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02화 (302/458)

321화 환영 (1)

눈길이 자꾸 뒤를 향했다.

레나에게 뒤를 맡긴다고 당부하고 놔두고 왔다. 후작을 따라간 나와 나냐우가 잘못되어도, 남은 자들에게 최소한의 미래는 보장되기를 바라며.

“미안해서 그래?”

나냐우가 말을 걸었다.

“조금.”

어깨에는 레나가 자기도 따라서 가겠다며 우기다가,결국 양보하며 온갖 물건을 바리바리 싸서 건넨

커다란 배낭이 메여 있었다.

이게 어떻게 여기 다 들어가는지 의문일 정도로 차곡차곡 빈틈없이 수납했는데,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설명하며 물건들을 집어넣은 덕에 뭐가 들어 있는지 머릿속에 제대로 정리도 안 된 상태였다.

T&T 본부에 있던 물건이면 사실 나냐우에게 익숙하겠지.

동행하는 그녀가 필요할 때 바로 꺼내어 쓸 수 있도록,인밴토리에 굳이 집어넣지 않았다.

은발의 ‘시조’도 그 배낭과 뒤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레나라면 잘 해낼 거야. 우리가

문제지.”

나는 앞쪽을 살폈다.

예전에 왔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골목골목마다 숨어 있는 건 물론이고,바깥쪽 대로변에도 점거하다시피 경비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아예 실수로도 황궁으로 향하지 못하게 죄다 틀어막은 것 같았다.

“어디서 저런 병력이.”

“여기는 제국 수도라고. 인간이야 널리고 널렸지.”

- 스숙!

하지만 내 수준에서는 허수아비와 다를 게 없는 인간들.

나냐우에게는 더욱 그렇다.

후작도 이들을 지나치며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못했겠지.

숫자야 많지만,아무래도 일반인 접근을 철저하게 막는 것 정도에서 그치는 듯하다.

- 팟!

골목과 골목,지붕과 지붕 사이를 가볍게 딛고 황궁으로 직진했다.

하지만 정작 미로 골목을 지나서 황궁에 근접하자 대로가 텅 비어 있었다.

경비는커녕 일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안개만 평소보다 자욱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안개는 점점 짙어졌다.

평소에는 작은 구멍으로 새 나오던 안개가 지금은 아예 거대한 뚜껑이 갈라져 펑펑 쏟아지는 것 같았다.

밤의 어둠을 품고 있어 더욱 짙게 느껴졌다.

살짝 바람이 불어도 떠밀려 가지 않고 주위를 스멀거리며 맴돌 만큼 무겁기도 했다.

안개는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웬만한 녀석도 이 안에 들어서면 감각이 마비되겠는데.”

나냐우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나는 손을 휘저었다.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거,기분 나쁘지?”

“약간.”

“그래? 나는 많이 나쁜데.”

나냐우가 망토 아래서 자그마한 은촛대를 꺼냈다.

- 파삭.

밀랍도 없고 심지도 없는 날카로운 촛대 끝에서 작은 빛이 터졌다.

어둠이 쓸려 났고,몸에 꼭 붙어 스멀거리던 안개가 큰 원을 그리며 밀려났다.

촛대 끝의 빛 때문에 안개의 결이 세밀하게 들여다보였는데,살아 있는 듯이 꿈틀거리는 게 심지어 안개도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얇고 무수한

촉수를 갖고 골목 구석구석을 덮는 생물처럼 느껴졌다.

움직일 때마다 안개는 휙휙 뒤로 물러갔다. 촛대와 안개를 번갈아 보며 나냐우에게 물었다.

“그건 뭐지?”

“나도 쌓아 온 밑천이란 게 있어. 더 친해지면 가르쳐 줄게. 연상이 비밀도 없으면 너무 재미없잖아?”

“아,저긴가 보다.”

나냐우가 손으로 오른쪽 멀리를 가리켰다.

안개가 유독 옅은 곳이 있었다. 하나의 길처럼 길게 나 있었는데, 누군가가 지나간 흔적 같았다.

“후작이 간 곳인가?”

“막 지워져 있는 게 그렇지? 어서 따라잡자.”

나냐우의 뒤를 쫓으면서도,문득 인벤토리를 열었다.

