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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05화 (305/458)

325화 환영 (5)

- 쿠궁!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철문 두께만 해도 거의 1미터에 가까웠는데,나냐우조차 문을 열며 약간 지체했을 정도였다.

안쪽에는 동굴과 비교도 안 되게 탁 트인 넓은 홀이 펼쳐졌다.

럽럽한 느낌으로 가라앉아 있던 동굴과 달리,지하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공기도 깨끗했다.

등불이나 야광주 같은 건 보이지 않았지만 딱 쾌적한 조도의 빛이 홀 곳곳을 빠짐없이 비췄다.

모두 고도의 마법으로 관리되는 느낌이었다.

철문에서 직선 앞쪽에는 보란 둣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다.

나냐우와 함께 걸어가며 테이블을 바라봤다.

흔한 무늬조차 없이,정말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은 몸통을 받치는 네 개의 기둥에도 장식 같은 건 없었다.

넓이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작은 시약병 두 개와,〈이걸 뿌려!〉라고 적힌 쪽지가 보인다.

“떡대 공작인가? 취향 하고는.”

쪽지 귀퉁이에 자리 잡은 네 개의 하트는 안쪽이 모두 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테이블 맞은편에는 역시 보란 듯 커다란 불의 고리가 있었다.

나냐우가 바닥의 마법진을 흘끗 살폈다.

“전형적인 반응성 포탈이시고..

- 획!

“이건. 다 비었고..

나냐우가 빈 약병을 흔들었다.

두 개의 빈 병과 하트가 그려진 쪽지를 번갈아 보자 머리가 조금씩 무거워졌다.

“여기,한 병 더요.”

나냐우가 300세 개그를 하는 것 같았다.

머리는 점점 무거워졌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졌다.

넓은 테이블 위를,아래를, 주위를 아무리 살펴봐도 유리병은 정확히 두 개밖에 없었다.

“히히힘!”

나와 나냐우가 아무것도 못 하고 가만히 있자, 지루해졌는지 미유가 불타는 고리를 뛰어넘었다.

“아무 일도 없군.”

“.하아아.”

당연하다는 듯 나냐우가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미유가 수십 번을 왕복해도 물론 마찬가지다.

- 철컥.

미유를 따라서 괜히 팔을 뻗고, 다리를 뻗고,머리를 들이밀어도 아무 소용은 없었다.

나냐우가 한숨을 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괜히 힘 빼지 마. 이게 힘으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지만..

“후작은 이걸 뿌리고 반대쪽으로 바로 넘어간 건가?”

나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흔적이 바로 여기를 통해 있잖아. 이 나쁜 자식,후대를 위해

반이라도 남겨야 될 거 아니야?”

어느 쪽이 후대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물론 후작에게 그런 의리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쫓아오고 있는 걸 알고 칼질이라도 안 하면 다행이지.

“꼭 시약이 필요했던 건가?”

나냐우가 얼굴에서 손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게도. 약속된 물질을 써서 반대편과의 연결을 되살려야 해. 딱 뭐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냐. 심지어 공간을 찢는 능력이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야. 여기 갇힌 것도 아니니까..

그녀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뭔가,방법이 있을 거다. 우리가 다음으로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야.”

나냐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말을 이어 갔다.

“아직 포기할 건 아니지 않은가? 초원을 생각해 봐. 추파카브라가 양치열매를 싫어한다는 네 지식이 층 돌파에 필요했어. 화산은 위로 갈수록 온도가 점점 낮아진다는 걸 관찰해야 했었지. 어쨌건 겉보기에

용암에 몸을 던질 수 있는 배짱도 필요했고. 이번에도 뚫을 방법이 있을 거다.”

쉽게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응성 포탈에는 반드시 시약이 필요하다.’는 지식이 오히려 생각을 제약할 가능성도 있다.

내 말에 나냐우가 눈을 깜빡이다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배를 잡은 그녀가 일그러질 얼굴로 확 고개를 젖히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콕. 크크크크. 푸하하하..!”

“뭐지?”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나냐우가 진하게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지하게 위로하지 마. 웃기잖아. 뭐. 하는 데까지는 해 봐야겠지. 좋아. 일단 믿어 보라고. 나도 다 생각은 하고 있었어. 여기 규모가 일단 엄청나지?”

한참 웃고 나서 목이 풀린 건지, 그녀의 목소리는 묘하게 나긋나긋한 데가 있었다.

