가 활성화됩니다!]

[피교육자의 약점이 당신에게 모두 파악된 상태입니다.]

[교육을 실시할 경우 상대의 스킬 습득,스탯 상승, 집중력과 이해력이 일시적으로 크게 상승합니다.]

어차피 차기 그라스미어의 영주가 될 녀석.

전폭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이왕 만난 이상,한 겹 정도 인연을 더 만들어 둬도 괜찮겠지.

대충 던진 나뭇가지가 땅에 부딪쳐 땅 안으로 완전히 파고들었다.

나뭇가지가 파낸 흙이 편안히 쉬고 있던 첸들러의 손까지 튀어 올랐다.

- 스롱!

챈들러가 열셋을 죽이면서도 뽑지 않던 칼을 즉시 끝까지 뽑았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초봄 햇빛이

칼날 끝에 부서졌다.

그가 극도로 긴장한 채 나뭇가지가 날아온 방향을 살폈다.

좀 더 쉬게 해 줄걸 그랬나?

하지만 어차피 호흡도 완전히 가라 앉아 있었고...

몸을 날려 땅으로 사뿐 내려섰다. 챈들러의 잔뜩 긴장한 얼굴을 보자 순간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어디의 고명한 분이시오?”

“글쎄. 뭐,산적 두목이란 생각은 안 드나? 딱 여기서 나타났잖아.”

챈들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중요한가? 덤벼 봐라.”

그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두 손으로 쥔 칼을 위로 곧추세웠다.

그리고 오른발을 천천히 앞을 향해 조금씩 내밀었다.

“그건 뭐냐?”

“고수를 상대할 때의 자세요. 설사 지더라도 한칼이라도 먹일 수 있게 하려는 거지. 그런데..

첸들러가 살짝 입술을 앙다문 뒤 씹어 뱉듯 물었다.

“덤벼 보라더니,칼은 안 뽑으시오?”

나는 쓰러진 시체들을 턱으로 쑥 가르키며 말했다.

“너도 안 뽑았잖아?”

별거 아닌 도발이었지만 챈들러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런 산적들과 비교하다니..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쉽게 흥분한 게 부끄러운 둣 고개를 흔들었고,천천히 얼굴색이 돌아왔다.

- 빠•악!

하지만 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닥에 놓인 창대를 들어 챈들러의 다리를 후려쳤다.

“실전에선 짧은 흥분도 치명적이다. 너는 명예를 자극할 때 너무 쉽게 평정을 잃는 경향이 있지.”

“끄육. 다,당신은 대체 누구..

“산적 두목으로 생각하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 빠악!

나는 다시 팔을 후려쳤다.

본격적인 교육 과정이 한참 남아서 별로 세지 않게 때렸지만,그게 훨씬 더 수치스러운지 챈들러의 얼굴이 불덩이처럼 새빨개졌다.

심지어 길고 검은 머리칼까지 붉게 변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 빠악! 빠악!

“오른쪽으로 칼을 휘두를 때 이가 꾹 맞물리고,”

- 빠악!

“왼쪽으로 휘두를 때는 이가 살짝 떨어지는군. 공격이 다 읽힌다.”

- 빠각!

“크윽..

물론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극히 작은 움직임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입술은 붙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이건 첸들러를 직접 몇 개월 동안 교육하며 알아낸 경험이다.

하지만,칼을 휘둘러 오던 챈들러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정말. 당신의 말대로요. 나조차 알지 못했던 버릇인데. 한 번 보고 어떻게 이런 것까지..!”

- 빠각!

“칼을 아래로 내려치기 직전 숨을 깊게 들이쉬더군. 그 때문에 속도도 느려진다. 가장 강해야 할 내려치기가 빠르지도 위력적이지도 않아. 사선 베기가 네 강점이 아니라 내려치기가 약점인 거다.”

- 빠악! 빠악!

이 역시 녀석을 한참 교육하던 중 알게 된 거다.

그나마...

내가 직접 찾은 게 아니라 옆에서 챈들러와 함께 수련을 받던 레나가 발견한 사실.

- 빠악!

“크허 억!”

