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87화 (287/458)

306화 Unearth (26)

달빛을 반사한 건 숱 하나 없는 익숙한 대머리였다.

‘경비대장?’

저번 생에도,죽이고,이번 생에도 무덤에서 깨어나자마자 틀림없이 살해한 인간이 터무니없는 속도로 도시를 질주하고 있었다.

- 째애잉!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거리로 들어서 이제 눈치도 안 보는 건지, 그가 지나가는 주위로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유블람 영주와 경비대장이 어딘가 이상하다던 커크 무리의 말이 떠올 랐다.

대머리 경비대장 아스포데는 절대 저런 속도를 낼 수 없다.

그 빠른 속도에 홀린 듯 녀석을 따라갔다.

함정일지도 모르지만 대체 어떻게 녀석이 살아 있는지,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 파앗!

대머리 경비대장 아스포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유블람 내성 방향으로 뛰어갔다.

내성 앞에 서 있던 경비 두 명은 그를 보고 인사한 뒤 바로 성문을 열었다.

‘영주와. 경비대장이 이렇게까지 친밀한 사이였나?’

성문을 주먹으로 치던 레안드로의 등장에,유블람 무리가 두 편으로 갈라져 성벽 위에서 싸우던 모습이

떠올랐다.

[경비대장이 여행자들을 노예로 잡아 팔아먹었습니다! 놈은 네크론 신사회의 주구입니다! 인장도 놈이 받았습니다. 제가 놈을 처벌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다 영주 새끼가 시킨 짓입니다! 년 성안에서 마약을 재배했잖아! 후작님! 유블람 주민들을 아편에 중독시킨 게 바로 이놈입니다!]

회상을 끝냈다.

분명 신뢰하는 사이는 아니다.

예전에는 분명히 영주파 경비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복도에는 인간이 아예 없다시피 했다.

생각해 보니 밖에서 엄정히 순찰을 돌고 있던 경비들 중 원래 여기서 본 녀석들도 있는 것 같았다.

언제든 칼을 휘두를 준비를 하고 대머리 경비대장의 뒤로 바짝 따라 붙었다.

‘탐지.’

하지만 수상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영주 집무실 근처에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존재하는 기척

- 덜컥.

아스포데는 집무실 문을 아무렇지 않게 그대로 열고 들어갔다.

집무실 중앙 책상 위에는 글자가 빼곡히 적힌 서류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전시대처럼 보이는 다른 한쪽 책상 위에는 특이하게 생긴 골동품 들이 쌓여 있었다.

“이게 오늘 감정할 것들인가..

아스포데는 골동품이 가득 쌓인 서랍 위로 손을 뻗었다.

형태를 갖춘 손이 촛농처럼 녹아 내리며 초록색 점액으로 변해 갔다.

점액으로 된 얇은 막은 골동품을 한꺼번에 감쌌고,힘을 발휘하는 순간 아스포데의 한쪽 눈은 붉게,다른 한쪽 눈은 녹색으로 번갈아 번뜩였다. 경악에 빠져 아스포데를 똑바로 바라봤다.

- 꾸드드득 •

아스포데의 대머리는 다시 천천히 유블람 영주의 모습으로 변했고, 처음에 녹색으로 형체만 잡아가던

머리카락도 세세하게 구현됐다. 불룩한 배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의복도 새로 뭔가를 걸칠 필요도 없이,꿈틀거리는 점액이 변경되며 천천히 영주의 의복을 만들어 갔다.

“슬. 라임?”

놀라서 은신을 풀고 멍하니 그를 불렀다.

슬라임은 반만 변한 상태로 나를 바라봤다.

- 또르르!

깜짝 놀랐는지 얼굴에 박힌 눈알

두 개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당신은..!”

안쪽에 눌려 있던 한쪽은 붉고, 다른 한쪽은 초록인 눈이 끈적대는 점액 안에서 어둡게 반짝였다.