[패턴 저장...] [유동 분석 중...]

아이작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역시 알 수 없는 말이 계속해서 떠오를 뿐이었다.

대체 여기서 뭘 더 하려는 걸까?

언제쯤 밖으로 나올까?

황실 비역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아이작이 본다면 분명히 재미있어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계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전문가다.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도 많을 텐데.

이런 시기에 녀석에서 조언을 듣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해 가면서, 아쥬라의 두 탑주를 찢어 죽인 뒤

내게 황실의 비역으로 가라고 했던 녀석이었는데.

인과율을 감당하지 못해 연기가 되어 사라지던 그의 환영과, 칼에 뚫린 까마귀 인형에서 흐르던 은빛 액체가 떠오르며 마음을 뭉겠다.

“크흠. 흠. 무슨 생각 해?”

5미터가 훌쩍 넘는 석벽을 앞에 두자 나냐우가 살짝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그냥. 여기가 외궁이라고 했는데 정말 조용하군. 와 본 적 있나?”

그때까지도 황궁을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하지. 내 나이가 몇인데?’

- 훌쩍!

담을 넘어 외궁 안으로 들어오자 바깥과 전혀 다른 경치가 눈앞에 펼쳐졌다.

작은 숲에라도 온 기분이 들 만큼 크고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인공적인 느낌과 자연적인 느낌이 기묘하게 반반씩 섞여 있었다.

묘하게 불안한 느낌에 탐지 스킬을 극대화했다.

“저기..

잎이 화려하고 넓은 부엽 식물로 빼곡히 덮인 연못 아래에서 눅진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치?”

나냐우도 흘끗 외궁에 있는 연못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사냥개는 오늘 밤이 굉장히 바쁠 거라고 생각했나 봐? 어울리지 않게 저런 걸 그냥 지나쳐 가고.”

좀더 정신을 집중했다.

홀끗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연못 아래 형체조차 잡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들어앉아 있었다. 상대를 살필수록 그쪽도

나를 빤히 들여다봤다. 한순간에 거리가 좁혀져 가까이 있는 듯한 감각이 섬쩟했다.

“예전에는 없었고?”

“응. 최근에 잠입했을 때만 해도 저런 녀석은 없었거든. 아무래도 결계 열린 거랑 상관있나 본데?”

나냐우는 잠시 연못 안쪽을 보다 돌아섰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안개는 확연히 열어졌다.

그렇지만 아무리 탐지에 집중해도 연못 아래 있던 거대한 녀석 외에, 사방에는 인간도 그 무엇도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았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보거나 듣지 못하게 치워 낸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황궁 안쪽인데. 이렇게 인간이 없을 수 있나?”

“공작이 그만큼 철저한 통제력을 발휘한다는 거겠지.”

거대한 정원 역할을 하는 외궁을 지나 계단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도 마찬가지였다.

빼곡한 곳곳의 초소는 문을 걸어 잠갔다.

경비병도 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기척을 굳이 감추지 않고 당당히 나와 걸어도 될 정도였다.

외궁에서의 그 진한 안개를 뚫고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시민 따윈 없겠지만,최소한의 경계도 하지 않나 싶었다.

어쩌면 황궁 내부라는 건 경비가 있으면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건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페가수스가 멋지게 조각된 다리를 건넌 나냐우가 가벼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도 함정이었나. 원래대로면 여기에서 걸려들었을 거야.”

“함정?”

“그래. 건너는 순간 인식 자체에

수정이 가해지는 결계지. 바깥에도 그렇고,정말 여기저기 빈틈없이 깔아 놨다니까. 마음 놓고서 다리 하나 못 건너게 말이야.”

나냐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 조각상이 결계의 중심인가?”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리 밑의 물.”

“물?”

“물이란 당연히 ‘있어야 할 것’, ‘없으면 안 될 것’이라는 인식을 더 보정하는 결계야.”

“그건. 상식 아닌가?”

물은 세계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걸 새삼스레 말하는 진의를 알 수 없었다.

나냐우가 피식 웃었다.

“그렇지. 이미 구축된 상식이니까, 다리를 건너는 자가 이미 동의한 기준이니까.”

