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Unearth (31)
“캐빈. 애슈턴.”
전혀 의외의 곳에서 그의 이름을 다시 접했지만,예상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세계의 이면에 닿은 존재들과의 만남에서는 애슈턴의 이름이 마치 약속처럼 튀어나오니까.
“왜? 좋아하는 작가야?”
하지만 나냐우의 어조에서 특별한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나.
애슈턴의 책을 본다고 시스템에 의해 스탯이 올라가고,정체불명의 동화율이 떨어지는 건 나 하나밖에 없을 테니까.
“뭐,그렇지.”
적당히 얼버무려 빠져나왔다.
회귀와 루-륨 흡수까지는 이야기 했지만,동화율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거 재밌네.”
“뭐가?”
“표지 한번 봐.”
캐빈 애슈턴의 이름에 놀란 탓에, 아직 신경도 안 쓰고 있던 표지로
시선을 돌렸다.
표지에는 퇴색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서로 맞물린 수많은 톱니바퀴 아래 커다란 수레바퀴를 그려 놓았는데, 전체가 조금씩 비틀린 수레바퀴는 가운데 지점에서 앞뒤가 맞물려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수레바퀴를 은빛 액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 넘치게 타고 돌며 꿈틀거린다.
이어진 지점을 멍하니 바라봤다.
“안팎의 구별이 없는 수레바퀴. 영원한 반복의 상징이야.”
나냐우가 내 반응을 기웃거리며 살핀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지만. 네가 회귀를 한다고 했을 때 바로 이게 생각나더라.”
홀린 둣 잠시 수레바퀴를 보다가 책을 펼쳤다.
캐빈 애슈턴의 이름이 적혀 있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첫 페이지를 넘겼을 때였다.
“그림. 책?”
“응. 설화? 동화라고 해야 되나. 비슷한 느낌이야. 천천히 읽어.”
앉아 몸에서 힘을 했다.
[인간들은 강가에서,산 아래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어요.
일 년 내내 따듯하고,숲에서는 언제든 과일을 맛볼 수 있었어요.
엄마는 아이에게 이야기했어요.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몰라. 하지만 잘 살아가고 있단다. 우리는 행복해.”
아빠도 고개를 끄덕였어요.
“우리는 행복해.”
강가에서 작살이 꽂힌 물고기도, 양념을 하지 않아도 굽기만 하면
무척 맛있어지는 멧돼지도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인간은 멋져.”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낚시 대신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울타리를 친 다음 양을,돼지들을 가둬 길렀어요.
아이는 긴 창으로 강가의 악어를 죽인 다음 가죽을 벗겼어요.
가죽이 벗겨진 악어가 말했어요.
“와,너는 정말 대단하구나.”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물론이지. 나는 인간이거든.” 아이는 친구들과 계속 행복하게
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커다란 괴물들이 나타났어요.]
- 스륵.
감흥 없이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마물들이라도 나타난 설정인가?
하지만 그곳에는,그저 원래 있던 인간들보다 좀 더 커다란 인간들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다만 등 뒤쪽에 반투명한 촉수가 어딘가와 이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처음 보는 모습은 아니다.
아이작과 함께 사냥했던 것.
사도의 부스러기와 유사하다.
책에 그려져 있는 촉수 주위에서 까만 공기가 올라와 주위를 돌며 일렁이는 것 같았다.
[괴물들은 말했습니다.
“너희는 왜 서로 싸우지 않지?”
다 자란 아이들은 당황했습니다.
“저희가요? 저희는..
“재미없어.”
대답도 듣기 전에,괴물들은 입을 활짝 벌렸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을
와그작와그작 질겅질겅 마구 씹어 먹었습니다.
조용한 마을에 울려 퍼진 요란한 소리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멀리 달아나려 했습니다.
하지만 괴물들은 그곳까지 금세 덮쳤습니다.
멧돼지를 사냥하러 달리던 튼튼한 두 다리는 괴물들이 뼈까지 씹어 먹었고,뭘 먹을지 생각하던 뇌는 괴물들이 혀끝으로 느긋하게 녹여 삼켰습니다.
“하하하!”
괴물들은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괴물들은 인간을 쫓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은 마를 때까지 쉬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도망갔습니다.
굶주리고 목이 말랐지만 땅 위는 너무 위험했습니다.
깊숙한 땅 아래로 도망갔습니다.]
땅 아래로 나 있는 통로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의 인간들은 모두 홀짝 말랐고,자세도 눈빛도 전과 다르게 변해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지하 통로를 다녀야 했으므로 퀭해진 두 눈은
조금이라도 더 빛을 반사하기 위해 번들거렸고,머리를 부딪힐까 봐 그들은 창백한 낯을 아래로 숙이고 구부정하게 걸었다.
