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Unearth (24)
“하지만. 너무 위험한걸요.”
“걱정 마십시오. 이 정도는 위험도 아닙니다.”
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 걸까? 아무래도 삼촌 놈과 토너먼트에서 맞붙는 것 같은데.
영주 자리라니,친선 경기의 결과를 놓고 이면계약이라도 했단 말인가.
마침 수행원들이 루비아에게 다른 안건을 보고해 온 탓에,두 여자의 대화는 더 진전되지 않았다.
보란 듯 공터에서 훈련을 계속하는 크리스티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커크 놈의 계획은 뭘까.
에라스트에 잠복해 있는 내사과의 협조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에라스트에서 ‘특수 상황’이 생길 때만 개입한다던 그 유령들이,정말 토너먼트 따위에 끼어들까.
조사해 볼 필요는 충분하다.
루비아의 삼촌 패거리가 있는 곳에 숨어들어 갔다.
커크 놈의 머리칼은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테이블 위에는 독한 술병이 굴러다녔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도 한층 더 몰락한 모습이었다.
공작이 이끄는 유령.
정말 이런 녀석들을 도와줄까?
어쨌건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보티스의 대리자와 모종의 거래 관계다.
은신의 가호를 지닌 탓에 그들을 찾기 어렵다.
그들은 마왕의 가호 아래서 세계의 뒤편에 기워져 있어, 그 밖을 지나는 자들을 비웃을 수도,혹은 홈치거나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나 역시 그렇다.
레일리의 시체에서 빼앗은 은신은 내게 이미 안착된 스킬.
혹시 커크와 유령이 접촉이 있다면, 그 접촉을 은밀히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녀석이 진다. 날이 어두워졌다.
“콜록!”
파이프에서 뿜어진 자욱한 연기가 골방을 가득 메운다.
눈이 벌게진 채 입을 뻐끔거리며 한 모금 한 모금을 피웠다.
그보다 더 많은 양을 내쉬었다.
밖으로 빠져나오는 건 연기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후우. 이건 아니지.”
혈색이라곤 없고,얼굴 군데군데와 목에 검붉은 두드러기가 지저분하게 돋아난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의 눈 밑은 퀭했고 이미 몇 겹의 주름이 가 있었다.
“넌 왜 지랄이냐?”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끼어들었다.
“어떤 멍청한 새끼가 이딴 걸 아편 이라고 만든 거야. 이따위 순도로 기분이나 좋아지겠어?”
“유블람이 좀 이상해지긴 했지.”
저질 아편을 빨며 의견을 나누던 자들이 커크를 바라보고 말했다.
“형님,영주도. 아스포데 녀석도 어딘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독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스포데가 살아 있다고?
분명히 내 손으로 죽였다.
심장도 목도 몸과 분리된 상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글쎄다.”
하지만 그 주제는 진행되지 않았고, 약에 취한 탓인지 그들은 잡담이나
주워섬기며 쓰레기를 흡입하고 다시 내뱉었다.
계속 감시했지만 주위에 유령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럴 기미도 없이 반나절이 지났을 때였다.
누군가 터덜터덜 골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오! 물건 좀 가져왔냐?”
커크가 반갑게 남자를 맞이했다.
하지만 갸름하게 눈이 째진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후. 우린 다 망했습니다. 완전히 망했다고요.”
一 철컥.
어깨를 축 떨어트린 남자는 테이블 위에 올린 가방을 열었다.
빈 가방에는 약간의 은화와 커크가 영주가 되면 돈을 갚겠다는 쓰이지 못한 보증서,그리고 먼지뿐이었다.
앉아 있던 녀석들의 인상이 단번에 구겨졌다.
“뭐야,물건도 안 가져왔어?”
“아무도 거래를 안 하겠답니다.”
“또?”
“하아. 어떡합니까?”
주위를 돌아보던 커크가 자신에게 모이는 시선에 인상을 찡그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도 대책이 있으니까.”
“대책이요? 드디어 그분들이 우릴 돕는다고 합니까?”
“쉿! 말조심해라. 네가 그러다 죽고 싶은 거냐?”
“아니. 그래도. 너무 답답하니까 알고 싶은 거 아닙니까. 애들한테는 그런 식으로 운을 띄워 놓으신 거 같은데요?”
유령의 개입이 있다는 걸까.
망설이던 커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분들은 바쁜 것 같다. 한동안은 연락도 못 받았어.”
“이런 상황에서요?”