아스포데와 유블람 영주가 서로 반씩 섞인 점액체는 얼굴을 발갛게 붉히고 나를 바라봤다.

“드디어. 오셨군요! 하,하지만. 변신 과정은 부끄러운데..

알고 싶지 않은 약점을 알아 버린 기분이었다. 하필 저런 상태에서 부끄러워하다니...

빠르게 밖으로 나가자 변환 중인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방 바꿀게요!”

“•••천천히 해도 된다.”

- 꾸득! 꾸드드득!

천천히 해도 된다니까.

문 너머로 듣기만 해도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 같다.

- 달그락.

나는 고개를 흔들어 방금 목격한

모습을 억지로 털어냈다. 솔직히 기억하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점액질이 꿈틀대는 소리는 머잖아 그쳤고,괜찮다는 말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두꺼운 손목에 찬 황금 팔찌까지.

완벽한 유블람 영주였다.

말투도 전혀 달라져 있었다.

어느 게 껍질을 벗겨 낸 녀석의 진정한 모습일지 잠시 궁금해하다, 책상 위에 수북히 쌓인 골동품과 라임을 번갈아 바라봤다.

“감정하려던 거 아닌가?”

라임은 반씩 섞인 초록색 얼굴로 찐득하게 웃으며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영주가 몰래 숨겨 놓았던 골동품을 보고 있었는데. 그다지 쓸모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중요한 분이 여기 오시지 않았습니까?”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던 라임이 말을 이었다.

“일단. 감사드립니다. 그동안의 활약은 정보망을 통해서 모두 듣고 있었습니다. 제가 말한 세 부족을 구해 주신 것,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 뭐. 그래.”

감격 어린 목소리에 민망해졌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라임의 호의를 얻기 위해 근처 보육원까지 찾아가 자랑하려 했는데.

이미 다 알고 있었다니.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얼핏 나온 결론이 이거였습니다만..

라임은 제 얼굴을 가리켰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지만, 이것만큼 녀석과 어울리는 방식도 없겠지.

“원래 있던 녀석들은?”

라임이 씁쓸하게 웃었다.

“제 안에 악한 피가 너무 많군요.” 죽였다는 이야기였다.

“루비아도 만났나?”

라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잘 되어 있습니다.”

“네 정체도..

“알고 계십니다.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말씀드렸습니다만,조금도 개의치 않으시더군요.”

루비아라면 그렇겠지.

더욱 나를 만난 이후의 그녀라면 마물을 접해도 거리낌이 없을 터.

에라스트,유블람,그라스미어가

당연히 손안에 들어온 듯 레나가 말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에는 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이런 이야기였구나.

“경비대장도 겸하며 도시 발전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마약에 찌들고 거주민들이 이미 체념한 상태라. 사실 발전이라기보다는 재활에 더 가깝지요.”

“힘들겠군. 돈이라도 좀 줄까?”

당장은 없지만.

정회원이니까, 상인 연합에라도 말하면 신용으로 빌려주겠지.

라임이 웃음을 터트렸다.

체인질링의 권능으로 목소리도, 외모도 완전히 동일한 한 인간의 웃음이었지만 환한 웃음의 느낌은 전혀 달랐다.

“괜찮습니다. 유블람과 거래하던 마약상들을 모두 녹인 탓에 자금은 풍족합니다. 남부에는 이제 마약이 돌지 않습니다.”

조용한 선언이 주위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애초에 섭외하려 했던 이유이긴 하지만,슬라임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깨닫는다.

치밀한 정보망,형태 변신,감정, 어디든 스며들 수 있는 첩보력과 만만치 않은 순수한 전투력.

그 짧은 시간에 남부에서 마약을 ‘지워’ 버렸다니.

아이작이 서운해하려나.

“유블람과 거래하던 마약상들도 네크론 신사회와 유착 상태였는데, 수도에서 분전하는 분이 계신 덕에 뒤탈 없이 그 조직들을 끊어 내기 쉬워졌습니다. 모두 덕분입니다.”

