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86화 (286/458)

305화 Unearth (25)

“그분은. 안 왔어?”

허리에 손을 얹은 레나가 딴 곳을 바라봤다.

“역시 그분을 찾아오신 거군요.”

“뭐,그라스미어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거기서는 에라스트에 갔다고 하더군. 그래서. 왔지.”

살짝 얼굴을 붉히는 레나를 보고, 루비아는 숨은 보조개가 깊이 파일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레나 님이 여기

왔다는 건 그분도 이미 아실 거예요. 수도로 올라가다 보면,금방 만나게 될 것 같은데요?”

“정말로?”

“그렇다니까요.”

[레나는 누굴 만나러 온 거지?]

유령 내사과와 비밀리에 접촉이라도 하려는 걸까.

아니면 상인 연합 거물이거나. 그녀가 만날 만한 거물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나도 그라스미어에 있다가

에라스트로 왔다. 나를 누군가가 추적하는 건 아닐까.

서늘한 위기감에 빠져 있을 때,깊은 한숨을 토한 루비아가 기가 막힌다는 투로 물었다.

= 누구냐니. 설마 그걸 모르시는 건가요?

[모르겠는데.]

루비아는 내 대답에 어지럽다는 듯 살짝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 당연히 해골님을 만나고 싶어서 온 거죠!

[그런가...]

이번 생엔 고작 한 번 만났을 뿐.

레나가 굳이 날 만나러 올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나리오 클리어 후 누적된 호감도가 이어지는 탓이겠지...

역시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루비아는 레나가 가지고 온 정보 보고서를 한 장씩 꼼꼼히 읽고, 끝의 작은 칸에 서명한 뒤 다시 레나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잘 읽었어요.”

루비아가 서명한 곳에는 또 다른 두 칸이 있었는데,그곳은 누군가와 그라스미어 영주의 서명으로 이미 채워져 있었다.

“다음에 보자고,예비 영주.”

짧은 인사를 남기고 레나는 밖으로 나갔다.

= 어서 따라가서 만나 주셔야죠.

루비아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 어쨌든. 감사드려요. 주위에 참 좋은 분들이 정말 많아졌어요. 특히 저분은 친해지고 싶어요.

그녀가 레나가 나간 뒷모습을 보며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알았다. 다음에 보자고.]

곧바로 따라 나갔다.

집무실로 들이닥쳐 올 때와 달리 레나는 천천히 움직였다.

에라스트 성문 밖을 지난 그녀의 속도는 한층 더 느리다.

방향은 북쪽.

수도로 향하는 길이었다.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 고민했는데, 길 한쪽으로 살짝 비켜서는 그녀가 마치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시간도 달리기 전.

에라스트를 벗어난 북쪽 가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운 곳에서 갑작스레 등장하면 놀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거리를

“레나.”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둣,동요 없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후후. 드디어 나타나셨군요.”

“나를 찾았나?”

레나도 보라색 망토를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저를 세 달 동안 잠도 못 자고 뛰어다니게 만든 분인데.” “.바빴나 보군. 그 망토는 뭐지?” 아까부터 눈에 들어오던 녀석이다.

가시와 뱀 무늬도 신경 쓰인다.

레나는 오른쪽 입꼬리만 실쭉 위로 밀어 올리며 말했다.

“길드에 잠입한 쥐새끼들을 죽이고 쟁취한 전리품이 꽤 많거든요. 그중 최상급이 에요.”

비브리오의 첩자가 있다는 내 정보 덕분에 내부를 철저히 단속했다는 이야기였다.

“한번 해 보실래요?”

레나는 망토를 나에게 둘렀다. 하지만 망토는 일정 수준 이하에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지,은신을 전혀 보조해 주지 못했다.

물론 실제로 도움이 된다고 빼앗을 생각 따위도 전혀 없다.

부드럽게 망토를 풀어 다시 레나에게 둘러 주었다.

그녀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게 느껴진다.

긴장한 건가?

뭔가 실수했나 싶어 말을 돌렸다. “그동안 무척 바쁘게 일했나 보군. 루비아까지 길드 차원에서 도와줄 줄이야. 고맙다.”

잠시 멍하게 있던 레나가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네? 네. 약속한 거잖아요. 약속이

아니라도 그 정도는 해 드리지만요.” 레나가 어깨를 으쑥했다.

“아, 이거부터 보세요.”

- 스록.

루비아에게 되돌려 받은 보고서를 슬쩍 펼쳐 건넸다.

“사실 거기 빠진 게 많아요. 여기서 서서 들을래요? 아니면 분위기 좋게 같이 걸으면서?”