레나를 생각하다 보니 힘 조절을 잘 못 하고 가슴을 세게 때려 버렸다. 챔들러가 바닥을 굴러갔지만.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내려치기 직전 지금처럼 치명적인 약점이 생기는 거다.”

대충 얼버무렸지만,챈들러는 나를 굳게 믿는지 열렬한 충격과 신뢰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가장 완벽한 지적〉에 3회 연속 성공했습니다.]

K검술 교육〉스킬의 숙련도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당신을 향한 피교육자의 신뢰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피교육자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 빠악!

“일단 여기까지 하지.”

더 하다가 얘가 죽을 것 같으니까. “가,가르침. 정말 감사드립니다.”

“원래 저 대신 산적들을 소탕하러 오셨던 고인이시군요. 모자란 모습을 보여드려 부끄럽습니다.”

“아니,뭐..

산적들을 죽이려고 한 건 사실.

굳이 따지면 오해도 아니라 별말 없이 있었다.

어쨌건 감회가 새로웠다.

첸들러와 처음 만난 건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의 장난감이었을 때.

막 동방에서 돌아와,멀껑히 산길을 지나가던 챈들러를 기스-제-라이가 잡아 와 내 첫 번째 ‘먹이’로 줬다.

설원 트롤에게 두개골이 깨질 만큼 약했던 시기.

싸우면 결코 이길 수 없을 상대를 흡수한 덕분에 한차례 비약적으로

강해졌다.

두 번째 만남은 서로가 자유롭게 길을 가던 상태.

하지만 그때도 녀석의 기술들을 잘 알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꽤나 수월한 싸움을 했다.

지금이야...

- 빠악!

“뭐냐?”

“크윽. 방심하고 계신 것 같아서 한번 노려봤습니다..

비교 불가능한 압도적인 수준.

비슷한 녀석 수십이 한 번에 덤벼 들어도 상대는 되지 않는다.

챈들러를 기준점으로 삼으니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실감했다.

예전에는 무척 힘겨웠던 이 척자로 아예 절 수 없을 만큼 강해진 거다.

나는 교육용으로 사용되다 몇 개나 부러진 창들을 바라보며 첸들러에게 물었다.

“행선지는?”

“그라스미어. 그라스미어입니다.”

녀석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말을 잇는다.

“그라스미어에 저희 아버지가 살고 계십니다. 혹시 그쪽으로 이동하시면 소소하게나마 오늘의 은혜를 되갚고 싶습니다만..

영주위를 계승할 예정이라는 얘긴 없이, 말을 돌려서 하는 녀석이다.

“뭐,그러지.”

은인이라는 걸 알게 되면 녀석의 눈빛이 재밌게 변할 거다.

챈들러를 앞에 세워 그라스미어로 향했다.

아이작이 인벤토리로 들어간 이후 오랜만에 가지는 동행.

챈들러는. 내가 당연히 초면이고, 이모저모로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

녀석이 무척 익숙하다.

실력도,성격도 자세히 알고 있다. 어떻게 죽게 되는지까지.

무척 친근함을 느끼는 상대.

오히려 혼자 다닐 때보다도 한층 긴장이 덜한 기분이다.

챈들러와 함께 움직이는 건 간만에 그라스미어의 상황을 확인해 보고 싶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무사 수행이라도 다니던 건가?”

막 동방에서 돌아온 녀석이다.

그가 아이작이 말한 ‘가짜 섬’에서 돌아온 건지,아니면 ‘죽음의 땅’을 경험한 건지 듣고 싶었다.

“그렇습니다.”

챈들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녀석은 먼저 말을 걸어 준 게 무척 반가웠던 모양이다.

“동방에. 갔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와는 다르게, 이 부분은 의외로 숨김없이 순순히 입을 열기 시작한다.

“거기는 어떤 곳이지?”

“아직 국가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곳입니다. 도적단이 설치고,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중앙군이 아닌 부족 무사들이 나서는 상황이죠.”

챈들러를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무사〉들은 그렇게 입나?”

그는 자신의 도복을 한차례 슬쩍 정돈하며 멈칫했다.

“어색합니까?”

