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제국의 칼 (2)
레안드로는 대답 없이 끄덕이고 상점을 떠났다.
양심적으로 거래해 줬던 피혁상에 대한 배려만은 아니다.
죽어 돌아오길 기대하며 던진 말이 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어차피 그쪽으로 가려던 길이었다.
두 배라.
그렇게까지 심하게 청구할 생각은 없었는데.
비슷하다.
현상금을 걸 때와 지급할 때의 태도가 완전히 다른 자들은 충분히 경험했고,그들을 상대하는 요령은 이미 알고 있었다.
대신 레안드로의 관심은 사냥감인 히포그리프에게 가 있었다.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혼자 4년 동안 마물을 사냥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동안 레안드로는 두 가지의 영역을 익혔다.
첫 번째는,휘두르는 칼의 영역.
반경 3미터 정도인 영역에서 그는 한순간에 상대의 틈을 베어 낼 수
있었다. 그게 몰래 다가오는 다른 현상금 사냥꾼이건,동굴 속 박쥐 괴물이건,어머니의 환영이건.
두 번째 영역은 훨씬 넓었다.
날씨와 지형에 따라 백여 미터로 늘어나기도 하고,스무 걸음으로 좁혀지기도 했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건 살아 있건 죽어 있건 모두 기척을 잡아낼 수 있었다.
두 번째 영역으로 녀석을 찾고, 첫 번째 영역에 일단 한 번만 끌어 들이면 끝이다.
날씨도,컨디션도 좋았다.
하지만 짧은 꼬리 평원을 한참 돌아다녀도 히포그리프의 기척은 나타나지 않았다.
녀석의 둥지일 가능성이 높다는, 평원 안쪽에 붙은 딱따구리 숲을 뒤져 봐도 마찬가지였다. 마물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돈 탓인지 인기척마저 없었다.
대신 곳곳에 세워진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세워진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팻말에는〈식인 히포그리프 출몰, 배회 금지〉라는 문장이 크고 붉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저지른 일이 작은 글씨로 기록되어 있었다. 쓰인 내용은 레안드로가 알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지금까지 아이,어른,여자,남자 가릴 것 없이 물고 가 조각냈다는 이야기였다.
팻말이 세워진 구역을 중심으로 돌아다녔다.
머지않아 바닥에 고여 굳은 피를 발견했고, 시선을 위로 쭉 올리자 시체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허리 위쪽이 끊겨 나간 하반신을 보고,레안드로는 이걸 한 구라고 부를지 반 구라고 부를지에 대한 짧은 고민에 빠졌다.
허리 부위는 이빨로 억지로 끊은 것처럼 지저분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듯 굵은 나뭇가지 몇 개를 부러뜨리고 중간 즈음에 걸려 있었다.
레안드로는 천천히 허리에서 칼을 빼들었다.
앞으로 조금 더 걸어가자 허리가 끊긴 나머지 시체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레안드로는 허리 아래쪽이 없는 시체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입은 복장이나 끊긴 부위로 보아 나뭇가지에 걸린 하반신과 분리된
녀석이었다.
손에는 칼과 활을 오랜 쓴 사냥꾼 특유의 굳은살이 배어 있었다.
그 뒤에야 레안드로는 상반신의 얼굴을 흘끗 바라봤다.
공포에 질린 얼굴은 마지막까지 살려 달라는 비명이라도 질렀는지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고,그 상태로 죽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참 더 걸어가자 비슷한 시체들, 그러나 죽은 지는 오래되어 풍화된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그들은 널려 있다는 표현이 실로 정확했다.
내장은 온전히 그대로였고 살점도 거의 뜯기지 않았다.
많게는 네댓 조각으로까지 분리된 파편들을 맞춰 보면 한 사람분이 제대로 맞춰질 것 같았다.
먹지 않았다.
순수한 사냥에 재미를 들였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경우라면 인간과의 싸움에 익숙하다고 봐야 했다.
레안드로는 슬슬 두 번째 영역에 정신을 집중했다.
작은 짐승들과 새의 기척까지도 그를 중심으로 한 커다란 원 안에
느껴졌다.
히포그리프는 지역에 따라 영물로 숭배되기도 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자신보다 강한 것들을 쉽게 경외한다.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들에 오히려 동조하고,옹호하고,심지어 복종하려고 든다.
규칙을 깨고 베풀어지는 예외적인 평화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히포그리프가 누구를 태우고 하늘을 날았다는 등,마물들이 아주 작은 친절만 보여도 그런 모습에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본질은 이렇다.
히포그리프는 먹지도 않을 인간을 사냥하고,찢고,흩뿌린다.
마물은 결국 마물일 뿐이다.
어머니를 죽인 덩굴 가르베라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산악 부족을 잡아먹은 식인 덩굴이지만,정작 그들에게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예속되어 섬긴다는 이야기였다.
마치 인질범에게 살해당하지 않게 살살 달래려는 심리와 비슷하다고 레안드로는 생각했다.
