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Unearth (27)
커크는 가슴 안에서부터 차오르는 뿌듯함을 느꼈다. 짜릿한 성취감이 살갗으로 하얗게 번져 났다.
지금까지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었는데,하얗게 질린 채로 불안에 떠는 루비아의 얼굴을 보니 이제야 세상이 순리대로 되는 것 같았다.
암컷이라는 건 마땅히 저런 표정을 지어야 한다.
애초에 밖에 나와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황당한 일이다.
암컷이 있어야 할 곳은 매음굴이나 집안 둘 중 하나다.
물론 어느 쪽이나 목줄이 잘 매여 제대로 교육되어 있어야 한다.
한낱 암컷 주제에 함부로 밖으로 돌아다니고 심지어 통치권에 손을 뻗다니,기가 막힐 정도로 황당한 현실이다.
무엇보다 뜬금없이 나타나 호위를 자청한 저 암컷 오우거가 상황을 훨씬 불리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아슬아슬하던 무력의 긴장 상태였는데, 완벽하게 저쪽으로 균형의 추가 넘어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됐어.”
망원경 너머의 루비아를 바라보며 커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계획은 성공이다.
그라스미어 영주 즉위식,모두가 보는 앞에서 단단히 망신을 받게 될 것이다.
“큭큭. 저 오우거는 아예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군요.”
다른 부하의 말이 들렸다.
“저 정도면 완전히 맛이 갔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러했다.
항상 강한 척하던 암컷 오우거는 주인이 가까이 왔는데도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거 린다.
완벽한 포획의 기회.
이대로라면 2차 계획의 실행까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여우 사냥.
그라스미어야 보는 눈이 많으니 당장은 힘들겠지만,돌아오는 길에 기회를 노린다.
오우거의 등장 이후는 그 괴물만 믿고 호위가 대폭 축소됐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마차에 실었다. 진심으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루비아의 표정이 가장 어두웠다.
주위와 한참 의논한 뒤 말머리를 돌리려 하는 모습까지 보였지만, 결국 그라스미어에 가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쫓아간다.”
“예!”
바람이 상쾌했다.
청량함이 가슴까지 적셔 주는 것 같았다.
커크는 선두에서 간격을 유지하며 신중하게 마차의 뒤를 밟았다.
질척한 흥분이 그의 살찐 배에서 가슴으로 끓어올랐다.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회자의 증폭된 목소리가 거대한 연병장에 빼곡히 마련된 좌석들로 퍼져나갔다.
- 그럼 이 시간부로, 챈들러 남작 그라스미어 영주 즉위 기념! 특별 토너먼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 와아아아아!
진행자의 이름은 군중의 함성에 가려져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달아오른 관중들의 함성이 야외 연병장을 가득 메웠다.
“브레드린!”
“후스타! 후스타! 후스타!”
토너먼트 참가자의 이름이 연달아 매겨졌다.
- 진행은 마상 토너먼트입니다! 일단 말에서 먼저 떨어지는 쪽의 패배입니다! 말에서 멸어지지 않을 경우 상대의 방패나 갑옷에 랜스를 부러뜨리면 점수로 산정합니다!
- 파삭!
어느새 격돌한 두 참가자의 랜스가 동시에 방패에 맞아 부서졌다.
“동점! 다시 격돌하겠습니다!” 토너먼트가 거듭될수록 관중석의 흥분은 고조되어 갔다.
뜨거운 열기가 커크의 온몸으로
느껴진다.
천여 명이 넘는 관중.
압도될 정도의 함성.
그가 영주가 되면 에라스트에서 토너먼트를 개최할 계획이었지만, 결코 이런 규모로는 할 수 없겠지.
절로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 승자는. 브레드린!
- 와다아■아사
- 잘생겼다!
- 갈색머리 미남 좋아!
관중들이 패배자에게는 용서 없는 경멸과 조소를,승자에게는 찬사와 동경을 보내리라는 것은 바보라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성대한 잔치를 개최한 그라스미어 영주 부자도,관중의 모습을 보고 흡족한 분위기다.
커크는 끈적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루비아를 흘끗 바라봤다.
걱정이 가득한 기색이다.
크리스티나가 낙마한 이상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앞뒤 사정 따위는 관계없다.
루비아가 이 토너먼트에 참가자를
내보내지 않는다면,지독한 야유가 그녀 하나를 향해 집중되리라.
“후후후..
꼬리를 말고 도망칠,부끄러워하며 떠나는 그녀를 사냥할 일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대전사는 루비아를 마음대로 하게 해 주는 조건으로 특별히 섭외한 녀석이다.
간신히 C급에 걸치는 용병이지만, 그 정도라도 오우거 같은 별종만 아니면 누구든 이길 수 있다.