“아니 뭐,잘 어울리는데.”

옷으로 트집을 잡을 생각은 없다. 이제 영주가 되면 저렇게 마음대로 입기도 어려울 거고.

약간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하곤, 첸들러가 말을 돌렸다.

“무엇보다. 동방에서는 해가 지면 ‘밤의 행렬’이 시작됩니다.”

“밤의. 행렬?”

“예. 낮에는 해에 늘린 채 인간의 주위만 돌거나,그늘 아래 붙어 있던

귀신들이 일시적으로 몸을 얻은 뒤 인간을 잡아먹습니다.”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동방에 관해 아는 게 전혀 없기도 했지만,이런 내용이었다면 진작 물어볼걸 그랬다 싶었다.

“거주지나 육체를 가진 녀석들이 아니라 토벌을 할 수도 없고,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그 때 그 때 싸워 없앨 수밖에 없죠.”

그러니 문명이 발전하지 못한다며 녀석이 안타까워했다.

“작은 하나의 부족에서조차 귀신과 싸울 수 있는 무사를 꼭 필요로 합니다. 어쨌거나.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수행하기는 좋은 곳이죠.” “지리는 어떻지?”

“삼 년 동안 사방을 걸어 다니며 수행했습니다. 해안선을 아마 백 일은 걸어야 할 만큼 큰 곳이긴 합니다만, 일단 사면이 바다로 막힌 섬입니다.”

섬이라면.

아이작이 말한 동방의 작은 공원.

‘복제’된 장소다.

“가는 자들은 많은가?”

“아닙니다. 뱃길이 좁고 험합니다. 갈 수 없는 바다 사이의 좁은 길을 알아야 하는 거라서. 게다가 가도 힘만 들고 별로 얻을 건 없습니다.

어디 금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저는 그저 수행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동방에 벌써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수행.

첸들러가 말한 귀신 무리가 혹시 용사 포인트를 준다면,동방 전체가 아예 하나의 거대한 던전이 된다.

용사 상점에서 ‘세계부정’을 빠르게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지도.

그라스미어 영주와 유베와의 연을 생각하면,챈들러를 섬으로 데려다준 것도 상인연합이겠지.

선장 넥스몬드에게 카드 다섯 장을

받아 둔 상황이다.

나도 ‘레플리카’에 가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다.

“으음..

인벤토리 안에 있는 아이작을 흘끗 다시 바라봤다. 그래도 동방으로의 이동은 꽤 큰 결정.

복제품으로서의 작은 섬뿐 아니라, 본토에도 가 봤다는 상대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게다가 루비아 시나리오가 끝나지 않은 상황.

너무 멀리 떨어지기는 꺼려진다.

동방으로의 여행은 마음에서 잠시

무기의 도시 그라스미어.

우람한 회색 성벽이 보인다.

오십 미터의 간격을 둔 이중 성문, 마찰이 생길 때 나타나는 성벽 위의 〈메신저〉까지 있다.

기계공학으로 작동하는 수성守域용 거대 발리스타.

예전에는 말하지 않고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손을 좀 봐줘도 좋을지도 모른다. 수녀에게 흡수한 기계공학

Lv.3 정도로도 전부 분석이 가능한 병기 였으니까.

물론 마법사들이 원거리에서 화염을 쏘아 내거나,유령들이 잠입해 부수면 쓸모없는 성냥개비에 불과하다.

모든 걸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무척 곤란하지 싶다가도,현실만큼 무의 미가 만연한 곳은 없다는 생각에 그만 진저리가 나 버린다.

오십 미터.

성벽은 점점 가까워진다.

첫 방문에는 마스커레이드를 써서 지났고,이후에는 은신으로 가볍게 통과했다. 지금은 어딘가 쭈햇쭈햇한 챈들러 녀석 곁에서 기척을 완전히

개방한 채 성문으로 걸어간다.

멀리서 낯이 익은 녀석이 보인다. 이십 미터...

속도를 줄이지 않고 걸어가자 문을 지키던 녀석이 창을 들고 이쪽으로 똑바로 달려온다.

거대한 몸인데도 한 마리 나비처럼 뛰어오는 움직이는 발놀림이 예사가 아니다.