그녀가 테이블과 불의 고리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가 있는 장소는 터무니없이 거대한 홀.

철문에서 중앙 테이블까지 똑바로 걸어오는 방향만 제외하고,빼곡한 실험대와 보관대가 주위를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야..

걸어 다니며 주위를 면밀히 살핀 그녀가 나직이 감탄을 뱉었다.

“순금 따위는 그냥 발로 만들어도 되겠어. 최고급 용매와 보조제에 분리 시약까지. 이렇게까지 선택성 높은 촉매들이라니..

나도 그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보관대를 살폈다.

전당보다 훨씬 넓었다.

다만 그곳에 있던 게 무구와 각종 기계들이 라면.

이곳은 갖가지 모양의 플라스크와 서로 다른 색과 투명도의 시약들, 흘끗 봐도 비범해 보이는 재료들이 백백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대한 실험실 같았다.

액체뿐만 아니라 투명한 유리관에 갇혀 타오르는 푸른 불,하얀 불도 있고,아주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암석과 수면에서 자라는 화려한 꽃과 식물도 많았다.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봐?”

몇 걸음 떨어져 보관대를 살피는 나냐우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층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남아 있다. 대체 뭘 만들어야 하지?”

뿌려야 하는 시약이 뭔지 모르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어,아까는 방법이 있을 거라며? 아무렇게나 한 말이었어?”

“내 뜻은..

“그래,나한테 방법이 있겠지.” 보관대 건너에서 놀리는 것 같은 눈빛을 보낸 나냐우가 품에서 검은 막대를 꺼내 들었다.

막대는 거의 바늘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가느다란데,끝부분에 작은 공이 붙어 있었다.

“시약 병 줘 봐.”

나냐우에게 텅 빈 시약병을 바로 건넸다.

- 끼긱.

그녀가 가느다란 막대로 시약병을 삭삭 긁어모으자,막대 끝의 공에 간신히 한 방울이라고 불릴 만큼의 투명한 액체가 맺혔다.

“후. 살았다. 이 정도면 되겠지.

여긴 연금술사의 신전인지 뭔지는 몰라도,최고급 성분 분석기까지 갖 추고 있거든. 어,거기. 네 앞에 있는 게 성분 분석기야.”

그녀가 조심스레 바늘을 든 채로 말을 이었다.

“분석기만 있는 게 아니라 정말 별의별 장비가 다 있더라. 완벽한 품질의 방호구는 물론이고,산화도 측정기에 분광광도계,흡착분석기, 고체,용매,토양 추출기들이 전부 따로 있었어.”

”미세 구조 절단기와 박막증착기, 초음파 파쇄기,액체 접촉각 측정 장비까지 있었다니까. 상온분석과

저온분석이 가능한 시차주사열량계 까지 있었다고. 미생물 배양기나 지금 쓰는 분석기 정도야 누구나 갖고 있지만. 나도 뭔지 모르는 물건도 있었어.”

“.그냥 대단하다는 건 알겠군.” “탑주 중에서도 이만큼 연금술에 전문적인 녀석은 아마 두 손가락에 꼽힐 거야.”

“아쥬라의 마탑주 말인가?”

“그치. 가지고 테이블로 와 줘.”

- 탈칵.

- 위이이앙

까만색 몸통에 인간의 핏줄 같은 선이 몇 개씩 연결된 기계가 혼자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녹색과 적색으로 연달아 깜빡이는 불빛을 바라봤다.

신기한 물건이었다.

“20분은 걸릴 거야. 기다려 줘.”

허리를 짚고 선 나냐우가 몸을 쭉 뒤로 젖히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여기 참 대단해. 솔직히 말해서 이상할 정도야. 내가 바로 트로핀 나냐우거든? 세계의 흑막을 자칭하고 있단 말이야. 그런 내가

이상할 정도라면..

그녀의 시선은 고정적으로 천장에 박혀 있다가,돔 천장에서 꼼꼼히 벽면 쪽을 훌었다.

이제 보니 몸을 풀기 위해 천장을 보는 게 아닌 것 같았다.

“ 이 상하다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서늘한 느낌의 금속으로 코팅된 벽과 천장에는 비슷비슷한 무늬가 반복적으로 새겨져 있었다.

