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제국의 칼 (4)
커다란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들의 땀 냄새나 쇠가 부딪쳐 내는 약간 매캐한 냄새도 없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자리를 비운 건 아니다.
대신 술과 분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으하하! 좋구나!”
푸른 사자 문양이 음각된 갑옷을 발치에 팽개친 남자가,양손으로
두 기녀의 허리를 잡고 그녀들이 넣어 주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직업 정신에 충실한 기녀는 커다란 칼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어머,저런 무거운 걸 들고 막. 움직이는 거예요? 나는 무서워서 그냥 막 떨어뜨리겠다아.”
“크흐흐. 네가 걱정해야 될 칼은 따로 있지 않느냐?”
다들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주위에 있는 자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하나같이 칼과 갑옷,투구 따위는 저 멀리 던져 놓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뒤에서 기녀의 가슴에 손깍지를 끼고 리듬을 흥얼대며 킥킥거리는 남자도 있었고,윗옷까지 벗은 채 누워 햇빛을 즐기는 자도 있었다.
그중 가운데 평상에 앉아 있는 남자가 안으로 들어온 레안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뭐야? 신입이냐? 누가 온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주위에서 한 마디씩 이어졌다.
“이야,신입? 옷은 왜 그래?”
“잘생기긴 했네. 아,그거구나! 깜짝 거지 흉내! 푸하하! 재 진짜 웃긴다.”
레안드로는 상황을 파악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대부분 20대에서 30대 초의 젊은 남자들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기사단은 물론이고 바깥에 깔린 경비들보다도 실력이 떨어져 보이는 자들까지 있었다.
하지만 갑옷에 새긴 무늬로 봐서 틀림없는 푸른 사자 기사단.
레안드로는 이게 어머니가 말한 그 기사단이 맞는 건가 싶어 눈을 의심했지만,확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너희가. 푸른 사자들인가?”
“어, 그런데. 넌 뭐냐니까?”
“쓰레기들이군.”
“뭐? 야,경비! 경비!”
갈색 머리의 외침에,얼어붙었던 경비병들이 뒤늦게 도착했다.
“뭐야. 얘 어디 누구야?”
“그게. 말입니다..
경비병들이 뭐라 대답할지 몰라 우물거렸다.
가운데 평상에 앉은 남자가 눈을 빠르게 굴렸다.
경비병들에게 상처 하나 없음을 확인한 그는 피식 웃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뭐,얘들이 통과시킨 걸 봐서 꽤 높은 집안 자제인 모양인데.
그가 한 걸음씩 레안드로의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나보다 높은 귀족 영식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알거든? 근데 넌 아니야. 그러니까 맞아라. 소개는 맞고 받자.”
이미 한두 잔 걸친 듯 불그스름한 얼굴의 남자는 레안드로의 뺨을 향해 주먹을 당겼다.
“어? 어?”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이게 왜. 안 움직여?”
공포에 취기가 억지로 사라지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형님!”
“형님,괜찮으십니까?”
그가 이를 악물었다.
불러들인 단골 기녀들 앞이다.
망신을 사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됐다.
화류계에 소문이 난다면...
하지만 덜덜 떨리는 손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레안드로는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너.”
w으... 으흐.
“네가 대장인가?”
남자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희의 명성을 듣고,이곳 수도까지 달려왔다. 왜 기사단이 이따위지?”
레안드로가 뿌리는 차가운 살기에 주위에서 자던 자들까지 벌떡 일어나 있었다.
“그. 그게... 기사로서 경력을 싸,쌓아야 하니까..
남자는 홀린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우,우리는 모두 높은 귀족이다! 어,어차피 내가 앞장서 싸울 일은 없으니까. 훈련 같은 건 굳이..
“들어온 지 몇 년 됐나?”
“사,사 년 됐는데.”
“.칼을 휘둘러 봐라.”
