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환영 (9)
- 스윽!
아이작과 미유는 날아간 문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내 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 쫓아올 거지?”
나냐우는 바닥에 쓰러진 천사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려 내던진 뒤 역시 문안으로 사라졌다.
나도 바로 그녀를 따라갔다.
투명한 문 안쪽으로 몸을 던지자 허공에 미미한 파동이 일며 어둠이 몸을 감쌌다.
이동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건지, 긴 터널을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거리감이 무척 왜곡되어 있었다.
엄청나게 긴 거리를 짧게 느끼게 만든 것 같았다.
터널을 이동하면서도 인밴토리로 만든 영역은 유지되는지 천사들이 쫓아오는 느낌은 없었다.
걸으며 생각할수록 인밴토리라는 권능이 놀랍게 느껴졌다.
전부 의지대로 되는 공간이라면.
지금까지 응용해 본 것만 해도, 천사들을 전부 가둘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적이 나타나더라도 인밴토리로 싸 버리면 아예 대항이 불가능하다.
여태까지 썼던 스킬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힘이다.
이해도가 높아진다면 후작 이상의 강자도 통제할 수 있겠지.
아이작은 대체 어떻게 이 쓰임을 알아낸 걸까?
그나저나.
내 의지대로 되는 공간이라면.
대체 어떻게 인밴토리를 홈쳐 내서
사용하고 있었던 걸까.
- 저벅.
기괴한 거리감의 터널을 거치자, 바닥에 단단한 질감이 느껴졌다.
“아이작,그런데 내 인벤토리를 어떻게 가져간 거지?”
대답은 없었다.
- 까악! 까악!
울음만 들려올 뿐.
터널을 거쳐 도착한 곳.
거기엔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호화로움이 극에 달하면 오히려 검소한 느낌을 받게 된다. 총천연색의 보석이 마치 바닷가 모래알처럼 수북이 쌓여 있으면 첫인상은 정말 흙처럼 느껴진다. 쌓여 있는 보석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몸을 휘감았다.
- 까악! 까악!
아이작은 그 빛 속에, 아니 빛을 뿜어내는 보석들 속에 아예 몸을 깊이 파묻고 있었다.
까마귀가 아니라 인간들이 아예 안에서 몇 명이고 질식해 죽을 수 있을 만큼 보석의 산은 거대했다.
까마귀의 주위에 뜬 인벤토리는 탐욕스럽게 보석을 골라 담아가고 있었다.
“. 5로군.”
나냐우도 앞에 있던 비석 위쪽의 숫자를 확인한 뒤 곧장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아이작과 가는 방향은 달랐지만
걸음걸이에서 흥분이 느껴졌다. “너희..?”
- 까악! 까악!
〈5는 좋은 숫자라네! 아주 좋은 숫자야! 히! 호! 히! 호!〉
아이작은 옆에 둥둥 떠 있는 작은 반구에 보석을 쓸어 담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이작,내 인벤토리는 어떻게 가져간 거냐니까.”
〈인벤토리! 아직 200배가 남은 네 인벤토리! 우흐흐. 나중에 설명해 주마.〉
나냐우도 맛이 가 버린 모양이다.
아이작이 탐하고 있는 보석산을 발로 밟으며 거침없이 위로 을라, 기괴한 물건들을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새까만 연기를 피워 올리는 술잔, 혼자 웃는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주사위,붉은색으로 빛나는 양털, 검은 천이 덮인 액자...
“정교해. 아름다워. 최고야.. 그녀는 꿀꺽 침을 삼키며 어딘지 불길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감탄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보고 보아도 사랑스럽다는 표정은 점점 깊어지기만 했다.
혹시 매혹 함정 같은 게 아닐까?
이 녀석도 저 녀석도 앞으로 갈 생각을 도무지 하지 않고 있다.
“나냐우,정신 차려.”