웬만한 인간 허리만 한 팔뚝을 보자 잡은 창이 지나치게 가벼워 보인다.

‘수문장이었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항상 혼자 성문을 지키던 녀석.

“아,제가 앞에 가야 했는데..r

뒤에 있던 동행이 긴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다짜고짜 공격을 해 오는 녀석은 아니었는데. 챈들러가 끝까지 말을 잇기도 전이었다.

- 쿵!

사뿐 내려앉은 남자가 창대로 땅을 찍으며 똑바로 서서 외쳤다.

“외곽 수문장 카일! 예를 표합니다. 제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영주가 따로 지시라고 한 건가?

“크흠!”

수문장을 보고 한 걸음 뒤에 있던 챈들러가 헛기침을 했다.

“카일 형님,원래 안 그러셨잖아요. 아직 영주도 아닌데 군례를 취할 건 없어요. 오랜만에 왔다고 너무..

오우거와 트롤의 같은 몸을 가진 수문장은 그제야 챈들러를 보더니 말했다.

“아,연락한 대로 도련님도 오셨네? 아이고,반가워라. 잘 오셨어. 안에 들어가쇼.”

“네..?”

첸들러가 수문장 근처에 다가가자

그가 슬쩍 공자를 막아서며 말했다.

“어허,무지 반갑긴 한데,그래도 신분증은 보여 주셔야죠. 우리 규칙 있잖아,그쵸?”

대조되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내가. 3년 만에 돌아. 왔는데..

“일행이다.”

“통과입니다!”

대체 영주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수문장의 태도는 극적이었다.

나는 첸들러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챈들러는 사태 파악이 안 되는지 당황한 눈빛으로 나와 수문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죠?”

“보내 준다잖아. 들어가자고.”

- 끼이이익. 쿵.

영주가 기력을 되찾은 뒤 신경을 더 썼는지,양옆으로 도열해 있는 경비병들의 훈련 상태는 예전보다 더 뛰어나 보였다.

수문장의 안내를 받아 어떤 검문도 없이 두 개의 성문을 통과했다.

안쪽 성문이 열리자 익숙한 망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여기서부터는 알아서 가지. 길은 물론 알고 있어.”

“정말 그러셔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몇 번이나 지나간 길이다.

“역시..”

수문장은 의미 모를 감탄의 눈빛을 보내고 뒤로 걸어갔다.

“카일 형님! 이 무슨. 이분이 대체 누구시기에..!”

“에? 일행이라면서 모르셨습니까? 흠. 영주님께 들으십시오. 수문장은 빨리 자리를 지켜야 됩니다.”

“뭐? 아니,아까는. 어?”

눈에 될 정도로 당황한 챈들러에게, 수문장은 바위처럼 거대한 어깨만 한 번 으족하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가자. 영주에게 볼일이 있다.”

“저,저기 말입니다..

나는 앞장서 휘적휘적 걸었고, 그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뒤에서

황급히 따라왔다.

“흐읍,후우..

첸들러는 무척 힘들게 나를 쫓았다.

귀찮은 설명을 영주에게 떠넘기기 위해 녀석이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조금 빨리 걸었다.

- 툭.

식은땀을 홀리는 챈들러의 다리를 창대로 쳤다.

하지만 힘든 탓에 통증에 제대로 반응도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될 때 보니 다리의 균형이 조금

안 맞는데..

“하아,하아..

“나중에 뼈 좀 맞추지.”

“뼈. 말입니까?”

챈들러가 흠칫한 표정이었다.

“나중에.”

골격 변용骨格變容.

하지만 지금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레벨이 더 올라야 가능한 얘기. 혹시 챈들러를 써서 스킬 경험치를 올리다 보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신의 사자햇놓시여!”

달려 나온 영주의 목소리였다.

‘마스커레 이드.’

[-45% 흡사합니다.]

“.은혜를 베푼 신의 사자使者여! 누추한 성에 다시 찾아 주셔서 정말 영광이옵니다.”

“반갑다.”

그제야 호흡이 가라앉은 첸들러는 눈을 끔백거리며 그라스미어 영주를

바라봤다.

