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91화 (291/458)

310화 Unearth (30)

“그 둘은. 같은 편 아니었나?” 소녀 공작과 비브리오.

공작은 비브리오를 통해 보티스의 가호를 빌린다.

동료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둘은 음지에서 제국을 쥐락펴락하며 살아가고 있다.

잠시 갈등을 빚는 모습도 봤지만, 레안드로라는 위협 앞에서는 금방 타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글쎄요.”

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테이블 위의 서류 더미를 한곳으로 밀어 치우고,서랍에서 보고서 몇 부를 꺼내더니 그중에 하나를 내 앞에 펼쳤다.

짙은 화장과 선 굵은 얼굴이 정밀한 초상화로 그려져 있었다.

“로랑스 타르티에. 도를 지나칠 정도로 재물에 관심이 많고,무엇보다 화장을 망치는 걸 두려워하는 우스꽝 스러운 인간이지만..

레나가 내 쪽으로 향한 보고서를 한 장 뒤로 넘겼다.

특위의 수장이었죠. 녀석이 대놓고 레안드로를 적대했더라면,균형을 맞추기 위해 저희 T&T가 전면으로 나서야 했을 겁니다.”

“.소녀 공작이 레안드로 후작을 감싸고 돌았다는 건가?”

“네. 그 본질은 어쨌건 검호. 진짜 재능을 보면 아껍니다. 정치 감각이 부족한 청년 검객이 유례없는 속도로 관내후가 된 데는 로랑스 공작의 역할이 컸죠.”

“솔직히 자신의 세력이 될 거라는 기대보다도 개인적인 애정에 좀 더 가까웠을 겁니다.”

아이작의 전당 지하에서 공작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레안드로를 살해한 걸 이야기하며 진심으로 슬퍼하던 기억이 났다.

〈아아... 어떻게. 이럴 수가. 발정이 나려면 그냥 나한테 나지. 생일 선물도 못 사 줬는데..!〉

그는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레안드로를 죽이기는 했으나.

소녀 공작에게 그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는 건가.

레나가 말을 이었다.

“레안드로 녀석도,지금은 소녀 공작에게 별다른 악의가 없지요. 하지만 로랑스 폰 타르티에,그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중요합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결국 후작을 치겠지요. 일리엔의 눈물 때문에 양상은 좀 달라지겠지만.”

공작의 후작 살해는 레나에게도 이미 공유한 사안.

아슬아슬하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선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이다.

당장 아이작이 떠올랐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결국 내가 헤쳐 나가야 한다.

“지금까지의 성공,네크론 조직의 붕괴는. 로랑스 타르티에 개인의 호의 덕분에 가능했지요. 지금부터 그게 곤란해질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가진 선택지는?”

“위험을 감수하고 후작을 전면적으로 돕거나,이 정도에 만족하고 사냥개가 죽는 모습을 방관하거나. 일단 그 두 가지죠.”

“위험이라면..

“첫 번째는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위험이에요. 공작이 이끄는 황실 특위, 비브리오의 잔당과 대놓고 싸워야

할 테니까요.”

T&T에게 부담이 클 뿐만 아니라, ‘우리’ 쪽 세력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 이야기다.

상인연합과 그라스미어,슬라임이 통치하는 유블람.

에라스트의 루비아까지.

전면전이 되어 버릴 수 있다.

아직 그걸 감당할 정도로 세력이 구축되어 있지 않은 건 당연하다.

“두 번째로 레안드로는, 공작을 경계하라고 하면 아마도 우리에게 칼을 겨눌 거예요. 로랑스 공작이 레안드로를 천거했으니까요. ”

“일리엔의 눈물까지 손에 넣도록 해준 데다,지금까지 은근히 도움을 줬는데도 말인가?”

“성격이 그렇거든요. 이간질이 안 먹히는 정도를 넘어서. 제 목을 자를 상대도 못 알아보는 고집스런 놈이에요.”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후작을 구하고 싶다.”

녀석을 살려야 한다.

일리엔의 빛이 흐려지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네크론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만들고,루비아가 순탄하게 영주로 등극할 수 있었던 데는 어쨌거나 후작의 활약이 컸다.

수도까지 급하게 달려온 본래 목적을 생각했다.

상태창에 분명히 나타났던 글자.

〈‘마녀재판魔女裁判’ 시나리오의

인과가 추가로 증가합니다.〉

루비아가 터무니없는 이유로 악마 숭배자로 몰렸던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

비브리오가 다시 남부까지 마수를 뻗을 가능성이 크게 높아진다.

모처럼 얻은 좋은 패가 찢기게 만들 수는 없었다.

레나가 단단하게 입매를 굳히고 눈빛을 가라앉혔다.

“역시 그게 맞겠죠.”

“괜찮은 건가?”

“물론이죠. 과거를 ‘직접’ 경험한 당신보다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분은 없으니까요. 일단..

레나가 살짝 침을 삼켰다.

“제가 먼저 녀석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해 볼게요.”