“하지만 내가 확실히 계획했다고!” 헛웃음이 나왔다.
바쁠 리가 없다.
에라스트에서 뭔가 기괴한 상황이 발생하는지 감시하는 게 주요 역할인 한가한 녀석들이다.
아무래도 커크 놈의 무능함을 보고 그냥 버린 모양이다.
루비아의 유능함은 놈과 비교되어
한층 더 부각되었겠지.
지나치게 거스르지 않는 한 당장은 나설 일이 없을 거다.
“그러니까 무슨 계획입니까?”
옆에 서 있으면서도,나도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막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마음이 초조한 듯 질문을 이어 갔다.
“솔직히 그 오우거에 대항할 만한 전사는 없지 않습니까? 힘은 힘에다, 빠르기도 빠르지. 칼만 휘두르면 갑옷을 종이처럼 찢는 괴물인데요.”
“쯧! 하지만 반쯤 죽여서 못 나가게 만들면 되지.”
“믿어도 되겠죠?”
미심쩍은 눈빛이 커크를 향했다.
“당연하지! 날 대체 뭘로 생각하는 거야? 이번에는 진짜라고. 전부 다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어.”
“흐음..
남자는 무언가를 입 밖으로 내려다 다시 삼키는 것 같았다.
그 침묵을 납득이라고 여긴 것처럼 만족스런 미소를 지은 커크가 말을 이었다.
“그런 데서 개망신을 당해 보라고. 어떻겠어? 한 방에 반전이거든.”
술병이 굴러다니는 테이블 주변에
앉은 무리들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억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유령의 개입은 없어 보인다.
안심이 되긴 했지만,그들이 없다고 해도 루비아와 크리스티나를 어떻게 공격하려는 건지 파악할 수는 없다.
계획서 따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따라갈까 하다가,고개를 저었다.
즉위식에서 내가 직접 개입하는 건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대대적으로 열리는 그라스미어의 영주 즉위식.
혹시 갑옷 안이나 마스커레이드를 꿰뚫어 보는 마법사라도 존재한다면,
지금까지 굳이 다른 인간들을 통해 루비아를 지원해 준 의미가 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행동의 제약이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껴진다.
당사자들이 직접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경고해야 한다.
[.루비아.]
서류에 파묻혀 정신없이 일을 하다, 잠시 책상 앞에 엎어지려던 그녀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응? 아가씨,무슨 일이십니까?”
[모른 척해라. 전할 말이 있다.]
루비아는 그제야 아직도 쥐고 있던 만년필을 놓았다.
창문 사이로 한낮의 따듯한 햇살이 흘러들어 온다. 나는 햇빛에 조금도 비치지 않지만,루비아는 내 존재를 분명히 확인했다는 듯이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총관님. 그냥 잠깐 쉬려고 했어요.”
“아,죄송합니다. 제가 제 체력만 생각하고 너무 일을 밀어붙였군요. 허허헛. 그럼 편히 계십시오. 저는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서류의 산 너머에 앉은 루비아를 희미한 죄의식과 꽤 진한 뿌듯함을 담아 바라보면서,총관은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 오랜. 만이네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라스미어 영주 즉위식에서,레이 커크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
= 그래도. 굉장히 오랜만인데. 안부 인사 정도는 해 주세요.
남이 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따듯하게 활짝 웃으며,그녀는 말을 이었다.
= 계속 숨어서 저를 도와주셨죠?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죽을 뻔한 사람들도 살아나고,다칠 사람들도. 무사할 수 있었어요.
그녀의 말에 물기가 어려 있다. 울면서 웃는 것 같은 말투였다.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는 고독, 고마움,슬픔이나 결단 같은 것들이 들어서 있었다.
루비아를 잃고 싶지 않다.
성공적으로 바뀐 과거를 고정시키고 싶다.
빠르게 시나리오를 끝내고 싶다...
결과적으로,시나리오의 당사자인 루비아와 보내는 시간은 예전보다 훨씬 더 줄어들었다.
실패하면 실패할수록,그녀와 계속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계속 구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一
어쩌면,나는 이제 루비아를 버리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커크가,즉위식에서 음모를...]
루비아가 살포시 웃으며 눈을 떴다.
= 알고 있어요.
[알고,있다고?]
= 대응책이 있어요. 크리스티나가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말씀 드리지 않을 거예요.
= 제가 영주가 되는 거니까,이번 일만은 저를 믿어 주세요. 지금까지 주셨던 도움들만 해도 정말로 차고 넘치는걸요.
