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제국의 칼 (6)
길이라고 할 만한 길도 없는데 숲의 중앙으로 향하는 흔적을 보며 생각했다. 가르베라를 잡으러 온 인간들일지도 모른다.
물론 복수를 양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레안드로는 이동 속도를 높였다.
숲속을 미끄러지듯이 지나 한참 나아갔을 때였다.
두 번째 영역 안에 함정과 연결해 놓은 투명한 철사들이 느껴졌다.
눈 덮인 마른 수풀에 숨은 자들이 무기를 들고 매복해 있었다.
레안드로는 기척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마주치려 했던 자들이다.
이런 경우는 오히려 자신을 그냥 드러내는 게 편하다.
상대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무기가 겨눠진다.
하지만 살기가 드러나는 그 순간 이쪽에서도 훨씬 정확하게 상대의 위치를 잡아낼 수 있었다.
마른 가지에 눈발 부딪히는 소리가 사각거렸다.
레안드로는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 내고 보란 듯이 앞으로 걸어갔다.
자신을 향해 겨눠지는 살기들을 발아래 눈처럼 뿌득뿌득 짓뭉개며 아무렇지 않게 나아갔다.
곳곳에 설치된 함정이 작동될 거라 생각했지만,앙상한 풍경에 숨은 자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면을 쓴 인간들이었다.
하관이 보이는 나비나 사자 가면 따위를 쓰고 있었다.
위치는 모두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풍경 속에서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한 호흡에 이뤄지며 레안드로를 압박해 들어왔다.
일제히 칼을 뽑은 것도 아니었다.
대검,철퇴,철 갈퀴,양쪽에 날이 달린 화극,한 명은 날카로운 철제 손톱이 붙은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호흡에 어긋남이 없었다.
지금까지 만난 어떤 기사단보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주위 풍경이 그를 압박하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하지만 레안드로는 뒤로 물러나는 대신 압박의 중앙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며 허리의 칼을 쥐었다.
공기가 바닥에 깔린 눈보다 한층 차갑게 식어 갔다.
매복을 푼 여섯은 다시 숲속으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역시. 그분의 관심을 받을 만한 인간다운걸?”
방천극戰을 손에 든, 붉은 눈의 여자가 입꼬리를 비뚜름히 올리며 레안드로를 바라봤다. 아무렇게나 묶은 회색 머리칼 위로 하얀 눈이 앉았다가 바로 녹아내렸다.
어딘가 비틀린 얼굴 표정 곳곳이 묘한 음영을 만들었다.
“정말 열아흡이니? 저기..
여자가 계속 말을 걸어왔다.
압박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난 건 그 여자 한 명 정도였다.
하지만 화극을 내지르는 공격을 한 번만 경험한다면 그녀도 압박 범위 안에 들어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까강!
레안드로는 상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앞으로 달려 칼을 휘둘렀다. 목적도,정체도 묻지 않았다.
그런 건 제압한 후에 따져 보면 될 일이다.
화극을 든 여자가 새된 단말마를 외치며 레안드로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튕겨 내지 못했고,그대로 온몸이 눈바닥을 구르며 머리가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그 순간 대검과 철퇴가 좌우에서 덮쳐 들어왔다.
“꺼져라.”
강렬한 살기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살짝 굳었고,레안드로는 화극을 든 여자를 끝까지 찾아가 발로 밟아 다리를 부러뜨렸다.
“끄으아아악 r
붉은 눈의 여자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역시 화극을 든 그가 구심점인 듯 나머지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셋이 더 쓰러지고,둘이 남았을 때 그들은 욕지기를 뱉으며 허공으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 피이잉!
“젠. 장..
양쪽에서 신호탄이 동시에 위로 쏘아 올려졌지만,그들은 신호탄을 쓴 일이 못내 불만스러운 것처럼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뭐냐?”
레안드로는 그들까지 쓰러트리곤 배를 밟으며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으로 두 눈을 뒤집을 때까지 말이 없었다.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우와아앗! 어머,어머나. 세상에. 역시 최고로 건강하고 젊다니까. 처음부터 열두 명을 다 보낼 것을 그랬나요? 이 멍청한 것들,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주제도 모르고 정말 덤벼 버렸네.”
머리와 몸을 툭툭 걷어찼다.
함부로 차는 발길질에 보살펌과 존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레안드로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찾아보기 힘든 실력자들.
그럼에도 상대는 그들을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장난감을 취급하듯 대했다.
“안녕하세요오?”
거한은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누군가의 비위를 맞춘다기보다 제 흥에 집중된 모습.
저런 걸 아양을 떤다고 부를 수
있을지 레안드로는 짧게 고민했고, 즉시 그 고민을 폐기했다.
절대 잡념에 매달릴 만큼 만만한 적이 아니다.
온몸과 마음을 한 점으로 집중해 싸워야 공방이 가능한 상대였다.