문득 아이작이 결계를 가르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최하위의 결계는 힘으로 억지로 튕겨 내는 거지. 힘의 용량에 따라 버티는 시간이야 다르겠지만 결국 소모적이야. 최고의 결계는 단단한

하나의 상식을 부추기고, 부추기고, 계속 그곳을 밀어붙여서 인식의 ‘틀’을 엉뚱한 방향으로 작용하게 만드는 거야. 가장 추악한 것을 아름답게 느끼고,가장 사악한 것을 정의롭게 느끼게...〉

“그래서?”

“그걸 덮어씌우는 순간 의식조차 불가능한 세뇌함정이,절대 풀릴 수 없는 암시봉인이 정신에 박혀.”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문제라는 게 풀리고 보면 우스울 정도로 쉽잖아. 음... 오른쪽으로. 그래. 그쪽만 풀렸네.”

- 덜컥.

대리석으로 지어진 장엄한 건물의 문을 열자,상상조차 못 했을 만큼 넓고 화려한 내부가 펼쳐졌다.

좌우로 놓인 촛대 하나하나조차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은 천사의 조각상이었고,두꺼운 금이 입혀진 조각상 위로는 초 대신 정밀하게 세공된 크리스털 상들리에가 빛을 사방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양옆은 거울이었다.

위로 올라가면 정교하기 그지없는 금빛 조각들이 한 칸 한 칸 서로 다른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극한의 화려함을 경험했습니다!]

[회계 Lv.l의 경험치가 미약하게 올라갑니다!]

천장 위에는 복도 전체에 이어진 명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장대한 스케일과 화려함이 어딘가 정신을 멍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가자.”

나냐우는 이미 내부에도 여러 번

온 적 있는 건지 그리 큰 감흥은 없어 보였다.

그녀를 따라가면서도 주위를 계속 살폈다.

천장에 그려진 화려하면서도 무척 종교적인 벽화가 특히 시선을 계속 끌었다.

어차피 나냐우도 크게 서두르지는 않았다. 후작은 황궁에서 움직인 흔적을 굳이 숨기지 않았고,그건 내가 가진 탐지 스킬로도 충분히 쫓을 수 있을 만큼 뚜렷했다.

거대한 건물 하나를 통째로 전부 지나갔지만 역시 인간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양쪽에 세심하게 관리된 넓은 정원이 있는 장소를 지났다.

그리고 커다란 중앙 광장 가운데에 있는 분수대로 향했다.

“레나가 말한 게. 여긴가.”

분수대의 크기는 압도적이었다.

주위 둘레가 300미터는 될 것 같았고,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분수대에는 여자의 모습,남자의 모습,아이의 모습,짐승의 모습, 물고기의 모습,악어와 거북이의 모습과 악마와 천사를 비롯해 온갖 환상의 것들이 서로 얽혀 반짝이는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분수대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한 가지가 없었다.

방금 전 나냐우가 다리를 건너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 훌쩍!

그곳에는 물이 없었다.

그녀는 물 한 방울 없는 화려한 분수대 안으로 뛰어들었다. 분수대 바닥은 흘끗 봐도 나냐우의 키보다 다섯 배는 깊었다.

“아까랑 연계된 결계라는 건가..

작게 중얼거렸다.

안쪽에서 외치는 그녀의 말소리가 웅웅 울렸다.

“조각상들! 웬만하면 닿지 말라고. 하나하나가 전부 독하게 축성받은 녀석들이야一”

“.여기 물이 차 있을 때는 전부 성수였다는 건가?”

“그렇지一 담기면 반드시 악마를 젖은 채로 구워 버리는 물이었다고. 악마는 그 때 그 때,상황에 맞춰 규정하면 그만인 거고一”

“흐음.”

따라 분수대에 뛰어들었다.

- 털썩.

발에 닿는 촉감이 단단했다.

바깥에서는 대리석으로 보였는데, 딛고 보니 그보다 단단한 무엇일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긴 은발을 한 바퀴 스록 돌리며 웃었다.

“무섭지? 밖에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다 이런 식이었어. 나만 해도 몇 번을 왔지만 정말 당하는 줄도 모르고 엉뚱한 곳만 헤매다 갔어.

차라리 펑펑 터지고 뭐라도 획획 날아오는 게 백배는 낫지.”

一 철컥.