“걸으면서 듣지.”

레나는 이미 보고서 내용을 완벽히 숙지한 둣,옆에서 천천히 순서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냥개는 지금 열심히 뱀을 쫓고 있어요.”

“후작 말인가?”

“네. 목줄 풀린 미친개라,통제는 못 하지만 황실도 사정이 비슷하니까 괜찮아요.”

“황실도?”

옆에서 나란히 걷는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 개인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이 워낙 많고,건드릴 명분도 없거든요.”

“황실 다이아몬드를 찾아내 줬던 영옹이라서?”

나는 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했다.

레나는 풋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거,가짜예요.”

“가짜라고?”

“보고서에는 없지만,저희가 가짜를 만들어 줬어요. 본부 협조를 받아서 엠버메어의 기술로 만들어서 줬죠. 빛이 나는 것까지 똑같아요. 진품은 후작이 가지고 있고요. 개가 날개를 달았죠.”

놀라운 일이었다.

레안드로의 약점은 감지할 수 없는 유령 수장에 의한 완벽한 기습.

그게 차단되면,놈의 약점은 사실상

근위기사단장 이사벨과 미유뿐이다.

그마저 후작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약점은 아니고.

개가 날개를 달았다는 표현은 무척 과소평가된 것이겠지.

이후로도 레나는 수도 지하에 퍼진 ‘자유의 길’을 조사했고,내 말대로 황실 비역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한 뒤 T&T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다른 쪽도 비역이랑 연결된 곳은 없는지 점검 중이라는 것까지.

전부 보고서에 없는 내용.

절대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극비

정보니까.

“에라스트,그라스미어,유블람. 상인 연합과 우리까지 함께하니까. 전쟁을 막을 지렛대 정도는 되겠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게. 기스-제-라이.”

“기스. 제. 라이?”

정신이 확 드는 기분이었다.

내게 정수 홉수를 심어 놓은 희대의 네크로멘서.

첫 만남에서,나는 기스-제-라이의 황제 암살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하지만 짧은 사이 그 네크로멘서에 대해서도 뭔가 해 놓았단 말인가?

기분 탓인지,눈가에 피로로 어두운 그늘이 져 있는 것 같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바싹 긴장해 들었다.

“기스-제-라이가 어쨌다는 거지?”

“말씀하신 암살이 벌어지는 장소에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요. 접촉하려고 위치를 찾고 있죠. 엠버의 본부까지 동원해서요. 하지만 레드 플레이크가 워낙 신비주의라서. 난항이네요.”

“달리아크 같은 곳에서도 정보를 구하기가 힘든가?”

레나가 실쭉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아,그때 미처 말씀 못 드렸군요. 〈등불〉달리아크는. 레드 플레이크 관할이에요.”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라도 아이작의 말을 듣지 않고 괜히 정보를 얻으려고 달리아크를 들쑤셨다면,최소한 루멘 발도프나 별빛청여우 같은 녀석에게 한 번의 죽음을 더 맞았겠지.

얌전히 지나가서 다행이다.

“기스-제-라이의 정보를 줄 턱이 없겠군.”

“그 이상이죠. 경매장에 묻기라도 하는 즉시,레드 플레이크의 표적이

됐을 거라고요.”

나나우와 레나가 달리아크에서 했던 말을 회상했다.

〈여기서 말해 주긴 어려워요. 서로 정보를 유출하지 않게 조약을 맺은 상태거든요.〉

〈다들 신분을 위장한 채로 ‘여기’ 저기 다녀서 정보 수집이 어렵지. 세부 프로필 입수는...〉

떠오르는 상대가 있다.

경매장의 정보상인.

첫 만남 때는 내가 인간이 아니고, 결계에 영향을 안 받는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챘다.

두 번째 만남에선 T&T에서 나를 찾고 있다는 걸 비웃듯 돌려 말했다.

세 번째 만남에서는 풀지도 않은 은신마저 쉽게 알아채고,달리아크 감시자들의 이목을 따돌린 것까지 파악한 녀석이다.

그자가 암살교단의 일원이라면.

아니,레드 플레이크가 아니라는 게 오히려 어색하겠지.

“지금도 물밑 작업 중이긴 한데. 쉽게 이쪽을 믿어 주지는 않네요.”

레드 플레이크 단원들과 제대로 된 접촉은 아직 어려운 모양이었다.

린트부름의 태양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 줬어야 했나.

하지만 그건 기스-제-라이 개인에 통하는 암호일 터고,그걸 말했을 때 그 네크로멘서가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나는 레드 플레이크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 가운데 셋이나 만났고,둘은 죽음의 현장에까지 함께 있었는데도.

