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90화 (290/458)

309화 Unearth (29)

지금까지 쌓아 온 일들이 반영되어 통치 레벨이 단번에 네 단계 상승.

루비아의 머리 위에 뜬 상태창을 바라봤다.

[현재 통치 도시 _ 에라스트]

[통치(眞) Lv.6(new!)]

통치 레벨의 계승.

당연하다는 듯한 영주 즉위. 시나리오 분기.

지금까지의 진행에 대해 뿌듯함을 느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다.

= 이 꿈같은 일들. 모두 해골님 덕분이네요.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머릿속으로 울리는 루비아의 말에 살짝 물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마녀재판이라고?’

그 아래 떠오른 글자들에 극도의 경계심이 들었다.

나나 끄로프들의 존재가 루비아를 공격하는 구실이 되는 건 아닐까?

처음 겪는 일도 아니다.

루비아와 함께 수도에 갔을 때, 이미 한차례 악마숭배자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은 적이 있다.

직접 숨을 끊은 건 아이작이지만.

절대 그때 같은 상황이 반복되게 할 수는 없었다.

루비아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자 흥조를 띠고 있던 그녀가 입술을 꼭 다물고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 악마숭배자로 몰릴 수 있다는 말씀이죠?

나만 알아볼 만큼 살며시 고개가 끄덕거린다.

= 알겠어요. 최대한 조심할게요.

나는 끄로프들을 최대한 은밀히 운용하라고 루비아에게 조언하고, 그녀가 도시를 바쁘게 통치할 동안 에라스트를 돌며 위협이 될 만한 녀석이 없는지 조심스레 살폈다.

며칠이 지나도 유령의 낌새 따윈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 보이지 않아도 보티스의 가호를 입은 녀석들은 분명 어딘가 자리 잡고 있을 터.

한 번의 죽음을 바쳐 가며 처절히 확인한 사실이다.

반드시 유령만 경계해야 하는 건 아니다.

평범한 인간 소년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놓아둔 탓에 죽은 적도 있다.

유언비어는 빠르게 퍼진다.

찬양하기에 바빴다.

“후우一 이게 바로 그 히비스커스 차란 말이지? 이걸 마시고 나니까 허리 통증이 마법처럼 나았어.”

“우리 영주님이 즉위하고 난 뒤 여기저기서 온갖 상인들이 별걸 다 가지고 온다니까?”

“잠깐 자리를 비우라더니 토질은 갑자기 얼마나 좋아졌어? 특별한 비료를 뿌리셨다고 했나?”

“정말 대단한 분이라니까. 얼마나 준비를 해 왔으면..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끄옥. 오늘도 합동 훈련인가..

“왜,관두게?”

“그럴 리가. 이렇게 좋은 식단에 급료도 잘 나오는데 내가 미쳤어? 그냥 근육통이 좀..

대화를 엿듣고 꼼꼼히 감시했지만 수상한 움직임은 없다.

불안감에 에라스트를 못 떠난 지 한 달째.

“예산 집행 보고드리겠습니다.”

담당관이 루비아에게 무척 밝은 표정으로 숫자를 읊어 댔다.

그가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맺었다.

도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척 풍족한 상황입니다.”

“상인들이 일부러 손해를 봐주고 있는 건 알고 있죠?”

“네. 영주님의 인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쪽에서 지원할 수 있게,손해만 보고 가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검토해 주세요. 다른 행정관들도 도와주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다음으로, 군사 훈련 상황 보고 드리겠습니다.”

경비대장이 앞으로 나섰다.

“현재 유블람,그라스미어와 함께 합동으로..

훈련 참가자들의 반응이 굉장히 좋다는 이야기와 함께 말을 맺는 경비대장을 보고 루비아가 질문을 던졌다.

“보고 자료를 보니 대련에서 우리 경비병들이 진 게 많더군요.”

“죄송..

“아니요,지는 건 당연한 겁니다. 일단 규모 차이도 있고요. 아,제가 그라스미어에 갔을 때 보니 은퇴한 지 한참 된 병사들도 훈련에 같이

참여하더군요.”

“은퇴한 병사들 말입니까?”

“그래요. 현역 시절에 뛰어났던 병사들이 옆에 꼭 하나씩 붙어서 대련 상대로 뛰더군요. 체력으로는 안되니까 상대방은 쇠 주머니를 차게 만들고. 경험을 가진 상대와 싸우면서 많이 배우던데,이것도 한번 검토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다음,농지 보고드리겠습니다.” 끄로프들이 순식간에 지하 토양을 끌어 올려서 토질을 향상시키고, 가지고 온 희귀한 묘목들을 활발히 심었다.