나냐우는 이미 분수대 정중앙, 아래쪽에서,누군가가 이미 뒤도 신경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열어 놓은 철문 손잡이를 과장될 정도로 활짝 열어젖히며 말했다.

“자,어린 순서대로 가자고.”

그때 였다.

- 히히히힘!

고요한 황궁에서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무언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한 번 뛰면 높이가 인간의 키에 달하고,십 미터는 가볍게 내닫는 검은 질풍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매일같이 쓸고 닦을 황궁 광장이 얼마나 강하게 발굽에 치이는지, 질주하는 흑마의 뒤편으로 뽀얗게 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재는..

“미유잖아?”

“뭐야,재 이름도 알아?”

“.사연이 좀 있어서.”

“후작이 타고 다니는 녀석인데, 여기는 어떻게 온 거지.”

주인이 자기를 떼놓고 와서 쫓아온 게 아닐까 싶었다.

비브리오를 본격적으로 조사하려 할 때도,후작은 제 애마부터 멀리 가 버리게 했다.

“뭐야,재 이름도 알아?”

“.사연이 좀 있어서.”

“후작이 타고 다니는 녀석인데, 여기는 어떻게 온 거지.”

주인이 자기를 떼놓고 와서 쫓아온 게 아닐까 싶었다.

비브리오를 본격적으로 조사하려 할 때도,후작은 제 애마부터 멀리 가 버리게 했다.

레안드로의 모습.

그리고 주인의 말을 무시하면서 긴 꼬리를 휘두르던 미유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히힘! 히히힘!”

갈기를 휘날리며 바로 앞까지 온 흑마는 나냐우가 막은 철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너 이 자식,지금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나냐우가 한 손을 뻗어서 미유의 진입을 막으며 경고했다.

미유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을 끔백였다.

“나 참..

나냐우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경비들은 어떻게 다 뚫은 거야? 어디 묶어 놔야겠는데.”

“히히힘! 히힘!”

“뭐야? 알아듣는 거야?”

“주인을 찾고 싶어서 왔을 거다. 레안드로를 찾아서.”

후작의 이름을 언급하자,미유가 정말 알아듣는 듯 처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데려갔다가 죽기라도 하면 우리에게 원망이 향하겠지.

배 위에서 완전히 돌아서 난리를

피우던 후작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냐우가 막아선 문으로 미유는 고개를 들이밀려 했다.

하지만 슬쩍 뻗은 나냐우의 왼팔 하나를 어쩌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어쩌지?”

나냐우는 곤란한 표정이었다.

“.일단 데려가자.”

고민 끝에 의견을 말했다.

“이대로 놓고 가면 너무 이목을 끌게 될 거야.”

문을 닫아 버린다고 순순히 뒤로 물러갈 녀석도 아니다.

온갖 난장판을 피우겠지.

경비병들이나 누군가 분명 여기로 잔뜩 몰릴 터.

불필요한 소란이 생긴다.

“좋아. 찬성.”

“하지만 이 녀석이 들어갈 공간이 있을지가 문제군.”

“내가 살펴볼게.”

어린 순으로 들어가자던 나냐우는 결국 맨 먼저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유가 그 뒤를 따랐고, 나는 맨 뒤에 섰다.

나냐우가 든 촛대에서 은은하게 나오는 빛이 좁은 통로를 환하게 밝혔다.

깨끗한 느낌의 빛이었다.

“들어갈 만하겠는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통로는 의외로 크게 구불구불하지 않았고,급하게 기울어져 있지도 않았다.

아치로 된 통로에는 함정 따위도 없었다.

반듯하게 깎인 돌들이 오밀조밀 잘 맞춰져 있을 뿐. 완만한 경사에 직진의 느낌까지 있어서,의식하지 않으면 아래로 내려간다는 느낌도 거의 받지 못할 정도였다.

만족했는지,미유도 큰 울음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우리와 발걸음을 맞춰 걸어가고 있었다.

보통 말보다 훨씬 덩치가 컸지만, 무리 없이 지나갈 정도로 통로는 넓고 평평했다.

- 끼긱.

슬쩍 칼로 벽을 긁어 봐도 역시 무척 단단했다.

크기는 훨씬 작았지만,몇 번인가 경험해 봤던 자유의 길 못지않은 기술력이 느껴진다.

