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환영 (4)
레안드로는 앞으로 걸어갔다.
길은 하나밖에 없는 탓에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용암 속으로 몸을 담근 뒤 나타난 광경은 그저 넓고 긴 동굴이었다.
뜨거운 유황연과 화산재가 터지던 분화구에 비교하면 동굴의 서늘함은 반갑기까지 했다.
- 똑. 똑.
차가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물방울은 한 번에 하나씩 떨어져도 어둠 속에서 메아리는 몇 번이고 울린다.
레안드로의 발걸음은 그 희미한 메아리조차 방해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이동하는 족적에 소음은 조금도 없다.
호흡마저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최상의 기척 차단.
제국의 4검주는,허공에 매달려 붉은 눈을 빛내는 박쥐들을 완전히
무시하며 지나쳤다. 구태여 상대할 가치도 없는 녀석들이었다.
종유석이 주렁주렁 매달린 동굴 천장 어디에도 빛을 내는 광석은 보이지 않지만,앞으로 걸어갈수록 동굴은 점점 밝아졌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실낱같은 바람 몇 가닥이 안에서 들락거렸다.
한참 안으로 들어간 순간 앞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기척이 어둠 속에 느껴졌다.
레안드로는 계속 기척을 숨긴 채 앞으로 걸어갔다.
통로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몸을 숙이고 있던 괴물이 일어났다.
그제야 레안드로는 차분히 상대를 바라봤다.
수천이 넘는 마물을 베어 온 그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형태였다.
구부정히 두 발로 서 있었는데, 찢어진 입은 넓적한 머리 양쪽으로 두 개였다.
코는 없고,몸은 깃털로 덮였고 팔은 옆구리에서 길게 빠져나와 있었는데 무척 길어 무릎까지 닿을 정도였다.
양손에는 칼을 쥐고 있었다.
온몸은 능축된 핏속에서 건진 듯 붉었다.
녀석이 짧은 목을 돌렸다. 마법사들이 실험실에서 만들어 낸 생물체들을 처리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들과도 달랐다.
만들어진 것에서 보이는 분명한 부자연스러움이 없었다.
몸도 얼굴도 조화롭고 매끈하다. 강하다.
기척을 알아차렸다.
움푹 들어간 구멍 안에 자리 잡은 세 개의 눈은 분명히 그를 향하고 있었다.
레안드로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네가..
한순간 레안드로는 자신이 방금 그 말을 꺼냈다고 생각했다.
네가? 네가 뭘 어쨌다고?
왜 이런 말을 했지?
하지만 낮은 목소리는 양쪽에서 나왔고,동굴 벽에 직접 부딪쳐서 꽤 또렷한 메아리를 만들었다.
“4검주인가?”
의심의 여지는 없다.
눈앞의 처음 보는 괴물이 분명히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렇다.”
움푹 들어간 구멍 속의 세 눈알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다.
괴물은 양쪽 입에서 축축하고 긴 혀를 쑤욱 내밀어 입가를 할은 뒤 말했다.
“생각보다 허약해 보이는군. 일단 칼을 들어라.”
레안드로는 그때까지 칼을 들지 않았다.
하지만 괴물이 칼을 쥔 양손에 불끈 힘을 주자,붉은 손이 뻗어서 칼자루와 엉키며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붉은 살은 칼자루를 넘어 칼등과 칼날에 혈관이 돋아나듯 빠르게 이어졌고,그 순간 괴물과 이어진 칼날에 진흥색 기운이 서렸다.
“.넌 뭐냐?”
괴물은 자랑스러운 어조로 고개를 슬쩍 치켜들고 말했다.
“검신일체劍身一體. 이것이 바로 검에 녹아든다는 것. 나는 검객이 꿈꾸는 궁극의 경지가 완전히 몸에 구현된 존재다.”
“.뭐?”
괴물은 레안드로의 외마디 물음을 감탄이라고 생각한 듯 자랑 가득한 어조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이름 높은 수배자들을 상대하며 내 실력을 검증했다. 혼자 수백을 죽인 인간들을 며칠 푹 쉬게 하고 모여 칼을 잡게 해 줬는데,항상 간단히 내가 죽이고 잡아먹었다.”
두 개의 입에서 다시 긴 헛바닥이 동시에 날름거렸다.
“며칠 푹 쉬게 해 줬다고?”
괴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이기면 사형을 면제해 준다고 약속하니 다들 필사적으로 달려들 수밖에 없었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몰라도 꽤나 자의식이 강한 것 같았다.
아쥬라의 탑에서 만들어 낸 역작 같은 걸까. 레안드로는 천성적으로 마법사들이 싫었다.
마법이란 건 그에게 잘 통하지도 않았지만,마법사라는 족속은 항상 ‘노예’를 만들려고 했다.