“아버지,저도 왔습니다만.. 영주도 놀라는 표정으로 첸들러를 바라봤다.

“예정대로 잘 도착했구나. 그런데, 이분과 함께 들어온 거냐? 혹시나 무슨 실례를 저지른 건 아니겠지?”

“그게. 우연히 만나서..

“크흠,어쨌건 제대로 인사드려라. 바로 이분이 우리 가문을 저주에서 풀어 주셨다.”

이제야 상황이 조금씩 파악되는지 챈들러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편지로 쓰셨던 바로 그분이..

“그래,덕분에 네가 새 삶을 얻은 것이야.”

제국 예법에 따르면...

첫 만남에서 투구를 쓴 채 자신을 소개하는 건 무례하다던가.

- 철컥.

자연스레 투구를 벗었다. 10분짜리 얼굴을 바라보는 챈들러의 동공이 깊숙하게 흔들렸다.

“미리. 말씀을 해 주셨더라면..!” 나는 수문장처럼 어깨를 으쪽였다.

물론 챈들러가 자신에 대해 모조리 털어놨어도 나는 침묵했겠지만.

언제나 설명은 귀찮은 일이다.

아이작이 새삼 내게 지난한 노력을 해 오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영주는 무언가 준비한 게 있다는 듯 나를 보며 말했다.

“아,잠시 제 집무실로 자리를 옮겨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지.”

“저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니, 너도 따라오너라. 곧 영주가 될 거 아니냐?”

천들러가 잠시 멈칫했다.

“내가 아는 건 너도 다 알아야지.”

일을 다 떠넘기겠다는 둣 단단히 힘을 준 말투였다.

두 부자父子와 나는 성에서 가장 높은 영주 집무실로 이동했다.

연병장이 한눈에 잘 내려다보이는 장소다.

영주는 선언하듯 말했다.

“저는 한 달 후 공식적으로 작위를 이양할 생각입니다.”

나는 첸들러를 흘끗 바라봤다.

“차기 영주?”

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영지와 작위 계승식을 대대적으로 개최할 예정이지요.”

챈들러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작위 이양은 알고 있었지만 계승식 얘기는 처음 듣는 듯했다.

“아버지,항상 허례허식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분 아니셨습니까? 전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이라면서요.”

“후후..

영주가 작게 웃었다.

“너도 들을 필요가 있지. 에라스트 상황은 알고 있느냐?”

“네. 작긴 하지만. 레이 백작님이 훌륭히 통치하던 곳이었죠. 최근에 돌아가신 걸로 압니다만.”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

“그분의 오물 같은 동생과 훌륭한 따님이 작위 계승을 경쟁하고 있다.”

영주는 이번에 나를 보고 말했다. 그 선언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

“바로 이번 저희 작위 계승식에서, 루비아 님을 에라스트 영주로 세우는 일까지 진행하려 합니다.”

논리가 이어지지 않는다.

“너희 계승식과. 루비아가 대체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당황해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도시들이 같은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힘과 명망의 차이는 존재하다. 무기의 도시,그라스미어 영주. 의심할 바 없는 명문가겠지. 남부에서라면 어느 영주보다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하지만 황제도 아니다.

황제가 임명한 재판관도 아니다.

최소한,후작위를 가진 인사가 황권 위임을 받아 판결해야 하는 상황.

백작위에 그친 영주가 황권위임을 받았을 리도 없다.

지지 선언을 한다고 해도 큰 의미 는 없지 않을까?

몇 마디 말 따위에 순순히 물러날 네크론의 무리는 아니니까.

계승식의 주인공.

그건 첸들러일 뿐이고,옆 도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언급하면 오히려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영주는 계속 공손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똑바로 된 답을 주지 않았다.

“하핫..

대신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사실,주연 배우께서 제게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루비아의 이야기다.

“.비밀 유지?”

“예,이런 상황까지 예측하신 무척 뛰어난 분입니다. 은공께 묻더라도, 계획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신신당부를.

받았습니다. 그 엄중한 경고를 감히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가까운 곳의 영주가 될 분이니까요.”

“으음..