한참 앞으로 걸어가자 공간은 더욱 넓어졌다.

나냐우가 손에 든 촛대의 빛이 한층 더 넓게 퍼졌다. 단단한 돌에 미유의 발굽이 닿는 소리가 점점 넓은 공간을 울리다가,어느 순간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1시간쯤 아래로 내려갔을까.

나나우의 은촛대보다 훨씬 밝은 빛이 맞은편에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긴 통로 끝에서 나냐우는 걸음을 멈추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뒤따라와 곧 그녀 곁에 선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눈앞에 거대한 자연이 펼쳐졌다.

걸어온 통로는 절벽에서 끝났고, 맞은편에는 도대체 어디서 찍는지 모를 강렬한 햇빛이 광활한 풍경을 메우고 있었다.

하늘에는 새하안 구름이,비탈진 계곡에는 깨끗한 물이 흘렀고 평야 위에 자라난 꽃무리 주위로 벌들이 모여들었다.

절벽 끝에 서자 시원한 바람이 전신을 스쳤다.

거대한 바위가 자리했고,곳곳에 울창한 숲마저 조성되어 있었다.

높게 솟은 나무들은 가지와 잎을 넓게 드리웠다.

“어떻게 이런 곳이 있는 거지?”

나냐우는 환한 햇살에 눈을 슬쩍 좁혔다. 멸어지는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 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수도 어디에도. 아니,지금까지 갔던 어디에도 이런 곳은 없었어. 처음 보는 지형이야. 게다가..

나냐우가 주머니에서 투명한 유리 막대를 꺼내들었다.

안에는 푸른 연기와 붉은 연기가 대치하고 있었는데,서로를 밀어내는 둘의 경계점이 어떤 숫자를 가리켰다.

“지하로 한참 내려왔다고.”

레안드로가 지나간 흔적은 분명히 느껴진다.

조금 더 차분히 주위를 살폈다.

“여기좀 봐 봐.”

나냐우가 절벽 한쪽에 두드러진 작은 비석을 손으로 짚었다.

이끼에 덮여 있었던 것 같은데, 그녀가 보기 전에 이미 누군가에 의해 깔끔해져 있었다.

“10.?”

“딱 경계점에 세워진 비석이야. 어쩌면 단계나 층 같은 걸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가 10층이라면..

“아래로 가면 숫자가 줄어들려나, 늘어나려나?”

그때 였다.

“히히힘.”

얌전히 걸어오던 미유가 갑자기 몸을 수그리고 등을 낮췄다.

“어? 올라타 줘?”

나냐우가 미유의 목덜미를 살짝 쥐었다.

“털 윤기 좀 봐 봐. 이런 아이가 타 달라는데 거절할 수도 없고.”

그녀는 훌쩍 말 위에 올랐다.

순식간에 안장 위에 앉은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뭐 해? 이리 와.”

“됐다.”

레안드로 후작의 애마다.

미유와 너무 가까워지는 건 뭔가 꺼려진다.

“좀. 겁이 많네?”

나냐우가 한순간에 손을 뻗더니, 나를 훌쩍 들어 자기 앞에 올리고 등을 단단히 받쳤다.

떨어지면 뒤에서 잡아 주기라도 하겠다는 걸까.

억지로 타긴 했지만 정작 오르자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한 번 타 봤지만 그때는 묶여서 짐짝처럼 올려졌다.

안장에 앉은 지금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미유는 다른 말보다 머리 하나는 높아서 반쯤은 하늘에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가자!”

뒤에 앉은 나냐우가 허벅지에 힘을 줬고,거기 감응하듯 미유가 폭발적으로 튀어 나갔다.

- 피이잉!

거대한 흑마가 겁도 없이 20미터 절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히힘! 히히힘!”

윤기 도는 미유의 갈기가 바람을 가르며 휘날렸다.

- 사뿐!

보통이라면 네 다리가 으스러졌을 충격을 미유는 다리의 괴물 같은 근육으로 가뿐히 상쇄했다.

그리고 쉬지도 않고 넓은 평야를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후작이 지나간 자취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둣,빠르게 달리며 한 호흡의 망설임조차 없다.

[최고 승마 속도를 돌파했습니다.] [승마 스킬의 경험치가 미약하게 을라갑니다!]