내가 어디 서 있는지도 모르면서,
허공을 보고 웃는 루비아의 큰 눈이 촉촉해진다. 그녀가 결심한다는 듯이 작은 두 주먹을 살짝 쥐었다.
[그래도. 내가 도와줄 건...]
= 말씀만으로도,이렇게 절 걱정해 와 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격했지만 이번에는 지켜봐 주세요. 저도 자신 있으니까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루비아가 레이 커크를 죽여 버리겠다고 말한 기억이 떠오른다.
어떤 음모를 꾸미는 걸까?
하지만 나에게는,음모가답지 않은 순수한 얼굴이다.
즉위식에는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혹시라도 루비아의 신변에 위협이 발생한다면,그 즉시 개입할 수 있는 위치에서 대기하면 그만이다.
이후 어떤 사태가 되더라도,다시 루비아가 눈앞에서 사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더 좋은 방법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인벤토리에 아이작이 ‘변환 중’으로 갇혀 있는 이상 조언을 구할 마땅한 상대도 없다.
미묘한 공허가 느껴진다.
루비아가 나를 잠시 바라보고는, 무언가 말을 돌리려 할 때였다.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한 명.
내성 복도를 지나 집무실로 곧장 직진하고 있다.
완전히 성 구조를 알고 있다. 손님이 아니다.
이만큼 가까이 온 뒤에야 알아차릴 정도로 뛰어난 고도의 은신. 게다가 잠행을 유지하면서도,이동 속도는 막 시위에서 튕긴 화살만큼 빠르다.
유령일까?
마왕의 가호와는 다르다.
다른 세계에 기워 넣는 보티스의 방식이라면,아예 느낄 수도 없겠지.
바닥을 박차고 달려오는 충격이나 마찰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마왕의 왜곡이 아닌 자기 자신의 뛰어난 몸놀림.
혹시 레이 커크가 굳게 믿고 있던 상대가 이 녀석이 아닐까.
놀라웠다.
이런 존재를 그 몰락해 버린 커크가 초빙할 수 있단 건가?
‘검기.’
푸른 기운이 검신 전체에 곧바로 일어났다. 완전히 바로 쭉 뻗은 맑고 푸른 검기였다.
기척은 집무실에 가까워져도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방 안에 들어오기 전에 루비아를 위해 나가서 처리할까,생각했을 때 다가오는 기척의 정체를 파악하고 흠칫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레나?’
루비아만큼,혹은 그보다 더 익숙한 기척이었기에 보지 않아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레나가 이 정도로 은신이 뛰어났던가?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짧은 사이 그만큼 실력의 증진이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 펄럭!
무인지경으로 집무실 안에 들어온 레나가 처음 보는 망토를 벗었다.
허리에 가시덤불 무늬가 들어가고, 목에 두르는 부분에 뱀 자수가 놓인 망토였다.
덮고 있을 때는 새까닿게 레나를
어둠 속에 묻었는데,양팔을 활짝 펼쳐 반쯤 벗자 빛이 쉽게 투과하는 얇은 보라색으로 변했다.
“또 왔어. 너무 자주 오나?”
“아니요. 오랜만이네요. 좀 더 자주 뵈면 좋겠지만,역시 바쁘시죠?”
루비아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고 레나를 맞이했다.
표정과 품새를 보니 무척 익숙한 응대다.
설마 한두 번 본 사이가 아닌가?
레나를 반갑게 맞는 루비아를 보고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그동안 잘 지냈지? 이건. 일단 수도 특별 동향이야. 레안드로라는 감정 기복 환자가 중심이고.”
- 툭.
“이건 월간 정보 보고서야. 중남부 지향 정찰 지역이 추가되었으니까 그럭저럭 참고할 만하겠지. 지리에 취미 있나? 재밌게 읽으라고.”
“와아. 정기 업무만으로도 무척 바쁠 텐데,레나는 정말 대단해요.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어요.”
레나가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살짝 움직였다.
“별로..
그 미묘한 광경에,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레나랑 아는 사이인가?]
루비아는 그렇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해골님께서. T&T가 저를 돕게 해 주신 거 아니었나요?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 호의적으로 도와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루비아는 따듯하게 웃으며 말했다. “레나,그런데 오늘은 어찐지 들떠 있는 느낌인걸요?”
보라색 망토를 두른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한 발 뒤로 물러서 입을 열었다. 숨겨 둔 본론으로 지금에서야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