넥스몬드의 소개로 왔다는 상인을 필두로,각종 상단들이 에라스트를 꼭 경유지에 넣어 움직이며 직물, 의상,향신료나 가재도구 등을 싼 가격에 도시에 풀어놓았다.

거의 이윤을 챙기지 않는 모습이 낮은 회계 지식으로도 쉽게 판명될 정도였다.

[토질 개선으로 인해 농지가 크게 발달합니다.]

[사치품이 유입되었습니다.] [시민들의 행복도가 올라갑니다.] [통치 경험치가 크게 올랐습니다!]

[통치 레벨이 올랐습니다!]

[통치(眞) Lv.8(new!)]

10이면 시나리오 클리어였던가.

한 달 사이에 통치 레벨은 2에서 8로 상승했지만,경험치가 오르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레벨이 오를 때마다 필요로 하는 경험치가 한 번에 적어도 세 배는 오르는 것 같았다.

이 속도라면...

순조롭게 진행해도,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일 년은 넘게 걸린다.

그사이 전쟁을 막을 수 없다면 시나리오 클리어는 이번에도 실패하는 게 아닐까?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영주의 자리가 굳건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없어 보였지만,에라스트에 파견된 유령들이 언제 어디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들이 있는 이상 루비아는 절대 안전하지 않다.

언제든 잘리고,썰리고,찢기고, 뚫릴 수 있는 평화.

레안드로 후작이 기대 이상으로 날뛰는 바람에 네크론 신사회에서 에라스트에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지만,이미 있는 유령들은 별개.

신임 영주가 황실에 어긋난다면 예전에도 그랬듯 간단히 뽑아낼 수 있다.

마녀 재판이라는 글자가 불안을

한층 더해 준다.

에라스트 유령들을 파헤쳐 모조리 없앨 수 있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 수도의 소녀 공작이 있는 한... 답답한 여운이 내려앉았다.

아이작에게 물어보면 좋겠는데.

[정체불명의 주술인형]

[몰입 연산...]

[현재 영자靈구 변환 중...] [인격분리에 의해 변환 효율이 크게 증가합니다.]

[공간관측 중...]

[차단,제어,확장,축소를 세밀히 관측합니다.]

[시간 감각의 차단으로 관측자는 특정 광기에서 보호됩니다.]

[관측의 정밀성이 증가합니다.]

아직도 뭘 하고 있다는 건지.

새롭게 몇 가지 메시지가 추가로 펼쳐졌다.

인밴토리를 관측한다는 건가?

문득 녀석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지금까지 네가 말한 모든 일을 직접 겪었잖아? 스스로 생각해 봐. 너한테 이야기를 들은 나보다야 훨씬 좋은 답을 내놓을 텐데.〉

누군가의 계시 따위가 아니다. 자신의 사고를 믿으라는 말.

천천히 단계를 밟아 생각했다.

루비아의 당면한 위협은 이곳에 몸을 숨기고 대기 중인 유령들.

기척도 잡히지도 않는다.

기적적으로 이곳의 유령들을 모두 뽑아낸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수도에서 다른 유령들,더 강하고

더 많은 유령이 올 테니까.

어쩌면 소녀 공작 본인까지.

결국 노려야 하는 건 본부다.

방법은 두 가지 중 하나.

소녀 공작이 절박한 위기에 빠져, 에라스트에 있는 녀석들을 수도로 불러 모으거나.

본부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

레나의 보고서를 읽어 보았을 때, 수도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후작은 의외로 유령들은 건드리지 않는 것 같았다.

일단 네크론 신사회와 비브리오를 쓸어버리려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순위를 정한 건지도.’

하지만 정작 레안드로 놈을 두 번 연속 죽인 장본인은 유령의 수장인 소녀 공작.

녀석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면, 어떻게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 사냥개를 활용해서 비브리오를 사냥하고 난 뒤 유령들까지 물게 만들 수 있다면...

에라스트에,루비아 곁에 머물러 있어도 내가 특별히 해 줄 수 있는 일은 더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여기 머무르는 일이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일단 수도로 간다.

레나에게 가서 더 자세한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지금 찾고 있다는 기스-제-라이의 정보가 궁금하기도 하니까.

아직 나타날 시간은 안 됐지만, 황제 암살 현장에서보다 한 발짝 먼저 만나서 말린다고 나쁠 거야 없겠지. 허망하게 잿빛 기사에게 살해당하는 결말은 막을 생각이다.