나냐우가 휘파람을 불었다.

“제대로 쫓아가고 있잖아?”

- 철적!

빠르게 평야를 질주하고,냇가를 건널 때였다.

- 쌔애앵! 퍽!

커다란 새가 활공하며 미유에게

부딪쳐 왔다.

온몸이 빼곡한 비늘로 덮여 있는 녀석이었는데,조류의 비늘이 아닌 파충류의 그것 같았다.

제대로 된 부리도 없었다.

둥그런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새.

지금껏 회귀를 거듭하면서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새를 몸으로 쳐낸 미유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문득 말에서 내려 시냇물 아래를 들여다봤다.

이마에 사슴처럼 뿔이 난 커다란 잉어들이 물살을 헤치며 뻐끔대고 있었다.

미유가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는 쪽에는 냇가에 반쯤 몸을 담근 채 풀을 뜯는 작은 얼룩말이 있었다.

물에 담근 하반신엔 두 다리 대신 인어의 것처럼 커다란 지느러미가 달려 있었고,앞의 두 발에는 발굽 사이에 물갈퀴가 달려 있었다.

물고기나 새, 얼룩말들이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왕이 강림할 때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저런 것들 본 적 있나?”

나냐우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귀엽긴 한데

- 끼애액!

긴 회색 머리털을 양쪽으로 묶은 녀석들이 나무를 타고 다가왔다.

“이건 또 뭐야?”

나무를 타는 모습이나,길게 펼친 팔다리와 몸만 보면 영락없는 밀림 원숭이 였다.

몸은 갈색이고 손발만 회색 털을 가진 녀석들이었는데,특이하게도 입에는 커다란 회색 부리가 달려 있고 등에 자그마한 날개까지 있어

무슨 혼종인가 싶었다.

- 끼액! 끼애액!

훌쩍 나무를 건너온 녀석들이 주위를 빠르게 돌았는데,미유가 앞발을 들어 한 마리의 꼬리를 꾹 누르자 들고 온 단단한 열매를 일제히 집어 던졌다.

- 부응!

나냐우가 크게 휘두른 낫자루에 열매는 하나도 닿지 못하고 전부 튕겨 나갔고,시무룩해진 녀석들은

몇 번 깽깽거리다 동료를 놓고서 뒤로 도망갔다.

미유가 주인을 찾아야 한다는 둣, 금세 발을 들어 꼬리를 놓아줬다.

그리고 킁줌거리며 다시 후작의 흔적을 찾아가려 했을 때였다.

“으음. 잠시만.”

미유의 목덜미를 두드린 나냐우가 푸른 하늘을 향해 낫을 겨눴다.

“뭐지? 뭔가 있나?”

“아니... 없을 거 같아서 그래.”

- 철컥.

낫자루의 90도로 꺾인 손잡이가 뒤로 젖혀졌다.

- 탕! 핑그르르!

옆으로 원통이 튀어 오르며 푸른 하늘로 한 줄기 섬광이 쏘아졌다.

그녀는 위로 날아가는 빛을 보고 눈을 감고 귀를 종긋 세웠다.

무언가 탕,하는 소리가 들리곤, 탄환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스무 걸음 앞에 떨어졌다.

나냐우가 눈을 떴다.

“들었지?”

“튕기는 소리 말인가?”

“그래. 여긴 막혀 있어. 저 하늘. 역시 가짜야.”

위를 바라봤지만 위화감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나냐우가 손으로 눈 위에 차양을 만들고 한참 위의 태양을 노려봤다.

“당연히 저것도 가짜고.”

“햇빛은 느껴지는데. 이런 온도도 전부 가짜라는 건가?”

“만들어진 태양이겠지. 에너지원 위에 눈속임을 한 걸 테고... 정말 감쪽같긴 하군. 후우.”

나냐우는 뭔가가 만져질 거라는 것처럼 손을 뻗어 위를 더듬었다. 무심코 그녀를 따라해 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가 보자.”

후작의 흔적은 계속 이어졌다.

양쪽의 커다란 바위 절벽 사이로 좁고 평평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사람 셋 정도가 지나갈 만한 좁은 길이었다.

“천천히.”

안장 뒤편에 앉은 나냐우가 문득 속삭이듯 말했다.