새삼 그들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어쨌거나...

레나가 이 정도로 많은 일을 하고 있을 줄이야.

“각지에서 급격히 약화되는 네크론 신사회의 활동. 이건 뭐지?”

혹시 내 활약 덕분이 아닐까?

녀석들의 거점을 세 군데나 부숴 버렸으니까.

미묘한 기대를 가지고 물어봤지만, 레나가 킥킥 웃었다.

“아,그거요? 성실한 사냥개가 워낙 여기저기 물어 대는 바람에. 평소 에 삶이 따분했던 걸까,생각보다 훨씬 잘해 준다니까요.”

“레안드로. 후작이?”

레나는 내 쪽을 보고 즐거운 듯 큭큭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크론 신사회의 중앙 통제력이 와해됐어요. 아니,통제는커녕 지금 주요 사업장 폐쇄하기 바쁠 정도죠.”

세 군데나 부숴 버렸는데도 추적이 붙지 않은 게 묘하긴 했지.

“아,깜빡했네요. 받으세요.”

레나가 품에서 펜던트를 내밀었다.

줄갈이가 되고 몇몇 장식이 추가된 펜던트와 레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물건이다.

“우리,또 볼 수 있겠죠? 저번엔

너무 충격받아서 이걸 드리는 걸 잊었거든요. 본부에 보여 주면..!”

사용법은 알고 있다.

레나 시나리오 호감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었던 목걸이는,스킬 숙련과 T&T 활용에 실용적인 물건으로 변해 버렸다.

멈칫하다 받아 들자,계승 아이템의 획득이라는 메시지와 예전에 봤던 창들이 다시 요란하게 떠오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_

[일주일에 한 번,높은 확률로...]

역시 ‘판단’의 보정.

언제든 필요하면 수도에 와서 이걸 보여 주라는 말을 남겨 두고,레나는 어느새 북쪽 모퉁이 너머 스며들 듯 사라졌다. 애초에 없었다는 것처럼 은밀한 움직임이다.

그녀가 여기 있었다는 건 손안에 쥐인 펜던트만 증명할 뿐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햇빛이 남긴 온기를 쓸어 내고,데워진 그 바람을 또 다른 바람이 식혀 냈다.

레나를 북쪽에 두고,나는 남쪽으로 계속 걸었다.

다음 목적지는 유블람.

루비아의 계획이 마음에 걸리지만 믿어 달라고 한 데다가,그라스미어 영주 즉위식에 직접 가면 별일은 지.

일단 내가 활약한 내역을 알려 줄 상대가 유블람 근방에 있다.

학대받는 이족 부락을 구해 달라고 부탁한 보육원장이다.

사실,그것보다.

커크 무리의 대화에서 아스포데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걸린다.

아스포데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칼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다.

혹시 시체가 벌레에게 먹히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신형’이 벌써 나왔다고?

고작 그런 녀석을 먹으러? 찜찜하다.

확실히 확인하고 넘어가야 한다. 미래가 바뀌고 있으니까.

돌로 쌓인 성벽이 어둠에 잠기면 망루와 성곽 곳곳에 하나둘 횃불이 일어난다.

- 파앗!

닫힌 성문 위를 가볍게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유블람 성벽 따위는 뛰어서 가볍게 넘을 수 있었고,예전보다 성벽이 높아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성벽을 넘으며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무언가 달라졌다.

기분이 심상치 않아 횃불을 들고 순찰하는 경비병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별반 달라진 건 없었다. 경비의 수준이 크게 올라간 것도, 숫자가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몇몇은 아는 얼굴이었다.

경비들을 한 명 한 명 확인한 나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유블람 경비병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적당히 시간만 때우거나 지나가는 이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실제로 도시를 ‘지키려’ 하고 있었고,그건 아편과 범죄에 찌든 유블람에서 한 번도 느낀 적 없던 긴장감이었다.

그때 였다.

- 스스숙!

미처 돌아보지 못한 반대쪽 성문에 있던 무언가가,빠르게 내성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햇불로 군데군데 기워진 어둠을 타고 넘는 것처럼 빠르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반사적으로 움직여 그것을 쫓았다. 유블람에서 한 번도 느낀 적 없던 속도였다. 내가 벌인 학살극 때문에 미래가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질주.’

스킬을 최대로 발휘한 덕에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아직 정체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상대방이 다.

미로 같은 골목을 돌파하기 위해 허공으로 몸을 높이 솟구쳤을 때.

- 반짝!

무언가가 달빛을 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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