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환영 (3)
흔적이 근방에서 끊겨 있었다.
미유도 후작이 지나간 길을 찾지 못하고 주위를 빙빙 돌았다.
바닥과 수풀을 살폈다.
사방 수십 미터 이상으로 범위를 넓혀 찾아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부터 흔적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걸지도 몰랐다.
[탐지 Lv.7]
[활성 상태로 전환합니다.]
[현재 체력 기준,초당 0.0014%의 체력이 소모됩니다.]
탐지 Lv.7.
완벽에 가까운 감각은,극히 미세한 흔적이라도 잡아낼 수 있다.
땅과 공기의 흔들림뿐만 아니라, ‘과거에 흔들렸던 흔적’까지도.
하지만 후작은 분명히 이곳에서 사라졌다.
아예 손으로 땅을 짚어도 새롭게 나오는 건 없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그때 였다.
“양치 열매를. 두 개나 땄어.”
주위를 살피던 나냐우가 무성한 수풀 한쪽에서 걸음을 멈췄다.
“양치 열매?”
“깨물면 팍 터지면서 입 안쪽을 씻어 주는 열매야. 추파카브라들이 굉장히 싫어하는 열매지.”
미유는 새하얀 열매가 오독도독 열린 곳에 가서 냄새를 맡고 슬쩍 얼굴을 찡그렸다. 묘하게 상쾌한 향기가 둔한 후각에 와닿았다.
“도망간 키메라들은 추파카브라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어. 이 열매를
건드릴 리가 없지.”
어느새 옆에 선 나냐우가 머리를 꼬며 중얼거렸다.
미유도 슬쩍 인상을 찡그리면서 양치 열매를 입에 물고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꼼꼼하게 바닥부터 살피던 나냐우는 금방 비석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도 있어. 9야.”
“숫자가 줄어드는군.”
“이렇게 되면 우리 1층에서 만나, 같은 건가?”
“.가 보자.”
그보다 이런 열매를 추파카브라가 싫어한다는 지식을 가진 나냐우가 대단하다.
그녀가 열매를 뜯은 흔적을 보며 말했다.
“하나는 방금 후작이 땄을 거고, 다른 하나는 공작이려나? 우리도 한번 따 보자고. 네가 할래?”
여기뿐이다.
망설일 건 없었다.
“그러지.”
작은 열매 하나를 손으로 잡고, 흑 잡아당겼다.
- 우우우응!
“역시 이거였어!”
나냐우가 외쳤다.
일렁거리는 허공이 눈앞의 작은 원 안에서 이리저리 떠다녔다.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건가? 여긴 나부터 가지.”
한 발자국 앞으로 디뎠다.
허공이 일그러진다.
안쪽에 무언가 붉고 뜨거운 것이 이글거리는 허공이 입을 벌리며, 몸을 흑 빨아들였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함정이 있으면 걷어치운다.
매복은 몰살시키면 그만이다.
일리엔의 유물을 손에 넣은 뒤로 세계는 한층 또렷하게 느껴졌다.
보조,상승,증폭.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여신에 대한 신앙심은 없다.
신앙 따위에 의지하지 않는다.
삶의 출구를 찾지 못해서,머리를
조아려 기도할 정도라면 그자는 볼 장 다 본 거라고 생각해 봤다.
하지만 그가 품은 다이아몬드는 아무래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와 궁합이 잘 맞는다.
가장 짙은 어둠 속에서도 활로를 구분해 낼 수 있을 정도.
무척 기능적이다.
두려울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레안드로는 자신이 밟고 있는 장소가 황궁 아래라는 사실이 걸을수록 믿어지지 않았다.
- 화아아악!
무거운 화산재로 만들어진 거대한 사마귀가 일어나 그에게 앞다리를 내리치려 들었다.
눈도 없고,신경도,피도,갑각도 없이 화산재가 뭉쳐 만들어진 회색 그림자다.
내리치는 앞다리 길이만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괴물을 그는 간단히 피했다.
칼날 따위는 당연히 들지 않는다.
웬만한 마법으로도 타격을 입히기 어려울 거다.
