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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294화 (294/458)

313화 제국의 칼 (1)

기사 데서리 바티엔느의 장례식은 3일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날은 제국을 위해 식인 덩굴 퇴치에 나선 근위단장으로.

둘째 날은 공신 바티엔느 가문의 막내딸로.

셋째 날은 출세와 한참 거리가 먼 집안,팔커스 남작가의 아내로서.

제국은 기사를 사지로 몰았으나 세 여신의 축복으로 마지막 가는 길을 달랬고,바티엔느의 가문은 오래전

제멋대로 한미한 집안의 남자와 결혼한 망자를 제명했으나 순직에 용서했다.

화려한 문장이 시체 없는 관 위에 덮어졌고,그것만으로도 장례식의 위엄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팔커스 남작가는 아내를 잃었으되 더할 것이 없었다.

눈에 띄게 초라해진 마지막 날의 장례식에서 실질적인 상주는 고작 아홉 살 난 소년이었다.

“도련님,손님맞이는 어떻게..?”

“광을 열고 어머니 유품을 팔게. 금붙이가 꽤 있을 거야.”

소년의 아버지는 오열조차 하지 못하고 넋을 잃고 있었다.

원체 유약한 성격이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글줄 읽고 읊는 것밖에 없는 한미한 남작가의 장남.

그런 남자가 뭐가 그리 좋았는지, 기사 데서리는 대대로 명예와 힘을 쥐고 있던 가문과 연을 끊는 것도 기꺼이 감수했다.

“아무래도 이것 정도는 팔아야 음식을 마련할 수 있을 터인데..

하인은 뒷말을 흐렸다.

유산을 쏟아 마련한 결혼반지였다.

남편의 동생들까지 꿀리지 않게 시집보낸다며,어머니가 웬만한 자기 패물들을 이미 다 처분했다는 건 소년도 미처 모르던 사실이었다.

첫째 날의 장례식 비용을 치른 황실은 차후 절차에 따른 위로금 지급을 약속했지만 돈이 필요한 건 당장 오늘이었다.

“.팔게.”

소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안 돼.”

넋이 나간 듯 한쪽에 기대고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눈에 불을 켰다.

“안 된다,그것만은 안 돼! 그게 어떤 반지인데..!”

하인은 곤란한 표정으로 소년과 아버지를 번갈아 봤다.

아흡 살 소년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근위기사단장의 마지막 장례식입니다. 귀족답게. 손님을 제대로 대접해야 합니다.”

“안 된다. 안 돼..

아버지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그 말만 중얼거렸다. 힘없는 호소는 처절하지도 못했다.

소년은 하인에게 슬쩍 눈짓으로 지시했고,그렇게 마지막 날까지

장례식을 제대로 치를 수 있었다.

기사 데서리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바티엔느가의 막내딸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미 다녀갔다.

남은 이는 망자를 남작 부인으로 기억하는 한 줌 손님들뿐이었다.

가난하고, 남루한 이들이었지만 접대에 소홀함은 없어야 했다.

소년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손님을 맞았다.

“이쪽입니다.”

칼 한 자루만 놓인 텅 빈 관에 사람들은 향이 든 주머니를 놓고 고개를 숙였다.

동부 산맥의 깊은 숲에서 시체도 못 남기고 먹혀 죽었지만,소년은 칼이라도 찾아온 황실 특위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빈소에서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쓰러진 아버지와 소년만 남았다.

소년은 밖으로 나가 집 뒤 공터를 바라봤다. 그곳에서 목검을 들고 자신과 놀아 주던 어머니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 아들은 정말 천재야!”

임무 때문에 집을 비우는 날이 많은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는 건 무엇보다 즐거웠다.

대련을 빙자한 장난을 마치고 땀에 젖어 집으로 들어오면,책을 읽던 아버지는 고개를 들고 웃어 줬었다.

다시는 그런 날들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자 먹먹한 추위가 뻣속으로 파고들었다.

아직 너무 큰 어머니의 검을 한참 매만지다,두 손으로 자루를 잡고 살짝 들어 올렸다.

혹시라도 그렇게 하면 뒤에서 엄마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무얼 껑껑대고 있냐고 쫓아오지 않을까?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며 무언가가 눈에 맺힐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작스레 들려온 건 넋을 잃은 아버지의 고함이었다.

“내려놔! 너는. 너는. 그걸 들 자격이 없어.”

소년은 검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슬프지도. 않니? 너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흡 살 아들에게 투정을 부리는 유약한 남자를 바라봤다. 그렇게 소년은 울 기회를 영영 잃었다.

“기사 데서리 바티엔느는.”

떨리는 아버지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옥쇄하셨습니다.”

마지막 임무에 가기 전 어머니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나는 제국의 칼이다.’

그 말을 억지 위로로 붙잡았다

“기사 데서리 바티엔느는 국가를 위해 명예롭게 죽기를 바라셨습니다. 왜 슬퍼하시는 겁니까?”