그건 일종의 왜곡이다.
혐오와 분노였다.
칼이 닿는 3미터의 영역.
이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뭐든지 벨 수 있어야 한다.
동부 산맥,숲의 신으로 숭배되는 가르베라가 목적이다.
현상금이 걸린 히포그리프 따위는 간단한 연습에 불과했다.
레안드로는 계속 걸었다.
그의 ‘두 번째 영역’보다 하늘에 떠 있는 히포그리프의 시야가 훨씬 높을지도 모른다.
아예 기척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당당히 걸었다. 하지만 다 풍화된
시체 사이를 걸어도 히포그리프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뜬금없이 성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 히히히힝!
보통 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야생마가 거칠게 달려오는 기세에 평야에 깔린 풀들이 흔들렸다.
마치 바람이 달려오는 것 같았다.
말이 저렇게 빠른 동물이었나?
홀린 둣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흑마는 제 질주에 찌그러진 바람을 앞발로 찢으며 레안드로를
후려쳤다.
무서운 가속도와 높이,덩치까지 더해진 일격은 잘못 맞으면 단숨에 머리를 부술 것 같았다.
당황한 레안드로는 한 발짝 뒤로 빠지며 들고 있던 칼을 휘둘렀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야생마.
인간을 먹는 마물은 아니다.
마지막 순간에 손에서 힘을 빼긴 했지만 말의 옆구리에서 허벅지까지 이르는 긴 상처가 났다.
- 히히히힝!
“진정해라.”
물론 씨알이 먹힐 턱이 없었다.
흥분한 말은 제 상처 따윈 돌보지 않고 계속 앞발을 휘둘러 댔다.
한 번의 발길질에 실린 중량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거센 풍압이 덮쳐 오며 옷깃까지 펄럭거렸다.
곤란해진 레안드로는 들이받기를, 거센 뒷발질을,연속되는 앞발질을 연이어 피하고 근처에 있는 굵은 나무 위로 올라갔다.
- 히히힘! 히힘!
방금 베인 상처에서 피를 홀리며 콧김을 내뿜는 녀석을 관찰했지만 틀림없는 보통 말이었다.
덩치가 컸고,그 큰 덩치 전체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었다.
나무 주위를 위협하듯 빙빙 돌던 흑마는 잠시 후 뒤로 물러갔다.
녀석이 돌아간 곳을 바라봤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망아지가 가는 다리를 이리저리 뻗어 가며 껑껑거리고 있었다.
수수께끼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힘이 남아도는 말인가 싶었는데, 보호할 새끼를 데리고 있어 신경이
날카로워진 듯했다.
작은 망아지는 뒷발로 콩콩거리며 앞발을 앞으로 뻗었다.
하지만 곧 털썩 뒤로 주저앉다가 뒹굴며 배를 보였다.
껑껑대며 몸을 돌려서 어떻게든 네발로 서 보려고 했지만 연거푸 실패하고 주저앉았다.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는 어미가 천천히 다가와 주저앉은 망아지의 엉덩이에서 등줄기, 머리까지 혀로 할았다.
망아지는 조그마한 코를 벌렁대며 눈을 낌뻑였다.
힘이 모자라 다시 주저앉았다가, 마르지도 않은 갈기를 세게 흔들며 뒷발까지 뻗어 결국 네발로 우뚝 버렸다.
레안드로는 왠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계속 옆구리에서 홀리는 피를 보자 괜히 베었다는 생각에 가슴 한쪽이 조금 욱신거렸다.
하지만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어미 새끼 사이의 정이 있어 봤자 어차피 미물일 뿐이다.
어차피...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히포그리프의 후각은 5킬로 밖의 피 냄새도 맡을 정도로 예리하다.
저 정도면 충분한 미끼...
- 휘이이잉!
바람이 강해지자 망아지는 다리를 조금씩 옆으로 움직이면서도 바로 선 자세를 유지했다.
불안하던 하체도 어느새 안정을 찾아 꼬리도 흔들리지 않았다.
망아지는 자신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을 우물거리며 여물처럼 씹었다. 그때 더 강한 바람이 불었다.
- 끼아아아!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공기 찢는 소리가 들렸다.
날개를 활짝 편 아래를 향해 뚝 떨어지며 발톱을 세웠다.
방금까지만 해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는데,어미 말의 피 냄새라도 맡고 날아온 건가 싶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새끼를 낳은 흑마를 미끼로 삼은 셈이었다.
진작 가까이 다가갔으면 몰라도, 거리가 너무 먼 게 아쉽지만.
“으응?”
곧바로 낚아채여 죽을 줄 알았던 흑마는 날쌔게 옆으로 훌쩍 피하며 뛰어올라 두 앞발로 히포그리프의 머리를 쳤다.
말 따위가 자기를 공격하리라고는 상상치 못한 듯 히포그리프가 흠칫 놀라 퍼드득 위로 올라갔다.