불, 얼음, 바람...
원소 마법으로 이것들을 상대할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 광!
사마귀 앞발이 찍힌 바위가 크게 파이며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하나,둘,셋,일곱,열...
화산재는 인간,새,사자,벌레, 지렁이처럼 가지각색의 모양으로 달려들었다.
“한 번에 덤벼라.”
레안드로의 칼에서 반원 모양으로 푸른빛이 벼락처럼 터져 나왔다.
창칼은 화산재가 뭉쳐 만들어진 사마귀의 앞다리를 베고,두꺼운 몸통을 베고,다시 뒤쪽에서 입을 벌리고 뛰어드는 사자 형태의 몸을 입에서 꼬리까지 갈라 버렸다.
그러고도 힘이 남아 넷을 더 베고 화산재 폭풍 속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이미 레안드로의 칼날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손으로 레안드로를 압착시키려는 4미터 크기 화산재 인간의 다리를 베고,목을 친 다음 몸까지 빠르게 회전시키며 주위의 네 형태를 전부 베어 버렸다.
- 휘이이엉!
주위가 조용해졌다.
검기가 일으킨 파동에 화산재가 마흔 걸음 앞까지 쓸려 나갔다.
하지만 레안드로의 표정은 지극히 어둡기만 했다.
지금까지 벤 것만 마흔둘.
이 정도라면.
지금이라도 올라와 인간과 한바탕 전쟁을 벌여도 될 만한 수량이다.
한참을 앞으로 나아갔다.
아래로 들끓는 용암이 보였다.
- 쿠아아아아!
먼 앞에서 새롭게 일어난 형태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살아 있는 용암이라니..
수도 아래에 이런 마물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겨웠다. 대체 얼마나 눈이 멀고 귀가 먹어 있었나.
- 퍼억!
정상 근처.
용암에서 솟아난 거인들이 손으로 그를 잡으려 했다.
레안드로는 칼을 쥐고 사선으로 거인을 베었다.
하지만 칼이 꿈틀거리는 용암을 지나도 불꽃만 흩어질 뿐 별다른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칼은 거인의 크기에 비해서 지나치게 작았고,거인들의 몸은 흐르는 용암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쿠크크크.
8미터에 달하는 거인들이 입에서 샛노란 유황 가스를 뿜으며 웃었다.
“웃지 마라.”
레안드로는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용암 거인의 허리 높이 즈음에서 오른쪽으로 칼을 휘둘렀고,불을 뿜는 용암이 그 공격을 무시하고 다시 붙으려 할 때 왼쪽으로 칼을 휘둘렀고,또 반대편으로 휘두르고, 다시 휘둘렀다.
레안드로의 몸은 어쩔 수 없는 물리 법칙에 따라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사이에 용암 거인은
가슴부터 발끝까지 이어진 수십 번의 칼질에 하반신이 사라진 상태였고, 상반신이 철퍽 바닥에 주저앉았다. 레안드로는 자신과 비슷한 높이가 된 거인의 머리를 보며 말했다.
“이제 웃어.”
- 쿠그그?
다시 몸에 이어 붙일 용암을 찾는 머리를 레안드로는 아래쪽에서부터 강하게 올려쳤다.
푸른빛이 터져 나가며 용암 거인의 머리가 산산이 터져 나갔다.
비슷한 방식으로 용암 거인 열을 처리하자,어느새 화산의 분화구 앞에 서 있었다.
“여긴가..
- 콰과과!
끓어오르는 용암.
파편에 닿기만 하면 몸이 뚫리고 부서지는 그 심연으로 레안드로가 한 걸음 더 내디디려 할 때였다.
“으음?”
몸이 닿는 촉각의 영역.
휘두른 칼이 닿는 3미터의 영역, 증폭을 고조시키면 백여 미터까지 뻗어 나가는 제2의 영역.
그리고 그보다 또렷하게 잡히지는 않아도 저편에서 뭔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는 직감의 영역.
멀리,화산지대의 입구에서一
결계가 순간 이지러지는 느낌이 육감에 희미하게 잡혔다.