아까까지만 해도 아이작과 제대로 잘못 얽혔다는 둣,심각한 표정을 짓던 나냐우가 내 부름에 어딘지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진짜다.”
“진짜라고?”
“전부. 최고 유적에서나 어쩌다 하나 발굴하면 행운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야. 이 세상 유물은 여기 다 있는 건가..
말을 맺은 나나우는 더 설명하지 않고 정신없이 물건들을 살폈다.
그녀마저 이럴 줄이야.
지금까지 거쳐 온 곳을 생각하면, 눈앞의 공간이 끔찍한 함정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위기를 겪은 경험이라면 누구보다
많을 두 존재가 정신없이 이곳에 빠져 헤매고 있다.
내가 도와줘야 하나?
아니다.
내가 만난 이들 중 둘의 안목을 따라갈 자는 없다.
아이작과 나냐우가 감탄한다면, 여기는 정말 세계의 재보를 모아 놓은 곳이겠지.
“이거야. 이거......!”
나냐우는 빠른 속도로 골동품을 자루에 집어넣으면서도 조심스럽게 음미하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총천연색의 보석에 파묻혀 요란히
그들이 한참 활동을 계속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보물상자가 갑자기 큰 입을 벌려 손을 깨물지도 않았고,어딘가에 불이 붙지도,독침이 날아오거나 마법이 터지지도 않았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괜찮은 걸까.
확실히 함정은 없는 듯하다.
“〇 으”
- TZI .
바닥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후작은 보물의 산은
무시하고 곧장 반대편으로 향한 것 같지만,역시 저들을 놓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번쩍이는 누런 금괴 하나를 주워 인벤토리에 넣으며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회계 Lv.l을 발동합니다.]
[해당 스킬로 감정하기엔 대상의 가치가 지나치게 높습니다.]
[도저히 무리입니다.]
[측정 가능한 한계치를 아득하게 초월했습니다.]
[골동주의 Lv.l 을 발동합니다.] [측정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수준을 넘어선 진품이란 사실만 느껴집니다.]
[골동주의 Lv.l을 발동합니다.]
[의식을 가진 어떤 유물이 당신을 보고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뭐?
입이 떡 벌어졌다.
한심하다고?
정체불명의 유물 더미를 낱낱이
바^^다.
자아를 가진 녀석이라면 분명히 높은 가치를 가졌을 테지만...
대체 무슨 유물이 나에게 감정을 가졌다는 건지 알아볼 수는 없다.
깊이 묻혀 있을지도 모르고,아예 투명화 마법이 걸려 있을지도.
일단 주위에 널려 있는 보석들부터 한가득 주워 담고 있을 때였다.
〈야! 그런 걸로 공간 낭비할 거면 이거나 넣어라!〉
머릿속에서 울렸다.
“여기서 그건 좀. 차라리 이걸.” 나나우도 가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건네는 묘한 부적을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이런 게 진짜 보물인가?
- 띠링!
[누군가의 강제적인 지도에 의해 무더미에서 압도적 가치의 보석을 골랐습니다.]
[회계 Lv.l의 경험치가 미약하게 상승합니다.]
[경험치가 미약하게 상승합니다.]
- 띠링!
[.독보적인 가치의 유물을...] [골동주의 Lv.l의 경험치가 극히 미약하게 상승합니다.]
“아,아예 거기다 담아도 될까?” 이미 자기 자루를 가득 채워 버린 나나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도 내게 빼앗은 인벤토리 분량은 다 사용한 것 같았다.
“뭐,그러지.”
이 둘의 안목을 이길 수는 없다. 골동주의 스킬만 해도,누구에게 흡수했는지 생각하면 당연한 얘기. 인밴토리를 열었다.
녀석들이 뒤로 건네는 물건들을 차곡차곡 받아 넣기 시작했다.
뭘 얼마나 더 넣으려고?
그 둘은 산처럼 쌓인 보물 중에서 뭐가 중요하고 뭐가 덜 중요한지 정확히 구분하고 있었고,서로 간의 의견이 어긋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조심해서 넣어 줘!”