더 많은 노예.
더 기능적인 노예.
노예를 관리하기 위한 노예.
골렘,키메라,패밀리어...
철저히 노예로만 사용되는 그들은 존재 자체가 끈적한 불쾌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여 줬다.
“쓸데없이 말을 잘하는구나.”
괴물은 그걸 칭찬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아아,이건 네가 너무 겁먹을까 봐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천천히 웃는’ 스테이샤도 내가 잡아먹었다.”
레안드로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건 제법 무서운데.”
괴물은 양쪽 입으로 동시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정말 실력이 뛰어났어. 혼자 자길 추격하던 현상금 사냥꾼 수백 명을 가지고 놀았거든.”
“그런가?”
“응. 도망가려면 얼마든지 국경 너머로 도망갈 수 있는데,현상금 사냥꾼이 얼마나 오는지 궁금해서 계속 그들을 역으로 사냥했었지. 음. 내가 어디까지 말했지?”
레안드로는 무심한 표정으로 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머리는 굉장히 안 좋은가 보군. 수배범이 현상금 사냥꾼들을 가지고 논 것까지 말했다.”
“그래,네가 겁에 질려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아서 흐름이 끊겼잖아! 젠장. 나는 제대로 된 몸 상태의 스테이샤와 싸우고 싶었다. 곤죽이 되어 끌려온 그 인간을 몇 개월간 회복시키고 싸웠어. 약간 힘들게 싸웠지만..
“결국 칼 가운데 하나만 쓰고도 승기를 잡았지.”
괴물이 왼쪽 칼을 스윽 들었다.
“그런 다음 조금씩 베어 먹었지. 생각해 보니,먹기 전에 왜 천천히
웃는 스테이샤라고 불리는지 물어 봤어야 했는데. 그 이야기도 조금 재밌었을 거야.”
이야기를 끝낸 괴물은 입이 달린 양쪽으로 한 번씩 번갈아 머리를 숙였는데,마치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흐음..
레안드로는 작은 탄식을 뱉었다.
“아무래도 안 잡고 죽여 주는 게 좋았겠군.”
“그거야 당연히. 뭐?”
“천천히 웃는 스테이사는 부모에게 학대를 당해서 감정 표현에 장애가
있었지. 태어나 웃은 적이 없어서 제 손으로 부모를 죽인 다음에야 다섯 시간에 걸쳐 한 번 웃었고, 웃은 뒤 살인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즐거운 거라고 믿어 버렸다.”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아?”
레안드로는 대충 칼을 늘어뜨리며 질문에 대답했다.
“그녀를 포함해서,네가 언급한 유명한 사형수들을 다 누가 잡아 왔을 거라고 생각하나? 제대로 된 집행이 아니라 이딴 짓이나 하고 있었다니..
- 피이잉!
구부정한 자세로 천장에 매달려 있던 박쥐 괴물이 미유를 덮쳤다.
나는 반걸음 대각선으로 움직이며 위쪽으로 칼을 뻗었다.
“끼,끼히..!”
이빨을 벌리고 수직으로 낙하한 박쥐는 살짝 검기를 두른 칼끝에 심장이 뚫려서 숨이 끊겼다.
투구에 된 피를 닦으며 거대 박쥐 시체를 밀어냈다.
- 털썩.
새된 소리를 낸 것과 달리 날개 너비만 3미터에 달하는 거물.
웬만한 말이라면 정말 먹히겠다 싶을 정도다.
“히히힘?”
미유가 자기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는 것처럼 앞발을 휘젓는다. 그럴지도 모르지만,싸우다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내가 하는 게 훨씬 낫지.
- 띠링!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세세한 경험치 메시지까지 확인이 가능할 정도.
“이 녀석..
옆에서 따라오던 나냐우가 시체를 바라보고 팔을 가리켰다.
“제법인데? 네 공격을 막으려고 했어.”
그녀의 말대로였다.
비늘이 돋아난 단단한 양 팔뚝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막 겹치려 하고 있었다.
나냐우가 말을 이었다.
“물론 팔을 교차했어도 그것까지 바로 잘렸겠지만,너한테 방어를 시도할 만한 속도야. 최상급 기사 서넛 정도는 찢을 수 있을 거라고 봐야 해. 더 내려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랬다.
여유롭게 지나고 있지만,10층의 추파카브라 키메라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녀석들이다.
한 마리만 풀더라도 10층의 모든 생태계를 파괴하겠지. 아래로 내려 갈수록 적은 강해지고 있다.
층 입구에 쓰인 숫자가 9, 그리고 8을 지나 4나 3정도가 됐을 때에 어떤 싸움을 하게 될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2나 1이 된다면...