토너먼트 참가자들도 흥분하는지, 격돌 속도는 점점 빨라져만 갔고 대진표의 이름은 하나하나 빠르게
지워졌다.
흥분이 최고로 고조되고,한 조의 경기가 마무리되었을 때였다.
- 땡땡땡!
종이 울렸다.
전임 그라스미어 영주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커크를 바라봤다.
“형님! 이제 시작인가 봅니다.”
“내가 나서지.”
섭외한 C급 용병은 단상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이미 한 걸음 앞으로 나서 있었다.
커크는 웃음을 머금고 루비아를 바라봤다.
그림자처럼 항상 곁에 붙어 있던 오우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근처 상석에 한가롭게 앉은 유블람 영주의 모습만 보일 뿐.
손목에 황금 팔찌를 찬 저 녀석도 훌륭한 관객이 되어 줄 거다.
루비아를 따라온 일행은 모두 다 아는 녀석들.
특별한 솜씨는 없다.
어떤 어설픈 대타를 내세울까?
“크흐흐..
지금처럼 루비아가 취약한 시기는 없었다.
- 다음은! 특별! 토너먼트입니다! 모두 단상을 향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폭력을 원하는,한시라도 빨리 영광스러운 승자를 찬사하고 패자를 한껏 경멸하고 싶은 관중의 시선이 일제히 단상으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먹잇감을 주지 않으면 누구라도 물어뜯을 둣 이글거리는 시선이었다.
- 레이,루비아! 레이 커크! 근처 에라스트 영주위를 두고 경쟁하는 두 분께서 친선 경기로 이 자리를 빛내 준다고 하셨습니다! 경기는 각 측의 대전사로 진행됩니다!
사회자가 커크와 루비아를 각각 손을 뻗어 가리켰다.
수천 쌍의 눈동자가 커크가 있는 장소를 향했다.
“히야..
그 뜨거운 시선에 압도된 커크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조바심마저 일어날 정도였다.
싸우는 게 자신이 아님에도 절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 양측의 대전사는 경기장으로 나와 주십시오!
“물론.”
섭외한 C급 용병은 허공에 휘휘 손을 저어 인사하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유블람 영주 근처에 혼자 앉은 루비아는 곤란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 이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루비아 님께서는 내보낼 대전사가 없으신 겁니까?
- 우우우우우!
- 김빠진다!
여기저기서 이유가 들렸다.
부하들이 뒤에서 속삭였다.
“형님,저거 원래 우리가 할 말 아니었습니까?”
“오늘 뭐가 되는 날인가 봅니다!” “한 마디 거드시죠.”
“크흠!”
커크는 앞으로 나갔다.
“영주가 되겠다고 하는 자가 대신 싸워 줄 기사 하나 없나?”
- 옳쇠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루비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수치와 곤혹스러움에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십 년 묵은 체증이 한 번에 내리는
기분이었다.
“뭐,도망치고 싶다면 도망쳐도 좋겠지. 아니면 본인이 직접 싸워 볼 텐가? 하하하!”
물론 농담이다.
루비아가 받아들일 리가 없다.
여자는 마땅히 약하고,도망치고, 하지만 그 도망조차 유희의 입맛을 돋아 줄 정도에 불과해 금방 사냥 당하는 존재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저 꼬리를 내리고 공포에 떨게 하려는 말이었다.
“호오. 그거 재밌는 생각이군요.”
하지만 근처에 앉아서 부푼 배만 만지고 있던 유블람 영주가 슬며시 거들었다.
동방에서 무사 수행을 하고 왔다는 애송이,신임 그라스미어 영주까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말리는 눈빛은 아니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루비아와 커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 싸워라!
- 직접 싸워라!
- 대전사가 뭐냐! 집어치워! 직접 본인들이 승부를 봐라!
- 와아아아아아!
밀집한 관중 속 여기저기서 유독 귀에 박히는 또렷한 외침이 있었고, 그런 외침은 곧 사방으로 증폭되어 퍼져 나갔다.
“완벽해..
커크 본인이 섭외라도 한 것처럼 관중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멋지게 돌아가는 상황이다.
이렇게 운이 좋다니.
놀라운 행운,딱딱 맞아떨어지는 상황과 군중의 반응에 도취된 그는
어지러움마저 느꼈다.
오늘은 어쩌면 그의 인생 최고의 날인지도 몰랐다.
삶을 새로 시작하는 날...
커크는 섭외한 용병을 밀쳐내고 홀린 듯 앞으로 나갔다.
아무 장애물 없이 군중의 열광을 그대로 받고 싶었다.
“도망칠 건가?”
“하,하..
살포시 고개를 숙인 채,얼굴이 붉어진 루비아가 입을 달싹였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군.
“하겠어요. 출전하겠습니다.”
“크하하하!”
“형님,그냥 죽여 버리시죠!”