레안드로는 살기를 죽였다.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 된 남자는 주섬주섬 허리에서 어설프게 칼을 빼들었다. 칼을 빼는 자세를 보고 레안드로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일 자신 있는 걸로.”
그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보고 있었다.
남자는 결심한 둣,이를 악물며 내려치기를 했다.
오랜만에 부응,하는 칼 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레안드로가 구겨진 얼굴로 손을 들었다.
“다시.”
말 그대로 다시 하지 않으면 당장 목이 잘려 나갈 것 같았다.
남자는 다시 내려치기를 했지만, 레안드로는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름,작위.”
“로, 로빈 자작이다!”
로빈이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푸,푸른 사자 기사단에 들어온 기사는 자동으로 남작위는 받는다. 그리고 아버지가! 상서성의 리어드 백작이고! 나도 곧 물려받을..
“좋다,로빈 자작. 네가 지금까지 연습한,가장 자신 있는 자세로 다시.” “흐. 흐아앗!”
로빈은 순간 연무장에 이 기괴한 소년과 자신 외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칼을 내려쳤다.
갑옷을 내팽개치고 퍼져서 놀고 있던 주위 동료들은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따지지도 못하고 그저 숨만 죽인 채 바라봤다.
이 연무장에서 유일하게 할 일을 하던 기녀들은 어느새 ‘푸른 사자’ 들의 손에서 슬쩍 벗어나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제값을 받기가 틀린 것 같으니,성실하게 일해 줄 필요도 없었다.
“흐아압! 끄앗! 으아악 r
로빈은 세 번을 연속 내리쳤다.
기합이라기보다 발작에 가까웠다.
레안드로는 얼굴을 굳히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주위에 그가 만든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게 아니다,로빈 자작. 기합을 지를 거라면 첫 칼질에 적을 죽일 것처럼 다시 해 봐라. 발은..
레안드로는 자세와 힘의 배분까지 설명했다.
로빈은 칼을 위로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아예 내려치기도 전에 레안드로가 손을 저었다.
“속도와 힘 빼고,그냥 자세로만. 천천히.”
들었다.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 레안드로가 손을 저었다.
“.다시 하겠다. 내가 손가락을 들겠다. 거기 맞춰서 칼을 올려라.”
레안드로의 손가락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로빈은 입술을 악물었다. 천천히 칼을 들어 올렸다.
“•••아니,다시.”
그가 서둘러 다시 칼을 올렸다. 이번에는 레안드로가 팔짱을 끼고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언뜻 봐도 아까보다 훨씬 엉망인 자세였으나 말리지 않았다.
베는 동작을 이어서 했다.
그는 발악하는 힘이 빠질 때까지 그렇게 했다. 동작이 멈추고 그가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었다.
경비들도,다른 ‘푸른 사자’들도 아무 저지도 못 한 채 그 모습을 숨죽여 바라봤다.
반드시 정체불명의 소년이 내뿜은 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로빈의 호흡이 천천히 잦아든 뒤 레안드로가 물었다.
“한 해에 푸른 사자 기사단이 쓰는 예산이 얼마나 되지?”
“그건. 안 적었소..
어느새 로빈의 말투가 반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로빈은 물론,주위 누구도 그걸 의식하지 못했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정원은?”
“마흔,마흔. 명이오.”
“마흔 명이 전부 남작위를 받나?”
“푸른 사자 기사단에 들어오면 일단 자동으로..
“검술 스승 같은 건 없나?”
“귀,귀찮게 굴어서 쫓아냈..
- 찰싹!
레안드로가 손등으로 로빈의 왼쪽 뺨을 때렸다.
완전히 획 돌아간 로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마흔 명의 기사가 너희 때문에 작위를 받을 기회를 잃었군.”
- 찰싹!
레안드로는 다시 로빈의 오른쪽 뺨을 때렸다.
다시 왼쪽으로 획 돌아간 입가에 피가 배어났다.