루비아에게 짤막한 작별 인사를 건네고 에라스트를 떠났다.

그녀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 달이나 곁에 있어 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이야기를 거듭했다.

〈저는. 여기를 잘 지킬게요. 꼭 다시 돌아오실 거죠?〉

<...〉

- 팟!

루비아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길을 재촉했다. 시나리오 분기를

넘어서인지,나를 향한 루비아의 호감도는 에라스트 안에 있을 때도 계속 올라갔다.

어차피 시스템에 의해 농락되는 감정인지도 모르지만 그런 마음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에라스트에 한 달이나 머물렀지만 일단 길을 떠나자 묘하게 마음이 급해졌다. 반듯하게 닦인 도로가 아닌, 중간의 산과 계곡을 그대로 뛰어넘는 쪽을 택했다.

루비아의 노력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내가 빨리 움직여야 한다.

인기척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험준한 지형을 한 번에 훌쩍 뛰어넘고

있을 때였다.

- 파드득!

큰 날개를 펄럭이며,노란 발목에 무언가를 매고 있는 매 한 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방향은. 에라스트다.

내성을 향해 날아가는 송골매를 보고 반사적으로 스킬을 시전했다.

‘공포.’

- 피리릭.

순간 몸이 굳어 음찔하며 아래로 떨어지는 매를 가볍게 받아 든 채, 발목에 묶인 대나무 통을 낚았다.

- 팍! 파팍!

정신이 들었는지 매가 부리로 눈 사이를 쪼려 들었지만,아무것도 부리에 걸리지 않는 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깜빡거렸다. 얼떨떨한 채 있는 매를 내버려두고 편지를 읽었다.

내용은 극히 간단했다.

〈그분을 수도로. 긴급 요망.〉

편지 아래 적힌 친필 사인은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레나.

그녀가 루비아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의 ‘그분’이면 여기서는 일단 나밖에 없다.

정기적으로 오는 대신 송골매를 보내 내용도 적지 않고 긴급하게 나를 부른다.

루비아에게만 신경 쓰고 있던 사이 레나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닥쳐오는 불안감에 편지를 잡은 손이 꽉 쥐어졌다.

공교롭게도 어차피 가는 길.

찢은 뒤 절벽 아래로 날린 편지를 허망한 눈으로 보는 매를 남기고, 지금까지보다 더 훨씬 빠른 속도로 이동을 계속했다.

“.초대장은 갖고 계십니까?”

“여기.”

수도 T&T 본부 입구에 도착한 뒤 레나의 펜던트를 내밀었다.

길드에 잠입한 네크론 무리에 대한 한차례 거대한 숙청의 여파인지, 가게를 운영하는 자들의 면면이 꽤 달라져 있었다.

“예약하신 분이셨군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 드르륵!

문을 열고〈자유의 길〉과 연결된 공간에 도착했다.

한 계단 한 계단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자,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마주하고 있는 레나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은근히 놀란 기색이었다.

“이거 굉장히. 빨리 오셨군요.”

곧 나타난 레나가 나를 맞았다.

“긴급 요망이라며?”

그녀가 피식 웃으며 손으로 살짝 깍지를 꼈다.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셔서 일단 감사드리죠.”

고개를 들어,똑바로 마주친 입이 꽤 길게 웃음을 홀린다.

“긴급이라고 쓰면 언제든 이렇게 당장 와 주시는 건가요?”

레나가 옆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누가 가져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바빠서 건드리지 못했는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꽤 기분이 좋네요. 남용할지도 모르겠어요.”

“.무슨 사건이라도 있나?”

그녀는 그제야 차를 한 모금 홀짝 들이켜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름한 두 눈썹 사이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안건을 생각하자 마시던 차 맛이 훌쩍 달아났는지, 한 모금만 마신 찻잔을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리고

돌아보지 않았다.

“우리 사냥개에게 몰린 네크론의 흑막. 비브리오 녀석이. 드디어 최후 통첩을 했다는군요.”

최후 통첩이라.

요구하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최대한의 무력 조치를 취하겠다는 이야기인가.

“후작에게? 아니면. T&T에게?”

후작에게 해 봤자 먹히는커녕 훨씬 더 불타오를 것이고,T&T는 은밀 하게 물밑에서 활동하는데.

“아니요,로랑스 타르티에요.”

잊고 멀뚱히 레나를 바라봤다. “.누구라고?”

“〈소녀〉공작님이요.”

“로랑스가 레안드로를 수도에서 내치지 않으면,유령들과 공작에게 보티스의 가호를 거두겠다는 최후 통첩을 한 모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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