“너는. 너는..

아버지는 말을 맺지 못하고 뒤로 돌아섰다.

남은 건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짙은 적막뿐이었다.

어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을 위로해 줘야 하지 않느냐며

따지고 싶었지만,부인만 바라보고 살던 남자의 허무한 표정을 보자 그런 기분도 사라졌다. 제대로 된 대화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와는 같은 집에 있었지만 같은 곳에 있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이곳저곳에서 이상한 책들을 구해 와 빠져 있을 때,레안드로는 어머니와의 기억을 회상하며 홀로 공터에서 수련했다.

즐겁게 목검을 휘두르다 수건으로 땀이 닦이던 유년 시절은 끝났다.

끝난 시절의 기억은 암흑 속에서 억지로 끌어 올릴 수밖에 없다.

레안드로는 멈추지 않고 공터에서 칼을 휘둘렀다.

어색한 동작을 하면 뒤에서 직접 잡고 움직여 주던 안정감.

목검을 아래로 떨어트리면 손목을 어루만지던 부드러운 감촉.

조금이라도 정확한 공격을 해내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온기.

칼을 휘두를 때만큼은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잘한다고 칭찬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고, 허점을 향해 공격해 들어올 때면 실제로 맞아서 아픈 것 같았다.

잘하는구나, 옳지,아니,여기는 이렇게. 어이쿠,발 조심하려무나. 칼에 쏟는 힘이 좋아졌네? 하지만 균형이 흐트러졌단다.

삼 년이 지났다.

그는 이제 죽은 어머니가 보여 준 동작들을 재현하며,어떤 차이도 없이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었다.

- 끼익!

레안드로는 어머니의 잔상을 향해 강하게 칼을 휘둘렀다.

깜짝 놀랄 만큼 날카로운 소리, 고작 목검을 휘두르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오싹한 소리가 허공을 잘랐다.

목검이 휘둘러진 후에야 바람이 움직이며 바닥에 깔린 흙먼지가 위로 따라 올라갔다.

소리와 그 모습만으로도 상대를 오싹하게 만들어 물러나게 할 것 같았다.

어머니가 가르쳐 줬던 검술은 여기 까지 였다.

하지만 레안드로는 멈추지 않고 다시 옆으로 칼을 휘둘렀다.

그때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고, 칼은 전이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반대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눈앞에서 생생하게 유지하고 있던 어머니의 이미지는 열두 살 소년의 칼을 막지 못하고 가슴팍에서부터 반으로 잘려 나갔다. 몸이 무너지며 가슴 아래는 앞으로,위쪽은 잘린 단면을 따라 옆으로 떨어졌다.

레안드로는 스스로에게 당황해서 칼을 떨어트렸다.

그건 레안드로가 희미하게 보이는 곡선 같은 것을 따라 칼을 휘두른 것뿐이었다.

착시에 가까웠지만 보인다기보단

어떻게 베고,움직일지 몸 전체에서 울리는 울림이 었다.

최초로 잔상을 베어 버리고 난 후, 어머니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더라도 제대로 상대하려 하는 순간 그녀가 여러 조각으로 보였다.

조각과 조각 틈 사이는 아주 넓게 벌어져 있어서, 들고 있는 연습용 목검 끝으로 슬쩍 찔러도 간단히 들어갈 것 같았다.

몇 번 어머니를 조각내고 난 후 레안드로는 더 이상 그녀를 공터에 끌어내지 않았다.

그저 칼을 놓은 채 몇 시간이고 공터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얄궂게도 목표가 생긴 건 곡기를 끊다시피 하며 무언가에 몰두하던 아버지까지 죽은 뒤였다.

3년 전이었던 어머니의 장례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명예롭지도,급작스럽지도 않다. 무엇보다 며칠간 서재에 남겨졌던 사체에서는 악취가 났다.

그제야 아버지가 죽기 직전까지 매달렸던 일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가르베라를 완전히 제거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잔뿌리나

가지 하나만 남아도 10여 년 후면 힘을 키워 그 자리에서 자라난다. 10년 전의 의식을 계승하고 있기에 더욱 영악해진 가르베라는...〉

10년 전 의식을 그대로 잇는다는 부분에 빨간색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펼쳐진 책 근처엔 식물형 마물을 잡는 법,산을 탐험하는 법 등에 관한 책들이 여럿 펼쳐져 있었다.

칼 한 자루 제대로 들지 못하는 약골 아버지는,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칼 한 번 휘둘러 보는 일

없이 3년 동안 책 속에만 갇혀서.

레안드로는 그 발버둥의 무의미에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진저리를 치며 그 사이 몸에 밴 시체 냄새를 털었다.

그는 밖으로 걸어 나와 집에 불을 질렀다.

크게 폭발이 날 것도 없이 집은 힘없이 무너졌다.