그가 입구를 열 때 일어났던 것과 비슷한 파동이었다.
한참 까마득한 거리.
뭐가 왔는지 자세히 느껴지지는 않는다.
새빨간 분화구 안과 지금껏 걸어온 길을 흘끗 번갈아 바라봤다.
굳이 돌아갈 이유는 없다.
- 콰과과광!
레안드로는 울부짖는 용암 속으로 몸을 던졌다.
들끓는 용암이 갑작스러운 투신에 당황스러운 듯 딱딱하게 굳는 것 같았으나,곧 그의 몸을 밭끝에서 머리까지 뜨겁게 감쌌다.
급한 열기가 온몸을 뒤덮는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자욱하게 뿜어지는 연기로 갑옷이 순식간에 달궈진다.
‘결빙.’
폭발한 냉기가 갑옷을 식혔지만, 만들어진 살얼음이 얼마 견디지도 못하고 주위의 온도에 사가각 녹아 내린다.
보이지 않는다.
칼에 바람의 힘을 불어넣고 앞으로 확 휘둘렀다.
[냉기 폭풍 Lv.l을 발동합니다!]
- 휘우우우옹!
사방으로 짓쳐 오던 무거운 재가 그 자리에 떨어져 바닥에 붙었다.
‘더블 캐스팅..
[냉기 폭풍 Lv.2를 발동합니다!]
칼날이 재차 토해 낸 하얀 숨결이 하늘을 가리는 진회색을 지워 냈다. 스무 걸음이 시야에 들어왔다. 비춰지는 것은 기묘한 세계.
언뜻 평화롭게까지 보였던 위와는 전혀 다른,검붉은 세계였다.
“어휴. 한 번에 이렇게 변하나. 뭐,위쪽이 너무 쉽긴 했지만.”
어느새 옆에 선 나냐우가 머리를 꼬며 중얼거렸다.
미유도 슬쩍 인상을 찡그리면서 양치 열매를 입에 물고 있었다.
‘냉기 폭풍. 더블 캐스팅..
- 휘우우응!
[냉기 폭풍 Lv.2: 특수 환경에서의 반복된 사용으로 스킬 경험치가 미약하게 상승합니다.]
‘이런 것도 있나.’
괜히 스킬을 더 과하게 써 봤지만 경험치 상승 메시지는 끝이었다. 시야를 확보하며 한참을 걸었다. 곳곳에 화산재로 만들어진 잔해가 보였다.
“화산재 인형 파티인가? 모형들이
참 다양하기도 하네.”
“엄청나군. 지금까지 본 잔해만 백이 훌쩍 넘는다.”
“네 기술에 부서진 거야?”
“아니. 검기에 잘린 흔적이군.”
나냐우가 가볍게 큭큭댔다.
“그냥 그렇다고 치자. 어쨌거나 수고가 많아. 고마워.”
냉기 폭풍을 사용할 때마다 사방의 열기와 냉기가 온도 차이로 인해 강한 바람을 만들어 내며 화산재를 폭발적으로 밀어냈다.
있을 것 같았지만,여기서는 옆에서 느긋하게 걸으며 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후작의 흔적을 따라갈수록 점점 화산재는 사라졌지만,대신 새빨간 용암이 곳곳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황궁 밑에 거대한 화산이라니, 정말 당황스럽지 않아?”
나냐우는 흐르는 용암을 밖에서 주워 든 나뭇가지로 쿡쿡 쑤셨다.
나뭇가지는 끝에서부터 곧장 불이 붙으며 타올랐다.
- 스르르록..!
하지만 후작이 전부 해치웠는지 이렇다 할 마물은 나오지 않았다. 모조리 잔해뿐이었다.
정상에 가까이 올라갈수록 용암은 폭발적으로 흘러내렸다.
“아까 화산재 인형들 부서진 거 있지 않았어?”
“그랬지.”
“여긴 뭐 없나. 좀 심심한데.”
- 끼릭! 끼리릭!
용암 속에서 샛노란 샐러맨더가 튀어나왔다.
“히히힘!”