덕분이라니.

물론 내가 한 일은 별로 없다.

그냥 레나에게 정보를 풀어 줬고, 그녀가 모든 실을 당겼을 뿐.

인간의 조직에서 레나는 이상할 만큼 잘 살아가고,활약하고 있다.

어쩌면 유능함에는 무자비,간교, 깊은 곳에서부터 깔린 인간에 대한 혐오가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다름 아닌 유블람 영주로서라면, 루비아에게 지속적이고 공식적으로 확실한 조력자가 될 수 있겠지.

슬라임이 바로 옆 도시의 영주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한층 마음이 놓인다.

루비아를 살해하던 마경의 영주가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묘한 역설이 느껴진다.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한 발짝

앞서 미리 움직여 준 라임이 무척 반갑고,놀랍고.

“정말 고맙다.”

영주가 고개를 저었다.

“고맙다는 말은 제가 드려야죠. 비겁하게만 살아온 제게 길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겁하게. 살아왔다고?”

“침묵의 관찰자로 살았습니다. 방관하며 이 세계는 답이 없다고 정해 놓고,바꿀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지요. 나중에는 다 포기하고 마왕이 강림하는 게 답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정확한 이야기다.

내가 ‘과거’에 개입하지 않았을 때 슬라임은 보육원을 관두고 마왕을 추종하는 무리에서 활동했다.

레나와 함께 푸르손 추종자들에게 포위되었던 밤,녀석이 내 두개골 틈새 사이사이까지 모두 스며들어 한 번에 녹게 만들었던 게 선명히 떠오른다.

슬라임에게 받은 목걸이를 그냥 줘 버렸던 레나도 그 자리에서 함께 녹아 죽었고.

“모든 걸 삭제하고 다시 시작하는 피의 폭력만큼 쉽고 명쾌한 일은 없겠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길을 걸어 보기로 했습니다.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뭐라고 했더라?

영주가 기대를 가득 안고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간신히 떠올린다.

마왕도 인간도 아닌 제3의 길을 녀석과 이야기했었지.

“참,이것 좀 보십시오.”

- 철컥.

- 드르륵.

영주가 뒤쪽의 큰 서랍을 열었다.

“제가 발굴한 물건들입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원하시면 모두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스캔 완료됨]

[전염병의 가면]

이 불길한 가면은 대륙을 덮쳤던 최악의 전염병을 예측하고,미리 약초를 독점한 상인이 살해당하지 않기 위하여 사용한...

[전염병에 관한 약초 발견 확률이

약간 증가합니다.]

[착용 상태에서〈식물 재료 채집〉 스킬을 사용할 경우 경험치가 조금 더 증가합니다.]

[스캔...]

[정신병자의 서클릿]

아직도 그 늙은 광대는 춤추고 있을까요?

[박해의 방패] [부정 탄 장갑]

[실패한 천사의 항아리]

[미약한 빛의 메이스]

[별 볼일 없는 어둠의 완갑]

[암흑 의식복]

모두 스캔이 완료된 물건이지만, 실제로 당장 쓸모 있어 보이는 건 전염병의 가면 정도다.

하지만 언제 어떤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

아이작이 있었다면...

일단 다 챙기라고 했겠지.

모조리 인벤토리에 넣고 터덜터덜 유블람 시내로 걸어 나왔다.

라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골동품 구경에 도시 상황까지 듣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예전과 다르게 유블람의 아침은 우중충하지 않았다. 거리에는 마약 냄새 대신 아침 준비 냄새가 솔솔 풍겼고,연기는 주저앉은 인간의 파이프가 아닌 주택가의 굴뚝에서 올라왔다.

경비병들은 어느새 교대된 건지

밤과는 다른 얼굴의 녀석들이 골목 곳곳을 순찰하고 있었다.

마약상들을 죽이고 빼앗았다는 해독초가 큰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하긴,실시간으로 몸을 녹이는데 없는 해독약도 만들어 바쳤겠지.