집을 전부 태운 불꽃은 공터에서 식어 가다 작아지고,이내 사라졌다.

황실의 보상금은 사라진 지 오래. 정리할 재산도 없었다.

어머니가 남긴 검.

팔커스 남작가에서 챙길 건 그게 전부였다.

“이. 이걸 정말 네가 잡았느냐?” 레안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덩굴이 다시 자라나는 건 어차피 7년 뒤였고,기다릴 동안 시간을 보낼 방법이 필요했다.

마물이 있다는 곳이라면 어디든 무작정 들어가 베었다.

그걸 훈련이나 연습이라고 불러도 좋을지도 모른다.

식사나 돈,잠잘 곳도 자연스레 따라왔지만 어린 나이는 어딜 가나 걸리적거렸다.

차라리 할 줄 아는 일이라곤 없는 아버지라도 데리고 다녔다면 좀 더 나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나마 4년이 더 지나,열여섯쯤 되자 예전보다는 귀찮은 일이 조금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기가 막히는군. 어디서 시체를 주웠지? 중요한 일이니 바른대로 말하거라,꼬마야.”

꼬마라고 불린 건 열넷 이후로

오랜만인데.

레안드로는 바닥에 쓰러진 박쥐 괴물을 바라봤다.

양쪽으로 활짝 펼치면 이 미터가 넘는 새까만 날개, 웬만한 단검보다 긴 발톱과 질긴 가죽을 훌었다.

걸어다니는 간식이라도 발견한 둣 자기 쪽으로 먼저 달려드는 덕에, 신중히 도망가는 사슴보다도 훨씬 잡기 쉬운 녀석이었다.

“그게,경비대장님. 이 소년이 원래 놀라울 정도로 사냥 실력이 뛰어 나서..

최근 거래를 터 뒀던 가죽 상점 상인이 비호에 나섰지만 경비대장의

불신은 두터웠다.

“닥치시오. 돌처럼 단단한 가죽을 아이의 화살 따위가 뚫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요? 아무래도 경비대가 예전에 싸웠을 때 죽여 떨어트린 시체를 발견한 것 같군.”

“그게 무슨..

“자네에게도 적당히 챙겨 줄 테니 가만히 입 닫고 있으라고. 꼬마야, 위험한 시체는 압수란다.”

물론 소년에게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다른 사냥꾼이 그가 잡은 마물의 시체를 홈쳐 가려 할 때도 있었고, 심지어 날붙이를 들고 강탈하려고

들 때도 많았다.

물론 그중 성공한 시도는 하나도 없었지만,이렇게 황당하게 구는 녀석을 만나는 일은 오래간만이었다.

짜증과 귀찮음이 치솟았다.

레안드로는 경비대장을 정면에서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제국을 위해 순직한 황실 근위기사단장 데서리 바티엔느의 아들 레안드로다. 너는 주민들을 보호해야 할 제국의 창으로서 가진 한 줌의 자부심조차 없느냐?”

“뭐. 라고?”

모인 인간의 무리가 서로 죽이고 빼앗고,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지옥이 되지 않게 보장하는 것이, 도시의 도시로 지키는 것이 너희의 임무 아닌가? 그런 고귀한 임무를 맡은 자들이 시민에게서 몇 푼의 현상금을 횡령하려는 것이냐?”

“허. 나 참..

경비대장이 같잖다는 표정을 하며 혀를 찼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표정을 보고 레안드로는 괜히 입 아프게 떠들었다고 생각했다.

방금 말한 건 열여섯 살 소년도 잠시만 생각하면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눈앞에 있는 남자는 경비대의 힘을 그저 자신이 강자가 되는 데에만 쓰고 있다.

모르는 게 아니다. 알면서도 그는 자신의 양심과 일부러 거리를 두고 있었다.

경비대장은 곧 뭔가 떠오른 둣이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뭐. 좋아. 그냥 네가 정말 박쥐 괴물을 잡았는지 확인이 필요했던 거란다. 네가. 그. 뭐? 유명하신 기사의 아들이라면. 새 한 마리 정도는 잡아 올 수 있겠지?”

“대장님. 지금 설마..!”

“자넨 이만 닥치라니까. 여기서

장사 그만하고 싶나?”

레안드로는 피혁상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보냈다. 경비대장이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흠흠. 네 말대로 우린 도시를 지켜야 하지. 덕분에 일이 쌓여서 이런 것까지 신경 쓸 수가 없어. 여길 보거라.”

그는 지도를 탁자 위에 펼치고 한 곳을 가리켰다.

“짧은 꼬리 평원. 여기서 반나절 떨어진 이 장소에 인간을 잡아먹는 커다란 새가 나타난단다. 가축,말, 사람까지 가리지 않고 습격해 대서 무척 골칫거리야.”

“히포그리프 말인가?”

경비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야.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럼 녀석까지 잡아 오면 모두 합쳐서 두 배의 현상금을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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