“너는..
푸른 사자 기사단의 연무장에서 한 번 칼을 겨뤘던 상대.
분장한 거한이었다.
관리의 손길이 느껴지는 결 좋은 머리칼과 곳곳의 화려한 장신구는 여전했지만,이번에는 옷이 조금 바뀌어 있다.
차가운 바람을 막아 주는 황금빛 외투는 특수한 재질인 듯 눈조차 쌓이지 않았다.
흔적도 없이 미끄러지는 눈송이를 보자 옷에 피가 묻지 않게 하려는 용도일 거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피는 깔끔히 미끄러져 떨어져도, 수없이 쌓인 진득한 살해의 냄새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지도 몰랐다.
레안드로는 칼자루를 잡았다.
곤두서는 긴장감부터 잘라 내야겠다 생각했을 때,상대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적의는 조금도 없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기척을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호호호,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역시 운명적이었죠? 기억해 주셔서 기뻐요.”
‘로라’는 차분히 가라앉은 미소를 띠면서 말을 이었다.
“사실 그때 이후로 당신에 대해 조금 알아봤어요. 무척 매력적인 분이더군요.”
“물어볼 게 있으면 직접 했으면 될 텐데.”
“에이,심한 말씀을. 저를 버리고 갑자기 떠나셨잖아요?”
상대가 얼굴에 서운한 빛을 짙게 드리운다.
풍부한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연극의 무대에 선다면 지나치게 변화가 잦다고 지적될 만큼.
레안드로는 살기라고는 한 점도 없는 상대와,바닥에 쓰러져 있는 가면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네 부하들인가?”
로라가 교태를 잔뜩 섞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찾으면 바로 신호부터 보내라고 했는데. 휴. 제 관심을 끈 분이 얼마나 뛰어난지 시험해
보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가까이 안 있었으면 놓칠 뻔했지 뭐야! 어유.”
- 팟!
그 말을 맺을 때쯤에야 눈 내리는 숲에서 여섯 명의 기척이 빠르게 가까워져 왔다.
로라는 쓰러진 자들을 걷어차며 뒤늦게 도착한 부하들에게 턱짓을 했다.
“들고 다 내려가. 나는 이분이랑 있고 싶으니까.”
“존명.”
그들은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동료를 업고 내려갔다.
뒤를 돌아보거나 괜찮겠냐고 묻는 일조차 없었다.
낯선 상대와 대치하고 있음에도 그들에게 눈앞의 ‘로라’가 위험에 처하는 상황은 상상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레안드로는 가만히 선 채 로라를 바라봤다.
숲 안쪽에 어머니를 죽인 마물이 살고 있지만,눈앞의 검객은 그가 시간을 할애할 가치가 충분했다.
로라가 입을 이었다.
“당신. 데서리 바티엔느의
외동아들이 더군요?”
“그렇다만.”
상대는 이 숲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장소에서 미리 대기할 정도의 정보력.
알아보기로 작정하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
“여기는 복수하러 오신 건가요? 하셔야 한다는 일이 그거겠죠?”
레안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으응. 이 복수가 끝나면 이제 뭘 하실 거죠?”
“.생각한 적 없다.”
어머니의 복수를 한다.
그것 외에 딱히 살아가는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쉬고 싶거나,끝내고 싶을 만큼 삶이 피곤하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씩 무감각해졌다.
“후후홋. 남 일 같지 않네요. 저도 수년간 가슴속에 복수만을 품고 살아간 적이 있었죠.”
“당신이?”
“어머,저랑 안 어울리나요?”
누구나 가슴에 무겁게 얹어 놓은 사연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눈앞의 남자라고 그 무게에 피멍이
들고 모서리에 찢기지 않았을 거란 확신은 없다.
레안드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뭐. 그냥. 성공했나?”
“성공이요?”
“죽였나?”
로라는 큰 손으로 짙고 가지런히 정리된 턱수염을 가리고 웃었다.
하지만 다른 때와 달랐다.
웃음을 참는 건지,고통을 참는 건지 모를 기묘한 표정이었다.
“진정한 복수는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될 거예요. 순수함은 맘에 들지만요. 후. 복수라는 게 대체
얼마나 의미 없는 건지... 으흐흐. ᄏᄒᄒᄒ..
기괴한 쇳소리가 섞인 웃음소리가 바닥에 쌓인 눈 사이로 스몄다.
물론 레안드로는 그런 말을 크게 귀담아듣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지겨운 이야기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하지만 로라가 이은 다음 말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같이 제국을 다스려 볼래요?”
“제국을. 다스린다고?”
레안드로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그 반응에 로라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언제든 절 찾아오기만 하세요. 당장이 아니라도 좋아요. 키워 드릴게요. 당신 같은 눈부신 재능을 가진 인재라면,제가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요.”
“사실 이 소녀,로라만큼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거든요. 좋은 인재는 도저히 놓칠 수가 없달까.”