- 털썩.

유블람에서 확인해 보고 싶었던 장소 앞에 걸음을 멈췄다.

흰 건물. 여관임을 알리는 간판이 걸려 있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아무도 없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여관 주인까지 포함해서 한바탕 살육을 저질러 놓고 이곳을 다시 찾는 것도 우습지만...

여기는 어차피 곧 새로운 주인을 맞이한다.

신경 쓰이던 정체불명의 여자로.

네크론 일당일지도 모르고,혹은 그들이 건드릴 수 없는 배경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 정체를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굳게 닫힌 문.

문설주에 쌓인 먼지.

아직 주인이 바뀌는 시점인지도 모른다.

슬쩍 여관 주위를 맴돌았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3층짜리 작은 여관이 유블람 내성보다도 훨씬 거대하게 느껴졌다.

어쨌건 안에서도,밖에서도 기척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여관 주위를 느릿하게 두 바퀴 돌았다.

- 파르르륵..!

나무에서 나무 사이로 날아가는 풍뎅이 한 마리를 보지 못했다면 유블람에 더 이상 볼일은 없었을 것이다.

예전에도 한 번 본 녀석이다.

뚜렷이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유블람의 다른 장소에서 풍뎅이를 본 기억은 전혀 없다.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한 유혹이었다.

‘추적.’

작은 풍뎅이에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풍뎅이는 여관 뒤쪽 나무 사이만 빙빙 돌았다.

풍뎅이는 한 마리뿐이었고,새로 나타나는 녀석도 없었다.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자신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에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착각이 스쳐 지나갔지만,아무래도 기분 탓인 것 같았다.

‘홈..

혹시 모르니 주인이 바낄 때쯤 다시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성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열 필의 말과,한 대의 기능적인 디자인의 마차가 산길을 달렸다.

속도는 가벼운 달리기 정도.

가운데 마차를 두고 호위하듯이 기병들이 달리는 가운데,한 간격 앞서서 말을 달리는 기사가 있다.

다른 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어깨는 반 뼘 정도 넓은 우람한 체구의 기사였다. 등 뒤에 대검을 메었으면서도 몸놀림은 누구보다도

- 다그닥! 다그닥!

휘어지는 산길에서 마차의 안전을 한층 세심히 기하기 위해,선두의 기사가 말을 조금 더 빨리 달려서 앞쪽을 살펴보려던 순간이었다.

- 히히힝!

기사가 탄 말이 길 한쪽에 피어 있는 풀을 보더니 놀라 반대쪽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고갯마루를 넘어가는 터라 반대는 구부러진 비탈길이었다.

말고삐를 어떻게 할 수도,안장에 이미 감겨 있는 발을 떼어 낼 수도 없을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

마차에서 얼굴을 내민 루비아가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소리쳤다.

주위에 있던 일행이 급히 말에서 내려 비탈길 아래로 치닫는다.

“크크크..

모든 광경을 보던 커크는 희열로

망원경을 꽉 그러쥐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행도 망원경으로 비탈 아래를 보더니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떨어졌습니다.”

“마구간지기를 협박한 게 이렇게 잘 먹힐 줄이야.”

“후후후후..

커크는 대답도 하지 않고 입가에 미소만 짓고 있었다.

예상 그대로의 낙마.

〈환상 뿌리>를 먹은 지 하루 안에 〈가시 팬텀〉의 냄새를 맡게 되면 인간도 말도 즉시 발작한다.

루비아가 먹는 음식에는 장난을 치지 못하더라도.

호위하는 오우거의 말 정도에는 이렇게 손이 뻗는다.

“안 움직입니다!”

“쉿. 기다려 봐.”

“죽은 건 아닌 거 같은데..

“형님! 돌아왔습니다! 떨어지면서 분명 우직,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크크크. 됐다.”

이마에서 피를 홀리는 크리스티나는 오른쪽 어깨부터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성공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