〈이거, 이거, 이거다. 크으으!〉
[스킬 레벨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감식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골동주의 Lv.l의 경험치가...] [회계 Lv.l의 경험치가...]
인벤토리를 연 채,빠른 속도로 던져지는 보물들을 하나씩 받으며 생각했다.
이 둘.
대체 어디까지 할 셈이지?
얼마나 시간을 들여야 할까?
- 띠링!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골동주의 Lv.2 달성!]
[유물/유적을 발견할 때,경험치가 한층 더 상승...]
[유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경험치가...]
- 띠링!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회계 Lv.3 달성!]
[거래에서 가격을 깎을 성공률이 상숭....]
“그런데 너희,도대체 얼마나 더 담을 계획이지?”
“어쩔 수 없어. 황실 비역이거든. 언제 이런 기회가 오겠어? 게다가 보안 장치도 안 되어 있는데,이걸 가져가지 않고 버텨?”
〈맞는 말이다.〉
〈설령 보석이 함정이라고 한들, 이건 넘어가 줘야 하는 거다. 내일 세계가 멸망한다고 오늘의 치장을 포기하겠느냐?〉
그런 건 당연히 포기하는 게 상식 아니었나.
이 녀석들...
후작이 걱정되지 않는 걸까?
레안드로는 비석에 새겨진 숫자를 확인했다.
‘. 3층.’
10층의 초원과 6층의 초원이 얼핏 겹쳐지는 것처럼.
3층의 초반은 7층과 비슷했다. 거대한 동굴이 후작을 맞이했다. 하지만 돌로 만들어진 7층보다는 부드럽고 따듯한 느낌이었다.
거대한 식물 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좀 더 걸으니 느낌이 또 새로웠다.
느꼈다.
땅에서,바닥에서,천장에서.
레안드로는 그 진동이 마치 맥박 같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더 걸어가자 금방 기척이 나타났다.
플라스크 속의 인간들.
그들 모두 맥박이 뛰었다.
인간들은 플라스크 곳곳에서 뻗은 미끈한 촉수에 꽂힌 채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남자도 여자도 전성기의 완벽한 육체. 그들을 보며 레안드로는 지독한
위화감을 느꼈다.
‘숫자가. 맞지 않는다.’
〈7, 906〉 〈8, 911〉 〈9, 920〉 〈11,925〉
〈38, 1075) 〈39, 1077〉
앞이 빠져 있고,
중간이 듬성듬성 비어 있지만.
앞에 쓰인 게 번호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뒤에 있는 건 연도 같은 걸까?
출생 년도?
그러나 실험관에 담긴 인간들의 싱싱하고 잘 깎여진 몸은 대부분 20대 초중반.
1077이라면 기세.
위로 올라가면 더더욱 늘어난다. 레안드로는 홀린 듯 플라스크를 들여다봤다.
금발,은발,청발,적발...
다양한 머리색과 음모.
완벽한 몸과 잘 깎인 얼굴.
하지만 찍어 내는 제품이란 느낌은 들지 않는다.
우연을 통해 태어난 존재들.
번식과 채집의 비린내가 후각을 자극했다.
어쨌거나.
‘당장 조사할 수는 없겠지.’
묵직한 맥박이 점점 가까워 오고 있었다.
“4층이다.”
나는 주의를 환기시키듯 거대한 기둥에 새겨진 숫자를 읊었다.
거대한 하얀 기둥 좌우로 펼쳐진 광활한 세계가 절로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대체 책을 어떻게 꺼내란 건지, 위로 10미터는 훌쩍 넘을 것 같은 책꽂이들이 끝을 알 수 없게 멀리 펼쳐졌다.
쓰는 쪽에서도 한계가 있을 텐데, 세상에 책이 이렇게 많을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아이작도 놀랐는지 일단 책꽂이 맨
꼭대기로 날아올랐다.