속도를 줄였고,내 감각에도 한참 전부터 뭔가 잡히는 게 있었다.

그것들은 바위 절벽 뒤편 우거진 숲속에 기척을 죽이고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기척은 점점 더 또렷해졌다.

인간은 아니었다.

커다란 짐승인 듯했다.

더 가까이 다가가자 네발 달린 녀석들이라는 것까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위 절벽 사이의 길은 새 소리나 벌레 소리,다른 짐승의 기척조차 없었다.

흙바닥에 스며드는 미유의 긴장된 숨소리만 남았다. 녀석이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등에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나냐우가 미유의 등허리를 차분히 쓰다듬었다.

“저런 거에 너무 걱정하지 마.”

열다섯에서 스물 정도의 기척은 우리가 다가가자 길 주변으로 슬슬 이동했다.

그것들은 미유가 속도를 줄이자 거기 맞춰 대형을 바꿨다.

“.지능이 있군.”

“그렇지? 악의도 강해 보여. 밖에

있던 귀여운 녀석들이랑 달라.”

하지만 길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 말을 몰아 들어가도 공격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흘끗 위를 올려다봤다.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그림자가 비치던 녀석들은 결국 길을 반이나 지나,숲이 끝나고 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 크르르 •

“어휴. 확실히 내 취향은 아냐.” 나타난 녀석들은 회색곰 정도의

크기였는데,그럼에도 몸 자체는 꽤나 날렵해 보였다.

네 다리 끝에 달린 손가락만 한 발톱은 뾰족한 바위를 꽉 움켜쥐고 있었고,길게 쩍 벌어진 주둥이는 늑대의 것과 비슷했지만 두 배는 길고 이빨이 많았다.

날카롭게 찢어진 붉은 눈에서는 강렬한 식욕이 피어올랐다.

- 크르르르•

좌우에서 나타난 스무 마리 마물은 위협적으로 울며 털을 세웠다.

뒤이어 나타난 몇 마리는 뭔가를 입에 물고 있었다. 비슷하게 생긴 동료들의 시체 조각이었다.

“그런 거였어?”

나냐우는 뭔가 알겠다는 둣 피식 웃었다.

시체 조각은 저들끼리 싸우면서 뜯어 만든 게 아니었다.

뼈와 살점의 절단면은 완벽하게 매끈했고,하나하나가 예리한 각을 그리고 있었다.

“쌓아 둔 식욕을 맘껏 풀어헤치고 싶은데 당한 지가 얼마 안 됐구나, 너희들?”

당장이라도 그녀를 입속에 넣고 찢고 씹고 삼키고 싶다는 눈빛들이 사방에서 가득했다.

미유도 비슷한 눈빛을 받고 기분 나쁘다는 듯 갈기를 세웠다.

- 폴짝!

나냐우는 마치 약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말 위에서 내려서 앞으로 걸어갔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그림자들이 동시에 그녀를 덮쳤다.

- 철컥!

낫에 붙은 거대한 칼날이 반대로 뒤집혔다.

나냐우는 피하지도 않고 그들이 덮쳐 오는 각도에 맞춰 그대로 날을 들이댔고,세 마리가 제 속도조차 이기지 못하고 동시에 그런 식으로 몸이 잘려 나갔다.

갑자기 변한 칼날 위치에 당황한 녀석들은 황급히 방향을 틀다 서로 부딪쳐 자빠졌다.

나냐우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며 낫날을 옆으로 가볍게 밀었다.

한순간 낫날에서 새하얀 섬광이 앞으로 뻗어 나가며 막 일어나려던 다섯 마리를 절반으로 베었다.

뒤쪽에 있던 열 마리는 그 모습에 입을 쩍 벌리더니,물고 있던 시체 조각도 놓은 채 황급히 숲속으로 도망갔다.

“.대단하군.”

돌아온 나냐우가 미유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미유는 귀를 살짝 앞으로 내밀고 머리를 숙였다.

아무래도 아까보다 태도가 한층 순종적으로 변한 것 같다.

“빨리빨리 해야지. 그런데..

나냐우는 말에 타지 않고,작게 한숨을 쉬며 건너편을 가리켰다.

“이 앞쪽에서,레안드로의 흔적이 끊겨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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