루비아의 의도를 알기 어려웠다.

비밀 누설을 걱정하는 건가?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

그라스미어 영주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였다.

얼기설기 이어진 몇 개의 단추가 아니라,제대로 된 옷을 두르고 있는 느낌이다.

당장 꼬치꼬치 캐묻기도 곤란한가 싶어 망설이고 있을 때.

“이것도 한번 확인해 주십시오.”

영주가 품에 지닌 열쇠로 서랍을 열고,미리 준비해 둔 네모난 장부를 꺼내 건넸다.

첫 페이지부터 펼쳐 들고 읽었다.

“루비아와. 거래한 내역이라고?” 영주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렇습니다.”

[회계 Lv.l이 발동합니다!]

초보적인 식견으로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장부에는 그동안 루비아와 거래한 내역이 적혀 있었다.

아니,단어가 틀리다.

거래라기보다 일방적인 지원이라고 하는 게 훨씬 맞는 이야기.

장부에는 다른 인간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레이 커크.

일방적인 지원을 퍼붓는 루비아와 완전히 대조적으로,그는 거의 말려 죽이다시피 하고 있었다.

“유베의 활약입니다. 저보다는 사실 그 친구가 한 일이 훨씬 많습니다. 아직까지는 말입니다.”

영주는 소탈하게 웃었지만,장부에 쓰여 있던 수고는 웃고 넘길 만큼 가벼운 것들은 아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동안 유베와 그라스미어 영주는 나의 부탁을 넘겨듣지 않고,최선을 다해 루비아를 위해서 일한 것이다.

“도와줘서. 고맙다.”

“별거 아니지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하니 즐겁더군요.”

그라스미어 영주가 싱긋 웃고 말을 이었다.

“부족하지만. 앞으로 영주가 될 제 들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챈들러에게 믿는다는 눈빛을 보내며 아들의 손을 살짝 잡았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만,내가 협조할 수 있는 건 물론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

영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보여드리고 싶은 장소가 있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알겠다.”

영주는 나와 챈들러를 데리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핏빛 까마귀 조각을 지나,예전에 아이작이 봉인되어 있던 신전으로

- 쿠구구구구..!

거대한 문 너머로 광활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고,안쪽은 무척 밝았다.

움직이지 않는 골렘들과 주술사의 석관만 있던 장소가 예전과 다르게 생기가 홀렸다.

“영주님께 경례!”

- 쿵!

안에서 한창 훈련 중이던 백여 명의 병사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일제히 영주를 향해 경례했다.

처음 보는 무리였다.

“아,됐어. 하던 거 하게.”

영주가 손을 내저었다.

챈들러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아버님,이들은..?”

“몰래 키우는 자들이다.”

- 슈슈슛!

병사들이 훈련을 계속했다.

벽쪽에 세워져 있던 허수아비들이 모두 강철 화살에 꿰뚫렸다.

화살은 허수아비 뒤에 세워져 있는 두꺼운 목판까지 부숴 버린다.

개량 석궁을 압도하는 위력과 편의.

재빠르게 움직이면서도,팔목에 찬 장비에서 철탄을 쏘는 모습이 제법 인상적이다.

전쟁터에서도 본 적 없는 무기였다. 영주가 슬쩍 웃었다.

“감사하게도 상인 연합 정회원으로 와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소개를 받은 기술자와.

저희 쪽 대장장이들이 합작해 만든 장비입니다.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리 고 재료 수급이 어렵긴 합니다만.” “하앗!”

- 파각!

다음 조가 휘두르는 칼에 화살이 꽂힌 허수아비들이 쓰러져 간다. 그럭저럭 정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리다.

“언제부터?”

“은공께서 저희를 구해 주신 후에 양성을 시작했습니다. 늦었습니다만,

그 전에는 사실 의욕이 없었습니다.”

아이작 때문이다.

놈에게 실시간으로 생기가 빨리는 상황에서 의욕이 날 리가 없다.

해방된 지금은,아들에게 영주위를 물려주기 전까지 다양한 조치들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기고 노릇만 하다가 휩쓸리면 아무것도 안 남죠. 저희는 특히 국경 아닙니까?”