대각선으로 책장 하나를 빠르게 훌은 까마귀가 외쳤다.
“다 진짜 책이야!”
나나우도 빠르게 책장 몇 군데를 확인하고 말했다.
“저자 이름 순서대로 배열됐어. 보물의 산 다음은 지식의 보고라. 고생 끝, 보상 시작인가?”
나냐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긴장을 풀려는 농담이었다.
4층.
공작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약 층부터 전투의 흔적도 전혀
없었다. 레안드로는 여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빠르게 지나갔다.
〈예메라의 외경外經이라니. 이야, ‘무지개와 로봇’은 연합에서도 0급 금서로 지정된 책인데. 이것 봐! ‘감금에 대한 신념’은 정말 재밌게 읽었거든.〉
아이작은 이미 몇 권인가를 뽑아 아래로 던져 댔다.
타고 있던 미유가 초조한 듯 길을 재촉하자 아예 최면으로 재워 놓고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법을 쓴 듯 책은 바닥에 닿기 직전에 차곡차곡 한 권씩 포개져서 내 앞에 놓였다.
나냐우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혈액 의식 마법’,‘순열 혈액 개요’,‘꽃에 대한 조언’,‘은빛 불명예’ 같은 책들을 내 앞에 쌓아 놓은 뒤 말했 다.
“이야. 이런 것들이 안 찢기고 남아 있었어? 한 문장도 퍼트리지 못하게 금지하더니 원본은 아주..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그녀가 미안한지 나를 보고 말했다.
“찾는 거 있으면 도와줄게. 내가 책은 빨리 찾거든.”
나나우의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44〇으...ᄍ
-- TU •
고개를 들어 도서관 저 끝을 보며 말했다.
“저자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다고 했지? 캐빈 애슈턴이 쓴 책을 찾아 줄 수 있을까?”
〈크큭,깜빡할 뻔했네.〉
아이작이 먼저 반응했다. “캐빈 애슈턴? 좋아.”
둘은 곧 도서관 속으로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이미 도서관의 구조를 파악한 것 같은 모양이었다.
세상의 책이란 책은 다 있는 듯 거대한 서고였지만,그들은 오래지 않아 가운데 있는 거대한 기둥으로 나를 안내했다.
〈여기다.〉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 끼리락
기다리고 있던 나나우가 기관 장치를 작동시켰다.
기둥이 마법처럼 열리고,바깥으로 책꽂이 한 칸이 올라왔다.
〈캐빈 애슈턴.〉
까마귀가 속삭였다.
한 칸에 꽂혀 있는 열 권의 책이 전부 캐빈 애슈턴이었다.
깜짝 놀라 아이작을 바라봤다.
“이게 전부 다..!”
구하기 쉽지 않은 책.
읽기만 하면 지혜가 오르는 책이 열 권이나 나란히 꽂혀 있었다.
기대는 완벽하게 충족됐다.
기쁜 마음으로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녀석은 태연히 나나우에게 신호를 줬다.
一 끼리릭...
나나우가 장치를 당겼다.
한 칸이 더 위로 을라왔다.
〈이것도 캐빈 애슈턴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칸.
추가로 열 권.
무려 스무 권에 달하는 애슈턴의 저작이 그곳에 보란 듯 자리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렇게 찾아 헤댔는데,황실 비역 서고에 마치 일부러 모아 놓은 듯 캐빈 애슈턴의 책이 빼곡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 끼리릭. 끼리릭. 끼리릭...
나냐우는 장치를 당기고,당겼다. 칸은 계속 위로 올라왔다.
세 번째,네 번째,다섯 번째 칸, 여섯 번째,일곱 번째,여덟 번째, 아흡 번째,열 번째 칸.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계가 낌빡깜빡 점멸하는 것 같았다.
“끝이야.”
장치를 다 당긴 나냐우가 내 쪽을 바라봤다.
“전부 캐빈 애슈턴이라고.”