지하 통로에는 작게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자유의. 길.”
“그래. 너도 몇 번 이용해 봤다고 했었지?”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괴물들이 인간을 땅 위에서,심지어 도피한 땅 아래까지 찾아 잡아먹는 장면은 편집증적으로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살점과 근육이 어떻게 찢겼는지,
관절이 어떻게 꺾이고 뽑혔는지, 가장 가는 혈관에 흐르는 피까지 어떻게 빨아 먹었는지.
해부학의 영역에 독자를 끌어들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겠다고 외치는 묘사를 한참 지났을 때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풍의 삽화가 나타났다.
괴물들에 비하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크기인 인간의 머리 위에는 본인보다 큰 글자가 적혀 있었다.
〈건국제 세이론〉
인간은 홀연히 일어나,양손으로 괴물들을 잡아 찢었다.
끊긴 목에서 흐르는 피를 마시고 촉수를 뽑아내고 흩뿌려진 사체와 피를 인간들에게 나눠줬다.
〈건국제 세이론〉,이라고 인간의 머리 위에 계속 쓰여 있는 글자를 손끝으로 살짝 더듬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나 모든 괴물을 무찔렀다고 생각했을 때,마지막 괴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마지막 괴물이라니? 어디 있죠?”
사람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이론은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괴물을 피해서 도망간 첫 번째 도시.
지금은 가장 번성한 도시 아래에 지하 괴물이 틀어 앉아 있었지요.]
건국제 세이론의 이야기는 이제 익숙하다.
하지만 마지막 괴물이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삽화로 그려진 도시를 바라봤다.
“여기는..
“워낙 그림을 대충 그려져 쉽게 알아보긴 힘들지? 하지만 윤곽을 보면,확실히 여기로 보여.”
나냐우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성문 터널 뒤 빛의 평야만 봐도 확실했다.
제국 수도였다.
다음 페이지에서 지하에서 새까만 그림자 같은 바짝 마른 손이 위로 나왔고,그림자는 도시 곳곳에서 수레바퀴를 돌리는 은빛 루-륨을 그대로 흡수하고 있었다. 루-륨은 비어 갔고,수레바퀴들은 하나둘 멈췄다.
그 삽화를 보자 스스로도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어쩌면,
[세이론이 지하에 숨은 괴물까지 물리치려고 했을 때...]
뒤에서 바로 느껴진 허전한 감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64.97% - 64.51%,
해당 문장 뒷부분은 아예 통째로 페이지가 뜯겨 나가 있었다.
[지혜가 1 올랐습니다.]
손을 멈추고 나냐우를 바라봤다. 의자에 앉은 나냐우도 나를 보고 있었다.
300년을 살아온 ‘인간’은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부드럽게 목을 한 바퀴 돌렸다.
루-름을 꼭 닮은 은발이 어둠을 반사하며 찰랑거렸다. 그녀가 입을 열자 찰랑이던 은발도 멈췄다.
황당한 동화책이지. 중간이 뜯어져 있기도 하고. 하지만 아까 말했던 수레바퀴도 그렇고,네가 루-륨을 흡수했잖아? 그걸 보고 이 책이 바로 생각나더라.”
“으음. 떠오르는 건 없는데.”
“그래? 하긴..
나냐우는 한 손가락으로 머리를 꼬며 다른 손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뒷 표지를 바라봤다. 역시 같은 수레바퀴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문장과 뒷 표지 사이에는 무려 절반 이상의 분량이 ‘뜯어져’ 있다.
기괴하다.
동화율은 언제 어떻게 떨어지는지 모른다.
그러나 캐빈 애슈턴의 책은 분명 한 권을 온전히 읽어야 능력치가 올랐다.
대충 획획 넘겨도 안 오르는데, 이만큼씩 뭉텅이로 뜯겨 나갔다면 지혜가 안 오르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랐다는 건.
혹시 여기까지가 온전한 한 권일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뜯겨 있는 게 연막.
집중해야 한다.
“이 마지막 괴물이라는 게. 수도 지하에 있다는 건가?”
나냐우가 고개를 저었다.
“세이론에게 무난하게 처단당하지 않았을까? 비역에 루-륨이 있다고 말하는 자료는 은근히 있거든.”
“흐음.”
“찢겨 나가긴 했지만, 그 책도 세이론이 마지막 괴물을 물리치고 루-륨을 차지한다는 이야기겠지. 제국 황실 대대로 물려준다는 거고. 안 그러면 루-륨을 황실이 그렇게 통제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나냐우의 말에 일리가 있다.