황실에 대한 은근한 반감.

넥스몬드 선장에게 혹시 내 이야기를 들은 걸까?

아니,어차피 이게 그라스미어 영주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영주의 눈빛이 묘하다.

이 병사들을 가지고 황실에 대적해 무슨 일을 할 수는 없다.

영주도 알고,나도 알고 있다.

이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검주급에 근접한 존재나 마법사가 전장에 끼어들기 시작하면 숫자는 의미를 잃는다.

당장 여기 있는 백여 명의 병사는 나 혼자서 십 분 안에 모두 넉넉히 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병사들은 보자 영주가

가진 삶의 의지만큼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날벌레도 거미줄에 걸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제자리에서 그냥 죽는 녀석들은 없다.

자연사에도 저항하기 위해 끝까지 이를 악다문다.

물론 영주는 현명하다.

검주는 4명밖에 없고,마법사#은 웬만한 일이 아니면 북방의 탑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

결국 황실에서 파견하는 검주 따윈 자연재해와 마주할 확률에 가깝다.

일상에서 매일 닿는 것들은 재해를 빌미로 날뛰어 대는 하찮고 남루한 무리들이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몰래 군사를 키우는 영주의 행동은 의외로 꽤나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병사들을 보고 무심코 말했다.

“훈련,도와줄까?”

그 순간 영주보다도,옆에 서 있던 챈들러의 눈이 선명하게 반짝였다.

“저도 시켜 주십시오!”

“그러셔도 되겠습니까?”

“어렵지 않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입은 은혜만 해도 하늘과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인사치레를 하는 영주에게 적당히

답례하고 병사들 사이를 향했다.

그라스미어의 전력을 올려놓는 건 나쁜 선택이 아니다.

차기 영주인 챈들러.

녀석의 나에 대한 호감은 최대치에 가깝다. 녀석이 쓸 수 있는 힘이면, 그건 곧 내가 세세하게 제어할 수 있는 힘이라는 뜻이다.

루비아를 돕기 위해 인간들을 표면에 내세워야 하는 일이 적을 리가 없다.

훈련시킬 가치는 충분하다.

“으... 으으.

크라켄에게 흡수한 스킬은 심지어 교육에서 조차 효과적이었다.

대련 중인 자들에게 약하게 공포를 홀려 넣는 것만으로도 실전 효과를 낸다고 여겨지는 걸까.

교육 스킬 경험치가 한층 빠르게 올라간 데다가,생각보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많았다.

[체술 교육 Lv.O을 획득했습니다!] [창술...]

[다양한 재능의 상대에게 집중적인 검술 교육을 수행했습니다.]

[검술 교육 Lv.3을 달성했습니다!] [제자 지정이 가능해집니다.]

[현재 제자 수: 0/10]

- 제자로 받아들인 대상은 대련을 통해 친밀도가 쉽게 오릅니다.

- 제자의 활약에 따라서,당신의 평판도가 추가 상승합니다.

재밌는 스킬이다.

[지정 가능한 상대입니다.] [지정 가능한...]

[.가능한...]

눈앞에 보이는 녀석들 백여 명이 모두 제자 지정이 가능한 상태.

물론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들을 제자로 삼을 생각 따위는 없다.

10명밖에 지정할 수 없다.

교육 레벨이 오르며 숫자가 늘어날지

모르지만,지금은 챈들러도 넣을까 말까 고민해 봐야 할 정도.

어쨌거나...

“나는 여기까지.”

짧게 말을 마쳤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병사들의 수준은 착실히 상승해 있었다.

전멸시키는 건 시간문제조차 아닌 녀석들이다.

허점은 말할 것도 없이 잘 보였고, 직접 때리지 않고 살기만 내뿜어도 목이 베이고 심장이 꿰인 것 같은 경험을 시켜 줄 수 있었다.

훈련 효율은 폭발적이었다.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은 어느 정도 메웠다.

훨씬 쓸 만한 병력으로 만들어 줬다.

어디든 따라가고 싶다는 챈들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몸을 빼내서 에라스트로 향했다.

‘은신. 탐지.’