1미터도 안 되는 자그마한 도마뱀 형태였는데,미유가 먼저 나서서 앞발로 녀석을 멀리 걷어찼다.
발굽에 잠깐 불이 붙었지만 워낙 빠르게 휘두른 덕분인지 곧 다시 꺼졌다.
샐러맨더는 다른 용암 속에 몸을 담그고 머리만 삐죽 내민 채 이쪽을 바라봤다.
“아,슬슬 다 왔어.”
- 우르릉! 콰과과!
열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약한 틈을 억지로 벌리고 용암이 위로 세차게 솟아오른다.
“정말 저기로 갔다는 건가?”
흔적은 틀림없이 말해 준다.
하지만 머리로는 의심하게 된다.
계속 이 흔적을 따라서 정상으로 향하면 들끓는 용암뿐이다.
결빙 마법 따위로 보호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 치이이익!
가까이 흐르는 용암을 쑤신 다음, 칼날에 묻은 용암을 바라봤다.
당연히 가짜는 아니다.
반경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 분화구도 진짜겠지.
“후우..
나냐우는 내 칼과 분화구를 흘끗 번갈아 바라보고 숨을 깊이 들이 마셨다.
“올라갈 건가?”
“흔적은 여기가 확실해.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야!”
“히힘! 히히힘!”
곁에 있던 거대한 흑마가 용암과 용암 사이를 날렵하게 도약해 가며 정상으로 나아갔다.
갈기가 마구 헝클어지긴 했지만, 성격을 모른 채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전설적인 명마의 모습.
“.쫓아가지.”
- 팟!
나는 빠르게 몸을 날렸다.
후작은 저런 녀석을 어떻게 놓고 갔을까?
제멋대로 놓고 간 주제에,뻘건 용암 덩어리에 맞아 자칫 죽기라도 하면 분명 우리를 탓할 거다.
눈이 벌게져서 달려들겠지.
말 보호 차원에서라도 지금 당장 따라가야 했다.
“히히힘!”
미유가 도도하게 멈춘 채 분화구 아래를 내려다봤다. 앞발로 분화구 경계를 툭툭 건드리는 녀석을 보고 물었다.
“여기로 뛰어드는 건 너라도 좀 꺼림칙하지 않냐?”
지옥의 입구 같았다.
군데군데 갈라져서,새빨간 선을 드러낸 검은 대지가 바로 아래에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넘치듯 위로 올라온 경계에 붉은 용암들이 넘실거린다.
용암으로 이루어진 땅.
“이건 미친 짓이야..
나냐우는 눈썹을 홀끗 치켜세우고 못마땅한 둣 중얼거렸다.
- 콰과과과과!
펄펄 끓는 용암이 분출되며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나마 검게 덮여 있던 부분마저 가운데서 폭발하는 분화에 무너져 빨갛게 변하고,덮여 있던 표면도 급격히 녹아 버렸다.
“정말 여기로 가는 게 맞을까?”
‘결빙. 더블 캐스팅. 결빙.’
땀을 홀리는 미유를 위해 끝없이 마법을 캐스팅했다.
그때 였다.
나냐우가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시만. 그 마법 말이야.”
“더 춥길 원하나?”
“아니. 쓰지 말아 봐.”
“진심인가? 말이 견디지 못할..
“잠깐만.”
- 파삭!
냉기 마법을 정지하자 순식간에 살얼음이 녹아내렸다.
나냐우의 이마에도 흥건하게 땀이 맺혔다.
“역시 다시..
“아니야. 분화구에 이만큼 가까이 왔으면 훨씬 뜨거워야 되거든.”
그녀가 펑펑 터지는 분화구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 째앵!
그리고 근처로 날아오는 용암에 슬쩍 낫을 가져다 댔다.
치이익,하는 소리가 없다. 조용하다.
날아온 용암은 칼날을 붉게 달구지 않았다.
“봐 봐,아까랑 다르지? 가자.”
“온천 안 가 봤어? 그냥 좀 크다고 생각하라고.”
“히히힘!”
터무니없이 눈치가 빠른 건지, 미유는 먼저 시뻘건 용암 속으로 뛰어들었다.
단말마는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