전쟁을 위한 수송도,반출도 모두 황실의 의사에 철저히 따랐다. 하지만.
그렇게 평범한 영웅 이야기라면, 왜 뒷부분이 찢겨 나갔을까.
혹은,찢은 척해 놓은 걸까.
이 자체가 실마리인 건 아닐까? 당장 답을 얻을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고민하다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나냐우,황실 비역에 들어가려고 해 본 적이 있나?”
트로핀 나냐우.
내 눈앞의 인간 정도로 오래 살고 강한 자는 극히 드물다. 루-륨에 대한 관심 역시 적을 리가 없다.
충분히 시도해 봤을 만하다고 생각 해서 물어봤지만, 트로핀 나냐우는 간단히 부정했다.
“아니. 결계가 웬만큼 대단해야지. 허가받지 않은 자가 힘으로 뚫고 들어가는 건 무리였어. 아무래도 이 시대의 것이 아닌 것 같아.”
아이작이 하늘, 땅,지하가 모두 막혔다고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정도라면 허가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겠지.
비역에서 밖으로 나오는 루-륨도 위험하다.
정체불명의 잿빛 기사가 등장해 모두를 학살했다.
놈에게서 안전한 건 나 하나뿐.
결계를 뚫고 비역으로 들어가면. 놈이 버티고 있을지도 모른다.
책에서 말한 ‘마지막 지하 괴물’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무슨 생각 해?”
나냐우가 다리를 꼬고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루-륨에 대해 아는 것들을 같이 나누지 않겠어? 나도 지금껏 해 온 실험 결과를 공유할께.”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루-륨 흡수 시의 느낌,그 소모와 아이작이 그린 내부의 회로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었다.
“정말 귀한 걸 받아 버렸네. 이런 회로라니..!”
나냐우는 무척 놀라워하며 질문을 계속했다. 그녀의 연구 결과들도 놀라운 것이 많았다.
루-룸 한 방울을 섞어 인간에게 주입하면 폭발적인 힘을 내게 하는 마약에 대한 정보,엠버에 있다는 루-름을 동력원으로 하는 기계들의 설계도와 세부 작동 원리까지.
“•••어렵군.”
“다시 설명해 볼까?”
[마도공학의 개념과 원리를 반복 습득합니다.]
[뛰어난 교수법이 적용됩니다.]
[마도공학 Lv.O의 경험치가 크게 올랐습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스킬 레벨이 오를 것 같았다.
그녀는 1/4 방울의 루-륨을 섞은 시약 하나를 눈앞에서 직접 제조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금으로 동을 만드는 모양새라. 그냥 순수하게 마력액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효율이 압도 적이지. 이렇게 하면 시약에서 분리해 낼 수도 있고.”
[특수 레시피를 습득했습니다.]
[마도 화학 Lv.3의 경험치가 소폭 올랐습니다.]
지식 교환이라기보다는,나냐우의 일방적인 강의가 순조롭게 진행된 지 하루가 지날 무렵이었다.
- 덜컥!
익숙한 인기척이 통나무집 문을 박차듯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레나?”
“네,저예요.”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아직 생각 안 변했어요?”
“.생각?”
“그놈,정말 꼭 만날 거냐고요.”
어딘지 툴툴대는 말투였다. 누구 이야기인지 물어볼 필요는 없다. 제국 대상조. 절찬리에 활약 중인 사냥개를 말하는 거다.
“물론이지.”
“후우.”
레나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단념한 듯 머뭇대지 않고 입을 열었다.
“레안드로와 자리를 마련했어요. 더 고민할 시간도 안 주고... 그놈 성격답게 날짜를 잡더군요. 당장 오늘 밤이에요.”
“오늘 밤?”
“네. 아니면 만나 주지 않겠대요. 빈말은 아닐 거예요.”
“뱉은 말은 지키는 성격이지.”
나냐우가 거들었다.
“시조도 동행하시는 거죠?”
“그럼.”
“일단 안심이지만. 그래도 조심, 또 조심하세요. 만나겠다고 했지 안 죽이겠다는 말은 안 했거든요?”
나냐우가 큭큭 웃으며 옆에 놓인 낫을 고쳐 들었다. 그녀의 정확한 실력은 모르지만,레나가 안심할 정도라면 괜찮겠지.
게다가 동행이 없더라도 후작과는 어차피 만나려고 했으니까.
“아주 좋아. 장소는?”
“제 쪽에서 정했어요. 제7 무연고 공동묘지 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