“마흔 명의 기사가 제국을 위해 헌신할 기회를 잃었다. 기록조차 안 되는 공금을 입지 않을 갑옷에 쓰고,낮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는 너희 때문이지.”
레안드로는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여기까지 헛걸음을 해서?
뛰어난 자질을 가진 자들이 좋은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암살자로나 구르다 부질없이 죽어 가는 모습이 떠올라서?
기사 이야기를 읽고,제국을 지켜 주는 기사들을 위해,작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시골의 여자아이가 떠올라서?
어쩌면 황실 근위기사단장으로서 근무했지만,유족의 3년 생활비도 못 남기고 죽은 어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너희가 진짜 기사들이 지키는. 제국을 일부러 파괴하는 무리라면. 나는 이곳에서 너희 모두를 죽여 버리겠다.”
레안드로는 칼을 빼들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였다.
- 오호호호! 호호호!
뒤쪽에서 참기 힘들 만큼 경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음뿐만이 아니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가, 슬며시 뒤로 빠진 어떤 기녀의 것보다도 강한 분 냄새가 진동했다.
그건 레안드로가 막 연무장으로 들어왔을 때 맡았던 술 냄새 전체보다 진했다.
독해 봤자 시체 썩는 냄새나 배가 뚫리는 단말마에 비할 리는 없다.
레안드로는 불편한 이유를 깨닫고 목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그가 지배하던 연무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깨졌다.
지금껏 한 번도 침해된 적 없던 ‘두 번째 영역’이,뒤에서 다가오는 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강탈되고 있었다.
“기특하게 대련 중이네? 바라지도 않았는데. 노력하는 모습들이 아주 대단해요.”
스무 걸음.
돌아보는 순간 한 박자 늦다.
기회는 한 번.
두 번째 영역을 허용해 버린 이상, 확실하게 첫 번째 영역 안에 끌어당겨 제압해야 한다.
열 걸음.
거기까지 와서도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레안드로의 영역을 유린하고 있었다. 그는 당황하는 스스로에게 냉소를 보냈다.
바로 이런 경험을 찾아 헤맨 게 아니었나?
세 기사단을 돌아다니며 지나치게 오만해졌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자신을 이길 자는 없다는 답을 이미 내놓고 곳곳에서 횡포를 부리고 있던 거였나?
다섯 걸음.
“어머나,로빈 얼굴 누가 이렇게 만들었어? 세상에. 고운 뺨 양쪽 다 터진 것 좀 봐. 순전히 얼굴만 보고 뽑았는데..
세 걸음.
“너니? 네가 그런 거니?”
- 탁.
어깨에 커다란 손이 얹혔다.
레안드로의 장검이 폭탄이 터지듯 바깥으로 뽑히며 세 갈래의 푸른 섬광이 폭사됐다.
12 휘점歸點이 적을 중심으로 한 세 걸음의 영역에 터져 나갔다.
묘하게 균형이 어긋나는 빛의 점은 베고,막아도 베고, 피해도 베고, 다시 베기 위한 공격이었다.
섬예적총的% 的友.
머릿속으로 구상만 해 두고 번번이 실패하던 기술이,세상에 첫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 까가가가가가가강!
소리와 소리가 부딪쳐 한순간에 서로를 먹어 버렸다.
하지만 자신은 알고 있다.
휘두른 순간 이미 실패를 직감. 망아忘我를 달성하지도.
공간을 고립시키지도 못했다.
그저 궤적의 수에 집착했을 뿐...
“어,어머나! 이런 거 잘못 맞으면 사람 죽는다고요! 까,깜짝이야!”
레안드로는 그제야 상대를 천천히 두 눈으로 살펴봤다.
시선은 상대의 칼부터 향했다.
세 군데.
칼에 상처를 낸 공격은 고작해야 세 군데였다는 건가.
“호호호. 그런데..
하지만 상대의 시선은 레안드로의 엉뚱한 곳을 향했다.
“뭐 이리. 잘생기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