기척을 숨기고 성문을 넘었다.

지하로의 이동에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지는 몰라도,도시에 끄로프들의 기척은 없다.

질주로 음직이는 나보다 녀석들이 훨씬 느린 건 당연하지만...

그라스미어에서 보낸 시간도 제법 길었는데.

에라스트가 아니라도,원하는 곳에 갔다면 물론 좋은 일이긴 하다.

- 스숙!

잠깐 도시를 둘러본 뒤 루비아가 있는 내성으로 움직였다.

소식은 들었다. 장부도 확인했다. 하지만 직접 루비아를 보고 싶었다. 아이작의 상태는 아직 그대로다. 유령들이 들어올 수 없는 결계라도

치지 않는 한 여기서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위험하다.

‘이상 사건’,‘누군가의 출현’만을 기다리며 잠복하는 황실의 유령들이 어디에 깔려 있을지 모르니까.

숨어서라도 보고 싶었다.

많이 변했을까?

내가 한 일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줬을지 궁금해진다.

활성화된 탐지 영역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잡힌다.

“저거야. 그라스미어 영주 즉위식 친선 경기에 나선다는 오우거지.”

다섯 명...

익숙한 복장의 인간들이 망원경을 들고 엎드려 앞을 염탐하고 있다.

“크크. 여기서 화살이라도 쏠까?”

“멍청아,관두라고. 저 괴물 암컷이 순순히 맞아 줄 리가 없잖아. 여기서 쏴 봤자 가지도 않겠다.”

“저렇게 밖에 있을 때 작업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지게 되어 있어. 두목이 다 계획이 있다고,망신은 공개적으로 줘야지.”

“끄응..

“이제 슬슬 들어가자.”

커크 무리가 떠났다.

망신을 준다고?

친선 경기?

그라스미어 영주가 말했던 계획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곧장 뒤를 밟을까도 싶기도 했지만, 일단 내버려 두고 내성 앞쪽 공터로 가까이 다가갔다.

- 쌔앵!

거대한 크기와 어울리지 않게, 칼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다.

놈들이 망원경으로 염탐하고 있던 상대는 크리스티나.

연속된 움직임이 무척 부드럽다.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한층 실력이 상승한 모양.

듬직한 모습이다.

역시 이 정도면 제자로 지정하기에 괜찮지 않을까.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크리스티나?”

익숙한 목소리가 공기를 간질인다. 열린 내성,공터로 향하는 통로.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모된 계단을 그녀가 걸어왔다.

내가 떨어져 있던 까닭일까.

상인 연합과 그라스미어 영주에게 도움을 요청한 덕분일까.

루비아는 아직 아무런 변고 없이 살아 있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一 ‘상태창.’

무심코 그것부터 띄워 버린다. 새로운 항목이 보인다.

[현재 통치 도시 - 에라스트]

[통치假 Lv.2]

- 아직 정식 영주로 등극하지 않은 단계에서 얻어낸 임시 레벨. 그러나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결과는 등극 시 곧바로 반영된다.

[통치 레벨은 영지의 발전과 주위 사람들의 신망에 따라...]

통치 레벨 2.

이미 반쯤 이겼다는 건가.

누군가의 압도적인 개입이 없으면 무난하게 영주로 등극하겠지.

“크리스티나. 정말 괜찮겠어요?”

하지만 루비아의 표정은 걱정으로 가득하다. 풍부한 몸짓으로 생생하게 전해지는 감정.

“문제없습니다.”

호위기사는 결의에 찬 둣,바위처럼 단단한 어조로 대답한다.

승리하건 패배하건,친선 경기로 뭘 어쩔 수는 없다.

특히 에라스트 영주위位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

경기에서의 사망이나 부상 따위를 걱정하더라도,크리스티나는 충분히 강하다.

커크 쪽에서 어떤 인물이 등장하건 그녀가 이길 텐데.

“하지만..

뭐가 걱정인지 알 수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목소리를 낮춰 살짝

입을 열었다.

탐지 스킬이 아니면 절대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속삭임이었다.

“저만 믿으십시오. 다른 것도 아닌 영주 자리가 걸려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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