로라는 굵고 긴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움직여 보세요. 정의롭게. 어머니 같은 불행한 기사가 다신 나오지 않길 바라잖아요?”
“너는 대체 누구지?”
“호호..! 로라라고 말씀드렸죠.”
- 스륵!
상대는 그를 놓고 미끄러지듯이 뒤로 물러갔다.
아래로 내려가는 기척이 희미하게 잡히다 곧 사라졌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였을까?
강한 눈바람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불어왔다.
로라가 서 있던 곳의 눈이 길게 휩쓸리며 레안드로를 덮쳤다.
무심코 손을 들어 얼굴에 닿는 걸 막았다.
바람은 나무에 부딪히고,바닥에 부딪히고,서로 부딪히며 허공에 섞여 흩어졌다.
벌어진 싸움의 흔적도 아무렇게나 지워져 버렸다. 레안드로는 마음을 정리하고 숲 안쪽으로 향했다.
10년을 기다린 복수를 행한다고 생각했음에도 전혀 떨리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그려 왔고, 철저히 연습한 과정이었다.
특정한 향을 배합한 허수아비를 설치하고 기척을 숨긴 뒤 차분히 기다렸다.
에페타 잎과 브레라스 베리.
가벼운 눈바람이 아닌 폭풍우가 쏟아지더라도 가르베라가 꿈틀대며 기어올 만한 미끼였다.
설사 숲의 끝에 있어도 이 냄새는 맡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을 때였다.
- 꾸르르록'
눈 아래 잠겨 있던 사방의 덩굴이 얽히며 앙상히 마른 겨울나무 위로 뻗어 가기 시작했다.
바닥에 쌓인 눈이 걷혔다.
더 이상 바람도 불지 않고 눈도 내리지 않았고,희미하게 비치던 빛도 들지 않았다.
사방이 하늘부터 어두워졌다.
- 꾸르륵. 꾸르륵'
세워 놓은 허수아비를 향해 검은 하늘에서 거대한 지네가 내려왔다.
하늘을 가린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아래로 뻗은 부분만 나룻배만큼 큰 녀석이었는데,레안드로는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가르베라가 너무 작았다.
- 꾸르륵 •
가르베라는 자신이 작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시체가 덩굴에 먹혀 만들어진 마물이다.
끝도 없이 자신을 키우고,키우고, 모든 걸 감고 먹어치운다.
죽은 뒤에도 보이지 않는 뿌리를 숲에 남겨 놓아 다음을 준비한다.
저게 가르베라의 부활이라면...
나룻배만 한 크기가 아닌 나룻배 정도는 입도 안 벌리고 삼킬 만한 크기여야 했다.
레안드로는 지네 모양의 덩굴이 미끼로 놓은 허수아비를 휘감고, 계속 깨무는 모습을 바라봤다.
당황스러웠다.
10년을 기다렸다.
싸우려 했던 녀석은 고작 이만큼
작은 마물이 아니었다.
지네 모양의 머리에도 원래라면 그동안 먹은 것의 ‘얼굴’이 빼곡히 나타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있는 것은 손 크기만 한 몇 개의 하얀 원뿐이었다.
덩굴은 허수아비를 입에 물고 위로 올라가려 했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었다.
- 화르록.
스무 걸음 떨어진 레안드로의 칼에 푸른 불꽃이 들어왔다.
고요한 바람이 칼에 빨려들었다. 고작 2미터 남짓한 인간이 아닌 한입으로 인간을 먹고 한 손으로 몸통을 으깨는 마귀들을 위해 준비한 비기...
- 꾸르륵?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가르베라가 머리를 치켜들었지만, 레안드로의 눈빛은 이미 사신死神의 그것처럼 파랗게 불타고 있었다.
- 번쩍!
주위의 어둠이 한순간 레안드로의 칼에 빨려 들어가며 연료가 되어 타올랐다.
푸른 번개가 아래로 당겨졌다가, 반동을 주며 새까만 하늘을 활짝 찢어 냈다.
- 꾸르르르! 꾸르르르!
푸른 번개에 쓸린 덩굴은 하얗게 타오르며 바사삭바사삭 땅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위로 다시 번개가 쳤다. 사방에서 덩굴이 얽힌 나무가 쓰러지고 땅이 파였다.
- 꾸르르...
19세의 레안드로는 반쯤 타 버린 본체 앞에 섰다. 그 몸을 반으로 정성껏 쪼개는 레안드로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게. 아닌데.
아버지가 가르베라에 대한 책이란 책은 모두 긁어모은 덕에 잘 알고 있었다.
가르베라의 나이를 재는 기준은 간단하다. 본체를 가르면 나오는, 핵 속에 새겨진 원의 수.
10년이 한 번을 뜻한다.
번개에 그을린 그 원은一 테 하나 없이 매끈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