“어,고용주. 죽이는 건 곤란..
“대신 돈으로 치르지.”
커크는 용병이 하는 말에 간단히 대꾸하고 연병장으로 걸어 나갔다. 루비아는 그라스미어 영주를 보고 급히 몸에 맞는 갑옷을 요청했다.
- 지금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모두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레이 커크! 레이 루비아! 에라스트 영주위의 두 경쟁자가 여기서 직접 승부를 가립니다!
一 와아아아아!
- 그냥 이긴 쪽이 영주해라!
- 짓밟아 버려!
- 이긴 편 우리 편!
대체 어디서 이런 훌륭한 사회자를 구한 걸까?
- 철컥.
커크는 투구를 내리고 나무 방패와 랜스를 손에 들었다.
얌전한 애마에 천천히 올라탔을 때였다.
- 우와아아아아!
- 멋지다!
갑자기 말초신경을 마비시킬 만큼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퍼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울린 적 없던 뜨거운 함성. 그것은 커크가 아닌 반대편을 향해 있었다.
커크를 투구를 올리고 반대편을 바라봤다.
“저. 미친. 년이..!”
죽으려고 정말 작정을 한 걸까.
레이 루비아는 말에 올라 있었다.
마상창시합용 풀 플레이트는커녕 사슬 갑옷조차 걸치지 않았다.
그가 얼마 전 길가에 심은 ‘가시 팬텀’과 비슷한 색상.
은은히 은빛이 도는 순백의 실크 드레스만 입은 채 루비아는 안장에 가볍게 올라탔다.
드레스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방패조차 들지 않고,두 손으로 잡아 든 건 오직 랜스 한 자루.
태워 버린 커크조차도 입을 벌리고 바라보게 되는 비현실적인 광경.
- 와아아아아!
괜찮냐고 거듭 말리는 사회자에게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는 흰 드레스의 루비아는,중무장한 커크보다 압도적인 그림이었다.
방금 전까지 받던 뜨거운 환호를 모두 빼앗긴 그는 침음을 삼키며 무심코 투구를 들썩였다.
이대로라면 이겨도 조금도 멋지지 않다.
하지만...
죽인다.
지금은 그게 중요하다.
홍분으로 끓어올랐던 심장이 다시 찐득하게 가라앉았다.
모양은 떨어져도 안전이 우선.
조금도 다치고 싶지 않다.
저 어설픈 랜스에 어디라도 잘못 찔리는 꼴은 당하고 싶지 않다. 완벽하게 죽인다.
저 열광은 루비아가 시체가 되면 다시 나에게 오게 된다.
암컷다운 멍청함으로 갑옷도 없이
말 위에 오른 대가를 보여 주겠다. 커크는 준비 사인을 보냈다.
- 양측,모두 준비 확인했습니다! 그럼. 시작!
t= t= t= 기~I~i~r
전속력으로 출발한 두 필의 말은 양쪽에서 한층 더 달리는 속도를 가속했다.
루비아가 랜스로 가슴을 직격해도 그는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심지어 몸만 서로 부딪쳐도 승리.
패배할 확률은 없다.
- 두두두두!
- F ^ F ^ F t
I I I I I •
30미터.
앞으로 기울인 랜스를 루비아의 배에 겨누며, 커크는 어떤 동요도 없이 승리를 확신했다.
- 두두두두!
겨누는 방향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바닥으로? 흙에라도 랜스를 꽂을 생각일까?
20미터.
- 끼히히이이이익!
커크의 말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섬뜩하고 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수그려 급정지했다.
- 부우응!
커크의 육중한 몸이 순간 앞으로 확 쏠리며 밀리며 앞으로 날아가 머리가 펜스에 강하게 부딪혔다.
- 광! 우득!
동시에,바닥에 비스듬히 겨누던 루비아의 랜스가 움직이지 못하는 커크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 콰직! 우드둑!
나무로 된 랜스 끝부분이 부러져 사방으로 흩날렸다.
목 부위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다시 짧게 울려 퍼졌다.
ᄃ: t: t= C: | 기一一I一一I~「I
루비아는 부러진 랜스를 두 손에 꽉 쥔 채,커크를 지나 순식간에 반대편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바닥에 떨어진 커크는 움직이지 않았고,두 번 연속 부러진 목은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루비아는 가시 팬텀으로 염색한 드레스를 흘끗 바라보고,남몰래
따라온 마구간지기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 와아아아아아!
연병장이 진동할 정도의 함성이 군중들 사이에서 울려퍼졌다.
유베가 심어 놓은 바람잡이들보다 먼저였고,전임 그라스미어 영주의 심복인 사회자도 침묵하고 있던 새 빠르게 터진 순수한 함성이었다. '이제 시작이에요.’
루비아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열광하는 관중을 바라보며,입술을
꾹 다문 채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