가운데는 푸른 정십이각형,그리고 모서리에 둘씩 하얀 꽃이 있었고, 그 위를 안쪽으로 스물네 군데가

움푹움푹 들어간 금색별이 둘렀다.

그 사이사이에는 수십 개 선분이 겹쳐진 기하학적인 모양이 계속해 모양을 조금씩 바꿔 가며 자리 잡고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전체 벽면에,근위단장 이사벨 시몬느의 갑옷에 새겨진 것보다 훨씬 백랙한 대마법對魔法 문양이 있었다.

물론 그 기하의 의미를 하나하나 파악할 수는 없었다.

“오키드와 파푸아의 꽃. 거기다 아브락트를 전개시켰지.”

“대칭을 가진 다포체를 2차원에서 한 동작씩 구현시켜 놨어. 완벽한 그물이야.”

나냐우는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그물?”

“응. 한 마디로 최상급 충격 흡수 장치야. 뭔가 말도 안 되는 힘으로 직접 땅을 쳐도,흡수할 수 있게.”

“철저히 요새화된 거지. 바깥에서 무슨 일이 터져도 여기를 뚫기는 어렵겠어.”

황실 결계는 별도로 해도,라며 그녀가 말을 맺었다.

“•••전쟁 같은 것도?”

나냐우가 피식 웃었다.

“고작 전쟁? 아니야. 인간이 대체

뭘 한다고 해도 그만한 물리력을 낼 수 있겠어? 지금 우리가 지하로 얼마나 깊숙이 내려왔는데. 이건. 모르겠어. 갖춰진 것들 중에 식량 대용으로 쓸 수 있는 것도 많더라. 한 방울만 먹어도 하루 종일 배가 부른 액체도 있고. 오랫동안 숨어 살아남기 위한 기능이 지나치게 잘 갖춰져 있어.”

전쟁 이상이라.

갑자기 머릿속에 곧바로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10년 뒤의 마왕 강림.

그걸 여기서 대비하고 있다는 건가?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전쟁을 준비하는 것은 황실.

전쟁 반대파를 암살한 것도 황실. 그리고 전쟁의 결과로 강림한 것이 마왕이 다.

인과를 넘어 그 자체.

‘황실이, 마왕을 강림시킨다..?’ 사슴 아에자르의 말이 떠올랐다.

〈왕께서 강림하실 걸세. 스스로 정화淨火가 되셔서,인간들을 소각 하실 거야.〉

인간들의 피와 절규를 대접받은 마왕이 강림한다.

마왕이 강림할 때 인간은 끝이다.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지하, ‘자유의 길’보다 훨씬 깊고 안전한 지하에 이토록 쾌적하게 숨어 있는 자들도 끝일까?

문득 한 단계가 더 떠오른다.

마왕은 ‘용사’들에게 밟혀 죽는다. 맞아 죽고 찢겨 죽는다.

다시 예전보다도 철저한 인간들의 세계가 온다.

‘용사’의 때가 오면 다시 바깥으로 나가 마음껏 활개 칠지도 모른다.

예전보다도 더한 어두운 무법의 세계에서.

마계가 열리고 마물들이 바깥으로 쏟아져,‘사냥감’의 질과 양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한 세상에서.

그들은 모든 걸 쓸어버리는 해일 같은 압도적인 위락을 누린다.

이 설계는.

이것을 설계하고,이곳에 깊숙이 숨어들 자들은.

20년 후를 내다보고 있다.

‘어쩌면 용사라는 게...,

나냐우에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 털컥.

한참을 돌아가던 기계가 멈췄다.

“좋았어! 성분 분석 완료는 일단 됐는데. 으음..

나냐우의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일이지?”

“이게. 흐... 내가 이래서 자의식 강한 인간을 싫어한다니까. 시약에 제작자의 시그니처가 들어가 있어.”

“.시그니처라고?”

“특정 재료에 마법을 씌운 다음, 분석기에 넣고 돌렸을 때 원래의 성질을 잃고 자기가 원하는 문양이 뜨게 만드는 거지.”

“그런 게 쉬운가?”

나냐우가 고개를 저었다.

“미쳤고,변태 같고,정말 쓸데없이 힘만 드는 아주 어리석은 짓인데, 자기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종종 다루기 쉬운 한 가지 재료에 그렇게 하더라. 시그니처가 되는 재료를 260가지 정도 아는데, 정말 운 나쁘면 여기서 하루는. 어? 뭐 해?”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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