그녀를 바라보니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과,가늠할 수 없는 고마움이 밀려왔다.

내 말 한 마디에 엄청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러 나서는 것이다.

자신의 위험뿐만 아니라 길드의 운명까지 아무렇지 않게 판돈으로 걸어 버린다는 그녀를 보니,순간 이 세계에 레나와 나 둘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이번 생에 레나에게 도움 될 만한 일이라고는 하지 못하고,처음부터 내내 도움만 받고 있는데...

하지만 레안드로를 만나야 하는 건 그녀가 아니다.

“내가 직접 만나지.”

공작을 경계하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할지 모른다면.

혹시라도 레나를 위험에 빠뜨렸다 후회할 일을 만들지도 모른다.

방관도 어렵다.

루비아 시나리오가 완료되지 않고 전쟁을 막지 못하면 결국 처음으로 돌아간다.

지금까지 쌓아 온 걸 유지하려면 도박을 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레나는 고개를 젓고 앞으로 팔을 뻗어 길을 막았다.

“아니요. 그건 자살인데요?”

“마魔를 보면 무조건 베어 버린다. 푸른 사자 기사단의 모토거든요. 그쪽 단장이랑 얘기가 통할 리가 없잖아요?”

무모한 도박인 건 사실이지만... 아무 대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후작에게. 회귀한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한다. 녀석이 믿을 만한 단서가 있어.”

놈이 이사벨에게 남겼던 징표를 기억하고 있다.

진정성을 가지고 말하면 믿어 줄 확률은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시나리오 클리어로 얻은,품속에 있는 레나의 펜던트가 미동도 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레나에게 털어놓았지만 그녀는 강경했다.

“그깟 펜던트가 뭐라고 믿고요..! 위험한 일은 전 반대예요.”

본인의 펜던트를 매도하다니.

“그럼 네가 위험한 건 괜찮은가?”

“저는 그래도..

“T&T가 위험한 건? 아니,황실에 맞서는 게 안전한 일인가.”

어차피 쉬운 길은 없다.

다만 레나의 판단을 거스르는 게 마음에 걸린다.

“내가 아니라 다른 녀석이었다면 어떻게 판단했을 거지?”

“글쎄요..

“솔직히 말해 줘.”

“그거야,다른 녀석이라면 당연히 해 보라고 했겠죠! 하지만.”

“그럼 됐어. 레안드로와의 자리를 만들어 줘.”

그때 였다.

- 철컥!

“그래. 녀석 말대로 해 줘. 그럼 볼일은 끝난 거지?”

석실로 긴 은발의 여자가 머리를 내밀고, 몸을 올렸다.

“트로핀. 나냐우?”

“내가 좀 늦었나?”

나냐우의 물음에 레나가 옆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분이 너무 성실하게 일찍 오신 거니까요.”

“정 걱정되면 내가 따라가서 구해 주면 되잖아. 이제 내가 데려가도 될까? 애타게 기다렸다고.”

“하아. 일단 알았어요.”

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팔을 접었다.

갑자기 나타나 더없이 반갑다는 둣 활짝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은발의 여자가 당황스러웠다.

“당신은. 무슨. 일이지?”

“이거.”

나냐우가 품에서 투명한 유리병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뚜껑이 닫힌 유리병 안에는 낮게 깔린 은빛 액체가 찰랑거렸다.

“너에게 줄 루-륨을 모아 놨거든. 따라을 거지?”

미로 같은 결계를 통과하면서도, 인벤토리 안의 아이작을 다시 띄워 상태를 살폈다.

[관측 중...]

아이작에게 꼭 넣어 주려고 했던 마력액이지만 역시 지금 상태에서 섣불리 건드릴 수는 없었다.

유리병 속에서 낮게 찰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홀린 듯 나냐우를

따라간 곳은 수도 교외였다.

산을 등지고 앞에는 호수가 있는 전원의 광경.

잘 지어진 2층짜리 목조 저택은 문단속도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집을 둘러싼 결계는 새 한 마리도 함부로 날아올 수 없도록 철저히 짜인 것 같았다.

- 덜컥.

가볍게 열린 문 안쪽에는 그 어떤 생활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산속에 있으면서도 요리,사냥,벌목,

채집 도구는 보이지 않는다.

식기는 물론이고 온도를 조절하는 벽난로도,창문 하나조차 없다.

달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목조 저택의 양쪽 벽에 진열된 건 오직 각양각색의 플라스크.

그리고 그 안을 채운 다잉한 빛깔의 액체와,큰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정렬된 주사기들뿐이었다.

내부의 풍경을 보고 나냐우에게 물었다.

“너는. 인간인가?”

나냐우는 굉장히 이상한 질문을 들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인간,이란 건 뭐지?”

순간적인 충동으로 뱉은 말.

돌아오는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이를테면 난..

아니겠지,라며 어설프게 예시를 들려는 내 말을 그녀가 단호하게 잘랐다.