하늘 위로 올라간 히포그리프는 선회하며 기회를 노렸다. 흑마는 망아지를 가운데 두고 원을 그리며 하늘을 향해 투레질을 했다.
- 끼아아아아!
히포그리프는 이번에는 한층 더 빠르게 날개를 접고 내리꽂혔다.
3미터를 넘는 날개가 일으키는 풍압에도 망아지는 똑바로 서서 버티며 히포그리프를 노려봤다.
- 히히히힘!
흑마는 망아지의 목덜미를 물고 옆으로 빠르게 이동하며 뒷발질로 적이 내려오는 순간에 맞춰 강하게 걷어찼다.
히포그리프는 뒷발질에 맞아 놀라
바닥을 흉하게 뒹굴다 황급히 위로 날아올랐다.
망아지를 사이에 두고 목숨을 건 몇 번의 공방이 더 이어졌다.
하지만 부딪칠수록 승패는 점점 더 명확해졌다.
히포그리프는 바닥에 내려앉아서 싸워도 오우거를 찢어 놓을 만큼 강한 맹수였다.
강철 같은 비늘로 뒤덮인 날개는 말의 발길질에 정통으로 맞아 봐야 치명적인 타격은 되지 않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어미 말의 몸은 완벽히 피해 내지 못한 둣 여기저기 날카롭게 베인 상처들이 늘어갔다.
웬만한 말이면,아니 그 누구라도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상처였지만 어떻게든 망아지를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버티는 것 같았다.
여기서 더 기다리면 아예 상황이 끝날지도 몰랐다.
말은 훌륭히 미끼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레안드로는 기척을 죽이고 나무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검에 묻은 어미 말의 피는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 끼아아악!
이번에야말로 건방진 목숨을 끊어 주겠다는 둣,히포그리프는 아예 양 발톱을 앞으로 내밀고 강하게 하강했다. 망아지를 노리지 않고 똑바로 어미 말을 노렸고,앞발에 맞으면서도 끝까지 따라가 온몸을 발톱으로 짓눌렀다.
이미 죽을 상황이지만 악착같이 버티고 있던 어미 말은 몸무게의 격차에 바닥에 쓰러졌다.
온몸이 근육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지만,히포그리프에 몸에 닿아 짓눌려 있으니 어미 말의 다리는 차라리 가늘어 보였다.
어미 말을 짓누른 히포그리프는 고작 자리에 서서 버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망아지를 비웃는 듯이 바라보다가,한 발을 들어서 아래 깔린 어미 말의 목을 잘랐다.
- 파앗!
피가 어미 말의 온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히포그리프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황급히 날아 오르려 했지만, 한쪽 다리가 잘린 경험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히포그리프는 다리를 칼이 지나간 잔상이 한 번뿐이었는데 어떻게 다리가 세 토막으로 잘렸는지 미처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을 이어 나가기도 전에 몸이 동그란 궤적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니,목이 잘린 커다란 새의 시체가 보였다.
기술의 이름을 뭐라 부를지 잠시 고민하며, 열여섯의 레안드로는 시체를 내려다봤다.
날개 한쪽이 잘려 드러난 육중한 몸 안쪽에는 시퍼런 말발굽 자국이
몇 군데나 멍으로 새겨져 있었다.
미끼로 사용한 외에도 어미 말의 활약이 의미가 없던 건 아니었다.
레안드로는 쓰러진 말을 바라보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고맙다.”
“히히. 히힘..
네 덕분이라고 말해 주려 할 때, 죽어 가는 호흡이 느껴졌다.
가방에서 응급 약을 꺼내 상처에 발랐다. 끈적거리며 피가 굳었지만 이미 홀린 피가 너무 많았다.
“끼잉! 끼이엉!”
망아지가 울며 무릎으로 기어서
다가왔다.
흑마는 레안드로를 바라보고 마치 부탁한다는 듯이 눈을 껌백이고는, 마지막 힘으로 새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힘겹게 몇 번 숨을 몰아쉬다 움직임을 멈췄다.
레안드로는 목 없는 히포그리프의 시체와 상처투성이인 커다란 말의 시체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혼자 남아 흑마의 시체를 혀로 할는 망아지를 바라봤다.
죽은 말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던진 시선은 무시하기 쉽지 않은 무게를 담고 있었다.
두 말이 아니었다면 히포그리프는
애초에 등장하지도 않았을 확률이 높았고,어쩌면 마지막까지 잡지도 못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함께 마물이나 수배된 살인마를 잡기로 한 동료 사냥꾼이 죽으면, 보상은 어떻게 해 줘야 하지?
한 번도 동료를 가진 적 없었던 레안드로는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가족에게 보상을 해 줘야 한다는 상식이 희미하게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머릿속으로 간단한 계산을 끝낸 다음,레안드로는 어딘가 곤란한 표정으로 망아지에게 말했다.
“나눈 현상금이. 적어도 30년치 여물값은 될 거다. 그동안 너를 데리고 다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