달려드는 거대 박쥐들을 처리하고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저 앞쪽에서 익숙한 초록색 빛이 비쳤다.
앞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동굴에는 처음으로 격렬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단단한 동굴 벽 곳곳에 날카로운 검기에 의해 파인 자국이 있었고, 10미터 넘는 천장까지 날아가서 부딪쳤는지 거대 종유석들이 떨어져 바닥에 박히거나 엉망으로 부서져 있었다.
암반인 바닥도 날카롭게 긁히고 깊이 파여 있었다.
그리고 피로 칠갑이 된 무언가가 반으로 갈라져서 동굴 벽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반으로 갈라진 몸을 석벽에 고정하는 건 시체 스스로의
꺾인 팔.
칼 자체가 된 팔이 쪼개진 반신을 벽에 꽂고 있었다.
“거한 흔적일세. 그나마 반항을 허용해 준 모양이야?”
과연,격렬한 전투의 흔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혼자 무언가에 필사적으로 부딪치다 죽어 간 듯하다.
“후작이겠지?”
나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에서 딱 얘만 죽이고 갔어. 직접 싸웠으면 상당히 귀찮았겠네.
꽤 센 거 같은데? 어디 보자-
- 철퍽.
그녀는 벽에서 시체를 뜯어내어 잠시 살폈다.
“으음. 워낙 변형이 심하긴 한데, 어디서 본 둣도 해. 전전대 새벽의 랜서 기사단장이 이런 얼굴이었나? 제법 잘나가는 검주였거든. 연격의 쌍검으로 유명했어.”
“언제 적 인간이지?”
“30년 됐나? 임무 중에 죽은 걸로 기억하거든.”
그렇게 죽은 기사를 이런 식으로 활용한다는 건가.
물론 이대로 시체를 놓아둘 수는 없었다.
[홉수가 가능한 상태입니다.]
- 우우우우..!
초록색 빛이 몸에 홀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 띠링!
[쌍검술 Lv.4를 흡수합니다!]
[쌍검술 Lv.5...]
[개념: 검신일체劍身一體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집니다.]
[신체 개조에 대한 이해도가 약간 증가합니다.]
[〈뼈의 군주〉의 숙련도가 미세하게 올라갑니다.]
[골격변용骨格變容의 변용 범위가 상승합니다.]
- 부위별 5.91% ᅳ 6.13%
K접붙이기〉에 대한 이해도가 약간 증가합니다. 다음 스킬의 경험치가 미약하게 증가합니다.]
- 식물 재료 채집 Lv.2
- 동물 재료 채집 Lv.l
엉뚱한 영향을 받아 버린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상당한 강자였던 모양인지,실로 오랜만의 흡수였다.
쌍검술 정도라면 충분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겠지.
시체가 휘두르던 쌍검은 칼날이 반 넘게 나가서 사용이 어려울 것
같았다.
앞으로 백여 미터 더 나아갔더니, 보란 둣 거대한 철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냐우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투로 말했다.
“들어가자. 웬일로 이렇게 친절해? 편하게 해 주네.”
“맞는 거겠지?”
“그럼. 앞에서 먼저 뚫어 주니까 이거 진짜 편하네. 방금 개가 여기 고비였나 봐.”
- 철컥.
나냐우가 손잡이에 낫을 걸었다.
“좋아,트랩 같은 거 없고. 이대로 쭉 얹혀 가자고. 입장권 검사하는 사람도 없잖아?”
레안드로는 반투명한 불의 고리를 향해 칼을 내밀었다.
- 화특.
직경 2미터.
칼은 약한 불길에 싸이더니 그냥 반대편 허공을 뚫고 나온다.
손을 넣어 봐도 마찬가지.
테이블을 흘끗 바라봤다.
지금까지 고생했다는 걸까.
넓은 테이블 위에는 투명한 시약 두 병이 있었다. 한 병은 비워졌고, 안이 차 있는 건 하나뿐.
분명 공작의 글씨체로 쓰여 있는 〈이걸 뿌려!〉라는 카드가 보인다.
‘먼저 가서 기다리는 건가.’
레안드로는 투명한 시약을 들어 불의 고리에 뿌렸다.
- 화르록!
허공에 뜬 불의 고리가,시약이 뿌려지자 원 안에 보랏빛 장막을 비추기 시작했다.
‘남겨 봤자 쓸 데도 없겠지..
- 탈탈!
후작은 빈 병을 테이블 위에 놓고 보랏빛 장막 안으로 걸어갔다.
남김없이 텅 비워진 두 시약병은,
나란히 배열된 채 불의 고리 안에 들어가는 레안드로를 배웅했다.
후작이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고리는 다시 아무것도 없는 반대쪽 허공만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