“너는 인간이다.”

테이블 옆 의자에 앉은 나냐우는 날카로운 주사기 하나를 들고 녹색 액체를 걷어붙인 어깨에 주사하며 말했다.

“아마,나보다는 조금 더.”

터무니없는 농담을 듣자 어찐지 민망해졌다.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나냐우는 작고 날카로운 주사기를 들어 분홍색 액체를 허벅 지에, 그리고 손등에 주사했다.

편안한 둣 파르르 눈꺼풀을 떠는 그녀를 보며 말을 돌렸다.

“이것들은 다 뭐지?”

“제트 락,벡스넬,트리들. 신경 거부반응을 안정화하기 위한 진정 계열 마약이다.”

피 대신 루-륨으로 300년을 사는 대가라면.”

그런 사정이 있었나.

트로핀 나냐우의 약물 중독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액상 마약이 주입된 핏줄은 살짝 달궈져 부풀고 가라앉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결국 기적은 기분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가.

이 정도 대가라면 효율이 좋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몇 번 가늘게 몸을 떨다가 다시 눈을 뜨고 일어난 나냐우는 낫을 들어 바닥에 박았다.

거듭된 주사에도 불구하고 눈빛은 오히려 명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쿠르릉...

바닥에 작은 틈이 생겼다.

지하의 서늘한 바람이 위쪽으로 가늘게 올라왔다.

그 틈 어딘가에 나냐우는 열쇠를 넣어 돌렸고,크게 균열이 생기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이쪽으로.”

이중 잠금이 된 좁은 지하실에는 1층과 달리 오직 한 종류의 액체만

벽에 진열되어 있었다.

두 병이 전부였지만,그나마 가득 채워진 건 한 병밖에 없었다.

나냐우는 가지고 온 유리병까지 조심스레 그 옆에 올려놓았다.

“이걸 어디서. 혹시 네 피에서 뽑은 건 아니겠지?”

나냐우는 피식 웃으며 주사기를 손가락으로 핑그르르 돌렸다.

“아니. 간신히 맞춘 밸런스라고. 그런 짓은 하지 않았어.”

벽에 놓인 루-륨 병을 바라보며 그녀는 어딘가 들뜬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 말했었지. 너는 루-륨을 흡수할 수 있다며? 괜찮다면 한번 보여 주지 않을래?”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너도 필요할 텐데.”

나냐우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내 안에 넣을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어.”

“달리 쓸모도 많지 않나?”

“글쎄. 그보다 네가 흡수하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거든. 어서 해 봐.”

저렇게까지 말하면 거절할 이유는 없다.

“일단 반만 흡수해 보지.”

“왜? 전부 널 위해 준비했는데.”

“나머지는. 혹시 가져가도 되나? 달리 필요한 데가 있어서.”

“흡수만 보여 주면. 물론이지.”

나냐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끼었다.

어서 해 보라는 자세였다.

- 쉬이이이이익!

손을 내밀자,유리병에 모여 있던 액체가 휘발되며 은은한 은빛 색이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아..

트로핀 나냐우가 나직한 감탄을 흘려 냈다.

[루-름 흡수에 익숙해집니다...]

그녀가 홀린 듯 나를 바라봤다.

입안이 바짝 마른다는 둣 천천히 마른침을 삼켰다.

약속한 절반을 거의 다 흡수해 갈 무렵이었다.

- 띠링!

[다음 전직이 해제된 상태입니다.]

- 해골 검사

- 해골 사냥꾼

- 리치

아래쪽에서 전직 창이 떠오른다.

기사는 이미 전직해 혜택을 받은 상태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리치,아래에 떠 있는 〈전직하시겠습니까?〉라는 글자를 바라봤다.

[루-름이 매우 부족합니다.]

검사도,사냥꾼도 마찬가지.

[루-륨이 부족합니다.]

이 정도로는 역시 무리.

나머지 반을 더 흡수한다고 해도 차이는 없을 듯하다.

“.일단 여기까지.”

한참 흘린 듯 서 있던 나냐우가 그제야 주먹을 쥐었다 펴며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정말*" 이군   ”

“너는 안 되는 건가?”

“물론. 상상도 못 했어. 300년..

은발의 나냐우가 다시 한 번 깊은 탄식을 홀렸다.

“나는 지난 300년 동안 이 은빛 마력액을 연구했어. 피 대신 몸에 이식하는 건 성공했지만. 아직도 주기적으로 온갖 약으로 안정시켜 줘야 하는 처지지.”

한숨을 쉰 그녀가 지하 책장으로 손을 뻗었다.

얼핏 보기에도 온통 루-름에 관한

주제로 가득한 책꽂이에서 그녀가 한 권을 빼내 건넸다.

“이걸 좀 봐 주지 않겠어?”

〈덜 굳은 고통〉

제목만으로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눈을 아래로 내리자 몹시 익숙한 이름이 드러났다.

〈덜 굳은 고통 - 캐빈 애슈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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